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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 촬영이 전쟁같다(1)
전화를 끊고 나서 생각에 잠겼다. 윤 실장은 워낙 쓸데없는 소리나 헛짓거리를 잘 하지만 진명이 같은 경우는 자신에게 깍듯하고 불필요한 장난 같은 건 치지 않는다.
약속은 오늘밤 12시. 보통의 직장인들이라면 이 시간에 약속을 잡지 않겠지만 하루 종일 바쁜 매니저에게는 이 시간이 아니면 누군가와 약속 잡기 힘들다. 이것도 그 밑에 로드가 따로 있기에 가능한 일일 거다.
어쨌거나 만나야 내용을 알 것이기에 신경 끄고 해야 할 일에 집중했다. 별이에 대한 관심이 많아져 드라마가 끝난 이후에 예능에 출연해달라며 섭외를 요청해 오는 것을 정중히 거절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아닙니다. 예능 안 한다는 게 아니라 아직 드라마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스케줄을 벌써 잡겠습니까? 그렇죠. 일단 드라마 끝나고 제작사측에서 여행을 갈 수도 있는 거니까요.”
말 같지도 않은 핑계로 거절하며 시간을 벌었다. 지금이야 섭외 전화 거절하는데 쩔쩔매야 하지만 별이의 몸값이 높아질수록 거절도 쉬워진다. 그 때가 되면 그냥 ‘죄송합니다. 어렵겠습니다.’라고만 해도 된다.
유니에 대한 섭외 전화도 들어오는데 역시나 대부분이 예능이다. 그리고 그 중 가장 기다리던 음악방송 섭외 전화가 드디어 왔다.
목요일 새벽 스케줄인데, 가서 하루 종일 고생해야 하지만 가수인 이상 이것을 넘기고 갈 수는 없다. 무대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야 진짜 가수로 인정해주기 때문이다. 음방에도 얼굴을 못 비추는 가수는 몸값이 싼 것은 물론이고 아이돌로도 쳐주지 않는다.
“음방 잡혔다구요? 세상에…”
“좋지? 그런데 어쩌지? 내가 따라가긴 할 건데, 솔직히 아이돌 스케줄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많이 버벅댈 거야.”
“괜찮아요. 천천히 익히면 되죠, 뭐.”
“너 음방 스케줄 한 번도 안 해봤니?”
“저희 딱 한 번 해봤어요. 처음 데뷔할 때요.”
“유디 엔터는 뭐 하느라 음방을 한 번밖에 안 해줬다니?”
“그게… 저희 첫 날에 같이 갔던 매니저 오빠랑 피디랑 싸웠거든요. 그래서 그 피디가 자기네 방송사 말고도 다른 방송사 피디한테 연락해서 우리 받아주지 말라고…”
“아이고, 왜 그랬던 건데?”
“자기보다 나이도 어린 게 반말한다고…”
우현은 머리를 짚었다. 그런 기본도 안 된 매니저를 붙여줬다니, 어이가 없었다.
“그런 놈을 매니저로 붙여준 유디 엔터도 참…”
“사실 저희가 데뷔하기 전에 사장님이 엄청 좋으신 분이셨어요. 그런데 그 사장님이 아프셔서 회사를 나오지 못하셨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처음 보는 사람이 회사를 막 자기 마음대로 하더라구요.”
“그래?”
“네. 그래서 원래 저희 맡고 있던 매니저 오빠도 회사 나가고 새로운 매니저 오빠가 들어온 거였어요. 덩치도 엄청 크고 팔에 이상한 문신 새겨진 무서운 오빠여서 저희도 눈치 많이 봤어요. 욕도 막 하고…”
“아휴…”
대략 그림이 그려진다. 그나마 다행인 건 능력만 없었지 쓰레기들은 아니었던 것 같다. 만약 그랬다면 아이들이 저렇게 밝을 리 없으니까.
“그래, 알았다. 그럼 모레 음방 스케줄 있는 거 알고 있어. 의상 준비해놨으니까 미리 한 번 입어보고.”
“넵.”
음방 이후 스케줄은 아직 정하지 않았다. 현재 음원차트에서 ‘그대는 아나요?’가 다시 한 번 1위를 넘보고 있는 상황이라 시간이 지나면 유니의 몸값도 훨씬 올라갈 거라는 판단에서다.
오후에는 작품 쓰느라 고생하는 윤 작가에게 먹거리와 홍삼 등을 보내주려 했는데 막상 인터넷을 검색하자 관리해야 할 사람들의 목록이 자신도 모르게 떠올랐다.
각 방송국에 소속된 작가와 피디, 유명 제작자와 감독들에게 보내줄 선물을 고르는 데만 몇 시간을 소모했다. 회사 통장에 돈이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거금이 빠져나가는 것을 보니 마음이 아팠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평소에 관리 해두어야 정말 중요한 일이 있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렇게 자질구레한 일들을 마치고 유니와 같이 ‘그 양반 같은 자식’을 모니터링 하고 유니를 집에 보낸 후 이진명 팀장과 약속한 장소로 향했다. 장소는 바로 우현이 사는 고시원 근처 조용한 치킨집. 밤 12시가 넘으면 사람이 거의 없기에 조용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제격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진명이 가게 한 귀퉁이에 앉아 핸드폰을 바라보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어이, 오래 기다렸어?”
“아닙니다. 제가 먼저 치킨에 오백 두 잔 시켜놨습니다. 치킨은 형님 좋아하시는 반반으로 했습니다.”
“새끼, 센스 있구만.”
어두운 표정을 보자 심상치 않은 일이라고 생각해 일단 맥주로 목부터 축였다.
“그나저나 형님, 왜 갑자기 일을 그만두셨던 거예요? 마이더스에서 형님을 많이 원했다고 알고 있는데…”
“그냥, 사정이 있었어. 그리고 넌 인마, 아직까지 팀장 딱지 붙이고 있냐? 아직도 네가 로드나 다름없지?”
“하하. 역시 형님은 귀신이네요. 로드가 한 명 있기는 한데 아무래도 케어해야 할 배우가 두 명이다 보니까 제가 로드 겸, 스케줄 관리까지 같이 하고 있습니다.”
“끈은 많이 만들어 놨어?”
작가나 피디들과 인연을 만들어 놨냐는 말인데 진명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상하게도 형님 하는 거 얼핏 보면 쉬워 보이는데 막상 제가 하려니까 그게 잘 안 되더라구요.”
“엄살은… 그래,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심각한 거야?”
그는 오백 잔에 담긴 맥주를 쭈욱 들이키고는 벌게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건 진짜 형님이니까 말씀 드리는 겁니다. 절대로, 누구에게도 말씀하시면 안 되는 거 알고 계실 테니까요.”
“썰은 그만 풀고 말해 봐. 뭔데 그렇게 심각해?”
“사실 형님이 이 바닥 떴다는 소문 때문에 그냥 저 혼자 안고가려고 했었는데… 이렇게 형님 다시 돌아오셨으니까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나, 우리 지나 좀 도와주세요.”
“지나? 유지나?”
사실 유지나는 원래부터 키웨스트 소속이 아니었다. 또 하나의 거대한 배우 매니지먼트 회사인 숲액터스 소속 배우로, 고등학생이 되기도 전에 데뷔해서 지금까지 경력만 10년이 넘은 베테랑 연기자나 다름없었다.
일반적인 스타급 여배우와는 다르게 자신의 소신을 분명하게 밝히고 다른 남자배우와의 연애도 거리낌 없이 밝힐 정도로 당당한 것이 그녀의 성격인데 누구한테 책잡힐 일이라도 있었단 말인가?
“네. 우리 지나 지금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심상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느낀 우현이 잠시 주변을 돌아보며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는 목소리를 깔았다.
“나만 들을 수 있도록 작게 말해봐, 어떻게 된 영문인지.”
“1년 전이었어요. 그 때는 한창 형님하고 술도 자주 마시고 그럴 때였는데… 이상하게 지나에게 작품이 들어오질 않았어요. 사실 그 전부터 작품 하는 것이 생각보다 잘 안 돼서 걱정이긴 했지만 그래도 유지나 하면 남자들의 로망 아닙니까?”
한 때, 베이글의 대명사라고 불릴 정도로 육감적인 몸매에 동안을 자랑하던 그녀였기에 남자들의 로망이라고 불리는 것이 결코 과장된 이야기만은 아니다.
“그럼. 한 때 나도 엄청 좋아했지. 알잖아?”
“그럼요, 저도 알죠. 우리 지나 한 번 키워보고 싶다고 형님이 그렇게 노래를 불렀지 않았습니까? 어쨌거나 작품이 좀 안 돼서 들어오는 시놉과 시나리오가 줄어들었다고는 해도 시간만 조금 지나면 금방 원래대로 돌아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이상하게 작품이 들어오지 않거나 들어온 작품을 하려고 하면 투자자 쪽에서 우리 지나를 까는 거 아니겠습니까?”
“투자자 쪽에서 까는 게 확실해? 작가나 감독이 까는 게 아니고?”
“아닙니다. 확실해요. 제가 아무리 형님한테는 비교가 안 되더라도 그 정도 눈치와 짬밥은 있습니다.”
“그래? 알았어. 더 해봐.”
“시간이 지나면서 회사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지나는 말은 안 해도 쪽팔리고 황당해하는 게 제 눈에 보였을 정도였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장 느긋한 게 바로 윤 실장이었습니다.”
“윤 실장? 뭐야? 윤 실장이 장난 쳤다는 거야?”
“일단 들어보세요. 제가 이상해서 지나를 붙잡고 조용하게 물었어요. 혹시 누구한테 실수한 거 없느냐구요.”
“너, 이 새끼. 혹시 스폰 받게 하냐?”
우현이 인상을 확 일그러뜨리자 진명이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진정시키려 했다.
“아휴, 형님 일단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지나가 한 번 마음먹은 거, 제가 말 한다고 바꾸는 애입니까? 걔 성격 아시면서 그러세요? 사실 저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언제부터 그걸 받았는지 정확히는 모릅니다.”
“그래서? 뭐라 그러는데?”
“처음에는 아니라고 잡아떼더니 나중에 가서는 말하더라구요. 실은 전에 스폰을 해주던 인간이 하나 있는데 지나도 한두 번 만나다가 이러면 안 될 것 같아 그만 뒀다고 해요. 받았던 돈도 돌려줬답니다. 절대 깊은 관계는 아니었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그 때부터 작품이 안 들어오는 것 같다고… 형님, 우리 지나가 내숭이 좀 없고 외향적인 것뿐이지 나쁜 아이는 아닌 거 아시잖아요? 살다보면 실수할 수도 있는 건데, 잠깐 실수했다가 다시 돌아온 겁니다.”
“하아… 그 스폰 해줬다는 인간이 누군데?”
“저한테도 말 안 해줬습니다. 아시잖습니까? 스폰 받는 애들, 본인 입으로 얘기하기 전에는 누구도 모른다는 거.”
같은 연예계에서 일한다고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당사자 간에 극히 은밀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관련된 인물들만 알 수 있다.
“이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너도 알 거 아냐?”
“저도 그렇게 생각해서 그냥 묻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이상한 겁니다. 분명 지나가 일을 못하고 있으면 수당도 붙지 않아 온갖 짜증을 내고 일 잡아 오라고 난리치던 인간이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 이렇게 변했으니까요.”
“너 윤 실장을 의심하는 거야?”
“저도 얼마 전까지는 그냥 여자나 밝히고 불쌍한 아이들 어떻게 하려는 쓰레기인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상해서 윤 실장이 자주 가는 술집 마담을 찾아가서 캐물으니까, 윤 실장이 스폰을 연결해주는 브로커일 수도 있다고 하면서 몇 번 높은 사람들하고 그런 이야기 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고…”
“마담이 그걸 순순히 이야기 해줘? 너 술값 엄청 썼구나?”
“크흠… 몇 백 쏟아붓긴 했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한 달 월급이 얼만지 뻔히 알고 있는데 그 정도 돈을 쓴 걸 보면 어지간히 속이 탔던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잖아? 지나가 스폰을 그만두었다면 윤 실장이 곤란해져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인간이 연결 시켜줬다면 말이지.”
“그렇겠죠? 그건 저도 잘…”
“아이고…”
잠시 머리를 감싸 쥐고 고심하던 우현이 입을 열었다.
“몇 가지 짐작 가는 게 있긴 한데… 너랑 이야기해서는 답이 안 나올 것 같다. 지나 데리고 와.”
“지나를요? 형님한테요?”
“응.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그런데 유지나를 어떻게 믿고 해결을 해줘? 내 회사 일도 아니라서 자칫하면 나만 병신 돼. 만나서 이야기라도 해봐야 진짜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알 수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