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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 사람은 변하는 법(1)
“저도 이소은씨 보고 싶었어요. 실물로 보니까 어쩜 이렇게 예쁜지 몰라.”
“예쁘긴요. 작가님이 훨씬 고우세요. 피부만 보면 20대로 보이는데요?”
“어쩜 얼굴도 예쁘면서 말도 그렇게 예쁘게 할까? 호호호. 앉아요, 앉아.”
인사와 동시에 상대방을 파악하기 위한 보이지 않는 눈치싸움이 거세다. 물론 우현 역시 보이지 않는 더듬이를 바짝 세웠다.
“일단 배고프실 텐데 식사부터 하실까요?”
강 실장이 노련하게 음식을 시키고는 윤 작가에게 말을 걸며 눈치를 봤다. 궁금했을 거다. 분명 이유가 있어서 연락을 안 받았을 테니까.
한정식이라 조금씩 계속해서 음식이 들어왔다. 그 동안 서로 간에는 안부와 최근에 했던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갔다.
“그런데 김 대표님은 원래 그렇게 과묵하신 성격입니까? 하하.”
강 실장이 가만히 음식만 먹고 있는 우현에게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우현이 입을 열어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리라.
“그렇지 않을 걸요?”
그런데 생각지 못하게 이소은이 입을 열었다. 강 실장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
그녀는 강 실장의 어정쩡한 물음에 답하지 않고 우아하게 떡갈비를 썰어 먹으며 우현을 빤히 바라보았다.
“제가 원래 성격이 좀 안 좋다는 말을 듣습니다.”
우현은 태연하게 큼지막한 떡갈비를 통째로 입에 넣으며 그녀의 시선을 마주했다.
“김 대표, 둘이 원래 알고 있던 사이야?”
“아는 사이는 아닙니다. 단지, 전에 은하를 데리고 있을 때 잠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죠.”
“그게 그냥 대화였나요? 내 기억엔 그 대화에 욕이 좀 섞여 있었던 것 같은데… 아, 실장님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설마 예전일 가지고 좀스럽게 굴겠어요? 이제 대표님이신데.”
소은이 다시 한 번 끼어들었다. 강 실장은 그제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치 챈 듯 소은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다행히 이 자리를 엎을 정도는 아닌 것 같다고 느꼈는지 조금 굳어졌던 얼굴이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 또다시 생각해보니 잘못이 그녀에게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이번에는 우현의 눈치를 살폈다.
“안 그래도 제가 뒤끝이 있다는 말을 좀 듣습니다.”
“뒤끝 있는 남자 매력 없는데…”
“오실 때 이야기 못 들으셨나 봅니다?”
우현이 못 참겠다는 듯 시선을 강 실장에게 돌렸다.
“네, 아마 제가 없을 때 일이 있었나본데 큰일이었나요?”
“제가 예전에 은하를 데리고 있을 때, 둘이 같은 드라마를 했습니다. 그 때는 은하가 막 뜨는 시기였죠.”
강 실장은 거기까지만 해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이 되는지 급히 일어서서 허리를 굽혔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그 생각을 못 했네요. 유은하씨 매니저였다는 걸 깜빡했습니다.”
은하가 막 신인의 티를 벗은 시기였는데 촬영 중간에 우연히 두 사람이 비슷한 의상을 입고 온 것이다. 둘이 붙는 신이었기에 누구 하나는 의상을 갈아입어야 했는데 당연히 양 측은 누구 하나 물러서지 않았다.
보통 이런 경우라면 후배인 은하가 옷을 갈아입어야겠지만 역할 상 소은보다 은하에게 더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이소은도 한 성격 하지만 은하 역시 자존심이라면 어디 가서 꿀리지 않았기에 1시간을 찍네 못 찍네 하다가 화가 난 이소은이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마시던 주스를 은하에게 끼얹었던 일이 있었다.
그 때 우현이 이소은을 향해 그녀의 학력과 정신 상태를 의심하는 쌍욕을 시전하며 주변 제작진을 경악시켰는데 그가 남들 앞에서 화를 냈던 몇 안 되는 순간중의 하나였다.
결국 은하가 젖은 옷을 벗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은도 그때 미친놈처럼 달려들던 우현에게 놀랐는지 그 이후로 별다른 사고 없이 조용히 드라마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이해하세요. 강 실장님이 저를 맡기 전에는 가수를 담당하셨거든요. 오래된 일이니까 모를 수도 있죠.”
본인이 잘못해놓고 뻔뻔하게 실장을 대신해서 사과를 하는 소은은 진정 그녀다웠다.
“우리 옛날이야기는 그만하고 이제 일 이야기 할까요? 회포는 나중에 풀고 말이에요.”
윤 작가가 소은과 우현을 돌아보며 눈웃음을 그렸다.
“그래요. 전 옛날이야기 지겨워요.”
강 실장은 우현이 윤 작가의 소속사 사장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 그를 살살 약 올리는 소은을 보고 안절부절못했다. 특히 우현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있었으니까.
하지만 강 실장의 마음과는 달리 우현은 일부러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 판을 깰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윤 작가 소속사의 사장이라고는 해도 그녀의 일을 침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캐스팅은 오로지 그녀와 피디의 권한이다. 자신이 왈가왈부 할 게 아니며 이런 자리에서 섣불리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서도 안 된다. 그리고 사실 오래전 일이기에 그녀에 대한 악감정도 남아있지 않았다. 단지 꺼려질 뿐.
그걸 알기에 소은이 저렇게 우현을 약 올리는 거다. 그 때, 드라마를 같이 촬영하며 우현에 대해 어느 정도는 파악했을 테니까.
“이번에 시놉시스를 수정했어요. 그래서 전에 보내준 시놉과 내용이 완전히 달라졌는데… 미안해서 어떡하죠?”
기어코 시놉을 완성해서 온 그녀를 보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지 불안한 것이라면 아직 그녀가 새로 쓴 시놉을 보지 않아 어떤 작품이 나왔는지 알 수 없다는 것.
“시놉이 바뀌었다구요? 농담 아니시죠?”
소은이 놀라서 우현을 돌아봤다. 하지만 굳은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그를 보고 거짓은 아님을 느꼈나보다.
“작가님, 저 이 시놉 보고 일본에서 일정도 다 못 마치고 왔어요.”
“소은씨, 나도 미안해요. 하지만 일단 보고 이야기 할까요?”
윤 작가가 가방에서 A4용지 묶음 몇 개를 꺼내 하나씩 주었다.
“이게 새로 바뀐 시놉이라는 거죠?”
“맞아요. 일단 읽어봐요.”
소은과 강 실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용지를 한 장씩 넘겨나갔다. 우현도 바뀐 시놉을 찬찬히 읽어 보았다.
‘허참… 역시 윤 작가네.’
뼈대는 전에 들었던 대로다. 죽은 재벌 3세의 몸에 조선시대 양반이 들어가서 취업준비생인 여주와 엮이는 내용인데 윤해연 작가 특유의 감성적인 부분이 더해졌다.
저승사자의 기억을 잃고 이승에 와서 혼란을 느끼던 남주는 몸에 밴 양반의 절도와 꼬장꼬장함으로 회사 일을 하다 사고를 치게 되고 그로 인해 여주를 만나며 점차 변해가는 과정에 젊은 세대의 현실적인 고민을 담았다.
전에 봤던 시놉은 남주와 여주의 감정선과 서로간의 생각의 차이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이번에는 코믹한 상황과 설정, 감칠맛처럼 더해진 사랑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무엇이 더 좋은가 하면 고를 수 없다. 꼭 무엇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그건 각자 취향의 차이일 뿐이다. 단, 어느 것이 시청률이 더 나올 것 같으냐고 묻는다면 우현은 두 번 생각하지 않고 후자의 것을 뽑을 것이다.
우현은 다 읽고 소은의 표정을 살폈다. 전에는 여주가 극을 끌고 갔다면 이건 남주가 극을 끌고 가야 한다. 극의 초점이 바뀐다면 당연히 분량이나 중심도 그녀보다는 남주에게 더 갈 수밖에 없다.
분명 다 읽었음에도 아무 말 없이 한참 동안 시놉을 바라보던 소은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남주는 누가 할지 결정 났어요?”
“아니요. 바뀐 시놉, 처음 보여드리는 거예요. 아직 소은씨를 제외하면 아무도 보지 않았어요. 그러니 천천히 결정하셔도 돼요. 어차피 이제 만든 거라…”
“할게요.”
소은이 윤 작가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말했다.
“네? 그렇게 빨리 결정할 필요는…”
“아니요. 이대로 가요. 전 좋아요.”
윤 작가가 다시 한 번 말리려 했지만 소은은 이미 바뀐 시놉에 마음이 간 것 같았다. 이렇게 되자 지금까지 표정 관리하던 우현의 마음이 급해졌다.
“그러지 말고 더 생각해보시죠? 보시면 아시겠지만 여주의 비중이 별로 없어서…”
“하겠어요. 더 안 떠보셔도 돼요. 계약은 강 실장님이 진행할 테니 세부 사항은 안 물을게요. 대신 한 가지만 여쭈어도 되나요?”
그녀의 물음에 윤 작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궁금한 건 물어 봐야죠.”
“시놉을 왜 바꿨어요? 전에도 좋았어요. 오히려 작가님의 세계가 더 분명하게 보였거든요. 그런데 이건 작가님 이름을 가리고 있었다면 윤 작가님 작품인줄 몰랐을 거예요.”
“언제까지 똑같은 작품만 쓸 수는 없잖아요. 재미도 없구. 나는 항상 그런 것만 쓰는 사람이 되니까. 그런데 지금까지는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나라는 사람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게 제 한계를 결정짓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조금 더 메이저하게, 조금 더 마이너하게… 그렇게 제 능력을 확장하고 싶어요.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최고의 작가 소리를 꼭 들어보고 싶거든요. 답이 됐을까요?”
이소은은 처음 윤 작가를 봤을 때보다 더욱 환하게 미소 지었다.
“고맙습니다. 저는 꼭 이 작품 하고 싶어요. 연락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래요. 연락드릴게요.”
상의도 없이 마음대로 결정해버린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강 실장은 아무 말도 못한 채 엉거주춤 일어났다. 강 실장이 전에 가수를 맡아봤었다고는 하나, 배우의 기를 감당하기는 힘들 거다. 특히 이소은이라면.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아, 김 대표님, 만나서 반가웠어요. 다음에 언제 술 한 잔 같이 해요. 남자가 다 지난 일 가지고 너무 꽁해있으면 매력 없어요, 후후”
우현은 하마터면 머리를 긁적이며 ‘하하, 그렇죠?’라고 할 뻔했다. 그만큼 저 미소는 맑고 예뻤다.
‘이제는 저 성질 좀 죽었으려나?’
은하와 붙어있으며, 그리고 많은 미인들에게 익숙해져있기에 가까스로 참아낼 수 있었으리라.
“어땠어?”
이소은 일행이 나가자 윤 작가가 급히 우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좋았어요. 생각했던 것보다 잘 나온 것 같아요. 특히 작가님 색깔이 죽지 않은 게 좋네요.”
“그래. 사실 뽑아내려면 더 빨리 뽑을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되면 내 존재감이 사라지는 것 같더라구. 그래서 어떻게든 나를 넣어보려고 했지. 김 대표가 잘 나왔다고 하니 안심이 되네.”
“별이 캐릭터도 좋더라구요. 비록 조연이긴 해도 색깔이 확실하고 너무 악역이 아니기도 하고.”
“이거 왜 이래? 나 윤해연이야. 뻔한 막장 스토리 싫다구. 어쨌거나 이젠 홀가분한 마음으로 제작사를 찾아가도 되겠어. 제작실장이 날 보면 죽이려고 들겠지?”
“감히 윤 작가님을요? 시놉시스 보면 단박에 바뀔 겁니다. 그러니까 화내기 전에 일단 문 열고 시놉시스부터 던지고 들어가요.”
“그래야겠다, 호호호.”
윤 작가와 헤어지고 사무실로 돌아와 별이에게 연락해보니 이제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중이라고 했다. 무사히 오라는 말로 전화를 끊은 우현은 혼자서 연습하는 유니를 불렀다.
“곡 정했다. 이걸로 하자.”
우현이 웃으며 다섯 개의 곡 중에 하나를 선택했다.
“진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