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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 촬영이 전쟁같다(3)
일산에 위치한 촬영현장에 도착하니 모든 스태프들은 굳은 표정으로 하염없이 대기하고 있었다. 보조출연진은 물론이고 조연들과 민준기까지 한 쪽에서 걱정스런 얼굴을 한 채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우현이 B팀을 이끌고 있는 한상호 피디가 있는 자리에 와서 인사를 하며 다들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곳에는 검은색 스타크래프트 밴이 늠름하게 서 있었다.
“김 대표님이 어쩐 일입니까?”
30대 중반의 그는 다른 피디들에 비해 퉁퉁한 살집을 가진 특이한 인물이다. 보통 방송국 피디들은 바쁘고 끼니를 거르는 것도 일상이기에 한 피디처럼 살이 찔 틈이 없는 게 보통이기 때문이다.
“저기 차 안에 이소은이 있다구요?”
“네. 혹시 이소은 문제 때문에 오셨어요? 잘 됐네요. 가서 한 번 이야기 좀 잘 해주세요. 지금 2시간째 대기 중입니다. 이러다가 오늘 촬영 날리게 생겼어요.”
“알겠습니다.”
“저기, 너무 막 뭐라고 하지는 마세요. 저 예전에 ‘스파이 스토리’ 촬영하다가 여배우 외국으로 날랐던 경험 있습니다. 또 그런 경험 하고 싶지 않아요.”
한 때 모든 연예면을 장식할 만큼 충격적인 일이긴 했다. 밤샘 촬영과 쪽대본을 견디지 못한 그 여배우가 촬영 중간에 외국으로 날라버렸던 것이다.
그 때, 그 여배우는 자신의 촬영스케줄을 위해 대본 수정까지 요구했었고 촬영 때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피디의 교체까지 요구했었다. 그러다 결국 자신의 요구를 묵살하자 촬영 중에 해외로 도피했던 것이다.
제작진측에서 수백억대의 소송이 제기된다는 말에 돌아와서 촬영을 마무리 지었으나 그 후 몇 년간 공중파에는 얼굴도 내밀지 못했다.
모든 협찬과 광고가 모조리 끊기고 돈 많은 사업가라는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난 뒤에야 그녀는 자신의 실책을 인정했을 거다. 그리고 지금은 케이블에서나 간간히 얼굴을 내밀고 있는데 그녀의 이름값에 비하면 진정 초라한 행보다.
사실 그 여배우 말고도 톱스타들이 피디와 작가에게 대본 수정과 촬영스케줄 변경을 요구하며 태업하는 것은 촬영하며 흔히 겪는 일중에 하나다.
“걱정 마세요. 저 싸우러 온 거 아닙니다. 달래려고 왔어요.”
“믿습니다.”
우현이 차량에 다가가 짙게 선팅된 문을 두어 번 두드리고 외쳤다.
“저 파인 엔터 김우현입니다. 이소은씨 저랑 이야기 좀 하시죠.”
잠시 후 차량의 문이 드르륵 열렸다.
“들어오세요.”
우현이 차에 들어서자 안에 있던 코디와 매니저가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생각했던 것처럼 이소은은 아주 멀쩡한 모습으로 그를 반겼다. 청바지와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티셔츠, 그리고 편의점 아르바이트가 입어야 할 조끼를 입은 모습인데 그것도 그녀만의 매력으로 보일만큼 예뻤다.
“아프시다면서 멀쩡해 보이시네요?”
“그거 놀리기 위해서 여기까지 오신 건가요?”
그녀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는 자신의 꾀병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도 전혀 개의치 않겠다는 뜻 같았다. 그녀다웠다.
“그럴 리가요.”
“그럼 전처럼 한 바탕 욕이라도 퍼부으려고 왔어요?”
“그 때는 많이 미안했습니다. 사과드리죠.”
“참 빨리도 하시네요.”
“그 때는 서로 흥분했었잖아요? 그리고 사실 소은씨가 욕먹을 짓을 하기도 했고…”
“사과를 하겠다는 거예요? 아니면 놀리겠다는 거예요?”
“사과하겠다는 겁니다. 그 때는 진짜 미안했어요. 이건 진심이에요.”
우현의 사과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그녀의 안색이 조금 풀어졌다.
“그러니 이제 그만 해요.”
“내가 왜요?”
“지금 분위기 좋은데 촬영 지연되면 좋을 거 없잖아요? 게다가 윤 작가가 이런 거 알게 되면 분명 신경 쓰여서 대본 제대로 못 쓸 테고 그러면 잘 나가는 작품 망치게 될지도 모르는 거 알잖아요?”
“솔직하게 말해 봐요. 진짜 윤 작가 때문에 왔어요?”
“네?”
우현을 빤히 바라보는 소은의 눈동자는 유리알처럼 투명했다. 그 눈빛은 마치 네 거짓말을 다 알고 있으니 어서 사실을 털어놓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진짜 이럴 거예요? 내가 김별한테 한따까리 할까봐 여기까지 온 거면서? 솔직히 촬영 며칠 늦어지고 기사 나가는 거 하나도 안 무섭죠? 아니, 좋아하겠지. 김별만 더 뜨게 될 테니까.”
뜨끔했다. 솔직히 이소은만 걸리는 게 아니다. 아무리 이 바닥이 인기가 곧 인격이고 계급이라고는 해도 상대 소속사는 분명 자신을 씹어댈 거다. 윤 작가가 우현의 회사 소속이기 때문에 조연이 주연을 잡아먹는 흐름에 우현이 개입했다고 생각할 테니까.
이렇게 소문나면 윤 작가의 차기작에도 문제가 생긴다. 아마 주연 배우들은 파인 엔터 배우들과는 같이 일하지 않겠다고 할지도 모른다.
“아닙니다.”
“아니긴… 좋아요, 솔직히 말해 봐요. 내가 김 대표 배우고 김별이 다른 소속사라면 이걸 그냥 두고 볼 거예요?”
개념 없고 싸가지 없는 줄만 알았는데 머리도 제법이다.
“아시잖아요? 드라마 이제 4회 나갔고 7회부터는 소은씨가 회사에 들어가게 되면 지금과는 완전히 달라진다는 거. 그 때부터는 하고 있는 엑세서리라든가 옷이…”
“말 돌리지 마요. 그냥 두고 봤을 거예요?”
결국 두 손을 들 수밖에 없다.
“원래부터 이런 시나리오였다는 거 알고 있었잖아요? 후…”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어지간해서는 달래려고 했지만 저 적의가 담긴 눈동자를 보니 그것도 먹히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이게 다 내 잘못이다?”
“그럼 이게 누구 잘못입니까? 솔직히 말하라니까 내 진짜 마음을 이야기해 줄까요?”
“해봐요. 내가 무서워 할 줄 알아요?”
“솔직한 마음으로는 당신이 당장 이 촬영장 엎고 나갔으면 좋겠어요. 누구처럼 해외로 달아나버리던지, 아니면 별이 데리고 머리끄덩이 붙잡고 늘어지는 것도 좋죠. 물론 별이에게 그런 일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지만 당신 비위만 맞춰주다 보면 16회가 지났을 때는 내가 해탈해 버릴 것만 같으니까.”
“거 봐. 난 알고 있었다니까!”
“그럼 이것도 알겠네요. 당신이 깽판치고 촬영장 엎어버리면 윤 작가가 당신 날려버리고 별이를 주인공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거. 안 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제야 그녀가 멈칫하며 우현의 눈을 빤히 직시한다. 진짜인지 거짓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던 거다. 그리고 그의 말은 분명 그녀에게 위협이 됐다.
“당신이 지금 이러는 거, 오늘 하루만입니다. 지금 당장 입원해서 링거 맞고 드러눕든 당장 나와서 촬영 시작하든 딱 하루예요. 만약 내일까지도 이러고 있으면 난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냥 넘어가지 않으면요?”
우현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놀랍게도 핸드폰에서는 녹음 기능이 실행되고 있었다.
“어… 어어! 이거 뭐야!”
“당신 날리고 여배우를 하나 꽂아 넣든, 아니면 별이를 주인공으로 하든, 이 드라마 마무리 지을 겁니다. 윤 작가가 당신 날린다고 해서 다음 작품 못 하리라고 생각해요?”
“…”
그녀는 주먹을 꼭 쥐고 우현을 노려보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우현은 차에서 내리려다가 그녀를 향해 한 마디를 더 하고 차 문을 열었다.
“동생이라고 생각하고 말할게. 스타가 되고 싶은 건지 배우가 되고 싶은 건지 확실하게 정해놓고 행동해. 그리고… 네가 내 배우였으면 이렇게 건방떨게 두지 않아.”
차에서 내리니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모였다. 그 눈동자에 담긴 기대의 빛을 읽었지만 혹여 소은이 그의 말대로 하루 내도록 시간을 끌까봐 잔뜩 굳은 얼굴로 한 피디에게 걸어갔다.
“잘 안 됐습니까?”
“잘 모르겠네요. 어쨌든 알아듣게 말 했으니 오늘만 지나면 다시 촬영할 겁니다.”
“그럼 오늘 하루 날리는 거네요?”
“일단 이소은 없이 촬영 가능한 걸로 미리 따놓으시죠? 몸이 안 좋은 거 같다고 말하는데 장단이라도 맞춰줘야 나올 거 아닙니까? 지금 멀쩡히 걸어 나오면 쟤도 민망할 테니 병원에 보내는 척이라도 해요.”
한 피디는 어떤 이야기가 오갔을지 짐작한다는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야! 명권아! 촬영 준비해라! 그리고 이소은씨한테 가서 병원 다녀오라고 해. 5시까지 기다리겠다고 하고!”
조감독을 닦달한 한 피디는 촬영장 한켠에 준비된 간식꾸러미에서 자양강장제 하나를 꺼내 우현에게 내밀었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드릴만한 게 없네요. 어쨌든 감사합니다. 이제 저희가 어떻게 해보겠습니다.”
“잘 해결돼야 온 보람이 있는데 사실 이제 어떻게 나올지 잘 모르겠습니다.”
“잘 아시잖아요? 여배우들 촬영 안 할 것처럼 하다가도 금방 다시 카메라 앞에 서서 생글생글 웃는다는 거. 아이들도 동생이 태어나면 나 좀 한 번 봐달라고 하는 것처럼 그냥 땡깡 한 번 부려본 건데… 그걸 알면서도 저희가 맞춰줄 만한 게 없었습니다. 그런데 김 대표님이 오셨으니 김별이 숙이고 들어오는 모양새가 돼서 어느 정도는 마음이 풀렸을 거예요.”
그의 생각처럼 좋은 이야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머리 나쁜 애는 아니니 잘 알아들었을 거다.
“그러면 좋겠네요. 어쨌거나 수고하십쇼. 다음에는 한 피디님 입봉할 때 정식으로 만나 뵈면 좋겠네요.”
“영광입니다. 저도 그럼 힘 내보겠습니다.”
사실 그가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는 모른다. 다만 이렇게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알게 모르게 돌아오는 게 있을 뿐이다.
택시를 타고 돌아가면서 지여울 제작피디에게 전화로 어느 정도는 해결 됐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전했다. 그리고 혹시 대본 쓰는데 지장 있을지도 모르니 윤 작가 귀에 들어가지 않게 해달라고 당부했다.
사무실에 도착하니 전에 구매했던 선물들이 회사에 한 가득 도착해 있었다. 그것에다가 일일이 손글씨로 편지를 적어 보내려는데 문자가 왔다. 이소은이 촬영현장에 복귀했다는 내용. 다행히 일이 잘 마무리 됐다. 나중에 술이라도 한잔 하면서 달래줘야 하겠지만 말이다.
일이 끝나고 밤 12시가 돼서 고시원 근처 치킨집에 도착했을 때, 모자를 눌러 쓰고 마스크로 입을 가려 누군지 알아볼 수 없는 여자와 이진명 팀장이 전에 앉았던 자리에 같이 앉아있었다.
“빨리 왔네?”
“예, 형님. 여기 우리 지나입니다.”
“반가워요.”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까딱였다. 그 행동에 기분이 나쁘지 않은 건 건방짐이라기보다 민망함에 가까운 그녀의 분위기를 읽었기 때문이다. 아마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불편할 것이다.
앉아서 맥주로 목을 축이고는 치킨도 나오기 전에 바로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한 가지만 물을게요. 이건 그냥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라 매니지먼트사 사장으로서 묻는 거예요. 진짜 깨끗이 정리 했어요?”
“네. 두 번 만났고 두 번 다 식사만 하고 헤어졌어요. 다음에 만나면 그 이상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냥 정리했어요. 받았던 선물과 돈 모두 돌려줬구요.”
안정된 목소리와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보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작품 안 들어온다는 게 그쪽에서 한 일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
“제가 안 건 아니에요. 진명오빠가 알아보니 그쪽에서 투자자에다가 손을 쓴 것 같다고 했으니까요.”
진명이와 유지나는 그 스폰서가 했다고 철썩같이 믿는 듯했다. 우현은 고개를 저었다.
“진명이가 착각했을 거예요. 그 사람이 한 짓이 아닐 겁니다.”
“네? 그 사람이 누군지 아시는 거예요?”
“그 누구라도 자신이 드러날 짓은 하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설사 그 대단한 삼선그룹 회장이라고 해도 죽였으면 죽였지 그런 치사한 짓은 하지 않아요. 그랬다가는 자신이 누구와 관계된 사람인지 다 알 거 아닙니까?”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