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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 공중파의 파급력(2)
이혜림 리포터의 음성을 따라 화면은 얼마 전 문제의 기자가 썼던 기사내용을 확대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영화 ‘밀실’의 언론, 배급시사회의 영상이 흘러나왔다.
“김별씨가 활동했던 라라걸즈의 불화설이 흘러나온 건 바로 며칠 전, 영화 ‘밀실’의 언론시사회에서입니다. 김별씨가 라라걸즈의 전 멤버들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이 나오는데요. 당시 모 기자는 이 당시 상황을 부풀려 네티즌들이 김별씨에 대해 오해하도록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그로인해 김별씨는 안타깝게도 네티즌들의 악성 댓글에 시달려야 했는데요. 그런데 각종 커뮤니티를 통해서 해당 시사회의 동영상을 포함해 김별씨의 소속사와 모 기자간의 통화내용이 공개되면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화면은 우현이 커뮤니티에 올렸던 글을 비추다 다시 모자이크한 누군가의 얼굴로 옮겨왔다.
“그래서 저희는 이 일의 정확한 팩트를 알고자 라라걸즈의 소속사인 모 엔터테인먼트사를 찾았습니다.”
모자이크를 하고 있었지만 우현은 실루엣만 봐도 그가 이해명 팀장임을 알 수 있었다.
“사실 별이가 라라걸즈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거든요. 그럼 멤버들을 다독여주고 이끌어주고 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그런 부분이 부족한 것은 맞았어요. 자주 다투기도 했고. 특히 아이들을 강압적으로 다루려고 했던 부분이 있었죠.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성격이 조금 어두워서 걸그룹에 맞을까 하는 고민도 있었는데… 제 실수였던 것 같아요.”
그는 마치 자신의 실수였다는 듯 머리를 감싸 쥐었고 그걸 본 우현은 미소 지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새끼… 네가 연기를 해라.”
이해명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김별이 소속사를 옮긴 뒤로는 전 멤버들을 험담하고 다니며 자신과 멤버들 사이를 이간질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별이와 라라걸즈간의 대화내용을 증거로 제시했는데 전후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충분히 김별을 오해할 만했다.
“지금까지는 해당 소속사의 의견이었는데요, 이번에는 김별씨의 입장을 들어봐야 했습니다. 그런데 김별씨의 소속사는 일이 커지기를 원치 않는다며 한사코 입장표명을 거부하다가 사태가 생각한 것보다 커지자 저희에게 녹음 파일 하나를 건네주었습니다. 저희가 들어본 그 내용은 상당히 충격적입니다. 같이 들어보시죠.”
화면은 아무 의미 없는 푸른 바탕으로 바뀌고 아래에 자막이 깔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마치 그 방송사의 대표 시사고발 프로인 ‘그것을 알아야한다’를 떠올리게 했다.
우현이 이혜림 리포터에게 건넸던 녹취내용이 편집과정 없이 그대로 흘러나왔다.
솔직히 우현은 약간의 우려를 하고 있었다. 별이가 대체 뭐라고 이렇게까지 일을 벌렸을까? ‘연예계 현장’을 보는 시청자들은 별이의 얼굴도 처음 보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런데도 끄집어내서 파헤치려고 했다는 건 분명 유디 엔터와 ‘연예계 현장’의 피디가 끈이 닿아있으니 저렇게까지 했을 거라고 짐작됐다.
그 끈이 어느 정도로 단단한지를 알지 못했기에 걱정했는데 지금 보니 별거 아니었던 것 같다. 여느 피디와 소속사의 관계처럼 술을 통해 몇 번 대접받은 것 정도? 옆에 여자 앉혀주고 술 먹여주니까 ‘내가 도와주겠다’ 했겠지.
이 바닥이 더럽기 그지없어서 소속사를 떠난 연예인 엿 먹이겠다고 동영상을 가지고 늘어지거나 사생활을 폭로하는 짓이 간간히 벌어지기는 해도, 피디 입장에서는 반대 증거가 확실하게 나오니 그걸 동조하기는 힘들었을 거다.
“지금까지 양측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저희 입장에서는 누가 잘못했다고 말할 수 없는 입장이기 때문에 아무쪼록 원만히 마무리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불난 집에 한창 부채질한 것도 모자라 기름까지 끼얹어 놓고는 불이 꺼지기를 바란다니 웃기지도 않지만 어쨌거나 우현이 원했던 건 모두 이루어졌다. 아무 입장 표명도 하지 않았지만 누가 보더라도 이건 대놓고 유디 엔터를 엿 먹이는 거나 다름없었다.
우현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느긋하게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시켜놓고 커뮤니티의 반응을 살폈다. 반응은 당연히 폭발적이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연예계 현장’의 보도내용을 요약해서 짤로 만들어 돌아다니고 있었고 그 밑에는 유디 엔터를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댓글들이 태반이었다.
짜장면을 다 먹었을 때는 포털에 기사까지 뜬 상태고 김별이라는 이름이 다시 한 번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찍는 기염을 토했다.
“대표님, 별이 언니 실검 1위 했어요!”
보컬 연습에 매진하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유니가 대표이사실로 다급히 들어오며 핸드폰을 흔들어댔다.
“알고 있어. 전에 네가 줬던 녹음 파일이 아주 큰 역할을 했어, 고마워.”
“네? 그게 왜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를 위해 우현이 사건의 처음부터 결말까지 상세히 설명해줬다. 유니는 그의 설명을 들으면서 표정이 점차 좋아졌지만 마지막에 이르자 시무룩한 얼굴이 됐다.
“왜? 마음에 안 들어?”
“이제 유디 엔터 망하는 거 아니에요?”
“아마도 이제 힘들겠지?”
우현은 웬만해서는 남의 밥줄 끊는 짓은 안하려고 했다. 하지만 김별과 유니의 목줄을 죄어오는 그들의 행태를 용납할 수 없었고 이제 유디 엔터는 이 바닥에서 당분간 밥 벌어먹고 살기 힘들게 됐다.
웃긴 건 유디 엔터의 돈을 받고 기사를 써준 그 문제의 기자는 아무 피해가 없을 것이라는 거다. 누구도 기자의 이름을 알려하지 않을 것이고 연예 매체는 특종에 항상 목말라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새로 시작하는 보배드림 애들은 이제 끝난 거네요.”
눈물을 글썽이는 유니를 보자 마음이 아파왔다. 유디 엔터가 새로 런칭한 걸그룹인 보배드림은 라라걸즈의 전 멤버가 속해 있기에 유니가 응원했을 것인데 또 다시 빛도 못 보고 망하게 생겼으니 그녀가 슬퍼할 만했다.
“미안해. 어쩔 수 없었어.”
“아니에요. 대표님은 어쩔 수 없었다는 거 알아요. 그냥, 한 번도 빛을 못 보고 사라져갈 애들이 불쌍해서 그래요.”
생각해보면 불쌍하긴 하다. 걸그룹 하나가 데뷔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 돈이 필요한지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바닥에서 양아치로 찍혀버린 이상 유디 엔터는 회사를 폐업하고 사명을 바꾸지 않는 한 재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소속 연예인들이 인지도가 있다면 상관없을 수도 있지만 이제 갓 데뷔한 신인들은 지원을 받지 못할 것이니 다른 회사로 옮겨야 할 것이다.
“그만 슬퍼하고 우리, 별이 실검 1위 한 거나 축하하자. 그리고 너 내일 ‘복면노래왕’에 나오는 거 알지? 내일은 회사에 나오지 말고 집에서 가족들이랑 같이 있어.”
“너무 티나지 않을까요? 항상 회사에서 연습했는데.”
“티 좀 나면 어떠냐? 그리고 너 매일 쉬지도 않고 연습했으니 하루정도는 목을 쉬게 해줄 필요도 있어.”
“알았어요.”
유니가 자신을 데리러 온 아빠와 함께 집으로 가고 나니 한적해진 사무실에서 마음이 헛헛해진 우현은 곧바로 집에 들어가기가 뭐해서 맥주 한 잔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후라이드 하나랑 5백 한 잔 주세요.”
가까운 호프집에서 치킨에 맥주를 마시는데 모르는 번호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밤 12시가 넘은 이 시간에 걸려온 전화라 보이스피싱 같지는 않아 얼른 받았다.
“여보세요?”
“아, 안녕하세요. 김우현 대표님 맞으시죠?”
“네, 그런데요? 누구시죠?”
“안녕하십니까? 마이더스 HQ의 정신규 실장입니다. 늦은 시간이라 실례될 줄은 알면서도 연락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들어본 적 있다. 우현이 은하를 데리고 있었을 때, 몇 번 이야기를 나눈 적 있으니까. 간단한 인사 정도였기에 큰 인상을 받지는 못했다.
“아니에요. 안 그래도 간단하게 맥주 한 잔 하고 있었어요. 어쨌거나 반갑네요. 그런데 무슨 일로…?”
“다름 아니라 유은하씨 관련해서 연락드렸습니다.”
“은하요? 무슨 일 있나요?”
“사실 저희 쪽에서는 은하씨가 김 대표님께 갈 줄 알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저희와 계속 일하겠다는 말을 들어서, 늦었지만 김 대표님에게 확답을 받고 싶어서 연락드린 겁니다.”
그럴 수 있다 싶었다. 가수들은 몰라도 A급 이상의 배우들은 아주 가끔 계약금, 계약 기간 없이 일하는 경우가 있기에 저들 입장에서도 정확한 사실을 듣고 방향을 정해야 할 필요성은 있었을 거다. 그런데 은하가 어떻게 자신에게 오려는 줄 알고 있었을까?
“네. 최소한 몇 년간은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아, 그렇군요. 쉽지 않은 결정하셨네요. 그리고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우현은 직감적으로 그가 무엇을 물어보려는지 알아채고 쓴 웃음을 지었다.
“네, 그럼요.”
“회사에서는 강소연씨가 이번 계약기간이 종료되면 다른 둥지를 찾을 거라는 이야기가 돈다고 하더라구요. 그 목적지가 김 대표님이라는 소문이 들려서요.”
“그런가요?”
“아, 물론 강소연씨와 계약하지 말라는 건 아닙니다. 단지 김 대표님의 진심을 알고 있으면 저희가 소연씨와의 계약과 관련해서 조금 더 수월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아시지 않습니까? 그냥 몸 값 높여보려고 그러는 경우도 많다는 거요. 김 대표님께서 진정으로 소연씨를 원하면 막지 않겠습니다. 은하씨 데리고 갈 수 있는데도 포기하신 거 알고 있으니까요.”
들어보니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제가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하시려구요?”
“그렇다면 강소연씨한테 계약금 더 주고 한 번 더 같이 하자고 해야죠, 하하하.”
“그럼 그렇게 하세요. 전 지금이 더 좋습니다.”
“진심입니까?”
“네, 진심입니다. 그러니 더는 유혹하지 마세요. 자꾸 마음 흔들립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끊겠습니다.”
이걸로 강소연에게 한 마디 들을지는 모르겠지만 간단하게 정리가 된 것 같다. 그녀가 오면 좋겠지만 쉽게 감당할 수 없는 여자다. 그녀를 받아들일 거면 차라리 은하를 받았을 거다.
다음 날, 아침부터 그의 메일과 전화로 별이를 캐스팅하기 위한 시나리오와 대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대개 웹 드라마나 영세한 규모의 단편영화, 뮤직비디오 정도였는데 말이다. 원치 않는 논란으로 이미지가 좋아지기도 했고 영화 ‘밀실’을 봤던 관계자들이 별이를 좋게 보면서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이미 방송 관계자들 사이에서 영화 ‘밀실’에 대한 이야기는 빼놓을 수 없는 주제가 되었다. 최 감독은 아마 좋아서 잠도 못 자고 있을 거다.
그러던 중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을 때, 우현은 지금까지 봤던 모든 시나리오와 대본을 치워버렸다.
“나, 김 대표 다시 봤잖아. 맨날 실실 웃으면서 다니길래 호군 줄 알았지 뭐, 호호.”
“아이고 윤 작가님. 그거야, 이 바닥에서 적 많이 만들어서 좋을 게 있습니까?”
대한민국 로맨틱 코메디 드라마계의 3대 작가를 꼽으라고 한다면 우현은 1초도 안 걸려서 세 명의 이름을 댈 수 있다. 김은선, 박지원, 그리고 윤해연 작가.
“하긴, 김 대표가 그렇게 다들 두루두루 친하니까 은하 고 기집애가 그 성깔에도 스태프들한테 욕은 안 먹지.”
“하하하.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뭘… 주연은 아닌 거 알지?”
“윤 작가님 작품인데요. 알죠. 은하도 조연으로 시작했지 않았습니까?”
“인연이란 게 참 묘해. 은하도 내 작품 조연으로 시작하더니 이번에는 김별씨도 내 작품 조연으로 시작할지도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