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 내가 스타로 띄어줄게-42화 (4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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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 사람은 변하는 법(4)

대본 리딩이라는 게 주연과 조연배우들이 만나 함께 연기 호흡을 맞춰보는 것인데 그러다보니 신인 연기자들은 대선배들의 기에 눌려버리기 일쑤다. 그러다 자칫 자신의 페이스를 놓치기라도 한다면 괜히 오버하기도 하고 반대로 어버버하다 끝나는 경우도 많다.

뭐가 됐든 최소한 자신의 연기를 제대로 보여줘야 하는 자리이다. 물론 경력이 상당하거나 톱스타의 자리에 오른다면 주변의 눈치를 덜 보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대충 시간이나 때울 수 있는 자리는 아니다.

“그럼요. 잘 알고 있습니다. 혹시 조연 중에 소개시켜 주실만한 분 계세요?”

“음… 보자. 아, 이번에 여주 어머니 역으로 김혜진 씨가 캐스팅 될 것 같아. 그 분 어때?”

“김혜진씨요? 그럼요. 대단하신 분이죠. 연결시켜 주실 수 있으세요?”

우현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중견 연기자 중의 한 명이 김혜진이다. 무거운 연기와 가벼운 연기 모두 완벽하게 소화 가능한 그녀는 언제나 맡은 배역을 120% 해내는 대단한 배우다. 특히 그녀가 출연했던 영화 ‘뱀파이어’에서 범인인 송강후를 암시하기 위해 눈을 껌뻑이는 장면은 아직도 종종 회자되는 명장면이다.

“내가 얘기 한 번 해볼게. 대신 사례는 김 대표가 알아서 잘 하고.”

“그럼요. 그 정도 예의는 지켜야죠.”

드라마 출연을 앞두고 신인 연기자가 경력이 대단한 선배 연기자의 지도를 받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그렇기에 작품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연기가 느는 건 꼭 카메라 앞에서 많이 해봤기 때문만은 아니다.

문제는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가 뺏기는 것이기에 누구도 그것을 공짜로 해주려고 하지 않는다. 간혹 아주 좋은 마음으로 그냥 해주기도 하나 소속사에서 약간의 성의라도 표시해 주는 것이 예의다.

아주 예전에는 신인 여배우들이 연기 배우러 갔다가 몹쓸 짓을 당하기도 했고 애초에 소속사에서 그런 목적으로 보낸 경우도 있었지만 요즘에도 그렇게 하다가는 이 바닥에서 매장당하고 수갑 차게 된다.

“그런데 혹시 제작진이 별이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 아세요?”

“그건 나도 모르겠는데? 설마 천 이상 생각하는 건 아니겠고… 700이상 생각하는 거야?”

“솔직히 700정도면 좋겠는데 그건 저희 바람이구요. 최소 500이상은 받아야 그래도 주조연 취급이라도 해주지 않습니까?”

“서 피디 그런 사람 아니야. 좀 까탈스럽긴 해도 돈으로 사람 판단하지 않아. 그리고 분량은 피디가 아니라 내가 정하는 거니까 걱정 안 해도 돼.”

“하긴 윤 작가님이 같은 식구인데 제가 조금 예민했네요. 첫 미니 들어가는 거라서 긴장했나 봐요.”

“확실히 회사 직원일 때랑 회사 사장일 때랑 다르지? 그래도 김 대표는 잘 할 거야. 워낙에 작품 보는 눈이 대단하잖아? 걱정 그만하고 별이만 착실히 준비시켜.”

“네, 알겠습니다. 그럼 작가님만 믿겠습니다. 파이팅 하십쇼!”

전화를 끊은 우현이 작게 미소 지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김혜진과 연결된 끈을 얻었으니 운이 좋다면 별이를 그녀에게 연기지도 받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가만있자… 4억의 20%면 8천이구나. 이제 민주씨 눈치도 좀 덜 보겠네.”

회사 통장에 돈이 말라있으면 일단 경리 보기가 제일 창피하다. 법인카드로 밥 사먹기도 눈치 보일 정도가 되면 괜히 경리의 시선을 회피하게 되는데, 이제 거액이 통장으로 입금될 테니 한시름 놨다.

이번 작품으로 윤 작가의 몸값이 오르면 다음부터는 회당 5천 이상도 바라볼 수 있을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균 시청률이 25%이상 나와야 한다. 요즘 시대의 시청률 25%는 90년대 시청률 40%이상 나온 거나 마찬가지일 거다.

한 마디로 대박 작가의 기준점이라 볼 수 있으며 드라마 작가들 사이에서 천상계로 올라가는 관문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유니야, 녹음실로 가자.”

“준비 끝났대요?”

“응. 상준아 차 대기시켜라.”

오늘 별이가 스케줄이 없어 쉬는 바람에 우현은 상준과 유니를 데리고 녹음실로 향했다.

“오셨어요? 일단 앉으세요.”

엔지니어는 이 바닥에서 나름 인정받는 30대 중반의 남자로 이름은 유병준이라고 했다. 이미 곡을 받을 때부터 편곡까지 완료된 음원을 받았기에 그가 해줄 일은 세션 녹음 후 곡을 다듬는 일이었다.

“보컬이 아니라 세션부터 녹음하는 이런 경우는 흔치 않은데… 혹시 OST녹음 하는 건가요?”

“네, 맞아요. OST에 넣을 노래 만드는 겁니다.”

“아, 그러시구나. 아주 급한 상황인가 봐요? 현재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인가요?”

보통은 보컬 녹음 후 세션이 녹음한다. 하지만 아주 간혹 상황이 급한 경우에 세션 녹음을 완료하고 난 뒤 보컬을 입히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 OST 녹음일 경우가 그렇다.

“아뇨. 1,2회 대본도 안 나온 드라마입니다. 그런데 이건 제작사 측이 만드는 게 아니라 저희가 그쪽에 제안을 넣을 거라서 미리 만드는 겁니다.”

“아… 잘 돼야겠네요.”

곧바로 준비된 세션이 악보에 따라 녹음을 시작했고 대략 세 시간정도가 지나 녹음이 마무리됐다. 유니는 기왕 녹음실에 온 김에 다시 한 번 정식으로 가이드를 잡으며 감을 익혔다. 가사가 언제 나올지는 모르지만 기왕이면 작사가에게 도움이 되도록 다시 녹음해서 이효정에게 보냈다.

다시 시간이 흘렀다. 영화 ‘밀실’은 흥행을 이어갔고 어느덧 손익분기점인 2백만을 가뿐히 넘겼다. 우현과 최 감독은 청담동의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와 와인을 즐기며 흥행을 자축했고 인터넷에는 김별에 대한 기사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충무로의 떠오르는 신인 여배우’

‘강소연과 폭발적인 시너지, 김별은 누구?’

거기에 더해 윤해연 작가의 신작에 김별이 캐스팅 됐다는 기사까지 나면서 이제는 공중파 예능에서까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유니가 ‘복면노래왕’에 나간 적이 있기 때문에 라라걸즈에 대한 이야깃거리가 예능에서 꽤나 괜찮은 소재이긴 했다. 때문에 공중파 예능 중에서 토크쇼로는 상당한 시청률과 화제를 보장하는 ‘마이크스타’ 작가들에게까지 전화가 걸려왔다. 물론 정중히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캐릭터 연구는 잘 했니?”

우현은 상준, 별이와 같이 SBC 방송국으로 향했다. 운전은 당연히 상준이 도맡아 하고 우현은 조수석에 앉아 뒤를 돌아보며 별이의 상태를 체크했다.

“이것 보세요.”

별이가 너덜너덜해진 대본을 흔들어댔다.

“솔직히 대사는 툭 치면 나올 것 같구요. 밤새 고민하면서 연구했어요.”

“그래, 고생했다. 긴장하지 마. 별거 아니야.”

솔직히 우현도 긴장됐다. 아무리 윤 작가가 같은 식구고 별이 연기를 믿지만 그래도 자칫 실수하는 날에는… 생각하기도 싫다.

“대표님, 전에 왜 대본 리딩하다가 까인 여배우도 있다고…”

“걘 연기 드럽게 못 해서 그런 거고… 별이는 그 정도 아니야.”

“대본 리딩하다가 까였다구요? 그럴 수도 있어요?”

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조수석 쪽으로 다가왔다.

“너, 인마, 쓸데없는 말을 해가지고는…”

“죄송합니다. 저도 그냥 긴장돼서…”

운전하는 상준에게 눈빛을 강하게 쏘아 보낸 우현이 별이를 달래듯이 말했다.

“별거 아니야. 예전에 대본 리딩하다가 작가한테 까인 여배우가 있긴 했었어. 그런데 걔 연기가 워낙 별로라 원래부터 발연기로 소문났었지. 그래도 데뷔한지 꽤 지나서 연기가 좀 나아졌을까 해서 캐스팅했다가 바로 까였지. 그래서 걔가 생긴 것과는 다르게 작품을 잘 안 해. 팬들도 왜 작품 안 하냐고 하는데 사실 작품을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게 아니라는 건 모르지.”

“그 작품이 뭐였는데요? 아니, 그 여배우가 누구예요?”

별이가 호기심 초롱초롱한 눈으로 달려들었지만 우현은 쓴웃음만 흘리며 무시했다.

“뭘 굳이 알려고 하니? 같은 업계에 있으니까 그냥 모른 척 해주자.”

“작품 이름은 알려줘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것도 안 돼.”

딱 잘라 말하는 우현에게 토라진 별이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입술을 삐죽이는 걸 보니 어지간히 궁금한가 본데 그래도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그 왜, 성…”

“됐고, 운전이나 해.”

상준은 우현의 눈치를 보다가 백미러로 슬쩍 별이에게 눈썹을 찡긋거렸고 그걸 본 별이는 우현 모르게 씨익 미소 지었다.

우현은 알면서도 모른 체 했다. 한창 호기심이 왕성하고 남의 말하기 좋아할 나이니까. 우현이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은 괜히 다른데 가서 말 실수할까봐 걱정 돼서인데 반대로 자신이 너무 억압하려고만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방송국에 도착해 대본리딩실에 들어가니 이미 대부분의 스태프들이 도착해 있었다. 우현이 스태프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아침부터 서둘렀더니 배우들 중에서는 별이가 가장 먼저 도착한 상태였다.

“안녕하십니까!”

“반가워요. 얼굴이 더 좋아진 것 같아요?”

서 피디는 나이가 50을 바라봐서인지 흰 머리가 희끗희끗했다. 그와는 별이의 캐스팅 계약 때 인사를 나눴는데 촬영장에서는 그렇게 꼬장꼬장하다더니 촬영장 밖에서는 영락없는 동네 아저씨 같다.

“아유 감독님, 긴장감 때문에 잠 한숨도 못 잤습니다.”

“하하하. 대본은 별이가 읽는데 왜 김 대표가 잠을 못 잡니까? 긴장하지 말아요. 전에 단막극 보니까 드라마 연기도 괜찮던데요, 뭘… 잘 해 봅시다.”

그와 악수를 나눈 우현은 조감독을 비롯한 스태프들 전원에게 준비한 음료수를 건넸다. 연신 별이를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고 있는데 누군가 그의 어깨를 살며시 툭 쳤다.

“김 대표, 벌써 온 거야? 빨리도 왔네?”

화사하게 멋을 낸 윤해연 작가가 그를 향해 환하게 웃음 짓고 있었다.

“이야… 못 알아보겠어요.”

“정말?”

우현이 그녀에게 다가가 슬쩍 귓속말로 말했다.

“이소은한테 기 안 죽으려고 한 거 아닙니까?”

“눈치 하나는…”

시간이 지나자 배우들도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래도 조연들이 먼저 도착했는데 중견배우인 김혜진이 들어오자 우현이 얼른 달려가 안부 인사를 나눴다. 윤 작가가 미리 이야기를 해 두었기에 언제 한 번 만나기로 약속만 잡은 상황이라 그녀에게 잘 보일 필요가 있었다.

이윽고 오늘의 주인공인 이소은과 민준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민준기가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모든 여자 스태프들은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안녕하십니까.”

굵직하고 섹시한 중저음의 목소리. 남자가 들어도 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인데, 심지어 얼굴도 조각같이 잘생겼다. 단 1주일만이라도 저 얼굴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갑습니다.”

이어서 이소은이 들어섰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녀는 청바지에 후드티를 입고 투박한 뿔테안경을 쓰고 나타났다. 머리도 대충 끈으로 묶고 왔는데 그럼에도 ‘나 여배우예요’하는 포스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까맣게 손때가 묻은 대본이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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