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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8] 스카우트 아닌 스카우트(4)
대표이사 노준기라고 쓰인 명패가 아주 그럴듯하게 보였다.
“제가 장난하러 온 것 같습니까? 저는 그쪽에게 아주 중요한 정보를 주기 위해 온 겁니다.”
“수십억 가치가 있는 중요한 정보가 있다? 무슨 비디오라도 가지고 있나 보지?”
비웃음이 가득 담긴 그의 얼굴에는 자신의 회사에 소속된 배우에 대한 자신감이 묻어 있었다.
우현은 조용히 들고 간 핸드폰에 저장된 음성 녹음을 재생시켰다. 처음에는 무슨 짓을 하나 말없이 지켜보던 노준기는 점차 얼굴이 굳어져갔다. 그리고 대진그룹 삼남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왔을 때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우현을 바라보았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자연스럽게 존댓말이 흘러나왔다. 보통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말 그대로 저희 회사 아이에게 스폰을 제의한 거죠.”
“아뇨. 들어보니 일부러 이야기를 꺼내셨더군요. 분명 윤 실장이 이런 일을 하는지 알고 접근했을 테죠. 목적이 있을 것 아닙니까?”
“유지나 아시죠?”
그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갔다.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윤 실장이 유지나에게 스폰을 붙여줬더군요. 그런데 아주 다행히도 유지나씨는 두 번 정도 만나다 받았던 돈과 물건을 돌려주고 이후 만남을 거부했다고 합니다.”
“그것 참 다행이군요.”
그는 입으로는 다행이라고 말하면서도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뒤이어 우현의 입에서 나올 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거다.
“윤 실장은 이후, 유지나에게 들어오는 작품을 교묘하게 차단시켰다고 합니다.”
“허, 참… 어쩐지 일을 안 한다고 생각해서 물어보니 쉬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더군요. 전부 거짓말이었다 이거지요?”
“그렇습니다. 유지나는 저에게 도움을 청했고 저는 지나를 윤 실장에게서 벗어나게끔 도와준 겁니다.”
“왜 당신이… 아, 그렇군요. 지나가 이곳을 떠나길 원하는 군요. 당신이 그녀를 데리고 가기로 이미 얘기를 끝냈겠죠”
“맞습니다. 그래서 일을 좀 번거롭게 했습니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똑똑 두드리며 한참을 고심하던 그가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언젠가 이런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지만 이렇게 터져버리니 당황스럽군요. 이봐요, 김 대표. A급 배우를 계약 전에 떠나보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알고 계시지요?”
“알고 있으니까 이렇게 번거롭게 빙 돌아온 거 아니겠습니까?”
“그럼 내가 얼마나 곤란한 상황인지 잘 아시겠습니다? 그렇죠?”
“사장님, 이렇게 생각하시죠. 윤 실장과 유지나를 데리고 있다가 만약 사고라도 터졌다면 주가 조금 떨어지는 걸로 끝나겠습니까? 아닙니다. 검찰에서 대대적으로 파고들면 매니지먼트 회사 하나 산산조각 나는 건 일도 아닙니다. 게다가 유지나 데리고 지금까지 근 1년 동안 눈에 띄는 작품 하나 찍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주가에 반영돼있지요. 내년에 재계약이 안 된다고 기사가 뜰 때, 과연 주가가 떨어지리라고 생각하십니까?”
“흐음…”
“지금 유지나 내보낸다고 해도 주가에 큰 영향 없습니다. A급 배우 10명 이상 데리고 있는 키웨스트입니다.”
“참 이상하군요. 들고 있는 그거, 기사에 내보낸다고 협박하면 내가 들어줄 수밖에 없을 텐데 말이죠.”
노준기 사장이 우현이 들고 있는 핸드폰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이거 말입니까? 이거 안 씁니다. 미쳤습니까? 저 대진그룹하고 맞짱 뜰 생각 없습니다. 정 안되면 유지나 포기합니다. 제가 데리고 있는 아이들 성공시키기에도 벅차니까요.”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했습니까?”
“그녀가 일하고 싶어 했으니까요. 누구나 실수할 수 있습니다. 아주 큰 죄를 지은 게 아니라면 다시 기회를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녀가 구렁텅이로 빠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남 아닙니까? 이 바닥에 있으면서 미녀를 많이 못 만나봤을 리도 없고…”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친구가 유지나 매니저인 이진명 팀장입니다. 그 친구가 지나를 그렇게 아끼고 도와달라고 하니 저도 신경을 안 쓸 수 없었습니다.”
“그랬군요. 그럼 원하는 건 유지나를 풀어 달라, 그거 하납니까?”
“네. ‘조건 없는 계약 해지’를 원합니다.”
“만약 내가 원하지 않으면?”
“그냥 포기하겠습니다, 미련 없이.”
“윤 실장만 내치고 계약 끝날 때까지 드라마며, 영화며 새로 계약 추진할 수도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원한다면 그렇게 하세요. 저희는 계약 끝난 후에 데리고 가죠.”
솔직한 마음이다. 무리하고 싶은 마음은 절대 없었으니까.
“허 참, 협박한다는 말보다 더 꺼림칙하네요. 좋습니다, 계약 정리하죠. 어차피 이 바닥에서 한두 번 볼 사이도 아니고… 어쨌거나 고맙습니다. 덕분에 큰 사고를 예방했군요.”
“민망하네요. 세간 훔치러 온 도둑이 칭찬받는 것 같아서…”
“그 도둑이 집에 불날 뻔한 걸 잡아줬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아깝긴 하지만 우리가 지나에게 몹쓸 짓 한 셈이니 놔주는 걸로 사과를 해야겠네요.”
“감사합니다. 그럼 여기서 바로 삭제하겠습니다.”
우현은 그가 보는 자리에서 바로 녹음된 파일을 삭제시켰다. 물론 혹시나 해서 집에 사본을 떠두긴 했지만 설사 그가 다른 말을 한다고 해도 그것을 쓸 생각은 없다.
노준기 사장은 전화를 들어 법무팀을 불러 올렸고 몇 차례의 대화가 오간 끝에 유지나에 대한 모든 계약을 조건 없이 해지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우현이 보는 앞에서 계약서를 찢으며 마무리 지었다.
“지나 얼굴을 못 봐서 아쉽군요.”
“다음에 좋은 자리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이렇게 쉽게 보내 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난 우리 키웨스트가 최고의 매니지먼트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회사에서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면 보내는 게 그녀에 대한 도리죠. 어쨌든 잘 되길 바란다고 꼭 전해주세요.”
되면 좋고 안 되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수월하게 일을 해결했다. 노 사장도 지나에 대한 미안함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거다. 그나저나 윤 실장은 이제 어찌 되려나? 아마 키웨스트에서 쫓겨날 테지만 아예 발을 못 붙이지는 않을 거다. 키웨스트가 소속 배우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가 한 잘못을 소문내지는 못할 테니까.
“상준아, 오늘 촬영 언제 끝나니?”
“네, 오늘 새벽부터 촬영 들어가서 조금 일찍 끝날 것 같습니다. 한… 10시쯤?”
새벽부터 10시까지 촬영해도 일찍 끝난 거다. 이게 우리나라 드라마 촬영의 현실이다.
“그래. 그럼 피곤할 테지만 사무실 앞에 식당 잡아놓고 있을 테니까 별이 데리고 그리로 와.”
“오늘 회식 있습니까?”
“회식이라면 회식이지. 식구가 새로 들어왔거든.”
“식구요? 혹시 영입한 겁니까?”
“응. 유지나가 오늘부터 우리랑 같이 할 거야.”
“유지나요? 그 유지나 맞습니까? 유지나, 키웨스트 아니었습니까?”
“응.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할게. 어쨌든 끝나면 그리로 와.”
“걱정하지 마십쇼. 그럼 저녁에 뵙겠습니다.”
사무실에 와서 유지나가 탈 중고차량을 검색하고 있는데 ‘밀실’을 촬영했던 최 감독에게서 연락이 왔다.
“어이! 김 대표! 잘 지내고 있었어? 어째 연락 한 번 없어?”
“원래 무소식이 희소식 아닙니까? 이제 영화관에서 ‘밀실’ 내려갈 때가 돼서 연락 한 번 오지 싶었네요. 스코어는 잘 나왔어요?”
“580만으로 마무리 될 것 같다. 이제 VOD쪽으로 돈 들어오겠지. 의외로 짭짤하다더라구.”
“그럼요. 500만 이상 든 작품은 VOD쪽에서도 매출이 상당하다고 하니까 그건 ‘보너스다’ 생각하세요. 그건 그렇고 580만이면, 200만을 손익분기점으로 삼고 380만 순익이네요?”
“응. 별이 러닝개런티로 1억1천4백만 원 나올걸? 인당 30원이잖아.”
윤 실장과 말할 때는 일부러 적게 얘기했지만, 무려 1억이 넘는 돈이 들어올 예정이니 즐겁지 않을 수 없다.
“하하, 감사합니다. 별이에게 정산해줘도 꽤 남겠어요.”
별이와의 계약은 6:4 로 별이가 6만큼 분배받는다. 이것은 신인이기 때문이며 3년 뒤에는 비율을 재조정하게끔 계약으로 명시되어있다.
“이번 주에 대박 기념 회식 있으니까 꼭 참석해야 돼.”
“어? 별이 요즘 드라마 촬영한다고 바쁜데…”
“알어 인마, 하지만 별이만 바쁘냐? 이 바닥에 안 바쁜 사람 어딨어? 잘 조정해봐. 토요일이다, 알았지?”
“아이고… 큰일이네. 하여튼 알겠습니다. 조정해볼게요.”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별이만 쏙 빠지는 것도 보기 좋지 않다. 게다가 원래는 별이 정도 되는 신인이 러닝개런티까지 계약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님에도 최 감독이 신경써준 거라 어지간하면 스케줄 조정을 해서라도 참석하는 게 맞다.
지여울 제작피디와 조감독을 설득한 끝에 토요일 촬영은 9시에 끝내주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이소은에게 또 한소리 들을 것이 뻔한 조감독이 안쓰러웠지만 그 때 우현이 도와준 것이 있었기에 잘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형님, 저희 왔습니다.”
“응, 잠깐 밖에 앉아 있을래? 서류 준비할 테니까.”
오후 5시가 넘어가자 이진명이 유지나를 데리고 회사를 방문했다.
“어머! 어머! 웬일이야. 사장님, 유지나 우리 회사에 들어오는 거예요?”
“우와, 대박! 대표님, 밖에 유지나!”
민주와 유니가 대표실에 후다닥 들어와서 호들갑을 떨어댔다. 확실히 A급 배우가 회사에 들어온다고 생각하자 급이 달라지는 느낌은 있었다.
“호들갑 떨기는… 오늘 저녁에 회식 있으니까 그렇게 알고 나가있어. 민주씨는 차 좀 갖다 줘요.”
“네, 주스로 하실 거죠?”
“네, 부탁해요.”
민주는 요즘 회사 통장에 돈이 많이 들어오고 A급 배우도 들어오니 기분이 좋은가보다. 그렇다고 경리 월급이 오르는 것도 아닌데 저렇게 같이 기뻐해주니 절로 고마운 마음이 든다.
“형님, 혹시나 했는데 정말 이렇게 빨리 일이 진행될 줄은 몰랐습니다.”
진명이 대표실에 놀란 얼굴로 들어섰다. 그 뒤로 깔끔한 하얀 블라우스와 발목까지 내려오는 붉은색 치마를 입은 지나가 들어섰다.
“사실 나도 이렇게 빨리 진행될 줄은 몰랐다. 어쨌든 잘 해결됐고 내가 보는데서 계약서 찢었다. 그리고 혹시 윤 실장에게 연락 오면 그냥 받지 마. 그리고 지나씨? 전에 저랑 얘기했었던 것, 변함없죠?”
“네, 물론이에요. 말씀드렸던 것처럼 두 말 하지 않아요.”
“좋아요. 전에 말했듯이 계약금 없고, 밴은 지원 안돼요. 처음에는 카니발 차량이고 코디와 메이크업은 지나씨 쪽에서 붙이는 걸로 8:2예요. 계약기간 3년이고. 우리 회사가 더 컸다면 코디랑 메이크업은 붙여줬을 건데, 아직 영세하네요.”
“괜찮아요. 일 시작하면 그 정도 월급은 충분히 줄 수 있어요.”
“진명이 네 월급은 많이 못 준다. 대신 1년 이후에 너 하는 거 봐서 실장 달아줄게. 그럼 네 영업력에 따라서 보너스 갈 거야.”
“헤헤. 형님이… 아니다, 대표님이 도와주실 거죠?”
“당연하지, 인마.”
그렇게 계약서를 휘리릭 작성 완료하고 민주와 유니를 소개시켜줬다. 하하호호하며 즐겁게 인사를 나누다가 저녁 먹을 시간이 되자 우현이 미리 예약해둔 식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의 전화로 뜬금없이 전화가 걸려왔다. 은하였다.
“갑자기 웬 전화야?”
“유지나, 오빠 회사로 갔다며?”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지금 소문 파다해. 갑자기 키웨스트에서 유지나 계약해지 공시했잖아. 알아보니까 바로 파인 엔터 이름이 나오던데?”
“응, 맞아.”
“어떻게 된 영문이야? 전에 강소연이 가겠다고 했을 때는 안 받았잖아? 나도 안 받아줘 놓고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