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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6] 단막극을 촬영하며(2)
“너 웃는 거 예쁘다. 괜찮아, 오빠 실물은 처음 보지? 우리 사진 한 번 찍자.”
이현민은 별이의 어깨에 한 쪽 팔을 걸치고 억지로 사진 한 장을 찍었다.
“표정이 이게 뭐야? 다시 한 번 찍자. 얼굴은 이쪽으로 조금 돌리고…”
“아니요, 지금 대사 외우고 동선 익혀야 돼서요.”
난처함에 어찌할 줄 몰라하는 별이가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그러자 그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잘 됐다. 나랑 대사 한 번 맞춰보자. 지금 어디 외우고 있어?”
그가 별이의 손목을 슬쩍 잡으며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 때, 우현이 그들 사이로 끼어들며 별이의 손목을 잡은 그의 손을 떨쳐냈다.
“한가하신가 봅니다? 대사는 다 외우셨어요? 이럴 시간이 없을 텐데?”
“어?”
우현이 별이의 앞을 막아서자 이현민의 눈 꼬리가 위로 치켜 올라갔다.
“뭐야? 매니저야?”
“그래, 매니저다.”
“뭐? 너 지금 뭐라 그랬냐?”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모든 스태프들이 달려왔다. 특히 남자 스태프들이 이현민과 우현을 갈라놓으며 말렸다.
“이 새끼가 지금껏 정신을 못 차리고 있네. 너 그러니까 지금까지 작품도 제대로 못하는 거야. 너 사고 친지 얼마다 됐다고 또 그러냐?”
“이 x팔! x새끼야! 너 다시 말 해봐!”
열 받은 이현민이 길길이 날뛰었다. 사태를 늦게 파악한 이현민의 매니저가 달려와 우현의 멱살을 잡으며 소리쳤다.
“너 이 새끼 미쳤어?”
“잘 됐네. 당신 이현민 매니저지? 지금 당장 기자한테 이현민이 벌인 일 한 번 까발려 줄까?”
그 순간, 우현의 멱살을 잡고 있던 매너저의 손이 스르륵 풀렸다.
“왜 쫄려? 계속 잡아봐! 그리고 이현민씨! 그 정도로 욕 처먹었으면 정신이라도 차려야 할 거 아니야? 은하한테 들이댈 때 불알 차이고 끙끙대던 동영상 한 번 뿌려줘? 어?”
둘의 사이를 말리려던 스태프들의 소리가 음소거라도 누른 것처럼 조용해졌다. 현장은 아주 잠시 적막감이 감돌았다.
“우.,. 웃기네! 야! 저 새끼 지금 거짓말 하는 거야!”
이현민이 자신의 매니저와 주변을 향해 항변했다. 하지만 우현은 그런 그를 비웃으며 이죽거렸다.
“흥! 웃기고 있네. 정소진이랑 사귀기 전에 은하한테 한 번만 만나달라고 애원했잖아, 남산 렉싱턴 호텔에서. 그 때가 대종상 시상식이었는데 기억이 안 난다고? 턱시도 입고 주차장 바닥을 구른 거 나만 본 줄 알아? 그 이후로 은하 얼굴도 제대로 못 쳐다봐놓고는 어디서 내 배우한테 껄떡거려?”
연달아 터지는 폭탄에 이현민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얼굴이 시뻘게져서 아무 말도 못 하다가 곧 길길이 뛰며 고소하겠다고 발광하기 시작했다.
“그래, 꼭 고소해라. 네 회사 대표한테 꼭 이야기해라, 어? 네가 안하면 내가 네 대표 김창환이한테 전화 한다! 알았어?”
우 피디는 사태를 어떻게든 진정시켜야겠다는 생각에 이현민을 껴안듯이 데리고 그의 밴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우현은 이현민과 그의 매니저까지 밴으로 사라지자 주위를 둘러보며 경고했다.
“지금까지 들었던 거 다 머릿속에서 지워버리세요. 못 들은 겁니다. 아시겠어요?”
“아, 그럼. 그럼.”
“당연하지. 누가 뭐라고 했어?”
“이현민이야 연기는 못 해도 성실한 걸로 알아주지. 걔가 한 여자만 바라보는 순정파라며?”
다들 우현의 사정을 알기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자리로 흩어졌다. 별이는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고여서 우현을 바라보며 걱정스레 말했다.
“죄송해요. 그냥 피하려고 했는데…”
“됐어. 자동차 사고가 방어운전 한다고 안 나냐? 상대방이 미쳐서 날뛰면 아무리 방어운전해도 소용없는 거야.”
“그래도 죄송해요.”
“괜찮아. 일부러 오버한 거야. 일단 차에 들어가서 마음 좀 진정시키고 대사 외우고 있어.”
우현은 일단 가만히 서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좋게좋게 하면서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솔직히 별이를 믿을 수 없었다.
웃기는 게, 남자연예인은 여자와 호텔에서 놀다가 걸렸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잠잠해지지만 여자연예인은 한 번 실수하면 몸값은 물론이고 이미지도 추락한다. 똑같은 실수를 해도 남자연예인 보다는 여자연예인에 대한 잣대가 엄격한 것이다.
만약 둘이 사귀다 엄한 사진이라도 찍히는 날에는 이현민이야 어영부영 넘어갈지 몰라도 별이의 연예계 활동은 끝장이라고 봐도 된다. 최소 이현민 팬들이 별이를 가만 두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오버인 것을 알면서도 미친개처럼 밀어붙인 것이다. 이건 이현민에게 한 경고임과 동시에 다른 남자배우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김별 매니저는 미친놈이니 건드리지 말라는…
이제 자신이 얼마나 또라이인지를 보여줬으니 사건을 수습하기만 하면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밴에서 이현민 매니저가 내리더니 우현에게 다가왔다. 그도 갑자기 상황이 커지면서 당황했는지 덩치는 산만한데도 불구하고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그럼 당신 배우 단속을 똑바로 하시든지요. 아까 별이한테 수작 부리는 거 못 보셨어요?”
“현민이 형은 그런 적 없다는데요?”
“웃기고 있네. 내가 다 봤구요. 어쩔 거예요? 내가 당신 대표한테 전화 할까요? 상황이 이러저러하니까 날 고소하든지, 별이 방송국 출연 다 정지시켜보든지, 뭐… 어디까지 할 수 있어요?”
“아, 이렇게 감정적으로 나오지 마시구요. 대표님이시잖습니까? 우리 이성을 가지고 차근차근 문제를 풀어가요.”
우현이 보통 미친놈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이현민 매니저가 결국 숙이고 들어왔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건데요?”
“일단 이렇게 사람들 많은데서 현민이형 개쪽 준 게 있으니까… 그냥 대표님이 사과하면 잘 넘어갈 것 같은데요.”
여기서 숙이고 들어가면 사람만 더 우스워진다. 이현민은 자신을 그냥 미친놈으로 볼 것이고 별이도 자신을 신뢰하지도, 무서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한 마디로 아무 대책 없는 x신, 또라이가 되는 것이다.
“그럴 순 없죠. 마음대로 하세요. 저희는 이 단막극 찍을 겁니다. 그쪽이 싫으면 빠지든가 하세요. 돈 많은 회사니까 위약금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이거 왜 이러십니까? 이대로 오늘 촬영 접을 거 아니잖습니까?”
“저한테 무리한 거 요구하지 마세요. 그 때도 은하가 알아서 처리해서 그냥 넘어갔구만…”
“그럼 이대로 촬영 접자 이 말입니까?”
“꼭 내가 사과 해야지만 촬영한다던가요? 그냥 하면 되잖습니까? 아니, 자기가 무슨 왕이야 뭐야? 이따위로 할 거면 내가 김창환 대표한테 전화 합니다.”
자꾸 자기네 대표 이름을 부르는 것이 못마땅했는지 그가 시뻘게진 얼굴로 소리쳤다.
“아, 전화 하세요! 해! 어디 한 번 해봐요!”
그는 우현이 못할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하지만 우현은 보란 듯이 전화번호 목록에서 김창환 대표를 찾아내 전화를 걸었다.
막상 전화를 걸자 그는 우현이 어떻게 번호를 알았는지 그것도 의아해했지만 곧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저 파인 엔터의 김우현입니다. 잘 지내셨어요?”
“파인 엔터 김우현? 유은하 매니저? 회사가 합병됐다는 소식은 들었어. 그러게 우리 회사로 오라니까… 그래, 웬일이야?”
김창환 대표는 세상 친근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현이 은하를 데리고 있을 때 김창환 대표와 여러모로 부딪힌 적이 많았다. 나중에는 김창환 대표가 우현을 인정하면서 관계가 회복되었고 여러 방법을 통해 우현을 스카웃 하려 했었다.
“제가 얼마 전에 다시 재기했습니다.”
“재기했다고? 다시 시작했어? 회사가 어딘데?”
“잃어버렸던 회사 이름을 다시 가지고 왔습니다. 제가 대표입니다.”
“이야… 이제 김 대표라고 불러야겠구만. 축하해.”
“감사합니다. 그런데… 일이 좀 생겼습니다.”
“무슨 일? 내가 도와줘야 하는 일인가?”
“사실 오늘 이현민이랑 저희 회사 여배우랑 단막극 하나를 찍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현민이 저희 배우한테 수작을 걸어서 제가 또라이 짓을 좀 했습니다.”
“하… 그래서?”
그는 언제 친근하게 굴었냐는 듯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아무리 그가 SR미디어 엔터테인먼트 대표라고 하더라도 이현민의 문제는 쉽게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잠시 주춤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현민이 벌어다주는 돈은 상당했으니까.
“지금 촬영을 하네 마네 하면서 제가 사과하기를 바라더라구요.”
“그깟 사과 좀 한다고 입이 닳아 없어지는 건 아니지 않아?”
“입이야 멀쩡하겠지만 제 체면이 깎이죠.”
“이제 한 회사의 대표라 이거지?”
“그렇지 않습니까? 저도 먹고 살아야죠. 한 번 봐주시죠. 옛 정도 있는데 말입니다.”
“하하하, 우리가 옛 정이 있기는 했나?”
“설마 저에게 진 빚을 까먹으신 거 아니시죠? 그걸로 퉁치고 이쯤에서 마무리 하는 게 어떻습니까?”
“흠… 이거 참, 후회하지 않겠지? 알겠네. 그럼 어디 잘 해봐.”
전화가 끊겼다. 보지 않아도 전화기 너머로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는 모습이 동영상처럼 그려졌다.
“처리했으니까 어디 기다려봅시다. 당신네 대표가 이현민한테 무슨 말을 하는지.”
우현이 팔짱을 끼고 이현민의 매니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우현이 진짜로 자신의 대표와 협상을 했다고는 믿을 수 없었다. SR미디어 엔터의 김창환 대표가 어떤 사람인가? 맨손으로 시작해 국내 배우계를 양분하는 거대 매니지먼트사를 일으킨 장본인이다.
그런 사람이 일개 중소 매니지먼트도 안 되는 구멍가게 수준의 대표와 말을 주고받는다는 것도 믿기지 않았고 그가 하는 말을 고스란히 들어준다는 것은 더더욱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10분 정도가 흐른 후, 이현민의 밴에서 우 피디와 이현민이 내렸고 그것을 본 그의 매니저가 곧장 그에게 달려갔다. 이현민은 그의 매니저를 본체만체 하면서 우현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대단하신 빽을 두셨어? 부모님이 장관이라도 하시나?”
“그건 알 필요 없구요, 더 이상 수작 부리지 말기 바랍니다. 똑똑히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우현은 그에게 경고하고는 바로 자리를 떠 자신의 차로 돌아왔다. 그를 더 자극하면 우현이 처리할 수 없을 정도로 곤란한 일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나와, 연기해야지.”
“어? 잘 처리 됐어요?”
별이는 자기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됐다고 생각했는지 눈이 퉁퉁 불어 있었다. 그 모습에 우현이 직접 그녀의 눈 화장을 고쳐주었다.
은하를 데리고 있을 때, 처음에는 회사에서 코디도 제대로 붙여주지 않은 신인이었기에 메이크업 아티스트에게 직접 화장을 배웠었다. 그래서 현장에서 틈틈이 무너진 화장을 고쳐준 일이 많았는데…
“지금도 이러고 있을 줄은 몰랐네.”
“네?”
“아니야, 나가면 이현민이 촬영 대기하고 있을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연기에만 집중해. 절대 티내지 말고. 물론 또 그딴 수작을 부리면 그 새끼 불알을 걷어 차버려.”
“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해결했어요?”
“이현민 회사 사장한테 직접 연락했거든. 하필 걔네 사장이 내가 아는 사람인데 나한테 빚 하나를 갚을 게 있었어. 그걸로 퉁쳤지.”
“그게 뭔데요?”
“비밀!”
“칫…”
그제야 별이의 얼굴에서 밝은 미소가 번져 나왔다. 그 미소를 보자 미안해졌다. 그녀를 믿지 못했다는 것이…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은 한 번도 자신의 배우를 믿었던 적이 없다는 걸.
“미안하다. 사고를 내가 치고 말았네.”
“뭐… 사람이 살다보면 실수할 수도 있죠. 걱정 마세요. 제가 연기로 팍! 죽여 버릴 테니까.”
그녀는 언제 울었냐는 듯 천사처럼 웃고는 볼을 크게 부풀리며 불끈 쥔 주먹을 우현의 눈앞에 흔들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