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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 사람은 변하는 법(5)
지금까지 로코만 주구장창 찍어댄 이소은은 몇 번이나 연기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냐는 소리를 들어왔다. 그렇기에 저 손때 묻은 대본을 보고 있자니 경계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의 앞을 지나가던 소은이 피식 웃으며 한 마디를 날렸다.
“눈 풀어요. 잡아먹지 않을 테니까.”
물론 저 잡아먹는다는 대상이 자신이 아닌 별이를 말한 것일 테지만 확실히 위협적으로 다가오긴 했다. 우현은 자신의 자리에 앉아 긴장된 얼굴을 한 별이에게 안심하라고 제스처를 취했다.
윤 작가의 눈치를 보니 그녀도 조금은 놀란 듯했다.
“허허, 이제 보니 소은씨가 이 작품 제대로 한 번 해보려고 마음 단단히 먹은 것 같네? 시작부터 감이 좋은데?”
“감독님께서 좋게 봐주시니 다행이네요. 작가님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사고 안 칠 테니까.”
주변 스태프들이 어색한 웃음으로 그녀의 말에 화답했다. 윤 작가도 마땅히 대답할 말이 생각 안 나는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소은이 예전에 대본 리딩에 꽤나 건방지게 임했다는 이야기는 이 바닥에 있는 모두가 알 정도로 유명하다.
작가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대본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아니면 전날에 누구랑 싸웠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한바탕 리딩 현장을 뒤집어 놨다는 이야기는 그녀의 또라이 레벨을 한 단계 올려줬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바른 청년의 모습은 모두를 당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윤 작가도 사실 그녀의 외모와 인기를 보고 캐스팅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트러블은 각오하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소은씨랑 첫 드라마라서 긴장했는데 그동안 소은씨를 오해 했었나 봐요.”
“그럴 수도 있죠. 시작할까요?”
저 여유 있는 모습. 우현은 감탄을 터뜨릴 뻔했다. 저 대인배스러운 모습을 보니 자신이 예전에 그녀에게 쌍욕을 퍼부었던 것이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지 않은가?
“그럽시다. 다 모였으니 인사부터 하죠. 반갑습니다. 이번에 드라마 ‘그 양반 같은 자식’의 감독을 맡게 된 서주완이라고 합니다.”
제목은 아직 완전히 정해지지 않아 가제로 붙어 있다.
“반가워요. 이번에 극본을 맡은 윤해연이에요. 이렇게 만나게 된 건 다 인연이라고 생각해요. 이 인연 좋은 기억으로 간직하고 싶어요. 우리 끝까지 아무 사고 없이 즐겁게 일해 봐요.”
윤 작가는 그녀답게 우아하면서도 차분히 할 말을 다했다. 그 다음으로 남자주인공인 민준기가 일어섰다. 타이틀롤을 맡은 그이기에 감독과 작가 다음으로 그가 일어선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준식역을 맡게 된 민준기입니다.”
인사말이 끝나기도 전에 모든 이들이 박수를 쳤다. 확실히 배우는 발성부터 다르다. 목소리 하나만으로 감탄을 이끌어낸다.
“이번에 좋은 작품을 하게 돼서 정말 영광입니다. 전에 이소은씨와 ‘이지매’라는 작품을 했었는데요. 시청률도 그렇고 평가도 좋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때의 좋은 기운을 이어서 이번에도 대박 났으면 좋겠습니다.”
민준기와 이소은이 오래전에 찍었던 드라마로, 그 때는 둘이 한창 떠오르는 스타였다. 학교폭력의 어두운 단면을 아주 사실적으로 표현해냈다는 평을 받았다. 그 때 당시 최고 시청률이 28%가량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민준기가 환호성과 함께 자리에 앉자 이소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갑습니다. 혜수역을 맡은 이소은이에요. 준기 오빠랑 오랜만에 만나서 좋네요. 옛날 생각도 나고… 이번에는 진지하게 해보려고 해요. 많이 도와주셨으면 좋겠어요. 잘 해봐요.”
분명 말은 열심히 할 테니 도와달라는 내용인데 저 당당한 표정은 ‘안 도와주면 어쩔 건데?’라는 뜻이 담겨있는 것만 같다. 사람이 많이 바뀌었다고는 해도 저 싸가지는 어디 가는 게 아닌가보다. 그래도 주조연 배우들은 이것만으로도 감지덕지 하다는 듯 웃으면 박수를 치고 환호했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예빈역을 맡은 김별이라고 합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많은 지도 부탁드립니다.”
꾸벅 허리를 숙이는 별이를 향해 많은 박수가 쏟아졌다. 확실히 별이도 이제 여배우 티가 나는지 소은 옆에 있어도 그리 죽지 않는다. 이후, 조연을 맡은 장년층의 소개가 이어졌고 모든 소개가 끝나는데 무려 30분가량이나 걸렸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대본 리딩에 들어갔다.
“어허! 망측하구나! 저 허벅지를 보아라!”
확실히 민준기의 발성은 사극에 잘 어울렸다. 더군다나 사극을 몇 번 경험해봤기에 하오체를 익숙하게 사용했다.
“이 아저씨, 웃기는 아저씨네? 생긴 건 멀쩡해가지고 말 하는 게 왜 그래요? 변태야 뭐야? 아니면 그런 쪽 취향인가?”
전에 은하와 같이 드라마를 했을 때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목소리만으로 연기를 하더니 이번에는 민준기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쏘아붙였다. 하지만 우현은 내심 그녀의 연기를 보며 아쉬움을 느꼈다.
그녀가 가진 특유의 굵직한 톤은 여성스러운 그녀와 맞지 않았다. 특히 그녀는 표정 연기가 다양하지 못해서 화가 났을 때도, 놀랐을 때도 큰 차이가 없었다. 물론 딱 보기에도 최선을 다해 연기하는 그녀에게 지적을 하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우현도 그녀 입장에서 아쉬움을 느낄 뿐, 지적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어차피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렇게 얼빠진 인간이랑 결혼할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단 말이에요! 안 할래요. 엄마가 말 못하겠으면 내가 아빠한테 얘기할게요.”
별이는 자신의 어머니 배역을 맡은 중견 여배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또박또박 대사를 이어갔다. 캐릭터 연구와 연습을 많이 해서 그런지 그녀의 말투는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쳤다. 인사할 때 쑥스러워하던 모습은 어디가고 전혀 다른 사람이 앉아있는 것만 같았다.
별이의 연기를 보던 윤 작가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어리는 것을 보니 우현은 한결 마음이 놓였다. 특히 서 피디도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하는 것을 보니 지금껏 긴장됐던 것이 스르르 풀리는 것 같았다.
이후로 대본 리딩이 숨 가쁘게 진행됐다. 전쟁과도 같은 치열한 연기의 향연이 이어지고 몇 차례의 휴식시간을 거쳐 무려 7시간에 이르는 긴 시간동안의 대본 리딩이 마무리됐다.
“수고하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촬영장에서 뵙겠습니다.”
대본 리딩만 가지고는 그 드라마의 흥행성적을 예측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민준기와 이소은이 열정적인 연기를 내보인 것만으로도 분위기는 달아올랐고 흥행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기에 충분했다.
별이는 처음 가지는 대본 리딩의 열기에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특히 이소은과 민준기의 치고받는 대사를 계속해서 지켜보다보면 자신도 그들 주연처럼 되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을 거다.
별거 아닌 연기에도 주변에서 반응해주고 칭찬해주는 걸 보면 주연이 가지는 아우라는 대단한 것임이 틀림없다. 그래도 우현은 이소은인 것을 다행으로 여기자고 생각했다. 전도현이나 이혜수 같은 여배우였다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을 테니까.
우현은 별이의 손목을 잡고, 리딩 현장을 빠져나가는 김혜진에게 빠르게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김별 데리고 있는 김우현이라고 합니다.”
“어머, 안녕하세요.”
“네, 윤 작가에게 들어서 아시겠지만 우리 별이가 아직 많이 모자랍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 잠시 지도를 해주셨으면 해서요.”
“윤해연 작가에게 말 들었어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선생님.”
별이도 그녀에게 깍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나이 많은 사람치고 예의바른 청년 싫어하는 사람 없기에 김혜진은 기분 좋게 웃으며 별이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래요. 열심히 한다고 하니까 선배로서 도와주지 않을 수가 없네. 어쩜 이렇게 예쁘면서 예의도 바를까. 내가 표정만 봐도 알잖아. 진짜 예의바른 거랑 싫은데 억지로 하는 거랑 딱 티가 난다니까, 글쎄? 호호호. 우현씨 번호 두고 가요. 내가 문자 보낼게.”
“감사합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정말 열심히 배울게요.”
“호호호, 그래요. 그럼 내일 봐.”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헤어지고 난 뒤, 별이를 데리고 차로 돌아오니 상준이 곯아떨어져 있었다.
“상준아, 끝났다. 가자.”
졸고 있던 상준의 어깨를 툭툭 치며 깨운 우현은 별이가 마실 커피를 사러갔다. 장시간 목을 많이 썼으니 시원한 음료가 당길 것이다.
별이는 녹초가 돼서 잠시 널브러져 있다가 문득 우현이 자리에 없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몸을 튕기듯이 일어나서는 운전석 가까이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아까 말했던 거 누구예요?”
“아까 말했던 거? 아… 그 대본 리딩 하다가 까였다는 배우?”
상준은 별이와 어느 정도 친해지자 말을 놓았다.
“네. 아까 ‘성’ 까지만 말했어요. 이름은 뭐예요?”
“하하하. 그거 사람 이름을 말한 게 아니었어. 작품의 제목이 ‘성’부터 시작하는 건데?”
“작품 이름이요?”
“응. 그 때 한창 인기 있었던 성균…”
덜컥!
차문이 열리며 우현이 커피 세 개를 들고 들어왔다. 우현은 재빨리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별이를 보며 대강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했지만 모르는 척했다.
“오늘 고생했다. 여기 네가 좋아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오늘 해보니까 어땠어?”
“저는 솔직히 어느 정도는 보여주기식인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정말 진지하게 하는 걸 보니까 저도 거기에 빠져들게 되더라구요. 그리고 확실히 김혜진 선생님하고 박근명 선생님의 연기는 정말 대단했어요.”
“그렇지? 두 분의 연기는 정말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 그래서 이번 기회에 잘 배워야 해.”
“윤 작가님께서 그렇게 인연을 맺어주실지는 몰랐네요.”
“작가님이 워낙 작품을 잘 쓰시잖아. 그리고 작품 쓰실 때 웬만해서는 쪽대본은 거의 없기로 유명하시거든. 대본 쓰는 게 빠르다는 거지.”
“대단하네요.”
“그럼. 퀄리티 있는 작품을 빨리 쓴다는 건 엄청난 장점이지.”
대한민국 드라마 환경에서 작가가 쪽대본을 쓴다고 욕할 수는 없다. 촉박한 시간과 대책 없이 태클 들어오는 투자자, 시청자들의 의견, 그리고 시청률은 이미 만들어진 대본을 여러 번 뒤집어엎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윤 작가는 최대한 쪽대본은 나가지 않게끔 해서 많은 중견 연기자들이 좋아한다.
“대표님이 보시기에 1,2회 대본 어때요?”
첫 미니시리즈라서 그런지 조연임에도 시청률이 신경 쓰이나보다.
“괜찮던데? 어? 잠시만…”
드디어 기다리던 전화가 걸려왔다. 바로 작사 의뢰를 했던 이효정씨.
“드디어 끝나셨습니까?”
“후… 네. 조금 오래 걸렸죠?”
“괜찮습니다. 늦었다면 이유가 있으셨겠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보내주시면 이제 바로 녹음 들어가야겠네요.”
“잘 되기를 바랄게요. 남자 주인공으로 민준기씨가 됐다는 기사는 봤어요. 아무래도 곡 테마를 남자주인공으로 쓸 것 같은데, 가사도 그렇게 맞췄어요. 그리고 유니씨 아직 얼굴도 보지 못했는데, 이번 OST에 참여가 결정되면 언제 밥이나 한 끼 먹어요.”
“물론입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전화를 끊은 우현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제는 유니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