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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 만찢남을 아십니까?(4)
“대표님, 이쯤 되면 제가 의심해도 이상하지 않은 거죠?”
별이가 짙은 의혹을 담은 눈빛으로 우현을 쏘아보았고 그는 차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피해버렸다.
“크흠… 일단 가서 카메라랑 동선 체크해. 대사 맞춰보고.”
“어째 쫓아버리는 거 같네요?”
“아니, 기분 탓이야.”
“으음…”
별이와 최 감독을 쫓아버린 우현은 커피 트럭을 쏘아보았다. 트럭 문구 옆에 붙어 있는 은하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활짝 웃고 있었다.
지이잉!
마치 보고 있던 것처럼 은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뭐 하는 짓이야?”
짐짓 화를 냈다. 하지만 그녀는 무슨 말이냐는 듯 도리어 우현을 바보 취급했다.
“무슨 말이야? 아… 혹시 촬영장에 커피트럭 보낸 것 때문에 그래? 그거 우리 회사 계열인 K보이즈의 유시훈이 웹 드라마 시작한다고 해서 보낸 거야. 오버하기는…”
할 말이 없어진다. 자기네 회사도 아니고 회사 계열사의 가수가 드라마 출연하는데 커피트럭을 보내준다? 은하를 알고 있는 사람이면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라고 말할 것이다.
분명 유시훈이 누군지도 관심 없을 게 분명하지만 따지고 들 수도 없는 노릇이다. 참고로 은하는 성격은 더러운 주제에 음악은 꼭 클래식을 듣는다. 이유는 아직도 모른다.
“그럼 왜 나한테 전화했어?”
“그냥. 오빠 이번에 웹 드라마 한다기에 잘 해보라구.”
“이런 것까지 신경 쓰다니, 한가하구나?”
“아니? 바쁜데? 나 지금도 인천공항이야. 이탈리아로 잡지사 화보촬영 가거든. 그리고 신경 쓴 거 아니야. 회사에서 하도 귀에 못이 박히게 떠들어대니 모를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그 자리에서 커피 트럭 보낸 거야. 보내고 나니까 오빠 생각이 나더라구. 내 생각하면서 잘 마셔.”
“네 생각하면 커피가 목에 넘어 가겠냐?”
“튕기기는… 어차피 마실 거 뻔히 아는데… 그리고 혹시 강소연이 꼬리쳐? 회사에 이상한 소리가 들리던데?”
여기서 말실수했다가는 어디서 벼락이 떨어질지 모른다. 우현은 최대한 그녀가 흥분하지 않는 단어를 찾아가며 답했다.
“꼬리를 친다고 하면 좀 그렇고… 그냥 샵을 옮긴 것 같던데? 그리고 강소연이 왜 나한테 관심을 보이겠어. 안 그래?”
“흥! 내가 오빠 목소리만 들어도 거짓말인지 아닌지 단박에 알아채는 거 잊었나봐? 보아하니 오빠한테 살살 꼬리를 흔들었나 본데, 그년한테 넘어가기만 해봐.”
우현은 괜히 울컥했다.
“너 웃긴다. 좀 넘어가면 어떠냐? 나도 회사 커지면 좋아. 솔직히 강소연 들어오면 투자금이 얼마나 들어올 거 같아? 나 당장 밴도 뽑아줄 수 있어. 아니다, 생각해보니까 당장 넘어가야겠는데?”
“진짜 이럴 거야?”
그녀의 말투가 급격히 싸늘해지자 우혁은 위축되고 말았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기죽을 수는 없는 노릇.
“네가 날 떠났을 때부터 정해진 수순이지. 또 다른 톱스타를 키우고 충분히 경쟁력 있는 톱스타를 영입해오는 거. 당연한 거 아냐? 나 지금 오피스텔도 빼고 고시원에서 살아. 계속 이렇게 살아야겠냐?”
“내가 나쁜 년이다 이거지?”
“그러면 내가 나쁜 놈이냐?”
울컥한 우현이 소리 질렀다. 그리곤 곧바로 주위를 둘러보고서 황급히 차 안으로 들어갔다. 싸워도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싸워야 한다.
“알았어. 일단 갔다 와서 얘기해.”
“갔다 오긴 어딜 갔… 여보세요? 여보세요? 야! 유은… 아… 진짜, 꼭 자기 할 말만 하고 끊네.”
우현은 나가서 그녀가 대령한 커피트럭에서 달콤한 라떼를 얻어먹으며 별이가 촬영준비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물론 끝까지 안 마셨다고 우길 생각이다.
“요즘은 트럭에서 파는 것도 맛있네.”
오늘은 첫 촬영인데 뚱뚱한 몸에서 날씬해진 후 겪게 되는 에피소드가 담긴 씬이다.
웹 드라마라 대본 리딩이 없기에 사실상 첫 만남이나 마찬가지라서 최대한 깔끔한 모습으로 촬영하는 것이고 내일부터는 뚱뚱하게 분장해야 하는 고된 씬이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한창 대사 외우고 카메라체크부터 해야 할 남자주인공이 나사가 빠진 것처럼 실실 쪼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 형! 내가 이 정도라니까.”
유시훈은 실실 쪼개며 자기네 매니저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손에 들린 대본을 보니 새하얗고 빳빳한 것이 갓 잡아 올린 활어처럼 신선했다. 대본 연습도 얼마 하지 않은 것이다.
‘미친 건가?’
순간 우현은 진심으로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대본을 차에서 가지고 와서 다시 읽어보았다. 그러니 유시훈이 저렇게 여유를 부리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대사가 얼마 없었던 것이다. 평소 말이 별로 없는 과묵한 캐릭터로 나오는지라 별이와 대사를 칠 때도 몇 마디 내뱉는 게 없었다.
‘그래도 좀 너무한데?’
아무리 그래도 첫 촬영이고 연기도 얼마 해 본적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저렇게 여유부리다가는 그 몇 마디 없는 대사도 제대로 못 할 것이 뻔했다.
“감독님 쟤 연기 좀 해봤데요?”
우현이 최 감독에서 슬쩍 말을 건넸다.
“뮤직비디오는 몇 번 촬영해봤다고 하고 제대로 된 연기는 이게 처음이라고 들었어요. 그래도 연기 학원에서 꽤 연기를 해봤다고 하기에 한 번 봤더니 곧잘 하더라구요. 그런데… 오늘 좀 들떴네요.”
최 감독도 정신 못 차리고 매니저와 히히덕거리는 그를 발견하곤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가서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이건 최 감독이 잘 하는 거다.
촬영 전에 연기자의 태도로 잔소리를 하는 건 대단한 실수일 수 있다. 그것으로 긴장을 푸는 사람도 있고 막상 슛 들어가면 귀신에 씐 것처럼 사람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으니까. 초보 감독이 그러다 개쪽 당하는 경우가 아주 가끔 있다.
못 하면 그 때 혼내도 된다. 그리고 혼나도 카메라 앞에서 혼나야 정신이 번쩍 든다. 어지간한 또라이가 아니면 수십 명의 스태프와 단역 연기자 앞에서 NG를 반복하다보면 다음 촬영 때는 대본이 걸레가 돼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지금 전화 한 번 해봐?”
“너 전화번호도 모르잖아?”
“그래. 아! 형이 유은하 매니저 전화번호는 알 수 있잖아! 유은하 매니저한테 전화해보자. 은근히 기다리고 있을 거라니까?”
우현은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나직하게 한숨을 내뱉었다. 대충 뭐 때문에 저렇게 들떴는지 알았던 거다.
저 김치국을 원샷으로 드링킹하는 것들에게 은하의 거친 욕 한 사발을 들려주면 단박에 정신이 돌아올 것이지만 아쉽게도 지금쯤 비행기 안에서 안대를 하고 곯아떨어졌을 거다. 생긴 것과는 다르게 피곤하면 항상 코를 골았는데… 지금은 고쳤으려나?
저들은 촬영 스탠바이가 되기 직전까지도 은하 매니저의 전화번호를 알아내느라 한동안 부산을 떨어댔다.
“스탠바이 하겠습니다! 씬 15 다시 2, 하나, 둘, 셋!”
조감독의 슬레이트가 떨어지고 지금까지 푸근했던 인상과는 반대로 사납게 인상을 일그러뜨린 최철수 감독의 고함소리가 촬영장에 메아리쳤다.
“자! 레디! 액션!”
하늘색 짧은 원피스를 입은 별이가 유시훈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신은 하이힐의 또각 소리만이 복도에 울려 퍼졌다. 그러다 시훈의 앞에서 걸음을 멈춘 별이는 그의 얼굴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여기 잘생긴 분은 누구실까?”
“넌 뭐야?”
가늘게 떨리는 유시훈의 목소리. 붉은 립스틱을 바른 별이의 섹시한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긴장한 것이다.
“나? 내 이름이 궁금해? 미안하지만 이름은 쉽게 알려줄 수 없고… 혹시 모르지. 술 한 잔 사주면 이름 정도는 알려줄 수 있을 지도.”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속삭이듯이 말하는 별이의 연기에 그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화면에 비치는 별이는 시훈이 보는 모습 그대로 아찔하게 아름다웠다. 별이의 드러난 상의 사이로 그녀의 가슴골이 시훈의 눈에 가득 들어왔을 것이다.
“저거 흥분한 거 아니야?”
음향감독의 옆에 붙어 있던 스태프 하나가 소리를 죽이고 나직이 내뱉었다. 그 혼자만이 아니라 모두가 느꼈다. 여기서 끊어야 한다.
“컷! 잠깐만 쉬었다 갑시다!”
최 감독이 컷 싸인을 날리자 시훈이 숨을 들이마시며 호흡을 골랐다. 최 감독은 쓴웃음을 지으며 혼잣말로 작게 중얼거렸다.
“바지 앞섬이라도 튀어 나왔다간 바로 실시간 기사 뜨는 건데…”
유시훈의 첫 드라마 데뷔에 촬영장에는 그의 첫 연기를 담으려는 팬들과 기자들이 아주 멀리서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었다. 1키로 밖에서도 사정없이 땡겨 버리는 요즘 카메라에 그런 게 잡힌다면 시훈에게 평생 놀림거리가 될 수도 있을 거다.
“죄송합니다. 잠시만…”
우현은 최 감독에게 양해를 구하고 곧바로 별이에게 달려가 속삭였다.
“적당히 해라. 애 잡겠다.”
“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은 별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쨌든 살살 하라고. 이거 성인영화 아니잖아, 응?”
“너무 나갔어요? 아… 그래서 컷 싸인이 났구나… 나는 그냥 최대한 열심히 하려고 한 건데…”
“알아, 알아. 그래도 이건 10~20대가 주 타켓인 청춘물이잖아. 최대한 담백하게 해야지. 누굴 잡으려고…”
“알았어요. 최대한 담백하게…”
그녀에게 약간의 방향 조절을 해준 직후 다시 돌아오니 최 감독이 우현을 빤히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최대한 담백하게 하라고 했어요. 잘못 하다가는 K보이즈가 AV에 나오는 배우인줄 알까봐서요.”
“흐흐흐. 김 대표님 센스 있으시네. 시훈아!”
최 감독이 아직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불렀다. 대사가 몇 줄 되지 않아 편하게 하려고 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았다. 시훈은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최 감독에게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대사가 생각이 안 나서요. 주의하겠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뭐. 그래, 조금 더 시간을 줄까? 대사 더 외워야 돼?”
여기서 감독이 시간 줄까 묻는다고 진짜로 시간을 좀 더 달라고 하면 양아치다. 시훈도 그걸 아는지 극구 거절했다.
“아닙니다. 이번에는 잘 하겠습니다.”
“그래, 잘 해보자.”
다시 한 번 슛이 들어가자 이번에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던 시훈이 제법 그럴듯하게 별이의 도발을 받아 넘겼다. 그렇게 별이는 그를 유혹하려 하지만 돌부처처럼 꿈쩍 않는 그의 모습을 담아낸 최 감독이 컷 소리를 외쳤다.
“수고하셨습니다!”
우현과 별이가 최 감독 뒤에서 카메라에 찍힌 모습을 돌려보았다. 모든 남자들은 자신의 손아귀에 있다는 듯 거침없이 도발하는 그녀의 모습은 웹툰의 여주인공이 현실로 튀어나온 듯했다.
“제가 만찢녀 만들어 드린다고 했죠?”
최 감독이 우현을 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