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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 첫 미니시리즈 스타트!(3)
“윤 작가님?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목소리가 왜 그래? 술 마셨어?”
윤 작가는 자정이 지났는데도 목소리가 쌩쌩하다. 하긴 작가들은 보통 야행성이라 지금 시각이 한창 일할 시간일지도 모른다.
“아, 네. ‘밀실’ 팀이랑 무대인사 돌고 나서 한잔했어요.”
“나 때문에 잠깬 거야? 미안해서 어쩌지?”
“아니에요. 방금 들어 온데다 인터넷으로 기사 좀 보고 있었어요.”
“영화 잘 나왔다고 기사 나온 거 나도 봤어. 축하해.”
“하하하.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지금 전화하신 거 보면 뭔가 떠오른 게 있었던 거예요?”
“응.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서 맞춰보긴 했는데, 이게 재미있으려나 모르겠어.”
드라마 작가의 자존심은 톱스타 여배우 자존심 못지않다. 생각해보라. 자신의 글 몇 줄이 회당 몸값 수천만 원의 배우들을 물에 빠뜨리기도 하고 뺨을 얻어맞게 하기도 한다. 자존심이 안 셀 수 없다.
그럼에도 자신의 말에 따라 생각을 바꿔준 것에 우현은 진심으로 그녀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일단 말해 보세요. 어떤 거예요?”
“원래 내용이 대학을 졸업한 여대생이 취업과 결혼을 준비하면서 겪는 이야기잖아? 원래는 남주가 같은 학교 다녔던 학생인데 이걸 재벌 3세로 바꾸는 거야. 지금 뻔하다고 생각했지?”
“뻔하기야 하죠. 한두 번 나온 소재는 아니니까. 소재라고 하기도 뭐할 정도죠.”
“맞아. 그런데 그 재벌 3세가 나쁜 짓을 저질러서 죽어버려.”
“죽어요? 다이?”
“응. 그리고 그 몸에 조선 시대 양반이 들어가는 거야.”
우현은 그제야 흥미가 동했다.
“무슨 사연으로요?”
“그 양반은 사실 조선 시대 때 충분히 장수를 누릴 사람이었어. 그런데 저승사자의 실수로 그만 죽어버리고 만 거지. 이것도 뻔한 거잖아? 그런데 염라대왕이 저승에서 공덕을 쌓으면 다시 이승으로 보내준다고 한 거지. 그래서 저승사자의 일을 하면서 공덕을 쌓고 나서 재벌 3세가 죽자 그의 몸속으로 들어가.”
“사체가 훼손되면 안 되는 죽음이어야겠네요.”
“디테일은 나중에 얘기하자. 어쨌거나 그렇게 재벌 3세의 몸으로 들어간 양반이 여주를 만나게 되면서 겪게 되는 로맨틱 코미디지. 별이는 그런 재벌 3세와 약혼녀인 관계야. 어때? 그림이 될 것 같아?”
로맨틱 코미디에 개연성은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건 남주와 여주의 감정선이 얼마나 명확하고 예쁜가가 중요하다.
“확실히 남주가 튈 것 같긴 하네요. 그런데 이거 남주가 연기 못하면 드라마 확 죽어버리겠는데요? 표정은 물론이고 발성도 좋고, 톤도 좋아야 하는데… 이번에 미팅하자는 걔는 좀 힘들지 않을까요?”
“알아. 그래서 김 대표랑 만나고 난 후에 찜찜해서 미팅 일정 나중에 잡자고 했거든. 잘 됐지. 시놉 다시 만들 때까지 캐스팅 디렉터한테 일정 올 스톱 시킬 거야.”
“제작사 측은 뭐라고 안 해요?”
윤해연 작가가 진행하는 드라마는 도마뱀미디어라는 대형 외주제작사에서 만들려고 한 것인데 그녀가 무작정 스톱시켜 버리니 걱정이 안 될 수 없는 것이다.
“제작 실장한테 딱 삼일만 시간을 달라고 했어. 시놉은 이틀이면 만들 수 있으니까 그 때 다시 이야기해봐야지.”
“아무리 윤 작가님이라도 이미 진행되는 걸 막 바꿔도 되는 거예요? 잘하는 건지 모르겠네. 어쨌거나 시놉 잘 뽑아야겠는데요? 어설프면 괜히 윤 작가님 이력에 타격 입을 수도 있어요.”
말은 안 해도 분명 제작사 측이랑 몇 번 ‘하네’, ‘못 하네’ 난리가 났을 거다. 그럼에도 자신에게 아무 말 안 하는 걸 보면 그녀의 뚝심도 대단했다.
“김 대표가 별로라고 하면 전에 줬던 시놉으로 갈 거야. 일단 수정된 시놉 보고 결정하자.”
“이럴 거면 저랑 미리 계약하지 그랬어요.”
“은하 그 망할 것이 김 대표 얘기를 얼마 전에 알려준 걸 어떡해! 내일 전화할게.”
빽 소리 지른 윤 작가는 전화를 끊어 버렸고 우현은 피식 웃었다. 누구나 최고가 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그것을 위해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다음 날은 역시나 새벽부터 서둘러 부산으로 향했다. 서울에 이은 두 번째 도시는 부산으로 선정했기 때문에 부산 영화관 일대를 돌며 무대 인사를 가졌다.
‘밀실’의 연이은 호평에 관객이 줄지 않고 더 늘어나고 있다는 영화관 관계자들의 말에 주연 배우들과 최 감독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소연씨 이번 영화 러닝개런티 기대해도 되겠어?”
예정됐던 무대 인사를 마치고 내려오며 최 감독이 강소연을 슬쩍 떠봤다.
“감독님도 마찬가지죠. 이번에 집 한 채 마련하는 거 아니에요?”
“그 정도 되려면 천만 들어야지. 그런데 공포, 스릴러로는 천만 힘들다는 거 알잖아. 500만 정도면 만족한다. 손익분기점이 200만이니까 그 정도면 만족해. 집 한 채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동안 날린 돈이랑 이곳저곳에서 빌린 돈은 메울 수 있을 것 같아.”
“아휴, 우리 감독님 불쌍해서 어째. 차기작 빨리 찍으셔야겠네.”
“다음 작품도 같이 할까?”
“시나리오 먼저 보구요. 그때도 이번만큼 좋으면 같이 해야죠. 그나저나 별이도 러닝개런티 계약했니?”
강소연의 시선이 뒤를 따라오던 우현과 별이에게 향했다. 별이는 그녀의 시선에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저는 잘 몰라요, 선배님.”
별이의 손사래에 우현이 끼어들었다.
“하하, 하긴 했는데, 한 명당 30원 정도라서 그렇게 크지 않아요.”
러닝개런티는 영화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개 손익분기점을 기준으로 그 이상의 관객이 들었을 때, 핵심 주연일 경우 관객 1명당 100원 정도이며 핵심 조연일 경우 1명당 50원 정도로 계약하게 된다. 그래서 손익분기점에서 100만 명이 더 들게 되면 핵심 주연일 경우 1억 원의 추가 보너스가 지급된다.
문제는 이런 계약 대부분이 감독과 주연 배우들에게만 집중되어 있으며 가장 고생하는 스태프들은 제외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 감독은 자신의 영화가 천만을 넘으면 스태프들에게 보너스를 지급하겠다고 했고 결국 그 영화는 천만을 넘었다고 한다.
“그렇구나. 좀 많이 하지 그랬어요?”
애석한 듯이 말했지만, 그녀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그녀와 똑같은 금액으로 계약했다면 감독과 제작사를 뒤집어엎을 게 분명하니까.
“다음에 좋은 기회가 있겠죠. 그나저나 소연씨는 다음 작품 결정하셨어요?”
“이번에 양석진 감독 작품 이야기가 나와서요. 어떤 것 같아요?”
“양석진 감독 작품이면 시나리오 볼 필요도 없네요.”
대한민국에서 알아주는 액션 영화 감독인 양석진은 지금까지 손익분기점 달성을 실패한 적 없는 대단한 감독이다. 양석진 감독 특유의 액션 시퀀스는 한국 액션 영화의 신기원을 이루었다는 말까지 들었다. 단지 아쉬운 게 있다면 손익분기점은 넘는 데 반해 완전 대박 작품은 없다는 것?
“그래 봤자 남자 영화잖아? 또 비련의 여주인공이나 약해빠진 여자로 나오겠지. 난 그런 거 싫어.”
“그래도 양석진 감독 정도면 흥행은 보장이죠. 그리고 전작인 ‘방콕 익스프레스’에는 여주가 가장 핵심 인물이었잖아요.”
“이번에도 그런 역할이 있을까?”
“솔직히, 없어도 해야죠.”
우현의 말에 그녀도 공감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렸다. 천만 영화 한 번 찍는 게 소원인 그녀로서는 양석진 감독의 차기작을 놓치기 싫을 거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세 시간 만에 올라와 별이를 집에 데려다주고 고시원에 도착하니 벌써 밤 1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바빠서 좋긴 한데 몸이 녹초가 되니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도 그냥 자고 싶었다.
“로드를 구해야 해. 로드를…”
유니 싱글이고 뭐고 로드매니저부터 구해야 한다고 되뇌면서도 메일로 도착한 가이드 음원을 청취했다. 대략 다섯 명의 작곡가에게 곡을 보내달라고 해서 그런지 그의 메일에는 무려 100개가 넘는 곡이 들어 있었다.
솔직히 유니의 작곡 실력이 훌륭하기 때문에 그녀의 곡을 바탕으로 싱글을 제작해도 되지만 아직 다듬어야 할 부분이 많았다. 기술적인 면은 엔지니어가 보완해줄 테지만 아직 음악 공부를 제대로 해본 적 없는 그녀이기에 기술만으로 커버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고 어쩔 수 없이 다른 작곡가의 곡을 받는 걸로 결정했다.
싱글제작은 뮤직비디오를 만들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천만 원 이하로 굉장히 저렴하게 할 수 있다. 정규앨범 제작에 필요한 자금이 보통 8천~1억 원 정도의 금액인 걸 생각하면 상당히 저렴한 편이다. 중소 기획사들이 디지털 싱글에 목을 메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일단 곡을 누구에게 받느냐에 따라서도 금액이 천차만별로 달라지는데 대한민국에서 이름난 대표 작곡가 같은 경우는 한 곡에 천만 원을 호가한다. 당연히 우현의 재정 상태로는 절대 불가한 선택이다.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작곡가의 곡은 곡당 백만 원 정도면 얻을 수 있다. 그걸 바탕으로 편곡을 하고 녹음실을 섭외한 후, 세션 녹음과 보컬 녹음을 하고 엔지니어가 잘 다듬어야 한다. 이것에 들어가는 비용만 최소 수백만 원이다. 여기에 듀엣으로 피처링을 입혀야 한다면 과정은 더욱 복잡해진다.
유니 같은 경우는 정규앨범이 아닌 디지털 싱글 제작을 목표로 하고 있고 내심 이번 별이가 출연하는 드라마의 OST를 노리고 있기 때문에 의상이나 안무 컨셉을 잡을 필요가 없어서 편했다.
한 마디로 곡만 잘 잡으면 많지 않은 비용으로 아주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야밤에도 우현이 졸린 눈을 비비며 멜로디를 듣는 거다. 그렇게 멜로디를 듣다 잠에 빠져 들어 아침에 일어나니 귀에는 이어폰이 꽂힌 채였다.
“아… 씨 하나도 기억 안 나네.”
잠에 취해 비몽사몽의 상태로 음악을 듣다보니 뭐가 어땠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당일 예정된 무대인사가 인천이었기 때문에 이른 시간에 마무리될 것이라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아, 대표님 진짜 힘들겠다. 이거라도 드세요.”
싹싹한 별이가 우현이 힘들까봐 약국에서 산 자양강장제를 내밀었다. 흐뭇한 마음에 그것을 먹고 이동하는데 전혀 모르던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예, 김우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김우현 대표님. 저 이소은 매니저 맡고 있는 강상섭 실장입니다.”
“아, 예. 강 실장님, 안녕하세요.”
“이번에 윤해연 작가님께서 파인 엔터로 들어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저에게…”
“다름 아니라 이번에 저희 소은이가 윤 작가님 차기작 시놉시스를 받고 미팅을 하려고 하는데 윤 작가님이 연락이 안 되고 있습니다. 보조 작가도 마찬가지구요. 제작진 측에 알아보니 캐스팅디렉터도 기다리라는 말 뿐이고… 윤 작가님께서 파인 엔터와 계약했다고 들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전화 드렸습니다.”
아직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건 아닌데 이미 소문이 난 것 같다. 아니라고 할 수 없으니 난감했다.
“네. 그런데 제가 작가님과 계약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전화를 안 받으시는 건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연결해 드리기는…”
“아, 오해하실 거 같아 말씀드리는데, 저희 쪽으로 시놉시스가 정식으로 전달된 거였습니다. 우리가 먼저 컨텍한 것이 아니었거든요.”
이러면 빼도 박도 못한다. 시놉 수정한다고 말했다가는 윤 작가를 또라이 취급할 거다. 완성도 안 된 어설픈 시놉을 들이밀었다고 말이다. 이제는 같은 식구인 윤 작가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저들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시군요. 그럼 내일 어떠십니까? 윤 작가님 모시고 가겠습니다.”
“소은이랑 같이 말이죠?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