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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 스카우트 아닌 스카우트(2)
대여섯 명의 소녀들, 핑크소녀라는 걸 알고 그들을 보니 몇 명이 눈에 익다. 그런데 그들은 한주아를 보며 팔짱을 낀 채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핑크소녀다. 언니 얼른 가 봐요. 핸드폰 없죠? 있으면 연락처라도 받아둘 텐데…”
“응. 미안 나 먼저 가볼게.”
그녀는 헐레벌떡 기다리는 멤버들에게 달려갔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유니에게 시선을 돌렸다.
“많이 친했니?”
“네, 저랑 별이 언니가 가장 오래된 연습생이었구요. 그 다음에 저 언니였거든요. 셋이 엄청 친했어요. 그런데 자꾸 데뷔가 늦어지니까 언니가 저 회사로 가서 핑크소녀로 데뷔했죠. 그때는 조금 서운했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언니가 선택을 잘 한 것 같아요. 사실 그 때 좀 삐쳐서 연락도 안 하고 그랬었거든요.”
“하하. 이제 어른 다 됐네. 그래, 각자의 사정이 있는 거니까. 배고프다. 이제 카메라 리허설까지 두 시간 정도 비는데 샌드위치나 먹으러 갈까?”
“굿굿! 좋아요.”
방송국 매점으로 향한 그들은 샌드위치를 사서 맛있게 먹고 있는데 아까 봤던 핑크소녀가 그들의 옆을 지나쳐갔다. 한주아가 유니를 향해 눈인사만을 하고 지나치는 것으로 보아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유니야, 한주아가 핑크소녀에 늦게 들어간 거야? 왜 저렇게 기죽어 지내?”
그녀도 그것이 이상했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아, 생각해보니까 핑크소녀 두 번째 싱글 때, 언니가 합류했다는 말을 듣기는 했어요. 지금 세 번째까지 나온 걸로 아니까 좀 자리를 못 잡을 수도 있겠네요.”
“그래? 이런 일이 흔해?”
“아, 사실 저희도 예전에 라라걸즈 처음 데뷔했을 때는 4명이었는데요. 두 번째 싱글에서 한 명이 추가되고, 다음 앨범에서 또 한 명이 추가됐어요. 웃기죠, 히히. 생각해보면 그 때, 새로 들어오는 멤버들한테 살갑게 대하려고 노력했는데 그래도 시간이 좀 걸리긴 했어요. 그런데 저희와 같이 데뷔했던 보이그룹인 갱스터는 추가된 멤버랑 잘 어울리지 못해서 싸우기도 했어요.”
흔히 있는 일이라는 것처럼 말하자 우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아이돌 그룹을 키워보지 못했기에 그들 사이의 알력이나 신경전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만 봤지 직접 보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샌드위치를 다 먹고 다시 스튜디오에 들어가니 드라이 리허설이 모두 끝나고 카메라 리허설이 진행 중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유니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유니입니다.”
다섯 걸음도 채 다 떼기 전에 연신 허리를 숙였다. 카메라 리허설을 끝나고 나오는 이들은 거의가 유니보다 선배이기에 깍듯하게 인사를 하는 거다.
“이제 인사 다 한 거야?”
“아직 많이 남았어요. 저기 무대에서 노래하는 분들도 저보다 2년 선배거든요.”
무대 위에서 카메라 리허설을 하는 남자 아이돌을 가리키는 유니를 보며 참 세월도 빠르다고 생각했다. 우현에게는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저 아이돌은 이제 데뷔한지 얼마 안 된 그룹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라라걸즈보다 2년이 더 빠르다는 건 데뷔한지 5년이 넘었다는 말이니 말이다.
유니 차례가 아직 멀었기에 객석에 앉아 다른 이들이 리허설 하는 걸 지켜보고 있는데 웬 덩치 큰 남자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저기요.”
“네? 누구시죠?”
“안녕하세요. 그룹 엠퍼러스의 매니저 이윤창인데요.”
“그런데요?”
“잠시 같이 가주시지 않겠습니까?”
누가 보면 형사가 용의자를 끌고 가는 모양새다. 어처구니가 없는 우현의 얼굴은 자연스럽게 굳어졌다.
“어딜 가자구요? 무슨 일입니까?”
그는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우현의 태도가 당황스러웠는지 주춤거리며 우현을 말리기 위해 양 손바닥을 보였다.
“제가 말하는 분은 유니양이 아니라 유니양 매니저분입니다. 매니저분 맞으시죠? 매니저분과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오해하지는 마시구요.”
“그럼 여기서 이야기하세요.”
“여기서 이야기를 나누기는 그렇구요…”
무척이나 곤혹스러운 표정의 이윤창을 보니 그도 마지못해 이러는 것 같았다. 그래서 우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이끄는 대로 걸어갔다. 그가 우현을 이끌고 간 곳은 무대 뒤편의 한적한 공간, 간혹 지나다니는 스태프만이 보일 뿐이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유니양 듣는 데서 말씀드리기는 뭐해서요.”
“도대체 뭔데 그러세요?”
“그게… 오늘 핑크소녀 본 적 있으시죠?”
“네. 그런데요?”
“핑크소녀가 저희 엠퍼러스의 여동생 그룹이나 마찬가지 거든요.”
“그런데요?”
“오늘 유니양이 핑크소녀를 보고서도 인사를 안 했다고…”
“하아…”
그 빌어먹을 놈의 인사. 정말 지긋지긋하다.
“그래서 화났대요? 그런데 왜 핑크소녀 매니저가 안 오고 엠퍼러스 매니저가 옵니까?”
“하… 그게…”
안 들어봐도 감이 온다. 나서기 좋아하는 누군가가 그녀들을 향해 ‘오빠가 처리할게’라는 식으로 말했겠지. 그리고는 자신들의 매니저에게 일을 시킨 것 같다.
보통 후배가 인사를 안 하면 그 자리에서 혼내거나 아니면 매니저를 시켜서 교육 좀 단단히 시키라고 하는 게 보통이다. 이 바닥에서는 지긋지긋하게 벌어지는 일이다.
이번의 경우는 후자의 경우라고 할 수 있는데 정말 웃기는 건 우현이 그냥 매니저가 아니라는 거다. 한 회사의 대표를 나오라고 해서 주의를 준다는 건 3대 기획사도 안 하는 짓이다. 우현의 나이가 젊어 보이니 매니저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걔네들 어디에 있습니까? 엠퍼러스, 대기실에 있어요?”
“네? 아, 네. 맞습니다. 대기실에서 준비중입니다.”
그는 우현이 사죄하러 가는 줄 알고 환하게 웃었다.
“돌아다니기 힘드니까 같이 기다리라고 하세요.”
그 말은 마치 사과하러 가는 게 아니라 혼내는 투였기에 그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우현은 이미 등을 돌려 사라진 후였다.
“유니야. 아직 카메라 리허설 시간 좀 남았지? 잠깐 나랑 어디 좀 가자.”
“네? 어디요?”
“누구한테 인사 좀 하러 가야할 것 같아.”
유니는 순순히 따라나섰고 우현을 그녀를 데리고 가수 대기실 중 엠퍼러스의 대기실 앞에 섰다.
“여기는 왜…?”
“들어가 보면 알아.”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핑크소녀는 물론이고 엠퍼러스까지 같이 있었다. 물론 코디와 메이크업, 매니저까지 같이 있어 십 수 명이 북적이고 있었다. 그 중에 가장 먼저 한주아가 유니를 보고 벌떡 일어섰다.
“여기, 인사에 아주 민감하신 분이 있다고 하셔서 왔는데요.”
우현의 말에 아까 대화를 나눈 엠퍼러스 매니저의 얼굴이 굳었다.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간다는 걸 느낀 것이다.
“아, 누구시죠? 제가 엠퍼러스 최승훈 실장입니다.”
아까 그 친구는 현장과 로드를 담당하는 친구고 최승훈이라는 자가 진짜 매니저라고 할 수 있겠다.
“파인 엔터의 김우현입니다, 대표로 있죠. 저한테 직접 와서 애 교육 잘 시키라고 하던데… 댁이 시킨 겁니까?”
“네?”
그는 회사 대표라는 우현의 말에 자신들이 큰 실수를 했다고 느꼈다. 그래서 얼른 사과의 말을 하려는데 우현이 빨랐다.
“인사해라, 얼른.”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솔로로 데뷔한 유니입니다.”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엠퍼러스를 향해 인사하는 유니를 보는 최승훈 실장은 얼른 앞으로 나서며 유니가 인사하는 걸 막았다.
“인사는요, 무슨… 다 같이 커가는 거죠. 우리 애가 실수를 좀 한 것 같은데…”
“자, 엠퍼러스한테는 인사를 했으니 저희가 선배 대우는 깍듯하게 했죠? 그럼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네? 그게 무슨…?”
“보아하니 이 친구들이 착각을 한 것 같은데, 제가 알아보니 핑크소녀가 데뷔한 날짜보다 라라걸즈가 데뷔한 날짜가 빠르더라구요.”
우현은 이미 유니와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언제 데뷔했는지 궁금해서 검색해본 뒤였다. 그 때는 한주아가 언제 데뷔했는지 궁금해서였는데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지는 몰랐다.
최승훈 실장의 뒤를 슬쩍 보니 핑크소녀의 얼굴들이 전부 흙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외쳤다.
“말도 안 돼! 한주아가 들어올 때, 라라걸즈는 활동을 안 하고 있었는데!”
“‘있었는데’는 반말이다. 그리고 음악방송은 너희들이 빨랐겠지. 그런데 앨범발매는 라라걸즈가 더 빨랐다. 라라걸즈 소속사가 음방 스케줄을 빨리 못 잡았던 거지.”
“그럼 앨범 하나만 툭 내면 다 선배겠네? 요?”
우현과 최 실장이 그녀를 쏘아보자 얼른 존댓말을 했지만 결코 자신의 생각을 꺾을 뜻은 없어보였다. 그런데 유니가 한 마디를 툭 던진다.
“음악방송은 늦게 했지만 행사는 저희가 먼저 했어요. 저희가 가장 먼저 한 일산 호수공원 행사는 13년 2월 17일 이었는데… 혹시 더 빨라요?”
그제야 그 건방진 소녀도 입을 다물었다.
“저대로 둘 겁니까?”
우현의 일그러진 얼굴에 최 실장이 뒤돌아 핑크소녀들과 엠퍼러스를 향해 소리쳤다.
“전부 사과해! 어서!”
가장 먼저 최 실장이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아이들을 잘못 가르쳤습니다.”
그나마 그가 사람다웠다. 그가 허리를 숙이자 어쩔 수없이 아이들이 허리를 숙이며 죄송하다며 사과했다.
“교육 똑바로 시키세요.”
“죄송합니다. 앞으로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유니와 문을 닫고 나오니 대기실 안에서 최승호 실장의 고함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들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실장급이 되면 1,2년 굴러서 그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닌데 타 회사 대표에게 숨도 못 쉬고 깨져버리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을 거다.
“대표님 이래도 괜찮을까요?”
“자기 연예인 관리 못하면 욕먹어도 싼 거야. 저 친구도 그걸 아니까 변명도 안 하고 그냥 욕먹은 거지. 저기서 나랑 누가 잘했니 하고 싸우게 되면 진짜 개쪽 당하는 건 저쪽이거든.”
“그래도 조금 무서웠어요.”
“무섭기는, 아까 말만 잘 하더만.”
“히히. 대표님이 그렇게 말씀 하시는데 제가 보조는 맞춰야죠. 제가 또 의리 하나는 죽이거든요. 아, 맞다. 저렇게 되면 주아 언니가 욕먹는 거 아니에요? 아까 보니까 사이도 안 좋아 보이던데, 힝…”
“어쩔 수 없는 거다. 서로가 가는 길이 달라. 계약이 걸려있을 테니 데려올 수도 없다. 그럴 거면 그 아이가 아이돌을 관두거나 스스로 이겨내는 수밖에 없어. 남 걱정 하지 마. 여기서는 네 걱정이 제일 우선이야.”
엄한 우현의 말에 유니가 굳은 얼굴로 끄덕였다. 어설픈 마음가짐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걸 다시 한 번 느낀 거다.
그 후, 핑크소녀가 카메라 리허설을 오르는 유니와 마주치자 썩은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는 것을 보니 대기실 안에서 호된 교육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녹화를 모두 끝내고 나니 저녁 10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형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유니를 집에 데려다주고 강남의 고급 룸싸롱에 도착하니 간신히 약속 시간에 늦지 않았다.
“윤 실장은?”
가게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진명은 긴장했는지 연신 손을 비볐다.
“잡아놓은 룸 안에서 이제나 저제나 형님만 기다리고 있죠.”
“그래, 들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