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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8]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1)
너무나 순수한 윤정의 말에 저들이 얼마나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설명하려 했던 우현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만 같았다.
“크흠… 그렇게 얘기해 주니까 엄청 감동인데?”
“그렇죠? 히히!”
우현은 그래도 윤정이 알아야 할 것 같아 하려던 말을 이어갔다.
“내가 전에 별이를 유디 엔터에서 데리고 나올 때, 계약서를 찢고 각서를 썼거든. 그래서 그쪽에서 합법적으로 별이를 데리고 올 방법이 없을 거야. 그런데 네가 계약하면서 계약 기간을 명시하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은 거지. 그래서 너와 별이를 데리고 라라걸즈의 나머지 멤버들을 충동질한 거 같아.”
“차라리 쟤네들도 나처럼 오디션을 보게 해달라고 했으면 대표님께서 뽑아주셨을까요?”
우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닐걸? 원래 너도 안 뽑으려고 했어. 그런데 생각 이상으로 네 목소리가 좋아서 뽑았던 거지. 그리고 더 이상 뽑아봤자 우리 회사에서는 감당이 안 돼. 일단 별이랑 너부터 띄워야지.”
“솔직히 조금 미안하기는 하거든요. 같이 고생했던 친구들이라서…”
그럴만했다. 윤정이를 비롯해 라라걸즈 멤버들은 아직 사회생활도 못 해봤고 친구들과의 유대감이 한창 강할 나이니까. 그러니 직접 얘기하지 않고 같은 멤버들을 시켜 회유하려 했던 것이다. 이 방법이 가장 효과도 좋고 뒷말도 없다.
“도와주고 싶니? 원래 인생은 독고다이다. 혼자 사는 거야. 정 도와주고 싶으면 일단 너부터 성공해. 그럼 친구들 도와줄 수 있어.”
“꼭 성공해서 그 친구들도 도와줄래요.”
“그래.”
윤정이는 그 후로 한참을 더 연습했다. 밤 12시가 돼서야 윤정이 아빠가 그녀를 데리고 갔다.
혼자 남은 우현은 뒤로 크게 젖혀지는 가죽의자에 앉아 윤정의 말을 곱씹었다. 자신을 믿고 이곳에서 꼭 성공하겠다는 그녀의 말은 생각 이상으로 그에게 감동으로 다가왔다.
우현은 단 한 번도 자신이 데리고 있던 배우를 믿어본 적이 없었다. 회사에 처음 입사했을 때도 소속 연예인들을 절대 믿지 말라고 배웠다. 또한, 이미 우현은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마음을 닫아왔다. 그래서였는지 모른다. 은하와의 관계가 그렇게 틀어진 것이.
별이와 윤정은 아직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믿어준다고 한다. 우현은 지금까지 자신을 믿어준 이는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시골로 내려간 전 대표밖에 없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그게 아니었다. 생각 밖으로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가만히 있는데도 입꼬리가 슬며시 위로 향했다. 인정과 신뢰를 받는다는 게 이토록 기분 좋을 줄 몰랐다. 오직 성공만을 바라보며 달렸던 것이 후회됐다. 지금 느꼈던 기분을 전에도 느꼈다면 은하를 그렇게 떠나보내지 않았을 거다.
‘나쁜 년, 지금쯤 와인에 치즈 한 조각 하면서 고상 떨고 있겠네. 소주를 더 좋아하면서…’
갑자기 은하가 보고 싶어졌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항상 자신에게는 미소만을 보여주었는데… 하여튼 나쁜 년이다.
그러다 문득 유디 엔터에 대한 생각이 미치자 눕다시피 했던 의자에서 벌떡 허리를 세웠다. 잠시 잊고 있었는데 스멀스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걸 어떻게 엿을 먹이지?’
한 방 먹여주고 싶은데 도무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특히 그들의 소속사가 가수 전문이라 우현과는 접점도 없었다.
사실 별이에다 윤정이까지 대박이 나면 그게 가장 최고의 복수이긴 한데 사람 마음이 또 그게 아니라서 뒤통수를 크게 한 번 때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들이 또 다시 일을 꾸미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고. 한 시간 넘게 서성이며 고심하던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스쳐 지나갔다.
‘그거다! 이주희!’
마음을 정한 우현은 다음날 아침에 별이를 촬영 현장에 데려다 주고 차에 앉아 전화를 걸었다.
“어? 대표님?”
“윤정아, 전에 녹음했던 곳 기억나지? 혹시 혼자 갈 수 있겠니?”
“그럼요, 제가 애도 아니고…”
“그럼 내가 말해 놓을 테니까 가서 네가 제일 잘 부를 수 있는 노래 세곡 정도를 녹음해. 핸드폰이나 뭐 다른 걸로 동영상도 촬영해서. 무슨 말인지 알겠니?”
“제 곡으로요? 아니면 다른 노래로요?”
“네 곡 말고, 대중가요로.”
“팝도 돼요?”
“팝도 부를 줄 알아? 그러면 한 곡 정도는 팝으로 불러도 되는데 그래도 두 곡은 가요로 불러. 잘 불러야 한다, 알겠지?”
“알았어요. 그런데 뭐 때문에 부르는지 물어봐도 돼요?”
“아니, 너 실망할 수도 있어서 그냥 시험 삼아 부른다고만 생각해. 잘 되면 그 때, 알려줄 테니까.”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대표님.”
“고맙긴, 내가 하는 일이 그건데. 하여튼 잘 불러.”
“에헴! 제가 오랜만에 실력 좀 발휘해 볼게요, 흐흐.”
전화를 끊은 우현은 전에 녹음했던 녹음실의 엔지니어에게 전화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바로 모바일뱅킹으로 비용을 송금했다.
이번 녹음은 엔지니어가 건드리면 안 되는 일이기에 엔지니어 비용을 제외한 녹음실 사용료만 보냈다. 하지만 그 비용도 40만원이나 돼서 다시 한 번 그의 허리를 휘청이게 했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남은 건 이주희 작가를 만나는 것. 그녀는 마지막 촬영일인 내일 나타날 것이기에 오늘은 윤정이가 최상의 상태로 녹음을 마치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이현민은 어제 우현에게 된통 당해서 그런지 별다른 사고나 소동 없이 조용하게 촬영을 진행했다. 별이에게 듣기론 상당히 진지하게 촬영에 임해서 오히려 자신이 놀랐다고 했다.
평소 그의 성격이었다면 이현민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을 것이지만 별이가 자신을 믿고 있다는 말이 떠올라 이번에는 그녀를 믿어보기로 했다. 그래서 촬영 중간의 쉬는 시간에도 굳이 별이와 이현민을 감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별이는 우현이 걱정할까봐 계속 차에 들락거리며 현장의 일을 세세하게 보고하고 쉴 새 없이 쫑알거렸다.
별다른 사고 없이 촬영을 무사히 마치고 코디와 별이를 집에 데려다준 후 사무실로 가니 윤정이 우현이 올 때까지 다소곳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시디와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우현은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간이 의자를 들고 윤정의 연습실로 가 그녀의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컨디션은 좋았어?”
“요 근래 감기기운이 조금 있었는데 아주 다행히 오늘 다 나았거든요. 운이 좋았어요.”
“그래? 다행이네.”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재생하자 녹음실에서 헤드폰을 쓴 윤정의 모습이 보였다. 총 세곡의 노래를 부르는데 과연 우현의 눈이 정확했다고 느낄 만큼 대단했다. 음색은 감미로웠고 고음은 깔끔했다. 특히 목소리에 힘이 있어 그녀 특유의 녹아들게 하는 감성이 귀에 쏙쏙 박혀 들었다.
“좋네.”
“좋아요?”
윤정은 이제 우현의 눈치를 보지 않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만큼 자신감이 생겼다는 뜻이리라.
“난 보컬트레이너도 아니고 전문가도 아니야. 하지만 그럼에도 내 귀가 틀렸던 적은 없어. 믿기지 않겠지만, 그래. 아주 좋아.”
“전 믿어요.”
믿는 게 아니라 믿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래, 조금 답답하겠지만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봐.”
다음 날, 모든 촬영이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컷! 수고 많으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우 피디의 컷 소리가 촬영장에 울려 퍼지자 마지막 씬 촬영이 끝났다는 것을 안 우현이 차에서 내렸다. 이현민은 뭐가 그리 바쁜지 휑하니 사라져버렸고 우 피디는 그의 밴까지 따라가 배웅 아닌 배웅까지 했다.
“사고가 있기는 했지만 잘 마무리가 됐네요.”
우현은 환하게 웃음을 보이는 우 피디에게 손을 내밀었다.
“김별씨의 연기가 좋았습니다. 앞으로 또 볼 날이 있으면 좋겠네요.”
우 피디도 우현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우현은 우 피디의 뒤에 서 있는 이주희 작가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마지막 촬영이라고 현장에 나와 있었다.
“좋은 작품 같이해서 영광이었습니다.”
“어머! 무슨 그런 과찬을 하세요.”
“과찬 아닙니다. 정말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그녀는 우현의 칭찬에 좋아서 어쩔 줄 모르며 손을 꽉 잡았다. 생긴 것과는 다르게 의외로 아귀힘이 좋았다.
우현은 품속에서 명함을 두 개 꺼내 하나는 우 피디에게 주고 하나는 이 작가에게 주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우 피디가 자신의 명함을 우현에게 주었는데 이 작가는 명함이 없는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여기에 연락처 적어주시면 제가 잘 간직하겠습니다.”
결국 우현의 명함에 그녀의 연락처를 받았다. 우현이 처음부터 원한 것은 그녀의 연락처니 목표를 달성한 셈이다.
근 몇 년 사이에 스타 작가들이 방송국을 떠나 매니지먼트사에 소속되는 일들이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다. 작가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인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능력은 있으되 아직 검증되지 않아 몸값이 낮은 작가를 영입하는 것은 애초에 우현이 회사를 처음 설립할 때부터 생각했던 바다.
“혹시 별다른 스케줄이 없으시다면 우리끼리 저녁 한 번 같이 하시죠?”
16부작 미니정도면 방송사에서 회식비가 지급될 것이지만 코딱지만한 제작비용을 아끼고 아껴 쓴 제작진 입장에서 회식은 언감생심이었다. 하지만 우현이 회식을 제안하니 다들 손들어 찬성했다.
근처 삼겹살집에서 고기를 구워먹는데 별이가 우현에게 슬쩍 다가와 속삭였다.
“대표님,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얼마 전에 네 영화 출연료 들어왔어. 돈 백 정도는 괜찮아.”
스태프들만 무려 서른 명이 넘기에 백만 원이 훌쩍 넘어갈 것 같지만 그래도 우현은 쿨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목적이 있었으니까.
우현은 모든 스태프들에게 별이를 잘 부탁한다며 한 잔씩 술을 주고받았다. 이건 상당히 중요한 일이다. 배우에게 언제 어느 순간, 악재가 닥칠지 모른다. 그런 일이 생긴다면 이들이 별이의 방패가 될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스타가 되더라도 결코 스태프들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
그의 이런 생각을 수백 번 귀에 딱지가 앉게 들었던 은하는 그 성격에도 결코 스태프와 사소한 마찰도 일으키지 않았다. 물론 스태프 이외의 사람들과는 큰 마찰을 쉴 새 없이 일으키긴 했지만…
식사가 모두 끝나고 헤어질 때쯤 우현은 은밀히 이주희 작가에게 커피 한 잔 하자고 제안했고 그녀를 태워 준다는 명목 하에 이 작가 집 근처 커피숍으로 향했다.
“저를 무슨 일로…”
그녀 입장에서 단막극이 다 끝난 마당에 굳이 불러서 무슨 할 얘기가 있을까 생각했을 것이다. 우현은 평소 그가 가진 작가에 대한 생각을 전하며 이 작가가 앞으로 크게 대성할 수 있는 작가라고 말했다.
단순히 재미있다가 아니라 다른 작가들과는 이런 부분이 다르고 이런 부분이 특출나다고 콕 집어서 말해주니 누가 들어도 립서비스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럼… 저와 계약을 하고 싶다는 건가요?”
“저도 당장 하고 싶지만 아직 회사가 영세하다보니까요. 별이가 조금 더 크면 이 작가님을 저희 회사식구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그녀는 첫 작품에 이렇게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받자 큰 감동을 느꼈는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리고 원래는 이 대화를 회사가 좀 더 커진 다음에 나누려 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겨서 피치 못하게 미리 자리를 마련하게 됐습니다.”
“제가 도와드려야 할 게 있나요?”
그녀는 눈치가 빨랐다. 그래서 우현은 한결 편한 마음으로 말했다.
“혹시 ‘복면노래왕’의 작가님들과 친하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