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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 신경 써야 할 게 한두 개가 아니다(1)
“가사 나왔대요?”
별이는 유니의 스케줄도 꿰고 있었다.
“응. 녹음실 잡고 바로 녹음 해야겠다. 아, 그리고 1,2회 대본 보니까 좋더라”
“어떻게 좋은데요?”
“사실 민준기랑 이소은 정도면 1,2회 시청률은 무조건 잡고 가는 거거든. 대본을 보니까 오버스럽지 않으면서도 적당하게 웃기는 요소가 있더라구. 솔직히 윤해연 작가님이 이렇게 가벼운 작품 쓴 걸 본 적이 없어서 내심 걱정했는데 코믹적인 요소가 아재스럽지 않게 녹아있는 걸 보고 놀랐어.”
“맞아요. 사실 저도 그게 놀라웠어요. 억지로 웃기는 게 아니라 상황과 대사로 웃기는 게 잘 짜여진 꽁트 같은 느낌을 받았거든요.”
“잘 봤어. 어디에 그런 재주가 있으신지 몰라. 보조 작가의 실력인가?”
메인작가 밑에 딸려있는 보조작가는 아이디어를 제공하기도 하고 메인작가에게 부족한 부분을 메워 주기도 한다.
“그것 말고 다른 건요?”
“코믹적인 부분이 있으면서도 긴장감을 잘 유지했어. 1,2회는 민준기와 이소은 얼굴 보려고 드라마를 시청하지만 궁금증이 없으면 3회 시청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데, 2회 마지막에 별이 네가 민준기의 행동을 수상하게 생각하면서 추궁하는 부분이 웃기면서도 긴장감 있게 마무리했던 것 같아. 뭐, 이리저리 생각해봐도 윤 작가님이 잘 쓰셨어.”
“대표님이 잘 쓰셨다고 하니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괜히 부담되네요. 제가 망치지는 않겠죠?”
“왜? 발연기 논란이라도 나올까봐 그래? 아까 대본 리딩할 때 작가님이랑 감독님이 만족스러워 하셨어. 네 연기에 문제가 있었다면 전에 말했던 것처럼 리딩 때부터 까였겠지. 너무 걱정하지 마. 더군다나 김혜진 선생님께 연기 지도 받을 거잖아.”
그렇게 긴장반 기대반으로 설레어하는 별이를 내려다준 우현은 곧장 녹음실을 예약했다. 내일 바로 가능하다는 말에 이효정에게서 받은 가사를 프린트해서 유니에게 달달 외우게 했다.
“김우현 사장님 계십니까?”
사무실 밖에서 낯선 남성의 목소리가 들리자 경리인 민주가 뛰어나갔다. 그리고 민주 뒤로 건장한 남성 한 명이 대형 액자를 들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어머, 이게 뭐예요?”
“아, 민주씨. 이번에 찍었던 영화 ‘밀실’에서 별이가 나왔던 장면이에요. 잘 나왔죠?”
자고로 엔터테인먼트 사무실이라면 소속 연예인 사진은 걸어줘야 하는 법이다. 전에는 프로필 사진밖에 없어서 그냥 뒀지만 이제 제대로 된 작품을 찍었으니 사무실에 별이 사진을 대형으로 인쇄해 걸어두려는 것이다.
“진짜 잘 나왔다. 영화에서 예쁘게 나온 장면이 몇 없는데 이건 딱 좋네요. 제일 예쁘게 나온 장면이었는데…”
“그렇죠? 하하. 여기 이쪽에 걸어주세요. 문 열고 들어오면 바로 보이게.”
제일 크게 현상한 것 말고도 몇 개의 사진을 곳곳에 걸어두자 유령회사 같던 사무실에 활기가 가득 차는 것만 같다.
“유니야, 이번에 OST 대박내서 네 사진도 한 번 걸자.”
우현은 신기한 마음에 사진을 둘러보던 유니의 어깨를 토닥였다. 유니의 사진을 걸고 싶어도 고작 ‘복면노래왕’에 나왔던 사진뿐이기에 차마 걸지 못했다. 그렇다고 프로필 사진만 거는 건 왠지 모르게 자존심이 상했다.
“힝… 드라마 쪽에서 거절하면 어떡하죠?”
“걔네들도 귀가 있으면 그렇게 안 할 거다. 걱정하지 마.”
사실 유니도 케이블 쪽에서 예능 섭외가 몇 군데 들어오긴 했다. 유니는 별이와는 다르기에 괜찮은 예능이 있으면 얼마든지 출연시킬 용의가 있지만 이번에 OST를 준비하게 되면서 몇 군데 생각했던 예능 출연을 모두 거절했다.
OST 작업이 어떻게 되는지 결론을 지켜보고 난 다음에 해도 늦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건 윤 작가의 고료가 통장에 들어올 예정이기 때문에 회사 자금 사정에 여유가 생기면서 내릴 수 있는 결정이었다.
다음 날, 유니의 보컬 녹음을 마친 뒤 녹음된 시디를 가지고 즉시 제작사를 찾아갔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이제 OST작업을 위해 프로젝트팀을 만들고 작곡가를 섭외해 각 인물에 대한 테마작업을 하고 있을 때였는데, 느닷없는 우현의 등장에 다들 당황했다.
“그러니까, 남자 주인공인 민준기씨의 테마를 만들었다는 말이죠?”
서주완 피디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솔직히 그의 입장에서는 우현이 가져온 곡의 퀄리티와 적합도를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직 대본이 1,2회밖에 안 나온 상황인데다 우현의 소속사가 가수 3대 기획사만큼 대단한 작곡가를 보유한 회사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맞습니다. 전에 적합했던 곡을 받아서 세션 녹음하고 며칠 전에 가사를 받아서 보컬 녹음한 후에 바로 가져온 겁니다. 작사는 이효정씨가 했습니다. 아시죠? 이 바닥에서 꽤 유명한 사람인데요.”
“그럼요. 알고 있습니다.”
서 피디 옆에 앉아있던 30대 중반의 젊은 작곡가 박유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술 하는 사람답게 노란 머리를 바짝 세운 그의 다크서클이 광대뼈까지 내려온 것을 보니 새로운 곡 만들어 낸다고 여간 고생하는 게 아닌 듯했다.
문제는 작사를 좋게 했다고 OST가 사는 건 아니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의 표정도 그리 좋지 않았다. 하지만 우현은 이미 각오하고 왔기에 아무렇지도 않았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 한창 전문가 섭외해서 프로젝트 진행하려고 하는데 가수를 전문적으로 키워본 적도 없는 구멍가게만한 매니지먼트 회사에서 OST라고 만들어 들이밀었으니 관심을 가져주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혹시 시놉시스가 나왔을 때부터 생각한 겁니까?”
“맞습니다. 남주와 여주 중에 고심하다 남주에 적합한 멜로디를 찾아서 제작한 겁니다. 보컬이 여자라고 해도 꼭 여자 테마에만 쓰지는 않으니까요. 장담하건데 민준기씨와 정말 잘 어울릴 겁니다.”
서 피디의 물음에 우현이 적극적으로 답했다. 서 피디의 입장에서는 별이 소속사의 사장이기만 했다면 그냥 듣지도 않고 잘라버렸을지도 모르지만, 윤 작가가 소속된 회사의 사장이기도 했기 때문에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그럼 한 번 들어보시죠?”
박유선 작곡가가 계속해서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서 피디를 향해 들어보기나 하자며 권했다. 우현은 재빨리 컴퓨터에 시디를 넣고 음원을 재생시켰다.
보통 사극을 배경으로 하는 OST는 단소나 해금을 바탕으로 깔아 특유의 한국적인 색채와 고풍스런 느낌을 살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현이 들려주는 노래는 그렇지 않았다.
느리고 서정적인 발라드지만 결코 촌스럽지 않았다. 특히 유니의 아름다운 목소리에 바이올린의 애절함이 더해지니 전통악기 없이도 충분히 사극에 어울릴 법했다.
사실 바이올린 대신 해금을 쓸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한국적인 색채를 더욱 살릴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유니가 솔로활동을 한다고 가정하면 무대 컨셉이나 의상 등 모든 게 애매해질 수 있다. 그래서 해금 대신 바이올린으로 했는데 생각보다 곡이 잘 나왔다.
곡을 다 듣고 난 뒤의 서 피디 반응은 듣기 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확신을 하지 못하겠는지 박유선 작곡가를 바라보았다.
“이효정님이 작사해서 그런지 가사 내용도 딱 준식역에 맞춘 것 같네요. 너무 오글거리지도 않고 남자 입장에서 충분히 생각할법한 가사이기도 하고. 좋네요.”
“좋다고? 정말?”
서 피디가 박유선을 향해 확신하느냐는 말투로 물었다.
“정말 괜찮은 거 같아요. 전통악기가 나오는 뻔한 전개가 아니라서 더 좋기도 하구요.”
“곡 하나 덜 써도 돼서 좋은 거 아니고?”
곡 하나를 빼면 그가 받아야 할 돈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실 그의 입장에서도 만들어야 할 곡 하나가 줄면 엄청난 스트레스와 스케줄의 압박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으니 꼭 나쁜 것만은 아닐 터였다.
“아휴, 서 피디님, 진짜 좋다니까요? 물론 곡 하나 덜 써서 좋기도 하구요. 크흠… 어쨌거나 제가 만들어도 이것보다 더 좋은 게 나온다고 확신할 수도 없구요. 솔직히 말해서 앞으로 두 달간 만들어야 하는 주인공 각각의 테마곡만 10개에 달합니다. 거기다 타이틀 음악에 엔딩에 쓰이는 텔럽 음악, 메인 테마, 각종 상황에 필요로 하는 몽타지 음악, 코믹 음악, 장면 전환할 때 쓰는 브릿지 음악 등등등 해서 만들어야 할 곡만 최소 30개가 넘어 간다구요. 곡이 나쁘면 몰라도 생각보다 상당히 괜찮게 나왔으니까 이걸 준식역 테마곡으로 쓰시죠.”
물론 그 혼자서 전부 만들어내는 건 아니다. 그 밑으로 많은 작곡가들이 만들어 낸 것들 중에서 선정하고 편집기사와 곡이 들어가는 타이밍을 잡는 것도 그의 일이다.
“진짜 괜찮은 거지?”
“괜찮아요. 그래도 여기 김 대표님 덕에 제가 머리는 덜 빠지겠네요. 감사합니다.”
“감사는요. 잘 들어주셔서 제가 감사합니다, 하하하. 그래도 고생한 보람이 있네요. 이거 고르느라고 얼마나 많은 멜로디를 들었는지 귀에 딱지가 다 앉았습니다.”
“그랬겠네요. 그래도 고생한 보람은 있을 겁니다. 주인공인 준식역의 테마곡이니 앞으로 수도 없이 흘러나올 테니까요.”
이번 OST를 책임지게 된 작곡가가 흔쾌히 수락하고 나니 서 피디도 더 이상은 거부하지 않았다. 그도 귀가 있기에 노래가 괜찮다는 건 알고 있으니 납득하는 것일 테다.
“그럼 우리 별이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요. 촬영장에서 봅시다.”
“아, 그리고 별이 협찬 관련해서 혹시 제작진 측에 명품 쪽으로 연락 온 게 있습니까? 없다면 저희가 준비해야겠죠?”
“그 부분은 저도 아는 게 없으니 제작피디한테 물어보시겠어요?”
“알겠습니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수고하십쇼.”
우현은 그 즉시 회의실을 나와 제작피디를 찾아갔다. 같은 사무실을 쓰고 있기에 그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별이 데리고 있는 파인 엔터테인먼트 김우현이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제작피디인 지여울이라고 해요. 여긴 어쩐 일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녀는 밝은 갈색 머리를 뒤로 묶은 채 무언가를 열심히 보고 있었다. 얼굴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푸석푸석했고 얼마나 커피를 마셔댔는지 종이컵은 탑을 쌓고 있었다.
원래는 별이와 계약할 때 봐야 했지만 마침 그녀가 한국에 없었기에 이제야 얼굴을 보게 됐다.
“이번에 별이가 맡게 된 역할 때문에 협찬이 들어온 게 있나 해서요. 그런데 제작피디님이 이렇게 미인이신 줄 몰랐네요.”
괜한 소리가 아니라, 뚜렷한 이목구비와 잡티 하나 없는 피부를 볼 때 일반인 치고는 확실히 눈에 띄는 외모였다.
“와하하! 감사합니다. 이 꼴에도 그런 소리를 들으니까 기분이 좋네요, 후후. 김별씨가 재벌집 딸로 출연하게 돼서 이번에 각종 명품 업체에 관련 시놉하고 출연진 돌렸어요. 그래서 몇 군데에서 연락이 오긴 했는데… 생각보다 그렇게 명품 쪽은 아니네요. 어쩌죠?”
아무래도 별이가 입어야 하기에 업체에서 협찬을 꺼린 듯했다. 이소은이 입는 거였다면 수십 군데에서 서로 참여하겠다고 난리가 났겠지.
우현은 아쉬움에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재벌 3세정도 되는 여자가 콕치 가방을 들고 있는 다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럼 이건 어때요?”
피곤함에 찌들어 푹 꺼진 제작피디의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