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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8] 위기를 기회로 만들다(1)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 첫 촬영 날짜가 다가왔다. 첫 날부터 제작진과 배우들 기를 살려준다고 민준기가 밥차를 쏘며 기운을 북돋았고 이소은은 이번에는 제대로 해보기로 했는지 촬영에 필요한 대화를 제외하고는 오직 대본만 바라보았다.
“그 쪽 분위기 어떤 것 같아?”
우현은 촬영장에서 멀리 떨어져서 별이를 지켜보며 옆에 서 있던 상준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요? 아, ‘잔혹한 사랑’ 쪽이요?”
“응.”
“대본이 기가 막히네, 어쩌네 하며 엄청 호들갑들을 떨어대고 있어요.”
그럴 거다. 민준기, 이소은이면 1,2회 시청률은 무조건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상대도 한여름이 원톱으로 나서는 드라마이기에 섣불리 초반 시청률을 장담할 수 없다. 그리고 상대도 그걸 아니까 일부러 계속 분위기를 띄우려는 거다.
“김별씨 스탠바이 하세요.”
조연출이 돌아다니며 촬영준비를 시킨다. 이번 씬은 이소은이 일하는 카페에서 민준기와 별이 만나는 장면이다.
“슬레이트 팔 다시 일 들어갑니다!”
“레디! 악숀!”
서 피디의 구수한 큐 사인이 떨어지자 그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알바생 이소은이 커피를 가져다준다.
민준기가 흠칫 놀란 표정으로 김별을 쳐다본다.
“이게 뭐…요? 꼭 사약 같이 생긴 것이…”
김별이 황당해한다.
“당신이 좋아하는 루왁커피잖아요.”
“내가 좋아한다고? 무슨 왁?”
“당신이 좋아하는 인도네시아 사향고양이 똥에서 나온 루왁커피요.”
“똥? 똥을 우려먹었단 말이오? 내가?”
민준기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루왁커피를 찬양하던 소리는 당신이 수십 번이나 말해서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에요. 그런데 갑자기 왜 모른 척이에요? 당신이 늘 하던 말 그대로 읊어 드려요?”
“어디 해보시오.”
별이 어깨를 으쓱하며 어이없다는 제스처를 취하고 극 중 역할인 예빈스럽게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대사를 이어간다.
“해보시오? 그건 또 무슨 말투죠? 어쨌거나 당신은 그 루왁커피를 마시면 처음에는 쓴맛이, 중간에는 신맛이 돌다 마지막에는 단맛이 돌아 세 가지 풍미가 어우러져 당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준다나 어쩐다나… ‘오전의 루왁커피 한 잔은 태양이 떠오르면 덧없이 사라지는 이슬, 오후의 한 잔은 황금빛을 머금은 클림트의 영혼, 저녁의 루왁커피는 잔잔한 파도를 비웃듯이 타들어가는 붉은 지중해의 노을. 이 맛을 느끼지 못하는 당신의 미각이 참 안쓰럽군요.’라고 말하셨죠.”
“내가 말이오?”
별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민준기를 톡 쏘아본다.
“참나, 당신이 아니면 누구겠어요? 그 뿐인가요? 특히 이곳은 외관이 몰디브의 리조트와 같은 느낌을 주어서, 오후에 이곳에서 인도네시아산 루왁커피를 마시면 인도양, 지중해, 태평양 모두를 느낄 수 있다면서요? 게다가 정한송 바리스타가 직접 카페를 운영하기 때문에 한 잔에 7만 원하는 값어치를 톡톡히 한다고… 내가 입 아프게 왜 이런 얘기들을 하고 있는지…”
옆 테이블을 정리하던 이소은이 돌아서며 나직이 말했다.
“꼴값을 떨고 앉았네…”
“컷!”
서 피디의 고함소리가 촬영장을 울리자 별이는 긴장이 풀렸는지 몸을 축 늘어뜨렸다. 모니터를 보던 서 피디가 일어서서 엄지를 치켜드는 것을 보니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하는 듯했다.
“수고했어. 잘 하던데? 그 긴 대사를 한 번에 오케이를 받아내네.”
민준기가 감탄하며 별이를 바라보았다. 신인인데다 대사가 상당히 길고 뻔뻔함을 요구하기에 몇 번의 NG는 생각하고 있었는데 단 번에 오케이가 날 줄은 몰랐던 거다.
“어머, 감사합니다.”
“잘 하더라. 연습 많이 했나봐?”
이소은도 별이의 어깨를 살짝 터치하고 지나갔다. 톱스타 선배들에게 칭찬을 받자 별이의 기분이 한껏 좋아졌는지 환하게 웃으며 촬영장을 돌아다녔다.
“분위기 좋은데요?”
“분위기가 좋으면 촬영이야 잘 하겠지만 언제 또 사고가 터질지 모르니…”
우현의 부정적인 반응에 상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도 좋으면 좋잖아요?”
“그럼 당연하지. 나는 그냥 이소은이 사고나 안치기를 기도하는 중이다.”
“설마 지금같이 중요한 시기에 그러겠어요?”
“그렇겠지? 이번에는 진중하게 임해보려 하는 것 같은데 내가 너무 사서 걱정하는 거겠지?”
“그럴 거예요. 지금 ‘잔혹한 사랑’이랑 전쟁 중인 거 알잖아요? 아무리 본인 일이 아니더라도 사고 칠 상황이 아니라는 건 알겠죠.”
“그래, 그럼 난 그렇게 믿고 간다.”
“지금요? 별이가 불안해하지 않을까요?”
“괜찮을 거야. 네가 눈치껏 잘 돌봐줘. 난 사무실 가서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그리고 이건 내가 가지고 간다.”
우현은 따로 준비해갔던 카메라를 집어 들고는 택시를 잡아타고 사무실로 이동했다. 그의 사무실에는 ‘채널’ 본사에서 사람이 와 있었다.
별이에게는 최종적으로 ‘채널’에서 협찬하기로 했다. 다양한 명품 브랜드를 전부 착용해본 결과 별이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것으로 선정했고 제작사 측과 업체 측이 정식으로 계약을 맺었다.
아이보리색의 깔끔한 투피스를 입고 있는 본사 직원은 시종일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일종의 영업적 마인드인가?
“약속시간이 아직 남아 있는 거 아니었습니까?”
“제 버릇이에요. 항상 약속시간보다 최소한 20분은 먼저 도착하거든요.”
“그런 줄 알았으면 미리 올 걸 그랬습니다.”
“아니에요. 회사도 구경하고 좋았어요.”
“몇 평 되지도 않는데 뭐 볼 게 있다구요. 어쨌거나 저희가 찍은 사진들입니다. 촬영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도 있고 협찬물건을 들고 찍은 사진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연스러운 장면을 원하신다고 하셨죠?”
“사실 저희도 이런 식의 마케팅은 생각하지 않았어요. 아무래도 정돈되지 않은 상태니까요. 그런데 김별씨의 명품관 사진은 저희가 가진 편견을 깨게 만들더라구요. 자연스러운 우아함과 아름다움이 오히려 저희 ‘채널’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었으니까요.”
그녀는 우현이 카메라에 담아온 사진을 살펴보더니 진한 미소를 보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아요. 사진사가 생각보다 실력이 좋네요?”
“그 친구가 한 때 아이돌 쫓아다니면서 사진을 꽤나 찍었다고 하더라구요. 아시죠? 요즘 기자들도 자신들이 찍은 사진보다 일명 대포카메라라고 불리는 찍덕들이 찍은 사진을 더 쳐주기도 하고 연예인들도 팬들이 찍은 사진을 화보로 내기도 한다는 거.”
“들어봤어요. 실력이 좋은 분을 데리고 계셨네요. 그럼 이대로 하죠. 보내 주시면 그대로 진행할게요.”
“그럼, 그 리미티드 에디션은 언제 촬영할 건가요?”
“윤해연 작가님과 이야기는 끝냈어요. 첫 방에 처음으로 등장 시킬 예정이에요.”
“임팩트가 상당하겠네요.”
“그럴 것 같아요. 김 대표님도 대단하시네요. 그쪽에서 사진 푸는 걸 일부러 그냥 두시다니… 그것 때문에 그 콧대 높은 자들에게 한 방 먹여줄 수 있을 것 같네요. 욕심 많은 샤롯백화점 같으니라고. 어쨌거나 사진 감사해요. 그럼 촬영 잘 되길 바랄게요.”
그녀가 가고 며칠 지나지 않아 SNS를 중심으로 ‘채널’의 신제품 광고가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그 중심에는 김별이 있다. ‘채널’에서는 본격적으로 기사를 내고 갤러리스 백화점과 협력해 잡지사와 자사 명품 고객을 대상으로 광고를 때렸다.
[‘그 양반 같은 자식’의 김별, 재벌 3세 역에서 ‘채널’의 다양한 상품 소화 - 신상품 리미티드 에디션 ‘태양의 연인’ 선보일 예정. 오직 갤러리스백화점에서만.]
시간이 흘러 드디어 ‘그 양반 같은 자식’의 첫 방. 아마 이 시간을 수백여 명의 사람들이 숨죽여 기다리고 있을 거다. ‘잔혹한 사랑’과 ‘그 양반 같은 자식’에 관련된 사람만 해도 엄청난 숫자니까. 물론 그 중에 우현을 비롯한 파인 엔터도 끼어있다.
“아주 샤롯백화점과 갤러리스백화점간의 전쟁이나 다름없는 것 같습니다.”
상준이 핸드폰으로 SNS상에 퍼져있는 광고를 보며 중얼거렸다.
“원래 드라마라는 게 그런 거야. 브랜드 전쟁이기도 하거든.”
“대표님, 여기 주스요.”
유니도 지금은 연습을 쉬고 우현 등과 함께 마실 것과 과자를 준비한 채 시청할 준비를 마쳤다. 사무실 TV 앞에는 우현을 비롯해 상준과 별이가 긴장한 채로 앉아 정면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지금 몇 시지?”
“9시 58분입니다.”
“MBS는?”
“아직 광고중입니다.”
우현의 긴장된 물음에 상준이 핸드폰으로 MBS를 틀어 놓고 대답했다. 어디가 먼저 시작하느냐, 어디가 늦게 끝나느냐에 따라 시청률이 요동친다.
“어? 이제 타이틀 광고 들어갔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최소 10개 정도의 광고가 나갈 거다. 그리고 2분 정도가 지났을 때, SBC에서 ‘그 양반 같은 자식’이 시작했다.
“MBS는 아직 시작 안 했습니다. 최소 1분은 우리가 빠릅니다.”
“서 피디랑 윤 작가가 몇 분이나 늘렸을 지가 관건이네.”
내용은 역시 윤해연 작가다웠다. 설정이야 많이 대중적으로 변했다고는 해도 윤 작가 특유의 감성이 살아있어 대사 하나하나가 마음을 자극했다. 특히 여주인공인 이소은의 캐릭터가 취업준비생의 애환을 가진 이 시대의 청춘이다 보니 현실의 벽에 막혀버린 절절한 고통이 대사를 통해 잘 전달됐다.
하지만 그렇다고 신파극도 아닌 것이, 조선시대 양반인 민준기가 재벌 3세의 몸에 들어가면서 곳곳에서 웃음폭탄을 터뜨렸다.
“하하하. 너무 재미있다.”
유니는 물론이고 대본을 본 적이 있는 상준도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1회가 거의 끝나갈 때쯤에 별이가 등장했다.
백화점 사장의 딸로 나오는 별이는 도도하고 이지적이며 실수가 좀처럼 없는 인물로 나온다. 말을 할 때도 거침이 없고 배려가 적어 요즘 말로 팩트폭행을 쉴 새 없이 가하는 스타일이라 주변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만든다.
“이제 나와요.”
별이가 긴장된 채로 TV를 주시했다. 화면 속에서는 별이가 친구들과 만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는데 이 씬이 그녀의 성격을 잘 드러내주는 장면이다. 그리고 이 장면을 만들기 위해 우현과 윤 작가가 하루를 고민했었다.
별이가 갤러리스백화점 VIP라운지에 앉아 있는데 그녀의 친구들이 걸어온다. 그런데 그 친구들 중 한명의 옷차림이 심상치 않다. 민트색의 시스루 블라우스에, 파스텔 핑크와 아이보리색이 실키하게 섞여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A라인 플레어스커트.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눈치 빠르고 명품에 빠삭한 시청자라면 그 옷차림이 ‘에르클레르’에서 광고하는 옷과 상당히 비슷하다는 걸 단박에 알아차릴 것이다.
그 ‘에르클레르’의 옷과 흡사한 옷을 입은 친구가 별이를 보며 반갑게 말했다.
“먼저 와 있었구나?”
별이 도도하게 다리를 꼬며 무릎에 얹어두었던 ‘채널’의 신상, 리미티드 에디션 ‘태양의 연인’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한 마디 한다.
“응. 그런데… 너, 엄마 옷 입고 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