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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5] 만찢남을 아십니까?(5)
다음날이 되니 근 세 시간에 이르는 분장을 한다고 새벽부터 부산을 떨었다. 아무리 CG 처리를 한다고 해도 기본 체형을 변화시켜줘야 더 그럴듯하게 화면에 나오게 되니 어쩔 수 없었다.
“대표님, 나 피부 상하면 어떻게 해요?”
별이는 분장 때문에 얼굴이 두 배는 커져 있었다. 군대에서 위장크림만 살짝 발라도 피부 걱정을 하는데 여배우 얼굴에다 몇 센티 두께의 분장을 하니 내내 피부 걱정이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고급 피부 관리 샵 보내줄게.”
“진짜죠? 약속했어요?”
“그럼. 내가 언제 허튼 소리하디?”
“히히, 알았어요. 그런데 후반부 대본 나온 거 보니까 키스씬이 있던데 이거 어떡해요?”
“너 키스 안 해봤니?”
“아무리 대표님이지만 민감한 질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 안 해요?”
별이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두 턱을 넘어 세 턱이 된 그녀가 그런 표정을 지으니 그것 나름대로 귀여웠다. 피식 웃은 우현은 그녀의 머리에 살짝 꿀밤을 먹였다.
“까불고 있네. 그래서 해봤어?”
“아직 안 해봤어요. 이 미모에 아직 키스도 안 해봤다고 하니 못 믿으시겠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어요.”
생각해보니 그럴만했다. 그녀가 연예계에 발을 담근 것이 그녀 나이 17살이었다고 했으니. 그 때부터 빡센 연습생 생활을 거치고 어떻게든 떠보려고 온갖 고생을 했으니 소속사에서 이상한 짓만 시키지 않았다면 연애할 시간도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그래? 별거 아니야. 그냥 분위기 좀 잡고 눈을 살짝 감은 채 가만히 있으면 돼. 어차피 여배우는 수동적인 입장이기 때문에 그리 걱정할 것 없어. 리드는 남자가 하는 거니까.”
“여기 여주인공은 좀… 능동적? 그런 성격이던데요?”
“별아, 아무리 성격이 그래도 그런 것까지 능동적일 필요는 없다. 물론 여자가 그래 주면 남자 입장에서 얼마나 고마운 일이겠냐마는 이건 드라마고 넌 톱스타잖니? 최 감독님이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지만 지금부터 걱정 안 해도 돼. 그러니까 피부 걱정, 키스씬 걱정 그만하시고 대본이나 외우세요.”
우현이 친절하게 설명했지만 별이는 그래도 궁금증이 남아있는 모양이다.
“그럼요, 대표님. 은하 언니는 처음에 키스신 찍을 때 어떻게 했어요?”
“은하? 하하하!”
우현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왜요? 무슨 일 있었어요?”
“하하하. 아… 걔 처음 키스씬 찍을 때 생각이 나서.”
“도대체 어땠길래요? 궁금해 죽겠어요. 빨리 말해줘요.”
“걔가 처음 키스씬 찍었을 때가 2014년도인데, 사실 그 전까지는 대부분의 배우들이 키스씬이 있을 때 적당히 카메라 워크로 하는 시늉만 하곤 했었어.”
“그래도 진짜로 하는 게 많지 않았어요?”
“진짜로 하는 척하는 게 많았지. 그런데 은하가 키스씬을 찍을 때, 그러니까 2014년 즈음부터는 감독과 작가들한테서 진짜 키스하기를 원하는 풍조가 생겨나기 시작했어. 뽀뽀가 아닌 키스를 진짜로 찍어보라는 거지.”
“세상에…”
“나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슛 들어가니까 상대 남자배우가 다짜고짜 혀를 집어넣은 거야. 서로 상의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지. 은하 성격에 어떻게 했을 거 같아?”
별이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듣는 어린아이처럼 집중해서 듣다가 얼른 손을 들었다.
“따귀를 후려갈기지 않았을까요?”
“아니, 아니, 은하가 그 정도로 상식적인 애가 아니지.”
“그럼요?”
“그 자식 혀를 깨물었어. 그리고 무릎으로 거시기를 찍어버렸지. 크크큭! 그 자식하고 그 자식 매니저가 길길이 날뛰었지만 은하가 너무 놀라서 반사적으로 했다고 하는데 어쩌겠어?”
“우아… 그 남자배우가 누구였어요?”
“그건 비밀이야.”
“치! 너무한 거 아니에요?”
“그 정도 프라이버시는 지켜 주자. 그 배우 안 그래도 트라우마 생겨서 그 때 이후로 키스씬 찍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대. 그러면 상대 여배우는 얼마나 놀라겠냐? 키스씬 찍을 때마다 남자 배우가 깜짝깜짝 놀라니까. 아마 ‘이 새끼 뭐하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걸? 크크크!”
우현은 지금 생각해도 웃긴지 계속해서 키득거렸다. 사실 이렇게 오랜 시간 분장을 하다 보면 덥고 답답해서 자연스레 짜증이 치밀어 오르게 마련이라 이런 식으로 기분을 풀어주는 것이 좋다.
그렇게 순조롭게 촬영이 흘러갔고 대망의 마지막 촬영을 앞두었다. 마지막 촬영일 다음 날이 윤정의 ‘복면노래왕’ 녹화일이라 사무실은 부산스럽기 그지없었다.
“대표님, 의상 왔어요.”
사무실의 경리를 맡은 민주가 의상을 들고 우현에게 보여주었다. 보통 이런 의상들은 퀵으로 오는데 코디가 들고 오는 경우도 있다. 아직 윤정에게 코디가 붙지 않았기 때문에 퀵으로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잘 나왔는데?”
보통 ‘복면노래왕’에 출연하는 사람들은 복면과 전혀 상관없는 의상을 입고 오는 경우가 많다. 가끔 넉넉한 체격을 가진 사람들이 출연할 때는 그것을 가리기 위해 전체적으로 탈을 뒤집어쓰고 오는 경우를 제외하면 말이다.
윤정이 만약 팅커벨이 아니었다면 그녀 역시 그녀의 매력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옷을 찾았을 테지만 작가로부터 컨셉을 듣자마자 의상부터 떠올렸었다.
초록색을 기본으로 한 원피스에 반투명한 시스루가 어깨와 치마 한쪽을 감싸고 있고 등 뒤에는 투명한 비닐로 만든 날개가 붙어 있다.
이 정도까지 완성도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저 무대 의상으로 적당히 팅커벨을 연상시킬 수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저 우현입니다. 네, 의상 잘 받았습니다. 딱 좋네요. 역시 황 선생님입니다. 너무 고맙습니다. 대신 꼭 비밀 지켜주십쇼. 네, 감사합니다.”
황석준 디자이너에게 감사의 인사를 한 우현은 옷을 들고 연습실로 갔다. 윤정도 그 의상을 보고 환하게 웃으며 마음에 들어 했다.
“이게 녹화 때 입을 의상이에요? 진짜 예뻐요.”
“한 번 입어봐.”
윤정이 사무실 한켠에 마련된 탈의실에서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왔다.
“어머! 예뻐라!”
민주가 팅커벨 의상을 입고 온 윤정을 보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현도 생각보다 예쁜 윤정을 보고 놀랐다.
160의 아담한 키에 초록색 짧은 미니 원피스는 그녀의 귀여운 인상과 맞물려 그녀를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특히 다리가 상당히 예뻐서 짧은 치마가 너무 잘 어울렸다. 서양인들처럼 키에 비해서 다리가 긴 편이었다.
“어때요? 좀 섹시해 보여요?”
윤정은 자신이 섹시해 보이길 원하는 것 같았다. 별이에 비해 전체적으로 아담하니 그런 생각을 할만도 했다.
“응. 아주 예쁘고 귀엽고 섹시하고… 굿이다, 굿!”
우현이 엄지를 치켜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이름을 예명으로 해야 할 것 같아서 한참 동안 고민해봤어.”
“예명이요?”
“응. 네 이름이 안 좋다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귀에 쏙 들어오는 이름은 아니니까. 예명이 필요할 것 같았거든. 그래서 이번 녹화 때 예명을 소개해야 할 거야.”
“뭐로 정하셨는데요?”
“유니. 유니크하다라는 뜻이 담겼어. 넌 다른 가수들과 다르다, 그런 뜻이지. 어때?”
“유니? 음… 귀에 쏙 들어오네요. 어감도 나쁘지 않고.”
민주는 찬성표를 던졌다.
“그래요. 저도 사실 제 이름으로 활동하는 건… 우리 반에도 저랑 같은 이름을 가진 애가 저 말고도 두 명이나 있단 말이에요. 좋아요.”
싫어할까 봐 걱정했는데 뜻밖에 윤정은 흔쾌히 그가 지은 ‘유니’라는 예명을 받아들였다.
윤정은 내일 녹화를 대비해 피부 관리 샵으로 보내고 우현은 다시 촬영장으로 향했다. 새벽에 샵에 들렀다가 촬영장에 별이를 데려다 준 후 사무실로 들어왔던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마지막 날 촬영장은 강남 한복판이라서, 가는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도착하니 마지막씬을 앞두고 한창 준비 중이었고 별이는 한쪽에서 메이크업을 수정하고 있었다.
“대표님…”
“왜? 긴장돼? 걱정하지 말라니까.”
그녀는 마지막 장면인 키스씬을 앞두고 울상을 짓고 있었다. 아무래도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
“그게 아니라요…”
별이의 시선이 촬영장 한 곳을 향했다. 우현의 눈이 그 시선을 따라가니, 유시훈이 키스씬을 앞두고 있다고 입에 구취 제거 스프레이 뿌리며 온갖 부산을 떨어대더니 최 감독에게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저걸 보니까 더 하기 싫어져요.”
“너 쟤랑 연애할 거 아니잖아? 그리고 키스씬 앞두고 저렇게 매너있게 대비해주면 좋지 뭘 그래? 그리고 말했지? 감독님이 알아서 조절해주실 거야.”
그녀를 달래고 최 감독에게 가니 유시훈 혼자 바스트 따는 장면을 위해 연기를 지도하고 있었다.
“표정 주의하고. 에로비디오처럼 하면 안 되는 거 알지?”
“알겠습니다.”
전투를 앞둔 병사와 같은 비장함이 오히려 주변 사람들을 더 걱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사람과 자신을 주목하는 카메라 앞에서 키스씬을 찍으려니 그 역시 떨려올 터였다.
“자! 스탠바이!”
유시훈이 카메라를 지긋이 바라보며 감정을 잡기 시작했다. 그 복잡 미묘한 표정에 우현은 하마터면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억지로 허벅지를 부여잡으며 웃음을 참는데 최 감독의 고함이 촬영장을 울렸다.
“액션!”
“넌 이제 내 거야.”
시훈이 카메라를 향해 천천히 얼굴을 들이밀었다. 최 감독의 뒤에서 함께 지켜보던 별이는 그의 입이 점점 벌어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머!”
“컷!”
별이의 목소리 때문에 컷이 떨어지긴 했지만, 그녀는 그것도 생각 못 할 정도로 울상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주변의 촬영 스태프들 또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 마디씩 내뱉었다.
“아니, 무슨 키스를 저렇게…”
“입을 호랑이처럼 벌리기 있어요?”
“별이씨 각오를 단단히 해야겠는데?”
별이는 울상을 짓고 우현을 향해 구원의 눈빛을 보내며 그에게만 들리게끔 작게 속삭였다.
“너무 더러워요…”
우현은 웃음이 나오려 했지만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에 최 감독을 붙잡고 항변했다. 아무래도 시훈의 과한 연기를 진정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
“감독님, 이건 아닙니다. 너무하잖아요? 아직 신인 배우인데… 이게 무슨 에로영화도 아니고 저게 뭡니까? 무슨 입술을 잡아먹으려고 하는 거 같잖아요? 무슨 감정을 어떻게 잡았기에 저래요?”
시훈의 매니저는 얼굴이 벌게져서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리고 최 감독은 곧장 시훈에게 달려가 얼마나 오버하고 있는지, 그리고 상대 여배우가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 찬찬히 설명해줬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얼굴이 빨개진 그는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연신 허리를 숙였다. 이윽고 기름기를 많이 뺀 그와 별이의 마지막 키스를 끝으로 촬영의 마지막을 선고했다. 별이는 그제야 얼굴에 웃음기를 보였고 무사히 끝난 촬영에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문득 우현은 은하의 첫 키스씬을 다시 떠올렸다. 그때, 상대 남자배우를 혼쭐 내놓고 보무도 당당하게 차에 올랐던 그녀는 우현의 품에서 한참 동안 울었더랬다. 괜히 코끝이 시큰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