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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 첫 미니시리즈 스타트!(4)
혹시 몰라 저녁시간으로 약속을 잡고 윤 작가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
“윤 작가님 지금 이소은 측에서 전화 왔는데요. 작가님 연락 안 된다고 난리 났어요. 제작진 측에서 우리 쪽과 계약했다고 말했나본데, 일단 약속 잡았거든요? 내일 저녁으로. 괜찮으시죠?”
“저녁? 그래, 저녁까지는 대충 시놉이 나올 것 같아. 그런데 나보다 김 대표가 시간이 돼? 한창 무대인사 돌고 있어야 하는 거 아냐?”
“그것 때문에 큰일 났어요. 빨리 로드를 하나 구해야 하는데 말이죠. 이렇게 일이 급하게 진행될 줄 알았으면 진즉 로드매니저 하나 구해놓는 건데…”
“아는 애들 중에 일 관둔 애 없어?”
“글쎄요. 한 번 알아봐야겠네요. 어쨌거나 내일 괜찮다는 거죠? 펑크 내지 말아요. 저는 오케이 한 걸로 알고 있을게요.”
“걱정하지 마. 시놉 완성 안 되면 그 전 시놉으로 밀고 나갈 테니까. 다음에 해야지 뭐.”
말은 저렇게 해도 분명 내일까지 만들어 올 것이다. 그 정도 능력과 근성은 있는 사람일 테니 그 자리까지 왔을 거다. 그런데 전화를 끊고 생각하니 문득 예전에 같이 일했던 친구 하나가 떠올랐다.
‘그 친구 아직도 관심이 있으려나?’
우현이 팀장을 거쳐 실장에 진급했을 때 은하의 로드매니저로 20대 중반의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들어온 적이 있었다. 원래 운동하던 친구였는데 부상으로 인해 다른 일을 찾을 수밖에 없어서 이런저런 일을 전전하다가 우연찮게 발탁됐었다.
회사가 쪼개지면서 그 친구는 퇴사했고 우현 역시 폐인처럼 살았었기에 그 친구도 자연스럽게 기억에서 지워졌는데…
우현은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서 별이를 무대 인사에 올린 후 핸드폰 번호를 뒤적이다가 박상준이라는 이름을 발견했다.
삐, 삐, 삐.
‘안 받네…’
우현이 끊으려던 찰나,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반가워요. 혹시 기억날까요? 나 김우현 실장인데.”
“어? 아, 예. 기억납니다, 김 실장님. 안녕하세요. 그런데 어쩐 일로…”
“미안해요. 회사가 망하고 나도 정신이 없어서 연락도 못 했네요. 그 동안 뭐하고 지냈어요? 다른 매니지먼트사에 입사했어요?”
“아닙니다. 그냥, 이런저런 일하고 지냈습니다.”
운동하던 친구라서 그런지 항상 말을 다나까 체로 사용했었는데 지금도 변함없는 것 같다.
“그래요? 혹시 지금도 매니저에 대한 꿈 가지고 있어요?”
우현은 확실히 기억한다. 그가 회사에 들어오며 톱스타를 자신의 손으로 키워내고 싶다고 했던 말을.
“매니저 말씀입니까? 혹시 다른 회사에 들어가셨습니까? 그 때, 마이더스에서 실장님을 그렇게 원했다고 들었는데 그냥 다 그만두셨다고만 들어서…”
“회사 세웠어요. 이름도 파인 엔터로 했구요. 은하는 마이더스로 보냈지만 제 2의 유은하를 키우고 있어요. 혹시 들어봤어요? 김별이라고… 얼마 전에 영화 ‘밀실’에 출연하기도 했는데.”
“어? 알고 있습니다.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봤습니다. 김별 매니지먼트 하시는 겁니까?”
“맞아요. 김별 말고도 가수도 있고 작가도 있어요. 그래서 로드매니저가 필요한데 알다시피 연예인 아무한테나 못 맡기는 거 알죠?”
사실 채용공고를 내서 아무나 뽑고 싶지만 혹시 사고라도 날까봐 되도록 이 바닥에서 일해 본 사람을 뽑고 싶었다.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그의 어조에 힘이 실렸다. 우현은 그가 로드매니저에 관심이 있음을 느꼈다.
“그럼 한 번 같이 일 해볼래요? 조건은 전보다 더 쳐줄게요.”
“그럼 언제부터 출근하면 됩니까?”
“지금 하는 일은 언제 끝나요?”
“노가다라서 그냥 안 나가면 됩니다.”
“좋아요. 그럼 문자로 위치 찍어줄 테니까 아침에 나올 수 있어요? 일이 좀 급하게 돼서 아침부터 움직여야 할 것 같은데.”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박상준이 같이 일하게 되면 우현이 움직이는데 한결 도움이 될 거다.
로드매니저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 때도 책임감이 뛰어나서 결코 스케줄을 어긴 적 없던 친구였다. 회사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면 지금쯤 팀장이 되어 있을지도 모를 정도로 괜찮았던 친구라 안심이 된다.
인천과 부평을 돌아오는데 우현이 새로 로드매니저를 구했다고 하니 별이가 눈을 휘둥그레 뜬다.
“그럼 이제 대표님하고 같이 못 다니는 거예요?”
“한 몇 달은 같이 다닐 거야. 그 친구도 사람들이랑 얼굴도 익히고 동선도 파악해야 하니까. 더구나 네가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필요하잖아. 그러니 걱정하지 마. 단지 내일 하루만큼은 그 친구랑 둘이서 무대 인사 갔다 와야 할 거야.”
“힝… 불안한데…”
“불안해하지 마. 그 친구 아주 초보 아니야. 은하 데리고 몇 달 일해본 적 있어.”
“그래요? 너무 무섭게 생기고 그런 건 아니죠?”
“다행히도 인상이 좋아. 운동을 하긴 했는데 자신이 운동 했다고 밝히지 않으면 사람들이 모를 정도로. 체격은 건장한 편인데 항상 웃는 얼굴이고 피부도 좋아서 은근히 인기도 많아.”
“잘 생겼으니까 참으라는 말이죠? 알았어요. 저 그런 거 잘 해요.”
그렇게 별이와 농담 따먹기를 하며 사무실로 복귀했다. 별이는 유니와 오랜만에 만나 근처 음식점에 밥 먹으러 간다고 나갔고 우현은 사무실에 앉아 다 못 들은 가이드 음원을 들었다.
사실 OST를 노리기 위해서는 일단 극의 분위기를 알아야 한다. 아무리 좋은 멜로디라고 해도 극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못하면 피디가 까는 게 당연하다. 따라서 우현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대략 5개의 멜로디를 취합했다.
그 중에서는 신인 여가수가 데뷔하기에 부적합해 보이는 멜로디도 있었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윤 작가의 시놉시스가 나오면 어떤 멜로디가 어울릴지 대강 윤곽을 드러낼 거다.
다음 날 아침, 샵에서 별이의 헤어, 메이크업이 끝날 때 쯤 우현이 기다리던 남자가 도착했다.
“오랜만입니다, 실장님.”
180이 넘는 큰 키를 자랑하는 그 청년은 한 때 태권도 꿈나무로 무럭무럭 성장했지만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무릎을 다쳐 더 이상 운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항상 웃는 인상이 좋았는데 지금도 특유의 눈웃음을 지으며 우현에게 90도로 허리를 구부렸다. 우현은 반갑게 그를 맞이하고는 밖에 주차된 차로 그를 이끌었다.
“반갑다. 잘 지냈어? 몸도 안 좋은데 무슨 노가다야?”
“그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실장님이 아니신 거죠?”
“그래, 이제는 파인 엔터 대표다.”
“예, 그럼 앞으로 대표님으로 부르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일정이 어떻게 됩니까?”
우현은 오늘 돌아야 할 별이의 스케줄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에게 주의해야 할 사항을 일일이 설명하는데 샵에서 별이가 걸어 내려왔다.
“인사해. 앞으로 우리 회사 로드매니저할 친구야. 이름은 박상준. 여기는 알지? 김별.”
“안녕하십니까! 박상준입니다.”
“안녕하세요, 김별이에요. 말 놓으세요. 저보다 나이 많으시던데…”
“그건 천천히 하겠습니다. 일단 타십쇼.”
그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항상 예의가 발라 좋았다.
“조심해서 갔다 와.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바로바로 전화 하고.”
“이 분 진짜 믿을 수 있는 거죠?”
별이가 우현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그녀가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기에 우현이 웃으며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 저 녀석 아이 때문에 딴 짓을 하고 싶어도 못 해. 그리고 혹시 몰라서 위치추적 어플까지 깔아놨어. 걱정하지 마.”
상준이는 이제 26살이지만 어엿한 가장이다. 우현이 실장을 달았을 때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았고 그 때 우현이 축하한다며 50만 원권 백화점 상품권을 준 적이 있었다. 물론 그 때는 우현이 한창 돈을 잘 벌 시기라서 그랬다.
별이를 보내고 난 뒤 우현은 곧장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취합했던 5곡을 유니에게 들려주고 그녀의 느낌을 물었다.
“이건 뭔가 사극에 어울리는 느낌인데요?”
“맞아. 그런데 네 목소리 사극하고 잘 어울려.”
“제가요? 전혀 모르겠는데?”
“보통 사극하면 굵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잘 어울릴 거라 생각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아. 어떤 반주를 가지고 부르느냐가 관건이지. 너는 잘 모르겠지만 네 목소리에는 뭔지 모를 애절함이 아주 희미하게 깔려있거든. 됐고, 그럼 다른 음악 들어보자.”
그렇게 모든 곡을 들려주고 하나하나의 느낌을 살려 유니만의 보컬로 다시 가이드를 잡았다. 물론 본격적인 가이드 녹음은 녹음실에서 하는 것이기에 연습실에서는 느낌만을 살려보는 것이다.
그렇게 몇 시간을 보내니 윤 작가에게서 연락이 왔다.
“어디로 가면 돼?”
“문자 찍어드릴게요. 지금 작가님 계신 오피스텔에서 출발하신다고 가정하면 바로 움직이셔야 해요.”
“걱정하지 마. 나 지금 신발 신고 문 열었다.”
“예. 너무 밟지는 마세요. 그러다 사고 납니다.”
웃으며 전화를 끊은 우현은 유니 혼자 연습하게 두고 사무실을 나왔다. 차를 별이가 타고 다니니 그는 전철을 타고 약속장소로 향했다. 목적지는 고급 한정식집. 이곳은 우현이 예약한 게 아니라 이소은 측에서 예약한 것이기에 마음은 한결 편했다. 돈이 안 나가니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강상섭입니다.”
예약된 방으로 향하니 이미 그곳에는 일남일녀가 와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는 당연히 그와 통화했던 매니저고 여자는 바로 그 이소은이다.
“늦었습니다. 김우현입니다.”
“늦기는요. 아직 10분 전인데요. 일단 앉으시죠.”
서로 명함을 교환한 둘은 자리에 앉았다. 우현이 자리에 앉고 나서야 눈을 마주친 이소은이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안녕하세요.”
초승달 같이 유려한 눈썹과 호수 같이 맑은 눈, 하얀 피부와 가녀린 턱선, 그리고 가만히 있어도 뿜어 나오는 도도한 아우라. 천생 여배우다.
“반갑습니다.”
보통 이런 자리에서는 빈말이라도 팬이었네, 실물이 훨씬 예쁘네 하는 말을 건넨다. 하지만 우현은 간단한 인사만을 건넬 뿐이니 그녀의 미간이 살짝 꿈틀거렸다. 우현도 그것을 봤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강상섭 실장은 둘이 벌써부터 기싸움에 들어간 것을 눈치 챘는지 우현에게 말을 걸며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왜 우현과 이소은이 기싸움을 벌이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더군다나 이소은 입장에서 우현은 윤 작가 소속사의 대표 아닌가? 그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 것이 눈에 들어왔다.
우현도 그에게 적당히 맞춰주며 윤해연 작가가 오기를 기다리니 약속시간에 딱 맞춰서 문이 열렸다.
“미안해요. 내가 좀 늦었죠?”
“어머, 작가님 너무 뵙고 싶었어요.”
두 손을 맞잡고 환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은 진정 TV에서만 보던 여신 그 자체였다. 어쩜 저렇게 청순하고 러블리 할 수 있는지… 세상은 참 불공평한 것이라 다시 한 번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