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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 첫 시사회를 하면서(2)
“그게… 연락이 안 된다.”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언론 시사회에 얼굴을 보이지 않는 주연배우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경우는 없다.
“모르겠어. 일단 그쪽 소속사에 계속 이야기하고 있기는 한데 거기도 계속 알아보는 중이래.”
“영화 끝나기 전에는 올 수 있지 않을까요?”
어차피 영화 끝난 다음에 기자들과의 간담회가 진행되기 때문에 그 전까지만 나타난다면 적당히 얼버무릴 수 있다.
“그러면 좋겠지만 만약 안 오면?”
최 감독은 난데없는 사태에 안절부절했다. 영화 잘 찍고 이제 잘 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주연배우 연락 두절이라니… 기자들에게 찍히면 영화 흥행에 지장이 갈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설마 언론 시사회를 펑크 내기야 하겠어요?”
“그런데 어째 예감이 그래.”
최 감독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촬영장에서는 카리스마가 대단한 감독이지만 이 중요한 자리에 자신이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니 멘붕이 오는 것 같았다.
“어? 감독님! 이것 좀 봐요!”
조감독이 핸드폰을 들고 달려왔다. 최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들이 우르르 몰려가서 그것을 보니 다름 아닌 연예 기사.
[한류스타 박형석. 올리브식품 장녀 최아영과 열애!]
“하…”
최 감독은 그제야 이 썩을 놈이 연락을 안 받고 잠적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관람석에 앉은 기자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들도 기사의 내용을 접했을 것이다.
“그냥 박형석 선배 없이 간담회 하면 안 돼요?”
별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지만 우현은 아무 대답도 해줄 수 없었다. 초반에 이슈몰이는 확실히 될 거다. 안 좋은 쪽으로. 그게 어느 쪽으로 튈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현도 그것은 예측할 수 없다. 그의 능력을 벗어난 거니까.
“일단 우리는 영화가 잘 나왔는지만 생각하자. 영화라는 게 재미만 있으면 아무리 개봉관을 적게 잡고 악재가 생겨도 관객들이 꾸역꾸역 몰려들게 마련이거든. 성폭행 피소도 아니고 고작 재벌하고의 열애설인데 큰 악재는 아닐 거야. 기자들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거고.”
기자들은 자신들을 무시하는 걸 제일 싫어한다. 기자들 불러놓고 조금이라도 늦으면 기본 예의가 어쩌고 엄청나게 씹어대는 반면 자신들이 잘못한 건 곧 죽어도 기사에 싣지 않는다.
제일 웃긴 건, 그네들이 별것도 아닌 상황을 가지고 문제를 제기해 논란을 만들어 놓고는 상황이 심각해지면 마치 네티즌들이 마녀사냥을 하는 양 문제가 있다고 지껄인다. 그런걸 보면 마치 자기네들이 대중을 가지고 논다고 여기는 것이 틀림없다. 그들의 논조는 항상 대중을 가르치는 것 같으니까.
어쨌거나 박형석이 정당한 이유 없이 태업하려는 게 아닌,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는 것이 밝혀진 마당이니 모양이 우스꽝스럽긴 해도 욕을 먹을 상황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다.
결국 영화가 시작하기 전까지 박형석은 모든 연락을 차단한 채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제작진들은 그 없이 간담회를 준비하기로 했다.
영화가 시작되자 웅성거리던 기자들은 침묵에 빠져들었고 우현도 별이와 함께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우현이 최 감독이 흥행한 작품을 만들지 못했음에도 신뢰했던 이유에는 몇 가지가 있다. 첫 째로는 무난한, 한 마디로 재미없는 시나리오를 가지고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능력이 탁월한 것이다.
평범한 스토리임에도 인물간의 대사는 살아있었고 캐릭터는 살아 숨 쉬었다. 그래서 대단치 않은 스토리임에도 관객을 붙드는 힘이 있었다.
두 번째는 그는 생긴 것과는 다르게 굉장히 섬세한 성격으로, 화면의 구도 하나 소품 하나도 철저하게 계산하며 찍는, 디테일이 살아있는 감독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로맨틱 코메디나 가족 간의 화합을 말하는 드라마를 찍었으니 그의 장점이 제대로 드러날 수가 없었다.
‘확실히 최 감독, 당신은 공포, 스릴러를 찍어야 해!’
우현의 판단이 맞았다. 드디어 제 몸에 맞는 옷을 찾아서 그런지 이번 작품은 그의 장점이 십분 발휘됐다. 영화는 뻔뻔하게 별이를 몰아붙이던 강소연과의 첫 장면부터 관객들을 쉴 새 없이 몰아붙였다.
두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관객들을 혼란에 빠뜨리던 감독은 마지막에 가서야 이 사건의 주범이나 마찬가지였던 은혜의 진짜 목적을 드러낸다. 머리를 때리는 반전, 그리고 마지막까지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게 만드는 감독의 교묘한 술수. 모든 게 만족스러웠다.
더불어 이 기괴한 서사를 이끌어가게 도와준 압도적인 영상미의 김석준 촬영감독은 극찬을 받아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영화가 끝났을 때, 예상했던 것처럼 반응은 만족스러웠다.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며 기자간담회를 위한 무대 세팅을 했다. 그리고 몇 번의 포토타임을 마치고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초반 질문은 감독에게 집중됐다. 아무래도 흥행작이 없던 감독이기에 기자들은 내심 이번 영화에 대한 기대가 없었을 거다. 그런데 예상과 다르게 너무 훌륭한 공포, 스릴러물이 나오다보니 무엇보다 감독에게 궁금한 점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질문은 주연배우로 옮겨가기 시작했는데 역시 박형석에 관한 질문이 안 나올 수 없었다.
“오늘 박형석씨에 관한 기사가 떴던데 혹시 보셨습니까?”
“네, 봤습니다.”
최철성 감독이 질문을 받았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오지 못한 이유도 그것과 관련이 있겠군요. 최 감독님의 생각이 궁금한데요?”
“생각이랄 게 뭐 있겠습니까? 어차피 영화는 마무리 됐고, 박형석씨는 자신에게 주어진 연기를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개인적인 사정에 의해서 못 나온 것이니 어쩔 수 없죠. 나중에 무대인사에 나오지 못 할 것 같아 아쉽긴 하지만 빨리 정리되면 별 무리가 없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하하하.”
최 감독은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안달복달했었는데 그 새 사람이 바뀌기라도 했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넘겼다. 하지만 우현은 그의 인중에 맺힌 땀을 보고는 미리 대답을 준비했음을 알 수 있었다.
“강소연씨에게 질문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로맨틱 코메디나 치정멜로극을 주로 연기하셨는데 처음으로 공포, 스릴러물에 도전하셨습니다. 개인적인 감상이 궁금한데요?”
강소연은 눈을 빛내며 마이크를 들었다.
“저라고 항상 예쁜 역할만을 맡고 싶었던 건 아니었어요. 아무래도 소속사의 의견도 있고 막상 좋은 시나리오를 만나지 못해서 그런 경우도 있었구요. 하지만 우연히 최 감독님의 좋은 시나리오를 받아서 이렇게 좋은 영화를 만들게 됐으니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인 연기자인 김별씨와 호흡을 맞춰 보셨는데요. 느낌이 어떻던가요?”
강소연은 김별을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김별씨는 정말 예쁘고 사랑스러워요. 그리고 연기도 얼마나 잘하는지 몰라요. 그리고 촬영장에 항상 제일 먼저 나타나서 분위기를 띄워줘요. 얼마나 귀엽고 예쁜지 조그맣게 만들어서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고 싶다니까요? 호호호.”
우현은 진심으로 강소연에 감탄했다. 그녀의 눈빛과 말투를 보면 정말 그녀의 평소의 그 싸가지 없는 성격을 상상할 수도 없을 테니까. 물론 그렇기 때문에 우현은 그녀를 배우로 인정한다.
“상대 연기자인 박형석씨와의 호흡은 어땠습니까? 영화 내용을 보면 초반에는 깨소금이 쏟아지는 신혼부부의 역할이지만 막판 가서는 좀… 그렇게 변하는 다채로운 역할을 소화 하셨으니까요.”
아무래도 내용상의 스포가 되기에 말끝을 흐렸지만 그녀가 알아듣기에는 충분했다.
“혹자는 박형석씨의 연기에 대해서 의문을 품고 있을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는 박형석씨의 연기에 대해 극찬을 하고 싶어요. 제가 연기를 편하게 할 수 있도록 잘 도와줬고 그의 감정연기는 정말 인상 깊었거든요. 천재적이라고 느꼈어요.”
우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강소연은 내심 박형석의 연기가 보통의 재능으로는 나올 수 없을 만큼 개판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테니까.
몇 번의 질문이 더 오가고 나서 별이에게로 기자들의 시선이 옮겨왔다.
“사실 김별씨의 연기 경력이 거의 없기 때문에 캐스팅에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 역시 그 중의 하나였죠. 이번에 김별씨가 은혜역을 맡으면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준비하셨나요?”
별이는 미리 준비했던 만큼 마이크를 들고 차분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이런 큰 역을 맡게 돼서 영광이었고 이 좋은 작품을 망치지 않도록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공중파에서 했던 단막극에 출연한 것을 보았습니다. 생각보다 연기가 자연스러웠는데 이번 ‘밀실’에서는 신인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괜찮은 연기를 선보이셨는데요. 비결이 있을까요?”
“비결 같은 건 없구요. 무엇보다 감독님께서 잘 이끌어주셨고, 저와 붙는 씬이 많았던 소연 선배께서 정말 많이 도와주셨거든요. 여러 선배님들께서 부족했던 절 정말 잘 이끌어주셔서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별이가 아직 어리기에 말 실수할까봐 며칠 전부터 질문에 대비한 답변을 외우고 있었다. 그래서 다소 까다로울 수 있는 질문도 실수 없이 해내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기자들 사이에서 말없이 앉아있던 한 기자가 손을 들었다.
“현재 같은 그룹이었던 라라걸즈의 다른 동료들은 아직 빛을 못 보고 있는 걸로 아는데요. 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없습니까?”
이건 또 무슨 시츄에이션인가? 이 바닥에서 성공하지 못한 연예인과 비교하는 질문을 공식석상에서 하는 건 일종의 금기나 마찬가지다. 뻔히 알면서 저런 질문을 한다는 건 대놓고 엿 먹으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욕을 먹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욱 문제는 저 질문에 대비한 연습을 하지 않았다는 것. 우현의 시선은 흔들리는 별이의 눈동자를 향했다.
“아… 제 주제에 다른 친구들에 대한 말을 한다는 것도 웃기기는 한데요. 저도 이제 시작이고, 그들도 아직 도전이 끝난 건 아니라고 생각해서… 다 잘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준비했던 대답이 아니라서 말이 정돈되지 못했다.
“라라걸즈 멤버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우리 모두 파이팅 하자!”
두 주먹을 들어 보이며 파이팅 포즈를 취하는 그녀를 보고 그 기자는 묘한 웃음을 지었다. 우현은 직감적으로 저 기자가 질문을 대신 받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기사를 내보낼지 대충 짐작이 가기에 막을까 생각하다가 그냥 두기로 했다. 그런 잡스러운 기사까지 막으려고 들면 더욱 호구 잡힐 뿐이다.
어차피 별이는 이번 ‘밀실’을 계기로 크게 도약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그런 기사는 자연스레 묻히게 될 것이니까.
아니, 생각해보니 우현은 어쩌면 바라던 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별이가 곤경에 처하길 바라겠지만 이 바닥이 노이즈 마케팅을 괜히 하는 게 아니다. 결과가 긍정적으로 보장되어 있다면 오히려 그런 식의 이슈는 별이의 인지도와 이미지까지 상승시킬 것이다.
별이는 우현의 웃음을 보고 안심이 됐는지 다시 평온한 안색을 되찾았다. 그리고 며칠 뒤, VIP 시사회가 열렸다. 반응은 여러모로 폭발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