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34] 공중파의 파급력(3)
“아이고 작가님, 그 가정법 안 좋습니다. 그 인연 쭉! 가야죠. 조연으로 시작할 겁니다.”
“그래. 일단 얼굴 좀 보자. 내일 시간 되지?”
“윤 작가님이 만나자는 데, 없는 시간도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하여튼 말은… 그럼 내일 봐.”
“네! 제가 괜찮은 식당 하나 잡아놓고 문자 보내겠습니다. 그럼 들어가십쇼! 사랑합니다!”
“호호호, 그래.”
전화를 끊은 우현은 소리 죽여 환호성을 질렀다. 말이 조연이지, 작가가 직접 전화했다는 건 여주를 받쳐주는 서브여주로 낙점했다는 말이다.
혹시나 해서 그녀를 비롯한 몇몇 작가들에게 ‘밀실’의 VIP티켓을 구해 보내줬더니 별이를 관심 있게 본 것이 틀림없었다.
우현은 룰루랄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예전에 자주 갔던 식당을 섭외했다. 1인당 십만 원 이상 하는 초밥집으로 예약하고 나서 그녀의 전작을 다시 한 번 살폈다.
대개 로맨틱 코메디를 잘 쓰는 작가들은 주연뿐만이 아니라 조연들의 캐릭터를 잘 잡는다. 그래서 주연이 간간히 힘이 빠질 때 매력적인 조연들로 화면을 잘 채우기 때문에 시청률을 꽉 잡고갈 수 있다. 우현이 조연임에도 두 번 생각 안하고 결정하는 것이 이것 때문이다.
우현이 개인적으로 대한민국 로코 퀸으로 생각하는 작가는 김은선 작가로, 김 작가는 캐릭터면 캐릭터, 설정이면 설정, 대사면 대사 뭐 하나 빠질 게 없는 최고의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결코 실패한 드라마가 없으며, 만들었다 하면 모든 화제를 자신의 드라마로 끌어 모으는 엄청난 힘을 가진 작가다. 우현에게 있어 김 작가 드라마의 여 주인공은 레이드로 치면 마지막 보스쯤 될 것이고 등산으로 치면 가장 높은 산이자 반드시 정복해야 할 산이다.
혹자는 박지원 작가를 최고의 작가로 꼽기도 한다. 여배우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김은선 작가보다 뛰어나다는 말도 듣는다. 우현도 박지원 작가를 인정하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녀를 김은선 작가와 동급으로 놓지는 않는다.
그녀가 대박 냈던 드라마인 ‘별에서 온 사랑’은 기본적으로 표절 의혹을 받았고 결국 원작자와 합의하며 그 의혹이 완전히 틀린 것만은 아니었음을 드러냈다. 또한, 김수훈의 압도적 비주얼과 전지수의 망가지는 연기가 빛을 냈지, 대사 자체가 참신한 것도 아니었다.
결국 그녀의 차기작인 ‘방송국 이야기’는 온갖 톱스타들을 모아놓고 엉성한 이야기를 만들어 최고 시청률은 10% 중반대로 중박을 쳤었다. 캐스팅된 인물 면면을 보면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다. 괜히 여주를 맡은 마이유만 온통 욕을 먹었지만, 전에도 말했듯이 진정 뛰어난 작가라면 여주가 아무리 발연기를 보인다 해도 작품을 망가지게 두지 않는다.
그리고 ‘인어공주의 전설’ 또한 표절 의혹을 받으며 스리슬쩍 묻혀버리고 말았다. 시청률은 높았다고 항변할 수도 있지만 하필 같은 시기에 방영했던 김은선 작가의 ‘도깨비 전설’에 비해 화제성은 처참하다고 할 정도로 낮았다.
반면, 윤해연 작가는 비록 김은선과 박지원 작가에 비해 엄청난 화제작을 쓴 것은 아니었지만 공중파에서는 항상 10% 중반 이상을 찍어왔으며 인터넷을 비롯한 화제성 면에서는 동시기의 타 드라마를 압도해왔다.
개성 넘치는 캐릭터에, 김은선 작가와는 달리 재벌이 나오지 않는 설정은 젊은 연령대의 시청자들이 언제나 반길 수밖에 없었다.
아직 대본은커녕 시놉도 본 적은 없지만 우현은 소풍을 앞둔 아이들처럼 어서 빨리 내일이 오기를 바랐다.
유니가 출연하는 ‘복면노래왕’을 기다리면서 인터넷을 검색하니 별이에 관한 내용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다. 인터넷의 특성상 누굴 욕해야 할 상황이 되니 들불처럼 번져 일어났지만 인지도가 떨어지는 한계 때문에 어느덧 사그라지고 만 것이다.
우현은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어쩌면 일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으로 그녀에 대한 홍보와 이미지 향상은 되었는지 몰라도 멤버들과 불화가 있었다는 사실은 언제까지나 그녀를 따라다닐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10분 전이에욧!]
유니에게서 문자가 왔다. 부모님께는 모른 척 비밀로 하고 본방 시청 준비를 마친 그녀가 긴장하고 있을 걸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우현은 사무실 TV앞에 앉아 ‘복면노래왕’을 시청했다. 실제로 무대에서 봤을 때도 그랬지만 방송으로 봐도 팅커벨과 후크선장의 대결은 막상막하였다. 적당히 편집된 연예인 판정단의 호들갑이 아니더라도 시청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쉬운 패배 이후 두 번째 노래를 부르고 나니 유니의 복면이 벗겨졌다. 화면으로 보니 그녀 특유의 귀여우면서도 섹시한 듯한 모습이 더욱 두드러졌다. 생각보다 화면발이 더 좋았다.
그녀와 판정단과의 대화는 편집된 부분 없이 전부 방송을 탈 수 있었다. 그 동물소리를 내는 어쭙잖은 개인기까지 만큼은 편집되기를 바랐지만 말이다.
지금쯤 유니의 집은 잔치 아닌 잔치를 벌이고 있을 거다. 생각지도 못하게 공중파 대표 예능프로에 그렇게 오랜 시간 고생하던 딸이 나왔으니 얼마나 감격스럽겠는가? 부둥켜안고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있을 게 상상되니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우현은 사무실을 나와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사서 고시원으로 향했다. 세 평도 안 되는 좁은 공간. 빨래방에서 가져온 빨래 뭉텅이가 커다란 비닐에 싸여 있는 것을 보니 힘이 쭉 빠졌다.
누군가 그랬다. 아이돌을 키우는데 해외스케줄이 잡혀서 비행기 티켓 값을 마련하고자 집을 팔았다는 이야기. 꼭 자신의 이야기인 것 같다.
별이의 영화 출연료와 웹 드라마 출연료가 들어오긴 했지만 아직 우현이 쓸 수 있을 만큼 회사가 안정되지 않았다. 사실 몇 푼 되지도 않는 돈이고.
별이가 윤해연 작가의 드라마에 낙점되면 얼마의 출연료를 받을까 생각하니 대략 회당 500~800만 사이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사실 그 정도로는 아직 많이 부족하니 당분간 이 고시원을 벗어나기 힘들지 않을까 싶다.
씻고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어 다 익을 때까지 기다리며 컴퓨터를 켰다. ‘복면노래왕’에 유니가 나왔으니 분명 기사가 뜰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역시나, 대형 포털사이트 연예란에 ‘팅커벨의 정체는 전 라라걸즈 멤버인 유니!’라는 기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시기가 참 절묘한 게, 바로 며칠 전에 그 난리가 나고 바로 오늘 유니가 ‘복면노래왕’에 모습을 비추면서 전 소속사와 현 소속사간의 일처리가 바로 비교됐다.
3장의 앨범을 내고도 공중파 예능에 얼굴 한 번 제대로 비추게 해주지 못한 전 소속사에 비해 회사를 옮긴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렇게 확실한 행보를 보여주니 연예계를 잘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전 소속사를 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이고…”
우현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으며 아직 음악방송에 얼굴도 내밀지 못 한 보배드림을 안타까워했다. 그 때 미용실에서 강소연을 보고 손을 부산스럽게 놀리며 인사하던 장면이 떠오르니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 바닥이 이런 곳이니 누굴 원망하겠는가? 다 본인 팔자인 것을.
어쨌거나 이것으로 얼굴을 알린 유니의 데뷔는 생각보다 빨리 준비를 해야 한다. 이 상태에서 시간이 너무 흐른 다음에 데뷔하면 또 다시 ‘그게 누군데?’가 된다. 물론 그 때도 OST를 통해 전략적으로 접근할 테지만 그래도 최대한 빠른 시기에 도전하는 게 맞다.
우현은 인터넷에 정신이 팔린 사이 불어터진 컵라면을 먹으며 곡을 받아야 할 작곡가들을 취합했다. 현재 소속사가 있는 작곡가들도 있겠고 회사 없이 혼자서 일하는 작곡가들도 있었다. 그 중에 유명하지 않은 작곡가 위주로 취합했다. 유명한 작곡가는 비싸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신없는 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이 되자 별이를 데리고 다시 정성껏 치장한 다음 미리 예약한 식당으로 향했다.
“진짜요? 진짜 윤해연 작가님 만나러 가는 거예요?”
별이도 윤해연 작가라는 말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가수만 했던 그녀도 윤해연 작가가 보통 작가가 아니라는 것쯤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응. 조연으로 쓰고 싶은가봐.”
“우와… 대박! 대표님 저 진짜 미니에 나오는 거죠?”
“진정해. 아직 결정된 건 없어. 오늘은 만나서 밥 먹으면서 이야기하는 자리니까.”
“그럼 전처럼 연기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안 해도 돼. 윤 작가님은 신인배우 안 쓰는 분이야. 카메라 돌고 있을 때 한 연기를 보고 판단하기 때문에 사석에서 연기 안 시켜.”
“아… 역시. 우리 대표님은 모르는 게 없으신 듯, 짱!”
“하핫! 야, 내가 모르는 게 있을 거 같냐? 그리고 윤 작가님과는 전에 같이 일한 적 있어서 잘 아는 거야.”
“은하 언니랑요?”
“응. 그 때도 지금처럼 은하가 신인이었거든. 장편 드라마는 그게 처음이었어. 그런데 그 드라마로 단박에 얼굴을 알렸지.”
“아! 기억나요! ‘쉐프와 스테이크’ 잖아요! 거기서 은하 언니가 레스토랑 직원으로 나왔었는데. 그거 맞죠?”
“맞아. 그 때 은하가 윤 작가한테 오케이 싸인 받고 펑펑 울었었지. 드디어 드라마에 출연하게 됐다고 말이야.”
“세상에… 은하 언니한테 그런 면이 있는 줄 몰랐어요.”
“걔 성격이 원래 좀… 폭이 큰 편이야. 그렇게만 알아둬. 그건 그렇고 가서 너무 오버하고 그러지 마. 대화는 주로 내가 할 거고, 너는 장단만 맞춰. 어차피 연기는 영화랑 단막극 통해서 어느 정도 봤을 거야.”
“그건 로맨틱 코메디가 아니잖아요?”
“웹 드라마도 찍었잖아. 마침 이번 주 월요일에 1회 풀렸으니까 그것도 봤을 걸?”
웹 드라마 방영시에는 포털사이트 위주로 홍보가 있긴 했지만 젊은 층 위주로만 알지 관심이 없는 이들은 알지 못 할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목표로 하고 있는 시청자가 국내가 아닌 중국시장이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우현도 별이와 같이 봤는데 기대했던 것만큼 괜찮게 나와서 충분히 만족스러웠고 CS 엔터테인먼트에서는 중국시장에서 조금씩 반응이 오고 있다고 했다.
“벌써 그렇게까지 봤을까요?”
“보통 작가들은 극의 중심이 되는 주연배우만큼은 꼭 자신의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을 쓰려고 해. 특히 잘 나가는 작가들은 아무리 돈이 많이 들어온다고 해도 연기 안 되는 아이돌은 잘 안 쓰려고 하지. 자신의 작품이 망가지는 걸 원하지 않거든. 그러니 장편 드라마 하나를 다 보는 것도 아니고 30분짜리 1회 보는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제 연기를 보고 마음에 들었나 봐요? 우히히.”
우현은 백미러로 좋아 죽는 별이를 힐끔 보며 그녀의 바람이 맞기를 바랐다.
식당에 도착해서 예약한 방에 들어서니 아직 윤 작가가 도착하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차분히 기다리고 있기를 10여 분이 지나니 문이 열리며 40대 초반의 여성이 안으로 들어섰다.
얼핏 보기에 수수하게 차려 입은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그녀의 옷과 액세서리 하나하나가 전부 명품인 것을 알 수 있다.
우현과 별이 용수철 튕기듯이 일어나 그녀를 맞았다.
“아이고! 어서오십쇼!”
“안녕하세요. 김별입니다.”
“알았으니까 앉아, 앉아. 김별씨, 반가워요. 나 윤해연이에요.”
그녀는 앉아서 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별이도 서 있다가 급히 앉으며 그녀의 손을 맞잡으며 깍듯하게 말했다.
“작가님 드라마, 항상 재밌게 보고 있어요.”
“그래요? 호호. 거짓말이라도 기분은 좋네.”
“거짓말 아니에요.”
“농담이에요. 그나저나 왠지 김 대표를 이렇게 보니까 자꾸 김 팀장이라고 하고 싶어지네? 예전 생각나. 한동안 폐인처럼 지냈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