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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 신경 써야 할 게 한두 개가 아니다(3)
“혹시 이번에 ‘에르클레르’의 뮤즈가 되기로 하신 건가요?”
“어머, 어떻게 아셨죠?”
느낌이 왔다.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한여름씨? 자리를 옮기실까요? 아무래도 모르시는 분도 계시고… 따로 준비해둔 것도 있으니까요.”
도도하게 앉아있는 한여름을 향해 차분하게 말을 건네는 박원호 지부장을 보니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시종 웃음을 잃지 않던 그의 얼굴이 굳어있었던 것이다.
“그래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그녀는 박원호를 따라 자리를 떴고 우현은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에르클레르’가 모델을 심사해서 선정하기로 한 것은 알고 있지만 한여름과 같이 본다는 건 생각지도 못했다.
알고 있었다면 미치지 않고서야 오려고도 안 했을 거다. 또한, 그것을 저들도 분명히 알 거다. 모르면 바보, 등신이지. 도대체 왜? 왜 톱스타인 그녀와 별이를 붙여놓았을까?
핸드폰으로 기사를 검색해도 당장 눈에 띄는 게 없었다. 결국 별이가 옷을 입고 백을 들고 나올 때까지 어떤 의문도 해소되지 않았다.
“어때요? 괜찮은 것 같아요?”
확실히 명품은 명품이다.
무릎 밑 선까지 내려오는 A라인 플레어스커트는 별이를 나이에 비해 우아한 여성으로 만들어주면서도 파스텔 핑크와 아이보리가 실키한 느낌으로 섞여 빛을 발하는 색감 덕에 올드해 보이지 않았다.
상의로 입은 시스루 블라우스는 스커트와 반대되는 색인 민트색이었다. 핑크와 민트색이 어떻게 어울릴까 싶었지만 일류 디자이너는 저들이 원래부터 같은 계열의 색이었던 것처럼 어울리게 만들어냈다.
20대 초반인 별이가 입으니 딱 그들이 원하는 컨셉이 나온 듯했다. 품위 있고 우아한 젊음, 그 자체였다.
언제부터 준비하고 있었는지 갑자기 나타난 사진사는 별이를 한 쪽 벽에 세워두고 연신 셔터를 눌렀다. 별이도 얼떨결에 다양한 포즈를 잡았다.
“응. 예쁘다.”
“그게 다예요?”
집중을 못하고 건성으로 대답하며 시선을 회피하는 우현의 반응에, 별이가 그와 시선을 마주치려 했다.
“그래, 진짜 예뻐. 일단 그거 벗고 나가자.”
“나가자구요? 지금요? 알았어요.”
그녀도 우현의 불편한 기색을 알아차리곤 점원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옷을 갈아입었다. 오히려 별이를 도와주는 점원이 당황할 정도였다. 그녀도 우현 일행이 이렇게 빨리 가려할 줄은 몰랐을 테니.
우현은 별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바로 매장 밖으로 나가려했다. 그러자 박원호가 헐레벌떡 나타나더니 우현과 별이의 앞을 가로막았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왜 이렇게 빨리 가십니까?”
“심사는 다 한 거 아니신가요?”
“아닙니다. 혹시 한여름씨 때문에 그러십니까? 우리 ‘에르클레르’의 뮤즈를 심사한다는 말은 이미 드린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해보기도 전에 미리 마음을 접으신 겁니까? 이런 이런… 명품을 입으시는 분들은 스스로가 자신을 명품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니 마음을 돌리시고 다시 옷을 입으시는 게 어떠신지요? 저는 아직 우리 ‘에르클레르’를 입은 김별씨의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개소리다. 별이가 한여름보다 못나서가 아니라 저들은 한여름을 까고 별이를 선택할 이유가 없다. 또한, 한여름의 소속사가 새파랗게 어린 신인 여배우랑 같이 심사받는 걸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 뒀다는 건 이미 결과가 정해져 있다는 뜻이다.
“사진 찍은 거 있으니까 그거 보시죠.”
우현은 더 이상 그의 헛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어떻게든 빨리 이 거지같은 곳을 나가고 싶을 뿐이다. 안 그러면 저 자식의 얼굴을 후려갈길지도 몰랐으니까.
“흠…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군요.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그의 입가에 새겨진 가는 미소. 분명 비웃는 거다. 우현은 별이의 손목을 잡아채고 빠른 걸음으로 매장을 나왔다.
“대표님, 무슨 일이에요? 아파요.”
그제야 자신이 흥분했음을 깨달은 우현은 잡고 있던 별이의 손목을 놓았다. 한숨을 쉬었다.
“아, 미안. 하아… 아무래도 당한 것 같아.”
“네? 당한 것 같다니요?”
“일단 사무실로 가자.”
별이를 태우고 사무실로 향하면서 지여울 제작피디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김 대표님. ‘에르클레르’랑 미팅은 잘 하셨어요?”
“네, 그것보다 혹시 한여름 신작 들어가는 거 있습니까?”
제작사 측도 몰랐을 거다. 알았다면 일부러 우현과 별이를 엿 먹이기 위한 것인데 자신들의 작품에 출연하는 배우를 엿 먹이는 미친 짓을 하는 제작사는 자신이 알기로는 대한민국에 없다. 그래서 다른 가능성을 생각했다.
“한여름이요?”
“네, 기사에 뜨는 건 없던데 혹시 영화나 드라마 얘기중인 거 있습니까?”
“잠시만요. 재성아! 그거 가지고 와 봐!”
지 피디도 전화 너머의 우현의 음성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짐작했는지 서둘러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아, 얼마 전에 MBS 새 수목 들어가는 ‘잔혹한 사랑’으로 얘기가 오간 적이 있다고 하네요. 왜요?”
“저희가 ‘에르클레르’에 가서 누굴 만났는지 아십니까?”
“설마?”
“네, 한여름을 제 눈앞에서 보고 정중하게 인사까지 나누고 왔습니다.”
“이, 개새…”
지 피디도 무슨 상황인지 드디어 눈치 챈 것 같다.
“잠깐만요 전화 끊어 봐요. 제가 알아볼게요.”
우현은 전화를 끊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어쨌거나 일은 벌어졌고 자신들은 덫에 걸렸다.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나는 게 없었다.
사무실에 도착해서 별이와 유니는 점심 먹으러 보내놓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 피디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미안해요, 김 대표님. 저도 이렇게 된 상황인지는 몰랐네요.”
“아닙니다. 그나저나 어떻게 된 상황입니까?”
대략 짐작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정확한 내용을 들어야 대응할 수 있다.
“MBS에서 새 드라마를 기획했는데 지금 같은 시간에 하고 있는 드라마를 조기 종영시킬 것 같아요.”
“우리와 같이 시작하겠다는 거겠죠?”
“맞아요. 그러면서 미리 ‘에르클레르’와 접촉한 것 같아요. 아마 별이씨를 부르기 전부터 한여름씨를 뮤즈로 정해놨을 거예요.”
“그래놓고 별이를 불러서 비교하려 했겠죠. 감히 이소은까지는 부르지 못하고.”
“이소은을 상대로 장난치지는 못했을 거예요.”
“우리 회사가 작기도 하니까요. A급 연예인을 보유한 회사가 아니니까. 그러고 나서 신나게 광고를 때리겠죠.”
“명품중의 명품인 ‘에르클레르’가 선택한 한여름이라고 하면서… 아마 별이씨가 찍은 사진도 올릴 거예요. 게다가 별이씨는 우리 드라마에 출연하고 한여름씨는 MBS의 드라마에 출연하니까 초반에 엄청난 시선몰이를 하겠네요.”
한여름이 나오는 드라마니까 명품의 협찬이 줄을 이을 거다. 그 중에서 한여름과 드라마 제작사 측에서 마음에 드는 걸 골랐을 테고, ‘에르클레르’와 같이 조금 더 시너지를 낼 방법을 생각하다가 우리 쪽에 미끼를 던져본 걸 거다.
“아, 이걸 어떻게 복수하죠? 김 대표님, 정말 죄송해요. 이건 해도해도 너무한 건데…”
지 피디도 자신의 실책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사실 우현도 감쪽같이 넘어갔으니 누굴 원망할 게 아니다.
“아니에요. 설마 업체 측이랑 타사 드라마 제작사 측에서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네요. 그럼 우리 드라마랑 같이 시작하면 이제 곧 기사 뜰 때가 됐겠는데요?”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나 봐요. 방금 기사 떴어요.”
우현이 급히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니 한여름 차기작에 관련된 기사가 떡하니 메인에 걸려있었다.
[한여름, 유지훈 작가의 ‘잔혹한 사랑’에 합류]
시간을 보니 채 10분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밑에 달린 댓글들은 모두 찬양과 환영 일색이다.
“유지훈 작가? ‘그 여름 아침부터’의 그 유지훈?”
유지훈 작가는 감성 멜로로 알아주는 작가다. 그가 썼던 ‘그 여름 아침부터’는 시청률은 물론이고 감각적인 영상과 기억에 남는 대사로 아직까지 명작으로 불린다. 우현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조기종영에 유지훈 작가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유 작가가 5년 만에 드라마를 쓰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유 작가 복귀작에다 한여름 캐스팅이면 우리 쪽에 비해서 절대 꿀리는 상황은 아니네요.”
“좋습니다. 이미 벌어진 일이고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일이죠.”
“어떻게 하실려구요?”
“협찬 들어온 명품 브랜드들, 제게 메일로 보내 주세요. 거기서 골라보죠.”
“보내드리는 건 문제가 아닌데 ‘에르클레르’에 비하면 조금 떨어지는 브랜드 들이라…”
“괜찮아요. 거기서 골라볼게요.”
잠시 후, 메일로 지 피디가 보내준 명품 브랜드 목록이 도착했다. 우현이 그것들을 하나하나 골라보고 있는데 윤 작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것들, 미친놈들 아니니?”
지 피디에게 이야기를 들었는지 윤 작가가 펄펄 뛰면서 소리쳤다.
“한여름도 알고 있었을까요?”
“그거야 모르지. 그런데 걔가 그렇게 못 된 애는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 아마 소속사랑 제작사랑 쿵짝이 맞아서 그랬겠지. 걔가 뭐가 부족해서 그런 짓을 하겠니?”
“하긴, 듣고 보니까 그렇긴 하네요.”
“안 그래도 얼굴로만 치면 대한민국 톱이라고 인정받는데 굳이 신인여배우까지 엮어서 그럴 리 없지. 잠깐만, 생각해보니까 MBS가 끼어 있겠다.”
“MBS요? 걔네가 왜요?”
“내가 걔네랑 드라마 안 하잖아.”
“일부러 안 하는 거였어요?”
“응. 사실 내가 MBS에서 단편드라마로 데뷔했거든? 그런데 거기 드라마국장이 어찌나 싸가지가 없는지… 내가 지금까지도 그 새끼 이름을 기억하거든. 입도 더러워서 조금만 반반하면 성희롱에, 건드리려고 하고… 하여튼 말도 못 해. 그래서 그 쪽에서 드라마 하자는 거 일부러 다 까고 다른 방속국으로 하거든. 나 제작사랑 드라마 계약할 때도 유일하게 다는 단서가 MBS에 편성 안 넣는 거야.”
“아, 그러면 작가님 미워할만하네요. MBS가 근 일 년 간 수목드라마 시청률 10%를 못 넘기고 있잖아요. 단단히 각오한 것 같은데, 그래서 엿 먹어보라고 이렇게 한 건가?”
“그랬을 가능성이 크겠지? 어떻게 보면 방송국 윗선에서 ‘에르클레르’랑 연결해줬을 수도 있겠고. 어쨌거나 내가 미안하네, 김 대표.”
그녀의 음성이 급격히 가라앉았다. 자신 때문에 별이가 손해 본다고 생각했나보다.
“그런 말씀 마세요. 작가님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요, 뭘…”
“어쨌거나 생각지도 못하게 큰 태클이 들어오네. 김 대표는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적당한 거 찾아 봐야죠. 찾으면 알려 드릴게요.”
“그래, 괜찮은 거 찾아 봐. 내가 잘 맞춰서 써줄게.”
잠시 후, 우현이 점심을 먹고 들어온 별이를 불렀다.
“너 이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거 골라봐.”
“제가요? 지금요?”
“응. 마음에 드는 브랜드 골라서 지금 보러 가자.”
“매장에 찾아 간다 구요? 약속도 안 하구요? 그래도 돼요?”
“너 언제까지고 신인연기자일 것 같아? 신인의 마음가짐도 좋지만 내가 말했잖아? 너 톱스타 만들어줄 거라고. 그럼 네 스스로 톱스타의 마음가짐을 가져. 네가 찾아가면 당연히 저들이 반겨줘야 하는 거야. 당당하게 행동해.”
“알겠어요. 흠… 솔직히 저 명품 잘 모르는 데요?”
“그래? 그럼 좋아. 한두 군데도 아니니까 바로 백화점으로 가자. 가서 골라보자.”
“가면 분명 눈에 띌 거예요.”
“괜찮아. 그러라고 하는 거니까. 마침 새벽부터 풀 세팅 했잖아. 아까운데 광고 한 번 찍어 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