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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 신경 써야 할 게 한두 개가 아니다(4)
우현은 2시간 정도 후에 별이와 상준을 데리고 가장 가까운 압구정동 갤러리스 백화점 명품관으로 향했다. 아무리 별이가 신인 연기자라고 해도 여배우는 여배우다. 명품관을 거닐고 있으니 모든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우현이 한 손에 들고 있는 종이 목록에는 명품관에 입점해 있는 매장의 절반 정도가 속해 있었다.
“대표님, 나 쪽팔려 죽겠어요. 그만 구경하고 어서 매장에 들어가요.”
별이가 우현에게만 들리게끔 복화술로 속삭였다. 지금 우현은 별이를 데리고 매장 입구를 지나치며 구경하듯 돌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멀리서 상준이 그들의 모습을 연신 카메라로 담고 있었다. 일명 대포카메라라고 불리는 그것을 대여해 온 것이었는데 이것을 빌리느라 바로 출발하지 못했다.
“쪽팔려 하지 말고 즐겨라. 전부 너 쳐다보잖아?”
영화를 본 사람들은 분명 별이를 알아볼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긴가민가 할 것이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게 꼭… 혼자서 영화 찍는 기분이란 말이에요.”
그 때, 명품관 가장 메인 자리에 있는 ‘채널’ 매장에서 30대 중반의 남자 직원이 나와 우현과 별이를 향해 걸어왔다.
“안녕하십니까? 혹시 영화배우 김별씨 아니신가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우현도 살짝 당황했다. 그저 시간 끌며 얼굴 좀 알리다가 매장을 하나씩 방문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에르클레르’측은 지금 당장 한여름을 모델로 해서 젊은 부유층을 공략할 생각이겠지만 그로 인해 별이를 희생시키려 했고 별이 입장에서는 그냥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이 위기를 타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에르클레르’를 엿 먹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김별과 한여름 중에 한여름을 선택한 것이 실수라고 말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최소 두 가지가 맞아 떨어져야 한다. 한 가지는 별이가 출연하는 드라마가 한여름이 출연하는 드라마를 압도적으로 찍어 눌러야 하며, 나머지 하나는 명품을 걸치고 있는 모습이 한여름보다 더 우아하고 아름다워야 한다.
첫 번째는 윤해연 작가를 믿기 때문에 설령 압도적으로 찍어 누르지는 못하더라도 이길 수 있으리라고는 확신한다. 분명 화제성도 ‘그 양반 같은 자식’이 더 높을 거다.
문제는 두 번째인데, 별이가 누군가에게 절대 꿀린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한여름 역시 대한민국 최고의 미인이라고 불리는 여자다.
그래서 대놓고 명품매장을 돌며 본인이 직접 자신의 협찬할 곳을 고르는 모습을 보여줬다. 드라마 배역과 관련해 직접 드라마에서 사용할 물건을 고르는 성실한 모습을 보여주어 TV에서 쓰는 그녀의 물건이 진짜 그녀의 안목인 것처럼 말이다.
이 정도까지만 생각하고 나머지는 별이의 연기와 윤 작가의 필력만을 믿고 있는데…
“네, 그런데요?”
“반갑습니다. 유찬주라고 합니다. 저희 쪽에서 이번에 새로 시작하는 ‘그 양반 같은 자식’ 협찬 의뢰를 받았습니다. 물론 저희 말고도 다른 여러 명품 업체에서 협찬 의사를 밝혔겠지요? 그래서 직접 나오신 것 같습니다. 맞습니까?”
꽤나 똑똑하다. 그리고 일개 매장 매니저가 알 수 있는 일이 아닐 텐데 너무 자세하게 알고 있다.
“맞습니다. 어떻게 아셨죠?”
우현의 물음에 그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보내주신 시놉시스와 주연배우 목록을 제가 받았거든요. 저는 본사에서 나왔습니다. 매장 관리 차원에서 들렀는데 이런 만남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어제 좋은 꿈을 꿨나 봅니다, 하하.”
“그러셨군요.”
“아직 안 정하셨죠?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시겠습니까? 계속 서 계시면 다리 아프실 텐데요.”
그가 별이의 늘씬한 다리와 하이힐을 보며 말하자 우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별이를 이끌었다. 그는 매장 한쪽의 소파에 우현과 별이를 앉히고 음료수를 가져다준 뒤 열정적으로 매장에 진열된 상품을 설명했다.
“세상에는 수많은 명품이 있습니다. 물론 저희 ‘채널’보다 더 비싼 브랜드도 있죠. 그럼에도 수많은 여성들에게 우리 ‘채널’은 동경의 대상이고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별씨와 같은 아름다운 여성은 더 없는 모델임이 틀림없죠. 우연하게도 얼마 전에 영화 ‘밀실’을 보았습니다. 아까 한 번에 김별씨를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죠.”
“잘 봐주셨다니 감사합니다.”
별이가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이 더욱 흡족했는지 그가 재차 말을 이었다.
“연기가 인상 깊더군요. 그 강렬한 인상에 이런 품위 있는 숙녀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으니 분명 세계적 브랜드인 ‘채널’과 어울릴 겁니다. 함께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알겠습니다. 검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별이가 바로 하겠다고 할까 봐 우현이 얼른 끼어들었다. 그런데도 그는 기분 나쁜 티를 내지 않으며 매장 밖으로 정중히 안내했다. 그 이후로 몇 개의 매장을 더 둘러본 우현과 별은 다시 사무실로 향했다.
“잘 찍었어? 어떻게 나왔어?”
“기가 막히게 나왔습니다. 한 번 보십쇼.”
우현은 카메라에 담긴 사진을 살폈다. 저절로 미소가 지어질 만큼 아름다운 사진들이 이어졌다. 안 그래도 선명한 화질을 자랑하는 DSLR 카메라에 망원렌즈까지 달렸으니 바로 옆에서 찍은 것 같았고 표정도 살아있었다.
더구나 백화점 명품관 내에 설치된 조명 덕분에 따로 반사판을 대고 촬영한 것처럼 눈부셨다. 보고 있는 우현도 반할 만큼 아름다웠다.
“진짜 예쁘죠? 하하. 저도 찍으면서 별이가 진짜 예쁘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별이가 나이가 어려서 안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진짜 잘 어울리더라구요. 왜 예쁘긴 한데 싼 티 난다는 말이 있잖아요? 우리 별이는 그런 게 전혀 없어요.”
“잘 봤어. 톱스타는 아무리 예뻐도 싼 티가 나면 안 되거든. 그리고 그건 남자도 마찬가지야. 그냥 잘생기기만 하면 인기가 생기지만 그 특유의 분위기가 중후하고 진중할수록 톱스타가 되지. 어쨌거나 수고했다.”
“아유, 어깨 아파 죽겠습니다.”
“새끼, 엄살은… 하여튼 수고했고 이거 사무실 가서 저장해놓고 뿌려.”
“전에 알아놨던 분들에게 부탁할까요?”
“기억하는구나? 당연하지.”
“옛 썰!”
유명한 블로거들이나 팔로우 수가 많은 트위터리안에게 접촉하는 건 연예인을 키우는 기획사에게 있어 기본적인 일 중의 하나다. 예전 회사가 망하기 전에 알아두었던 사람들이다. 당연히 무료가 아니기에 그들에게도 좋은 일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회사 계정으로 SNS를 만들고 그들에게 기삿거리를 던져주면 그들이 그것을 받아 뿌리는 거다. 단순하지만 효과는 아주 크다.
저녁을 먹을 시간이 다 와 갈 무렵, 우현의 생각보다 반응이 훨씬 강하게 다가왔다. 별이가 갤러리스 백화점 명품관에 나타난 것이 사람들 SNS를 통해 퍼지면서 실시간 검색어 1위를 한 것이다.
“언니 실검 1위 찍었어! 완전 예쁘다, 짱!”
사무실에 있던 유니가 갑자기 달려와 호들갑을 떨어댔다. 정신없이 흔드는 핸드폰을 받아 자세히 보니 상준이 찍었던 사진이 몇 줄의 상황설명과 같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상황설명이 필요한 이유는, 그냥 백화점 돌아다니는 사진만 있다면 아직 신인 주제에 명품관 들락거린다고 욕만 먹는다. 그래서 차기작 관련이라는 자세한 설명을 붙여줘야 의도한 효과가 날 수 있다.
어쨌거나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찍자 가장 먼저 지여울 제작 피디에게서 연락이 왔다.
“김 대표님, 완전 최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저는 법적으로 대응하실 줄 알았어요.”
“법적으로 대응하면 우리만 시궁창으로 빠져들 거예요. 우리가 사진을 못 쓰게 하면 사진이야 안 쓰겠지만, 상대측에서 우리가 사진을 못 쓰게 법적 대응했다고 기사를 내면 아무 의미가 없어지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만 바보 되는 거겠죠. 그 정도도 대비하지 않았겠습니까? 어쩌면 법적으로 대응하기를 바랐을 겁니다. 시간이 지나면 이길 수는 있겠지만 별이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법적으로는 별 타격을 주지 못해요. 진짜 저들을 엿 먹이려면 매출에 타격을 줘야죠.”
“대단하네요. 그리고 사진 찍는 것도 미리 준비하신 거예요?”
“대포 카메라 급히 구한다고 우리 매니저가 고생 좀 했어요.”
“하하하, 잘했어요. 그럼 일단 우리 쪽에서 기사 낼게요. 이 기회에 김별씨 좀 밀어주죠, 뭐. 히힛.”
“그럼 부탁합니다.”
잠시 후에는 윤 작가에게 연락이 왔다. 윤 작가는 한동안 남자처럼 호탕하게 웃어주더니 의미심장하게 한 마디를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두고 봐. ‘에르클레르’인지 나발인지, 내가 한 방에 보내줄 테니까.”
그녀의 저주와도 같은 한 마디가 과연 어떻게 돌아올지 정말 기대가 된다. 그리고 이후로 MBS와 SBC간의 치열한 전쟁이 이어졌다.
제작사 측에서는 김별이 ‘에르클레르’를 협찬 받아보려 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 직접 명품을 고르기로 했다고 선제공격을 날렸다.
그것을 본 상대방 측은 한여름이 ‘에르클레르’의 뮤즈가 됐다며 경쟁자인 김별을 물리쳤다는 내용으로 반격을 가했다. 김별이 명품관에서 쇼핑한 것이 이것 때문일 거라는 추측기사까지 나오며 여배우들 간의 싸움은 ‘잔혹한 사랑’이 더 위라는 말 같지도 않은 기사를 뿌려대기도 했다.
우현과 제작진은 일부러 더는 대응하지 않았다. 대응하길 바라는 쪽은 상대방일 테니까. 첫 선제공격으로 ‘에르클레르’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이미지를 심어 준 걸로 만족하니까. 그런데 별이가 생각지도 못하게 제작진의 어깨에 힘을 실어주는 일이 발생했다. 지 피디가 호들갑을 떨며 좋은 소식을 알렸다.
“갤러리스 백화점이요?”
“네, 그쪽에서 김별씨가 명품관을 돌면서 쇼핑하는 사진을 보고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한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에 갤러리스 백화점 측에서 정식으로 우리 드라마에 협찬하고 싶다고 하네요. 명품관 촬영도 협조한다고 하구요.”
백화점 일반 매장에서 하는 촬영은 종종 허가해준다. 하지만 최고급 백화점 내의 명품관 촬영은 어지간해서는 허가를 내주지 않는다. 명품이 매출에 차치하는 비중이 너무 큰데다가 VIP고객들이 싫어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명품관을 내어준 이유는 타 백화점에 비해 명품관의 매출이 줄어들고 있어 나름대로의 타개책으로 생각한 것 같았다.
“이번에 내부 매장들도 새로 배치하고 인테리어도 살짝 바꿨나 봐요. 그리고 제가 그쪽 업계에 있는 사람들한테 알아봤는데, 프랑스의 ‘에르클레르’가 샤롯백화점에서 들여 온 브랜드라고 하더라구요. 입점 한 백화점도 샤롯백화점이 유일하고 ‘잔혹한 사랑’도 협찬한다고 하네요. 그래서 갤러리스 쪽에서는 홍보할 겸 우리 드라마에 협찬하는 것 같은데, 정말 잘 됐죠?”
결국 가볍게 협찬 하나 받아볼까 해서 움직였던 일에 수많은 경쟁사간의 이권이 걸려 있었던 셈이다. 드라마 제작사와 MBS, 에르클레르, 샤롯백화점까지…
“다행이네요. 그럼 별이 캐릭터를 새로 잡으실 건가요?”
“생각지도 못한 협찬 제의까지 왔는데 그러지 않겠어요? 사실 김별씨도 어떤 직업을 줘야 할지 애매하긴 했거든요. 자세한 건 작가님께 여쭤보시겠어요? 작가님께는 이미 연락 드렸거든요.”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는 김 대표님이 하셨죠. 그럼 파이팅입니다!”
전화를 끊고 곧바로 윤해연 작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대표, 이야기 들었어?”
“네, 마침 방금 전에 지 피디한테 전화 왔었습니다. 별이 캐릭터를 조금 수정하신다구요?”
“캐릭터를 크게 수정한다기보다는 조금 바꿔보려고. 백화점 사장 딸래미 어때? 그럼 재벌 3세 정도 되는 남주랑 급이 맞을 것 같은데? 그리고 남자 조연 하나 넣어서 따로 로맨스 하나 만들어 줄게.”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아니야. 오히려 상대방에서 별이를 띄워 줬잖아. 그럼 받아야지. 안 그래, 김 대표?”
“그렇네요. 줘도 못 먹으면 바보 소리 듣는 동네죠, 여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