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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5] 신경 써야 할 게 한두 개가 아니다(2)
“네? 어떤 거요?”
“사실 이번에 ‘에르클레르’에서 협찬 의뢰가 들어온 게 있긴 해요. 그런데 그쪽에서 김별씨가 매장으로 와서 착용한 모습을 보길 원해요. 그들의 입장에서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하면 협찬을 철회하겠다는 뜻이죠.”
“뭐 그런… 아, 정말 너무하네.”
“그렇죠? 그런데 해보는 게 어때요? 거기 백 하나에 몇천만 원을 호가하는 진짜 명품 중에 명품 브랜드예요. 사실 이 드라마에 협찬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미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브랜드거든요.”
“그런데 왜 협찬 의뢰가 왔다고 합니까?”
“너무 나이 들어 보인데요.”
“네? 누가요?”
“그 브랜드를 만든 프랑스 회장이 자신의 물건을 가진 사람들이 전부 나이 든 사람들뿐이라 걱정이라고 했데요. 웃기죠? 자신의 브랜드가 너무 나이 든 사람들만 하고 다니는 것처럼 인식될까 봐 이번에 협찬해보자 하는 것인데, 그래서 모델이 좋았으면 한대요.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예 협찬을 안 하겠다는 게 그런 뜻이죠.”
우현은 그녀의 말을 단번에 이해했다. 사실 그는 그 브랜드의 파워를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다. 은하를 데리고 있을 때도 수시로 협찬 의뢰가 들어왔지만, 그거야 그녀가 하는 것이지 그가 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저 많이 보고 들어서 조금 아는 정도였다.
만약 제작 피디의 말처럼 그렇게 고급 브랜드라면 별이에게 있어 굉장한 기회일 수 있다. 아무리 톱스타라고 해도 명품브랜드의 뮤즈는 자기가 선택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특히 신인배우에게는 다시없을 기회이긴 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저희가 연락 취할까요?”
“아니에요. 저희가 그쪽에다가 연락할게요. 문자로 시간과 장소 보내드릴 테니까 늦지 않게 맞춰 가시면 돼요. 부디 잘 되길 빌게요. 그쪽에서 협찬하면 저희 쪽에서도 그림이 많이 사니까요.”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아, 그리고 윤 작가님이랑 계약하셨죠? 제가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장화 신은 고양이처럼 귀여운 표정으로 울상을 하며 부탁하는데 도저히 글쎄요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윤 작가와 관련됐다면 분명 민감한 것일 텐데…
“어떤 건데요?”
“사실 이번 1,2회에 들어온 PPL 중에 노트북이 하나 있는데… 작가님이 도저히 그걸 쓸 수가 없대요. 너무 최신형인 데다가 협찬사 측에서는 꼭 중간에 휴대용 배터리로 충전해줘야 하는 부분을 넣어달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 이소은이 맡은 캐릭터가 비록 사회초년생이라고는 하나 겨우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는 처지인데 어울리지도 않게 최고급 노트북을 쓰고 있는 모습은 도저히 쓸 수가 없었을 거다.
“그건 저도 어떻게 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닌데요? 작가님 자존심도 있는데…”
“그렇죠? 저희도 알죠. 그런데 아시죠? 이번에 방송사에서 회당 1억5천밖에 안 줬다는 거… 그것만으로는 솔직히 배우들 출연료도 벅차요. 작가님만 회당 2500이잖아요. 이번에 삼선노트북 PPL로 들어오는 돈만 몇억인데… 그냥 깔까요? 절대 안 된다고? 그럼 이 정도 금액의 협찬 받아오려면 몇 개를 더 넣어야 하는데…”
차라리 윽박지르고 강요했다면 대응하기 쉬웠을 테지만 이렇게 나오니 그도 도저히 그냥 안 된다고 딱 자를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작가님한테 이야기해볼게요. 지여울 피디님 정말 사람 잘 설득하시네요. 감탄했습니다.”
“이힛! 너무 감사해요. 그런데 진짜 이건 우리 쪽에서는 쉽게 생각할 수가 없어요. 아시잖아요? 우리나라 드라마 제작환경이 어떤지… 그러니까 너무 미워하지 말아주세요.”
“그럼요. 제가 왜 제작 피디님을 미워합니까? 우리 한 팀이잖아요.”
“그럼요, 한 팀이죠. 그런 의미로 제가 별이씨 협찬 팍팍 챙겨 드릴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마 깔려 죽을지도 몰라요.”
“하하하. 그런 죽음 한 번 맞아봤으면 좋겠네요. 그럼 연락주세요.”
그녀와 헤어지고 오는 길에 문자로 해당 매장 주소와 시간, 연락처가 찍혀 왔다. 내일 오전 10시. 또 새벽부터 바빠질 것 같다.
우현은 곧바로 윤 작가가 작업하는 오피스텔로 향했다. 홍대에 있는 메크로폴리오라는 고급 오피스텔인데 이것도 도마뱀미디어에서 제공한 거다. 전 작도 도마뱀 측과 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이 오피스텔을 쓰고 있었나 본데 만약 다음 작품을 다른 외주업체와 하게 된다면 오피스텔을 옮겨야 할 것이다.
우현은 오피스텔 1층에 있는 빵집에서 빵을 한가득 사 들고 벨을 눌렀다.
“김 대표가 여긴 어쩐 일이야?”
오피스텔에는 윤해연 작가와 보조작가인 20대 후반의 여성 한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방금 제작사 측이랑 미팅하고 왔어요. 유니가 부른 곡 OST에 집어넣어 볼까 하구요. 박유선 작곡가랑 서 피디님이랑 같이 검토했는데 다행히 통과됐네요.”
“정말? 그 깐깐한 서 피디가 뭐라고 안 그래? 그 사람 이상한 데에 꽂히면 엄청 깐깐하게 구는데? 정식 루트 아니면 버릇없네, 낙하산이네… 좀 피해의식 비슷한 게 있거든.”
윤해연 작가는 그와 작업하며 몇 번 데어본 경험이 있는 듯했다.
“조금 그럴 뻔했는데 작곡가님이 잘 막아 주셨어요. 마음에 들어 하시더라고요.”
“박유선 그 친구도 자기 일에서는 깐깐한 사람이야. 그 친구 마음에 들었다면 괜찮은 거겠지. 아무튼 다행이다. 이제 김 대표 날개 달겠네?”
“날개야 이미 윤 작가님하고 계약하면서 단 거 아닙니까?”
“호호호. 하여튼 김 대표 말하는 거 하고는… 그래 여기에 온 진짜 목적이 뭐야? 그거 자랑하려고 온 거는 아닐 거 아냐?”
우현이 씨익 웃으며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슬쩍 앉았다.
“다름 아니라 이번에 삼선노트북 쪽에서 PPL 들어왔다면서요?”
“어이구… 내가 왜 왔나 했네. 저 빵에 아주 그냥 검은 의도가 팍팍 들었던 거지? 야, 너는 참 빠르기도 하다. 언제 그걸 물었니?”
빵 봉지는 어느새 보조작가의 손에 의해 풀려 있었고 그녀의 입에는 소보루빵 하나가 물려 있었다.
“아이참, 선생님 그냥 노트북 넣어줘요. 그거 넣어주면 노트북도 공짜로 준다는데…”
“얘! 너는 노트북 하나에 내 자존심을 팔라는 거니?”
“김 대표님까지 오셔서 부탁하시는데 그냥 넣어주시죠?”
보조작가가 이렇게 도와주니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작가님, 회사 가보니까 제작 피디가 아주 죽으려고 하더라구요. 그거 안 받으면 다른 PPL 몇 개나 받아야 한다구요. 사실 PPL 여러 개 나오면 나올수록 골치 아파지지 않습니까? 이거 하나로 다른 거 퉁치는 게 좋죠.”
“내가 그냥 노트북 정도 나오는 건 넘어가겠는데 꼭 휴대용 배터리로 충전하는 부분을 넣으라니까 짜증이 나는 거지. 그렇게 되면 불필요한 대사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부자연스러운 행동이 생긴단 말이야.”
“암요, 알지요. 그래도 최대한 이상하지 않게 넣어 봐요. 그… 1회에 준식이 처음 회사 출근하는 장면에서 컴퓨터를 처음 쓰다가 망가뜨리는 장면 있잖아요?”
“망가지는 컴퓨터를 노트북으로 하자는 이야기는 아니지?”
“당연히 그건 아니구요. 망가진 컴퓨터 대신 노트북을 사용하다가 배터리가 없어서 휴대용 배터리로 충전하는 내용은 어떨까요?”
빵 봉지를 달랑달랑 들고 온 보조작가가 윤 작가에서 빵을 주면서 끼어들었다.
“그 노트북 배터리 지속시간이 12시간이라고 엄청 광고하던데… 그거 다 쓰려면 남주가 12시간 동안 컴퓨터 해야겠네요?”
“아… 그런가요?”
그 후로 한동안 머리를 싸매고 고심하던 그들은 결국 주인공인 준식이 컴퓨터 게임을 처음 해보고 12시간 동안 몰입하다 충전하는 장면을 넣는 것으로 합의했다.
“내가 김 대표 때문에 그냥 넘어가는 거야.”
“하하. 저 때문에 승낙해주셨다니 기분이 좋네요.”
“가, 나는 또 지옥의 불구덩이로 빠져들어야 하니까.”
“그래도 이번에 지옥에서 나오시면 한 단계 올라서 있을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네.”
오피스텔을 나와 룰루랄라하며 사무실로 향하던 우현은 덜컥 겁이 났다. 모든 게 그의 생각대로 이루어지고 잘 풀려가니 어딘가에서 큰 사고가 터지지 않을까 싶었던 거다.
“에이, 설마 그러려구…”
작품의 흥행과 개인의 스타성은 볼 수 있지만 사건, 사고는 절대 예측할 수 없기에 주식을 포기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일이 너무 잘 풀리다 보니 갑자기 어려운 상황이 닥치지는 않을까 지레 겁이 난 것이다.
다음 날, 우현은 새벽부터 별이를 데리고 샵에 들러 헤어와 메이크업을 풀 세팅한 후 청담동의 한 명품매장으로 향했다.
“그런 명품이 있었어요? 저는 처음 듣는데?”
“사실 나도 처음 들었어. 한국에 들어 온 지는 얼마 안 됐다고 하더라고.”
네비에 찍힌 장소에 도착하니 외관부터 포스가 장난 아닌 매장이 눈에 들어왔다. 촌스럽게 화려하기만 한 인테리어가 아닌, 블랙톤 계열로 무게감이 있어서 단순히 구경하기 위해 가게 문을 열어볼 엄두가 나지 않게끔 했다. 쇼윈도에 진열된 물건은 딱 몇 가지밖에 없어서 여기가 영업 중인지, 아닌지 헷갈리게 할 정도였다.
“대표님, 진짜 여기예요? 어째 좀 기가 죽는데요?”
“걱정하지 마. 미리 연락 다 해놨어. 점원들도 한국말 할 줄 알 거야.”
“별로 위안이 안 되네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검은색 정장은 입은 젊은 여성이 맞았다. 손이 낀 장갑과 블라우스만이 하얀색이라 오히려 눈에 띄었다.
“어서 오십시오. 찾으시는 품목이 있으십니까?”
“오늘 이곳에서 미팅이 있습니다.”
“아, 파인 엔터테인먼트에서 오신 분들인가요?”
“네.”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그녀의 흰 장갑을 따라가니 매장 깊숙한 곳에 50대로 보이는 남자가 푸른색 벨벳 정장을 입은 채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에르클레르 한국지부장인 박원호입니다.”
한국말이 살짝 어설픈 것을 보니 외국에서 오래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야기는 들으셨을 줄 압니다. 저희는 젊은 분들이 우리 ‘에르클레르’를 사랑하고 동경할 수 있도록 드라마에 협찬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에르클레르’의 뮤즈는 아름다우며 품위 있고 현명한 분이길 바랍니다. 그래서 모델을 선정함에 있어 까다로운 선정 과정이 있다는 점을 미리 밝히겠습니다.”
“네, 들었습니다.”
그는 별이의 얼굴부터 발끝까지 전부를 자세히 살폈다.
“이분이 이번에 저희 ‘에르클레르’와 함께 하길 원하시는 분이군요. 좋습니다. 아름다우면서도 동양적인 미를 갖추었습니다. 훌륭하군요. 그럼 옷을 입어 볼까요?”
별이는 여성 점원을 따라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갔다. 그 사이 박원호 지부장이 ‘에르클레르’의 컨셉과 가치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지루하고 별로 와 닿지도 않으며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던 중 멀리서 걸어오는 한 여성의 모습을 보자 튕기듯이 몸을 일으켰다.
“이런, 11시에 오시기로 하지 않으셨나요?”
박원호 지부장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고 걸어오는 여자는 팔짱을 끼고 우현이 앉았던 자리 옆에 앉았다.
“점심에 약속이 잡혀서요. 그런데 이분은 누구시죠?”
“파인 엔터의 김우현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파인 엔터? 어디서 들어본 거는 같은데… 어쨌거나 빨리 입어보죠.”
그녀는 바로 대한민국 최고의 미녀라고 불리는 한여름. 진짜 톱스타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왜?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