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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 첫 시사회를 하면서(1)
우현은 곧바로 황석준 부띠끄에 코디부터 보냈다. 옷을 미리 준비시켜놔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전과는 다른 컨셉으로 갈 예정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준비하려 했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꼭 원하는 옷으로 입히기 위해 일찍부터 체크해 놓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핸드폰으로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나 서울 도착]
어떤 이모티콘도 없는 간략한 내용. 은하가 보낸 문자다.
우현은 의자에 앉아 생각에 빠졌다. 언제까지 그녀를 피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이제 결론을 내야 한다. 즉시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왜? 오려고? 지금?”
“응. 내가 갈게.”
“아니야, 내가 갈게. 오빠 회사 문자로 찍어줘.”
어지간히 움직이기 싫어하는 그녀가 웬일로 오겠다고 하니 문자로 회사 주소를 찍어주었다. 그녀를 기다리며 드는 ‘생각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였다. 하지만 막상 회사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녀를 본 순간, 준비했던 말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빨리 왔네.”
하얀 블라우스에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하늘거리는 붉은 치마를 입고 온 그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예뻤다.
“금방이던데? 자.”
그녀는 이번에도 양 손에 커피를 쥐고 들어와서 우현에게 하나를 건넸다. 그는 이번에는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앉아.”
상석에 앉은 우현과 그의 오른편에 앉은 은하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로 할 이야기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말이다.
“그래, 그 때는 너무 경황이 없고 모든 일들이 물밀듯이 밀려와서 너와 대화가 부족했어. 그 와중에 한 가지는 진짜 궁금하더라. 꼭 마이더스로 가야 했던 거야? 마음만 먹으면 다른 회사로 갈 수도 있었잖아.”
이건 정말 궁금했다. 자신이, 아니면 회사가 그렇게 싫었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을 정도였으니까.
“오빠도 알다시피 내가 처음 파인 엔터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 그리 좋은 형편은 아니었잖아?”
은하의 부친은 그녀가 초등학생 때 바람나서 도망가 버렸고 그녀의 모친은 알콜중독이었다. 한 마디로 막장이었던 집안이다.
“그랬지.”
“그래서 난 꼭 성공하고 싶었어. 그런데 일을 시작한지 얼마 안돼서 오빠가 들어왔지. 신기하게, 신입인데도 불구하고 말하는 걸 들어보니 능력은 있어 보였어. 그런데 웃기게도 사람 볼 줄은 모르더라.”
“내가? 내가 사람 볼 줄을 모른다고?”
이게 무슨 말인가? 우현은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이 사람은 참 잘 본다고 생각해왔다.
“오빠는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겠지만, 장태현이 제일물산의 박재연 상무랑 나를 엮어줄려고 했었잖아?”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우현이 그 때 일을 조용히 처리하려고 당사자였던 장태현이를 쥐 잡듯이 잡아가면서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장태현이 그런 놈 인줄 알면서도 같이 일을 한다?
“사실 그거… 내가 원한 거였어. 죽을 것 같이 힘들 때 거부하기 힘든 액수의 제안이 들어왔거든. 그래서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승낙했어. 그런데 오빠가 알아버렸던 거지.”
“하…”
허탈감에 몸이 소파 깊숙한 곳으로 파고드는 기분이었다. 한 순간에 바보가 된 기분. 그리고 또 다른 배신감.
“일이 어긋나고 나서 처음에는 오빠를 원망했어. 그 돈만 들어왔으면 모든 게 해결될 수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나를 그렇게 힘들게 하고 옥죄어왔던 것들이 하나하나 정리되기 시작했고 그렇게 시간이 더 지나고 나서는 그 때 나를 구해줬던 오빠가 너무 고마웠어.”
“고마운데 그랬던 거야?”
우현은 모든 게 이해되지 않았다. 어째서 그 이야기를 지금까지 숨겼던 건지, 고맙다면서 자신을 떠났던 건지.
“훗! 오빠는 아무것도 몰라.”
“내가 뭘 모르는데!”
답답한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은하는 처음과 같이 담담한 표정을 유지한 채 손에 들고 있던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입을 열었다.
“나한테 처음 박재연을 소개시켜준 사람이 고작 장태현일 것 같아?”
“뭐?”
“중소 매니지먼트사 실장 따위가 박재연에게 줄을 댈 수 있겠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오빠가 오기 얼마 전에 이준식 대표가 나를 방으로 불렀어. 그리고 박재연의 사진을 들이밀면서 소개시켜줬지. 장태현은 이준식 대표가 시켰던 일을 했을 뿐이야.”
다시 한 번 망치에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이 자리까지 올려준 사람이 그런 인간이었다니…
“그게 진짜야?”
“이준식 대표가 말했어. 5억. 박재연이 나를 스폰해주기로 한 돈이 5억이었어. 나는 그게 너무 급했고 절실했어. 그래서 그 5억이라는 말에 녹음까지 했지. 꼭 받아내려고 말이야. 못 믿겠으면 들려줘?”
은하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우현은 굳이 녹음을 듣지 않아도 그녀가 거짓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한참동안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던 우현이 입을 열었다.
“그럼 회사가 넘어갈 때 나를 떠났던 게 이준식 대표가 싫어서였구나?”
“아니.”
“그럼?”
“그 회사 내가 망가뜨렸거든.”
“뭐?”
이제는 더 놀랄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유은하는 대단한 여자다.
“오빠 몰래 이곳저곳에 손을 대보려는 짓거리를 보고 내가 온전하게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강벽두 부사장을 부추겨서 회사를 마이더스에 넘기도록 했어. 그 놈은 그 때 내가 자기 애인이라도 될 줄 알고 미친놈처럼 회사 장부와 각종 비리 증거를 내게 가져왔고 그걸 마이더스 사장에게 넘겼지.”
“아…”
감탄사 말고는 할 말이 없었다.
“물론 나중에 내가 자신을 이용해먹었다는 걸 알고 분노했지만 전보다 더 많은 돈을 벌게 되니 입을 꾹 다물더라구. 결론적으로 난 회사가 망하기 전부터 마이더스로 갈 수밖에 없었어. 오빠가 싫었던 게 아니야.”
“장태현하고는 왜 같이 일하는 거야?”
“회사를 망하게 하는 것만 생각했지 그 이후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마이더스로 합병하면서 같이 따라올 줄은 몰랐어. 내가 한 짓인 걸 모르니까 같이 일하기 싫다고 거절한다고 하기가 어려웠거든. 그렇게 어영부영 같이 일하게 됐지. 그 인간은 아직도 내가 그랬다는 걸 몰라. 걱정할 필요는 없어. 그 인간 이제는 나한테 큰 소리 한 번 못 내. 은근히 새가슴이잖아.”
은하는 웃으며 여유를 부렸다.
“그럼 왜 나한테 이야기 하지 않았어?”
“아버지처럼 따랐잖아. 이준식 대표, 오빠한테는 그저 회사 사장이 아니었다는 거 알고 있는데 어떻게 말해?”
“지금은 왜 이야기하는 건데? 계속 숨기고 있지 그랬어?”
“말했잖아. 오빠가 나한테 올 줄 알았다고. 조금 힘들겠지만 다시 올 줄 알았어. 그래서 말하지 않았던 거야.”
“이젠 갈 수 없어.”
“알아. 그래서 내가 온 거야.”
고백과도 같은 그녀의 말. 우현은 다시 한 번 고민에 빠졌다. 티를 내지는 않았어도 은하랑 다시 일하는 건 항상 꿈꿔왔었다. 자신이 싫어서 그랬는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니 지금껏 했던 고민들이 덧없게 느껴졌다.
“그래, 돌고 돌았지만 제 자리로 가야겠지.”
“내가 마이더스와 했던 계약은 딱 1년이었어. 어차피 파인 엔터 소속이었던 배우들 다 데려갔으니 나 하나는 1년으로 묶었지. 나머지야 계약금을 받았지만 난 계약금을 거절했거든. 이 바닥, 이제 계약금 얼마 되지도 않으니까.”
은하는 이미 마음을 정하고 온 듯했다. 하지만 우현은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냥 거기에 있어.”
“무슨 소리야?”
“아직은 너를 받을 수 없어. 아직 키워야 할 아이들도 있고…”
“내가 오빠한테 내 로드해달래?”
은하는 기분이 상했는지 인상을 확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우현이 물러서지 않았다.
“나도 네가 오면 많이 편해지겠지. 투자금도 들어올 테고. 하지만 이번에는 내 힘으로 커 볼게. 지금은 쪽팔려.”
“웃기네. 지금 쪽팔린 게 대수니?”
“그래. 너한테 쪽팔려서 안 돼. 그러니까 가. 가서 기다려줘. 내가 쪽팔리지 않을 정도가 될 때, 그 때 데리러 갈게.”
한참동안 그와 눈을 맞추던 은하는 우현의 진심을 알았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성격 급한 거 알지?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마.”
그녀는 인사조차 하지 않고 뒤를 돌아 나가버렸다. 섭섭하긴 했지만 생각해보면 헤어지기 전에 언제 그들이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던가 싶다.
삼주 후, 우현은 차에 별이를 태우고 강남의 대형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향했다. 새벽부터 한껏 치장한 별이는 미리부터 준비한 의상을 차에서 갈아입고 거울을 보며 긴장한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대표님, 저 괜찮아요?”
“나 운전 중이다. 그리고 예쁘니까 걱정 마.”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강소연 선배도 엄청 예쁘게 하고 올 텐데.”
“걱정하지 마. 내가 봤을 때는 네가 더 예뻐.”
“그나저나 영화는 잘 나왔겠죠? 으흥… 긴장돼 죽겠어요.”
오늘 언론, 배급 시사회에는 각 언론사 기자들이 다 몰려올 것이다. 영화가 끝난 후에 기자들과의 인터뷰가 예정되어 있다.
“잘 나왔을 거야. 그러니까 이번에 개봉관이 천 개나 넘게 잡혔지. 배급사에서 확실히 밀어줄려나 본데. 게다가 이번에 토론토영화제에 영화 출품했다더라고.”
토론토국제영화제는 매년 9월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리는 국제 영화제다. 9월 첫째주 월요일 노동절이 지나고 나서 목요일 밤에 축제가 시작되며 10일 동안 열린다. 중심 거리에 23개의 스크린이 설치되고 300~400여 개의 영화를 상영한다. 매년 TIFF의 참가자는 일반 대중 및 관련 업계 포함 30만 명에 이른다.
“우와… 잘되면 해외 진출하는 거예요?”
“막상 잘 되도 그렇게 대박나기는 힘들어. 그냥 토론토 영화제에서 무슨 상을 탔네 하면서 홍보효과를 노리는 거지. 물론 영화가 정말 잘 나오면 해외 흥행도 기대할 수는 있겠지만 한국영화의 감성과 외국영화의 감성이 다른 부분이 많아서 배우가 주목받는 경우는 있어도 영화가 주목받는 경우는 희박하지.”
그렇게 별이와 수다를 떨며 움직이다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별이를 데리고 극장에 들어서니 영화 상영 1시간 전이었다.
최감독을 비롯한 제작 스태프가 한쪽에 근심어린 표정으로 모여 있었다. 우현이 별이와 함께 다가가니 최 감독이 환하게 웃는다.
“왔어?”
“네. 그런데 박형석씨가 안 보이네요?”
우현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한 귀퉁이에선 강소연이 오늘도 여신처럼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서브주연인 임호준과 김철균도 영화 관람을 위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남자주인공인 박형석이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