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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9]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2)
“그럼요, 같이 일했던 친구도 있어요. 아!, 혹시 별이를…?”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별이도 놀라서 우현을 돌아봤다. 하지만 우현은 빙그레 웃으며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별이는 예능에 나가지 않습니다. 사실 저희 회사에 키우는 친구가 하나 더 있는데 이 친구의 보컬 실력이 진짜 저희 회사라서 이런 말 하는 게 아니라 정말 괜찮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실력도 안 되는데 밀어 넣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녹음실에서 녹음한 노래 3곡을 담은 CD를 드릴 테니 한 번 봐주셨으면 하는 게 제 바람입니다. 그리고 이건 녹음실에서 찍은 동영상인데 한 번 보시겠어요?”
“그래요.”
이주희 작가는 흥미로운 눈으로 우현의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이 작가는 이어폰을 꽂고 세 곡을 부르는 동영상을 끝까지 시청했다.
동영상을 다 본 이 작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하네요. 사실 저야 예능 작가를 하면서 많은 아이돌을 봐 왔기 때문에 잘 한다는 것만 알지 정확한 실력은 가늠하지 못해요. 그래서 제가 평가할 수 있는 건 그저 ‘잘한다’, ‘한 번 써보는 게 어떻겠느냐’ 이 정도예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복면노래왕’의 컨셉은 오직 편견을 버리고 목소리만으로 평가하는 거잖습니까? 그러면 적당한 사연도 필수적이구요. 이 친구는 별이처럼 3장의 앨범을 냈던 라라걸즈의 메인보컬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재능을 가지고도 빛을 못 봤죠. 하지만 이제 회사를 나와 혼자서 다시 도전해 보려 한다는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충분히 통할만한 이야기 아닐까요?”
“음… 그렇네요.”
“거기다 음악을 하는 것에 집안의 반대가 엄청나게 심했습니다. 그러다 이번에 부모님과 화해하면서 반대로 아버지가 그녀의 가장 열렬한 팬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매일 밤 12시까지 홀로 연습하는 딸을 위해 학교와 사무실, 집을 수시로 오가며 태워주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엠씨와 주고받는다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 그림이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요?”
“충분히 이야기가 되겠어요. 이런 정도면 제가 그리 부담가지지 않고 밀어줘도 되겠네요.”
사실 몇 번 본 적도 없는 사이에 몇 마디 달콤한 말로 마음을 샀다고 해도 이런 부탁을 쉽사리 들어주는 건 쉽지 않다. 그렇기에 우현이 녹음된 CD, 동영상은 물론 충분히 어필 가능한 스토리까지 만들어 준 것이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전에 유은하의 매니저였습니다. 은하의 첫 데뷔작부터 저와 은하가 헤어질 때까지 작품선택은 거의 제가 맡아왔죠. 찾아보시면 아시겠지만 어떤 작품도 흥행에 실패한 적은 없었습니다. 이 얘기가 어떤 의미인지는 아시죠?”
“놀라운 눈을 가지고 계시네요.”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시나리오 보는 눈은 꽤 정확하다고 자부합니다. 물론, 100% 정확한 건 절대 아닙니다, 운도 많이 따라줬죠. 만약 저와 함께 하신다면 이 작가님의 다음 작품에 상당한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아직 계약하지 않았잖아요?”
“계약이야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이 작가님도 저를 도와주셨으니 저도 도와드려야죠. 명함에 제 메일 있으니까 언제든지 시나리오 보내주시면 성심성의껏 제 의견을 적어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녀는 우현의 말을 완전히 신뢰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당연하다. 하지만 혼자서 작업하는 것보다 주변의 피드백을 받는 것이 시나리오를 쓰는데 훨씬 도움이 된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흔쾌히 동의했다.
그녀와 헤어져 별이와 함께 돌아오는 길. 살짝 삐친 별이의 목소리가 운전석 뒤로부터 들려왔다.
“대표님 미리 좀 알려주시지. 그랬으면 윤정이한테 응원도 해주고 그랬을 텐데요.”
“너는 연기에 집중해. 서로 응원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일단 자신들만의 길에 집중해야해. 너도, 그리고 윤정이도 잘 되면 그때는 같이 살아도 뭐라 하지 않을 테니까.”
“알았어요. 그런데 갑자기 ‘복면노래왕’은 어떻게 나온 거예요? 혹시 윤정이 싱글 제작 들어간 거예요?”
별이의 입장에서는 싱글을 제작하면서 홍보 목적으로 예능에 나간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아니고… 실은 네가 속해있었던 유디 엔터테인먼트에서 너와 윤정이를 빼오려고 시도했거든.”
“네? 진짜요? 어떻게 아셨어요? 아니, 그보다 우리 팀장님은 그런 사람 아닌데…”
우리 팀장이라는 걸 보니 전에 만났던 이해명 팀장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런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고, 어쨌거나 라라걸즈의 남은 멤버들을 부추겨서 윤정이를 꾀어내려 했어. 너와 함께 내 회사를 나오면 새 앨범을 내주고 대표 예능프로인 ‘달리는 사람들’과 ‘끝없는 도전’에도 출연시켜 준다고 말이야.”
“세상에… 대표님께서 아시는 걸 보면 윤정이가 넘어간 것은 아니겠네요?”
“응. 윤정이는 내가 걱정하지 않아도 전혀 갈 마음이 없었다고 하더라고. 하지만 윤정이의 마음을 떠나서 그것들이 괘씸해서 그냥 넘어갈 수가 없네. 이 바닥에도 상도의라는 게 있는데 양아치들도 아니고 좋게 내보낸 아이들을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그러면 안 되지.”
“그럼 이번에 ‘복면노래왕’에 출연하는 건 유디 엔터에 일부러 보여주기 식으로 하려는 거예요?”
“그런 마음으로 하는 거지만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이왕 예능에 나가는 김에 윤정이 이름도 알리는 기회로 삼으려고. 단, 알아둬야 할 건 배우가 가야 할 길과 가수가 가야 할 길은 달라. 그래서 윤정이는 앞으로 예능에 출연할 기회가 된다면 꾸준히 출연시킬 생각이야. 하지만 너는 안 돼. 이유는 알지?”
“네. 저도 이해해요.”
“길게 봐야해. 예능 프로 몇 개 나간다고 돈 되는 거 아니야. 고정이나 돈 많이 주지, 게스트는 돈도 얼마 못 받아. 배우 몸값이 얼만데, 그런데서 이미지를 소비해서야 되겠어? 너도 알지? 요즘 한창 잘나가는 걸그룹인 ‘엔젤소녀들’의 윤설.”
“대한민국에서 윤설 모르면 간첩이죠.”
“윤설이 한창 뜨기 시작할 때 CK텔레콤을 비롯해서 온갖 CF를 섭렵하고 안 나오는 데가 없었잖아. 만약 그렇게 빨리 이미지를 소비하지 않았으면 지금보다 훨씬 잘 될 수 있었어. 물론 걔가 다른 남자아이돌하고 열애설이 터지면서 더 빨리 식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소속사가 너무 빨리 팔아먹으려고 들었거든.”
“아… 저는 그냥 인기가 많아서 많이 나오는 줄 알았는데…”
“회사 입장에서는 걸그룹 키우는데 돈이 많이 드니까 일단 떴을 때 많이 뽑아먹자고 몸값도 싸게 후려쳤지. 그렇게 조금이라도 더 벌어들이려고 안달을 하니 윤설 이미지만 소비되고 말았고. 참, 안타까워.”
“만약 대표님이 윤설 회사의 대표였다면 더 크게 키울 수 있었을까요?”
백미러로 보이는 별이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났다. 은근히 자신과 비교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줘? 윤설, 나였다면 걸그룹 안 시켰어. 전에 윤설이 영화제에 참석한 적이 있었거든. 그 때 걔가 아이보리색 드레스를 입고 레드카펫에 나타났는데 그 영화제에 참석했던 상당수 여배우들의 빛이 죽어버렸어. 몇몇 톱스타들이 아니고서는 옆에 서지도 않으려고 할 정도였지. 팬들은 물론이고 영화 관계자들도 다들 윤설에 대한 이야기밖에 없었어. 연기력이 부족하다? 연습으로 어느 정도는 따라잡을 수 있어. 하지만 그런 아우라는 연습으로 안 돼. 그리고 솔직히 김태연이 연기 잘한 적 있었니? 전지수가 연기로 톱스타가 됐어? 고소진은? 물론 은하처럼 연기까지 될 때 진정한 톱스타가 될 수 있겠지. 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톱스타는 연기로 되는 게 아니야. 그냥 타고나는 거야. 너처럼.”
반전 아닌 반전에 별이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좋아 죽으려 했다.
“우히히! 역시… 우리 대표님 최고!”
“당연하지. 어쨌거나 윤설 같은 그런 친구를 걸그룹 시킨다고 벗겨놓고 춤이나 추게 했으니… 연기에만 몰두했으면 더 크게 됐을 텐데. 참 멍청하지?”
“그 회사 대표님은 왜 그랬던 걸까요?”
“돈에 환장했으니까. 더 크게 봤으면 훨씬 큰 돈을 벌 수 있었을 텐데 지금 당장 몇 푼 벌어 보려고 하니까 그런 거지.”
“그렇구나.”
“남 이야기는 이쯤 하고, 어쨌거나 윤정이를 ‘복면노래왕’에 선보이는 것으로 유디 엔터에 대한 응징과 윤정이의 이름을 알리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아보려는 거지. 안 되면 할 수 없고.”
“그래도 아까 이 작가님께서 자신 있어 하시던 눈빛이던데요? 잘 될 것 같아요.”
“그래야지. 그건 그렇고 너도 혹시 라라걸즈 멤버들한테서 연락 오면 단호하게 끊어야 한다. 아예 받지 말라는 게 아니라 걔네들에게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면 단호하게. 응?”
“걱정 마세요. 제가 가장 언니였잖아요.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저 자신 있는 표정을 보니 믿어도 될 듯싶다.
“그래, 믿는다.”
별이를 집에 데려다 주고 사무실로 돌아와 윤정의 연습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학교가 끝나면 곧바로 보컬 선생님에게 가르침을 받고 그 이후부터는 회사 연습실에 상주하며 끊임없이 연습에만 몰두했다.
“걔네들에게서 또 연락은 없었니?”
“사실 계속 연락오고 있어요.”
“그래서, 뭐라고 그랬어?”
“저도 그렇고, 언니도 유디 엔터로 돌아갈 생각은 없다고 했죠.”
“그랬더니? 그냥 알았다고 하디?”
“좀… 힘들긴 해요. 문자 보내도 제가 씹으니까 SNS에 욕하기도 하고…”
“너 SNS하니? 그거 당장 접어라.”
“네? 꼭 그래야 해요?”
윤정이는 두 손을 꼭 모으며 간절하게 원했지만 우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연예인의 SNS는 득보다 실이 많아. 네가 충분할 만큼의 지식과 교양이 갖춰지기 전까지는 절대 허락할 수 없어.”
연예인들이 SNS 잘 못 사용해서 욕먹은 사례는 거론하기도 벅찰 만큼 무궁무진하게 많다. 퍼거슨 감독의 ‘SNS는 인생의 낭비다’라는 명언이 가장 잘 들어맞는 직업이 연예인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어쨌거나 우현은 윤정의 핸드폰을 뺏어 온갖 SNS 계정을 탈퇴시켰다. 그리고 라라걸즈의 남은 멤버들에게서 온 문자를 살펴보았다.
“대표님, 이건 사생활 침해라구요.”
“인정. 하지만 이건 너만의 문제가 아니라 회사 대 회사의 문제야. 다른 건 안 볼 테니까 이건 넘어가줄래? 이건 내가 꼭 알고 있어야 하는 문제니까 말이야.”
“네.”
SNS 계정이 강제로 탈퇴돼서 그런지 윤정은 살짝 삐친 듯했다. 하지만 우현은 애써 무시했다. 결국 윤정이는 아빠가 데리러 올 때까지 우현의 시선을 피하며 그의 행동이 부당함을 어필했을 뿐이다.
이후로 별이의 스케줄이 없는 관계로 회사 연습실에는 별이와 윤정, 이 둘이 함께 했다. 한쪽에서는 노래를 부르고 한쪽에서는 연기 연습을 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을 때, 이 작가에게서 연락이 왔다.
“제 연락 기다리셨죠?”
이 작가의 목소리에 담긴 즐거움을 느낀 우현은 직감적으로 일이 잘 됐다는 걸 알았다.
“그럼요. 목이 빠지게 기다렸습니다.”
“별이가 출연한 단막극 ‘옆집 남자의 정체’ 방영일이 떴어요. 다다음 주 일요일이에요. 밤 11시에 하는 건 알죠?”
“그럼요. 원래 그 시간에 하는 거 알고 있습니다.”
언젠가 사라졌던 단막극이 다시 부활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관심이 떨어져서 광고도 붙지 않는 단막극을 좋은 시간대에 편성해줄 수는 없기에 일요일 밤 11시에 방영한다.
“원래 FD가 알려줘야 하는 건데 알려줄 게 하나 더 있어서 제가 연락한다고 했어요.”
“윤정이, 된 겁니까?”
“네. 윤정씨 ‘복면노래왕’ 녹화 잡혔어요. 2주 후부터 세션과 연습 있고 한 달 뒤에 녹화예요. 자세한 사항은 그쪽 작가가 연락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