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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 공중파의 파급력(1)
솔직히 우현은 별이를 ‘연예계 현장’과의 인터뷰에 응하게 해주고 싶지 않았다. 물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하지 않겠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상황이 그렇게 쉽게 흘러갈 리가 없다.
우선 시선이 분산되는 것을 강소연이 원할 리 없다. 이 영화의 여 주인공은 분명히 강소연이고 별이는 신인배우일 뿐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대놓고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또한, 따로 대본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서 어떤 질문이 오갈지 알 수 없다. 별이가 숙련되게 대처하지 못한다면 무슨 곤욕을 지르게 될지 모른다. ‘연예계 현장’도 엄밀히 말하면 예능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이슈를 끌어 모으기 위해서라면 자극적인 보도를 하거나 민감한 질문을 던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기서 발을 빼면 저들이 자리에 없는 별이를 놓고 무슨 말을 지껄일지 알 수 없다는 것. 공중파라고 모두 선량한 말을 할 것 같지만 은근히 먹이는 말도 잘 하기에 방심할 수는 없다. 게다가 ‘연예계 현장’의 리포터를 퇴짜 놓는 건 해당 프로그램 피디와 작가를 까는 거나 다를 바 없다.
“그러시죠. 그런데 질문할 내용을 제가 미리 알 수 있을까요?”
우현은 그녀가 기분 나쁘지 않게 최대한 정중한 말투로 물었다.
“개봉 영화에 관련된 내용이죠.”
“아까도 상황이 상황이라고 말씀하셨으면서… 하하하.”
우현이 넉살스럽게 웃으며 채근하자 그녀도 어쩔 수 없는지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아, 사실 실제로 라라걸즈 멤버들과의 사이가 어땠는지 궁금하긴 해요. 그리고 멤버들과 연락은 하는지도 궁금하고…”
우현은 그제야 저 리포터의 의중을 알 수 있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30분 뒤에 시작인가요?”
“알고 계셨네요. 지금 다른 곳과 인터뷰 중이니까 30분쯤 뒤에 저희 차례가 올 거예요.”
“그럼 그때까지 대기시키겠습니다.”
우현은 집에 가려고 준비 중인 별이를 스탠바이 시키고 화장도 다시 고쳤다.
“저 추가 스케줄 생겼어요?”
“응. 이따가 ‘연예계 현장’ 팀이랑 인터뷰 있어. 원래 너 없이 하는 건데 그 쪽에서 너도 같이 하기를 원했거든. 그런데 문제가 있어.”
“뭔데요?”
“아무래도 그 쪽에서 너희 라라걸즈 전 멤버들을 찾아 인터뷰를 딴 것 같아.”
우현이 이혜림 리포터의 망설이는 눈빛을 보고 눈치챘다. 아무래도 라라걸즈와 김별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 팩트체크를 하겠다며 들쑤시고 다닌 것 같았다.
“저희 멤버들이요? 왜요? 혹시 그것 때문에 그런데요?”
“응. 아무래도 너희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어서 그런데, 혹시 너희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니?”
이 부분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파고들어야 한다. 멤버들 사이의 불화는 어떤 식으로든 좋은 결론이 나올 수 없다. 가까이서 보면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네티즌과 기자들은 꼭 누가 잘못한 것처럼 이야기한다.
“아니요. 제가 제일 언니였고, 우리끼리 전혀 문제없었어요. 오히려 일반인 친구들보다 훨씬 가까웠어요. 못 떠서 우리를 이해해줄 사람은 우리밖에 없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파인 엔터로 오면서 연락이 뜸해지긴 했고 결정적으로 윤정이랑 저를 회사로 다시 끌어들이려는 것 같기에 몇 마디 했던 건 있었지만…”
“그 때, 네가 다른 멤버들에게 유디 엔터에서 나오라고 했었잖아. 혹시 그 후에 어떻게 된 줄은 아니?”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주연이는 다시 유디 엔터랑 재계약한다는 이야기는 들려 왔는데 당사자와는 연락이 된 건 아니에요. 인스타를 보고 알았던 거라서…”
그녀도 예전 멤버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찝찝해지기 시작했다. 우현은 즉시 유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 갑자기 웬 전화예요?”
한창 보컬 연습에 매진하던 그녀는 다행히 전화를 받았다.
“혹시 전에 라라걸즈 멤버들이 너를 회유할 때 그들하고 전화통화하면서 녹음해두거나 한 거 있니?”
“네. 혹시 몰라서 녹음해 놓은 게 있긴 있어요.”
우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거 지금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지? 그거 나한테 좀 보내줘, 당장.”
말투에 담긴 다급함을 눈치 챘는지 그녀는 의문을 표하지도 않고 우현에게 바로 전송해주었다. 남은 시간을 체크하며 그것을 듣는데 묘한 이야기가 오간다.
“네가 그래서 멍청한 년인 거야. 그 코딱지만 한 데에서 널 띄워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것도 솔로로? 그게 말이 되는 소리니?”
“혹시 모르잖아. 그리고 대표님이 잘 해주셔. 예전 라라걸즈 때는 솔직히 대표님 얼굴도 제대로 본적도 없었기도 하고…”
“아휴. 대가리 빠가 같은 년. 회사가 작으니까 대표라는 인간이 하나하나 봐주지. 어쨌든 잘 선택해. 별이 언니 잘 되는 것 같지? 이제 곧 시궁창에 빠지게 돼있어. 우리 회사가 그 언니 잘 되게 그냥 둘 것 같니?”
우현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유니가 생각지도 못하게 아주 큰일을 했다. 자칫 잘못했으면 아주 어려운 싸움을 할 뻔했는데 의외로 쉬운 곳에서 일이 풀렸다.
그는 즉시 이혜림 리포터를 찾았다. 그녀는 이제 5분 앞으로 다가온 인터뷰를 준비하느라 메이크업 수정이 한창이었다.
“잠시 얘기 좀 할까요?”
“죄송한데, 지금 곧 촬영 들어가야 해서요.”
그녀는 바쁘다며 이야기를 거부하려 했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다.
“라라걸즈에 대해서 물어보려 하셨죠? 제가 드릴 얘기가 있는데요.”
“그거야 김별씨에게 들어도 되는 거 아닌가요?”
“그런가요? 그럼 그렇게 하세요. 전 분명히 말했습니다. 나중에 다른 소리 하시면 안 돼요.”
우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그녀가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밀어냈다.
“알았어요. 하지만 이제 스탠바이 해야 되기 때문에 시간을 많이 드릴 수는 없어요.”
“잠시 자리를 옮기죠.”
우현이 그녀를 사람들이 오가지 않는 조용한 곳으로 이끌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거죠?”
“혹시 라라걸즈 다른 멤버들의 인터뷰 따셨어요? 아님 유디 엔터쪽과 그랬나요?”
흠칫 놀라는 그녀의 눈동자는 그의 짐작이 맞았음을 말하고 있었다. 분명 별이에게 불리한 이야기를 할 것이었고 이들은 그것을 가지고 팩트가 어쩌구저쩌구 하며 양쪽을 씹어댈 게 틀림없다. 둘 다 잘못이 있지 않은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우현은 그녀만이 들을 수 있도록 이어폰 한 쪽을 건넸다. 그녀가 가만히 그것을 귀에 꽂자 그가 녹음된 소리를 재생시켰다. 가장 핵심적인 부분 전에 맞춰놨기 때문에 이혜림 리포터는 곧바로 녹음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건…?”
우현은 곧바로 그녀의 귀에서 이어폰을 빼고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어요?”
앞뒤 없는 그의 물음에 그녀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건 그녀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거 누가 시킨 겁니까?”
“네? 그게 무슨 말이죠?”
“당신 혼자서 이걸 결정할 리 없잖아요? 피디가 시켰어요? 알아보라고?”
아무 말 못하는 걸 보니 피디가 시킨 게 맞는 것 같다. 우현은 짜증이 치밀었다. 유디 엔터로서는 황금알 낳는 거위를 빼앗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것을 알기에, 유니가 ‘복면노래왕’에 나오는 정도로 약을 올리며 넘어가려 했는데 이렇게까지 치졸하게 나오니 이제는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우리는 일이 커지는 걸 원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냥 넘어가려 했는데 이제는 안 되겠네요.”
“어떻게 하시려구요?”
“다른 방송국에다 이거 갖다주려구요. 당신네들은 준비했던 인터뷰 하세요.”
이혜림 리포터는 입술을 깨물었다. 만약 준비했던 그대로 방송을 내보내면 자신들만 바보 될 게 분명했다. 특히 경쟁 방송국인 KBC에서 이걸 터뜨리면 방송국 사장이 국장부터 까고 내려올 게 뻔했다. 그럼 밑에 있는 것들은 줄줄이 비명을 질러댈 거다.
“김 대표님, 그러지 마시구요. 저희 그런 일 없어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거든요. 그냥 김별씨에게 이번 일과 관련해서 몇 가지 물어보려던 게 다였어요.”
“그래요. 그럼 그렇게만 내보내시면 되겠네요. 이건 다른 쪽에 보내죠, 뭐.”
그건 또 그녀가 받아들일 수 없다. 타 방송국에서 특종으로 내보낼 게 뻔한데 이걸 알고도 그냥 바라만 볼 수야 있겠는가?
“알았어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녀는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면서 어딘가로 급히 전화를 걸었고 우현은 팔짱을 끼고 그녀가 나오기를 차분히 기다렸다. 어차피 결론은 정해져 있다. 그녀는 그저 자신의 책임을 덜기 위해 상부의 확답이 필요할 뿐.
화장실에서 나온 그녀는 전보다 한층 차분한 안색이었다.
“그거 우리한테 주시면 저희가 보도해 드릴게요.”
“좋습니다. 대신 제대로 보도 안 하시면 이거 다른 데로 넘기겠습니다.”
그녀의 메일로 파일을 전송하기로 하고 그녀는 얼른 인터뷰 장소로 뛰어갔다.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기 때문이다.
우현이 후련한 마음으로 천천히 인터뷰 장소로 가니 벌써 촬영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들은 암묵적으로 박형석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은 채 이번 영화에 관련된 이야기만 진행했다.
이미 숱하게 진행됐던 질문과 대답이기에 시간이 지나면 표정과 자세가 흐트러질 수 있다. 생각하면 이해가 되는 것이, 몇 시간동안 똑같은 질문과 똑같은 대답을 반복하며 웃기지도 않는 농담에 리액션까지 해줘야 하는 일은 막상 해보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강소연을 비롯한 주연배우들은 어떤 흐트러짐도 없이 생글거리는 표정으로 임했다. 별이도 각오했던 질문들은 없고 그리 어렵지 않은 질문을 받아서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촬영을 끝낼 수 있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너도 수고했어.”
우현이 촬영을 끝낸 별이를 데리고 나오려는데 특유의 도도한 분위기를 풍기는 강소연이 우현의 앞을 막아섰다.
“김 대표, 일이 어렵지 않아요?”
“하하, 그렇네요. 여러 군데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네요.”
“그럴 때 회사에 톱스타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데… 그렇죠?”
웃으며 우현의 어깨에 뭍은 먼저를 툭툭 털어주는 그녀의 손길은 그를 얼어붙게 했다. 이건 그의 잘못이 아니다. 대한민국 어느 남자라도 마찬가지일 게 분명하다. 물론 이 모습을 은하가 봤다면… 그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 그렇긴 하죠, 네.”
“그럼 다음에 봐요.”
그녀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사라졌다. 영화가 예상보다 잘 나왔다고 생각해서인지 오랜 인터뷰를 치렀음에도 기분이 좋아보였다.
“으…”
별이는 사라져가는 소연을 보며 입을 앙다물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모습이 귀여워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차를 타고 사무실로 향했다.
“그런데 어떻게 됐어요? 잘 처리 됐어요?”
“응, 잘 될 거야.”
별이는 환하게 웃음을 보이는 우현의 모습에 마음이 놓였는지 미소를 보이며 눈을 감았다. 많이 피곤할 테니 잠시 잠을 청하려는 거다.
다음 날, 우현은 사무실에 앉아 ‘연예계 현장’을 시청했다. 이윽고 영화 ‘밀실’의 VIP시사회를 보도하며 관계자들의 발언과 관람객과 평단의 호평을 집중 보도했다. 저렇게 분위기를 끌어올려주니 영화가 안 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드려야 하는데요. 영화 ‘밀실’에 출연한 김별씨가 요즘 화제의 중심에 있습니다. 바로 라라걸즈 전 멤버들과의 불화설인데요. 그래서 저희가 이번에 양측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습니다. 같이 보시죠.”
우현이 눈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