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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5] 단막극을 촬영하며(1)
그날, 돌아오면서 별이는 소연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냐고 물었지만 우현은 별 얘기 아니었다며 말하지 않았다.
그로서도 고민이 될 수밖에 없다. 분명 그녀가 회사로 들어오게 된다면 큰 수익을 가져다 줄 것이 분명한데, 그렇게 되면 별이에게 집중할 수 없다. 그녀의 성격상 자신에게 올인하기를 원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게다가 그녀가 알려준 강벽두 전 부사장의 마이더스 고문 행은 분명 회사 합병에 그가 관여했음을 암시했다. 이걸 캐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그것도 고민이다.
때문에 그날 이후, 우현은 별이가 출연할 단막극 ‘옆집 남자의 정체’에 정식 캐스팅될 때까지 머리를 싸매고 고심해야 했다. 물론 고심한 후에도 정답은 나오지 않았다.
피디, 작가와 사전미팅 하는 날, 별이를 데리고 여의도의 한 식당으로 출발했다.
“상대역이 이현민이라는 얘기는 들었지?”
“네, 믿기지 않아요. 세상에… 이현민이라니… 말도 안 돼.”
그녀는 감격에 겨워 어쩔 줄 몰라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이현민이 왜 한 동안 작품을 쉬었는 줄 알아?”
“아니요, 왜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작년 초에 드라마 ‘태양 가까이’를 촬영하다가 정소진이랑 사귀게 됐어.”
“어머어머! 그런 기사 못 봤는데?”
“그럴 거야. 양 소속사에서 기를 쓰고 막았거든.”
“그런데요?”
“한 달쯤? 사귀다가 헤어졌어. 그런데 왜 헤어졌는지 알아?”
“왜요?”
“정소진이랑 사귀다가 연기지망생이랑 바람이 났거든. 그리고 하필 그 여자를 임신시켰네?”
“헐… 대박… 미쳤다.”
“걔가 지금까지 드라마를 하면 상대 배우랑 꼭 사귀었는데 어떤 것은 기사가 나기도 하고 어떤 것은 기사가 안 나기도 했어. 그런데 그 사건이 터지고 나서 이현민이 나온다고 하면 상대 배우 소속사에서 출연을 번복했어. 왜 그랬겠니?”
“이현민이랑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요.”
“그렇지?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이 단막극에 출연해야 돼. 최 감독이 부탁한 거니까. 그럼 너는 어떻게 해야겠어?”
“이현민과 사고치지 않는다.”
“맞았어. 내가 처음으로 너한테 경고하는 거야. 절대로 이현민과는 사적으로 한 마디도 주고받지 마. 무슨 말을 하고 싶으면 제 3자를 옆에 두고 해. 핸드폰 번호 줬다가는 나와는 그대로 결별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네, 알겠습니다.”
그녀도 심각성을 인지했는지 진지하게 답했다. 그렇게 그녀에게 경고를 단단히 하며 운전하니 어느새 약속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식당에는 이미 두 명의 사람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우상민입니다.”
이번에 입봉한다던 피디는 30대 중반의 남자였는데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고 살았는지 벌써부터 머리 중앙의 머리카락이 듬성듬성했다. 그걸 보니 왠지 모르게 그를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였다.
“반가워요. 극본을 맡은 이주희예요.”
상당히 젊어 보이는 여자가 손을 내밀었다. 검은색 뿔테안경에 대충 입은 티와 청바지를 보면 방송국 작가실에서 방금 자다 나온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신인배우 김별입니다.”
별이는 언제나처럼 밝게 웃으며 허리를 숙이고 인사했다.
“대본은 읽어 보셨어요?”
“네, 받자마자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어요. 엄청 재미있더라구요. 특히 여주인공이 탐정처럼 옆집 남자를 추적하고 의심하는 게 너무 웃기고 매력적인 것 같았어요.”
“잘 보셨네요.”
자신의 대본을 꼼꼼하게 읽고 칭찬해주자 이주희 작가는 흡족한 듯 미소 지었다. 사실 우현도 그 재수 없는 난봉꾼 때문에 이 단막극을 하기 꺼려졌지만 대본을 받아서 읽자마자 어쩌면 잘 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일단 저 입봉하는 피디의 실력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본이 좋았다. 천편일률적인 로맨스를 벗어나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새로움을 찾고 거기서 상당한 재미를 뽑아낼 수 있다는 것은 작가의 역량이 상당하다는 것을 엿볼 수 있었다. 특히 날선 듯하면서도 위트를 더한 대사가 마음에 들었다.
전에도 말했듯이 피디의 능력이 아무리 좋다 해도 드라마의 흥행을 결정하는 건 작가의 역량이 90%다. 캐스팅은 오직 1, 2회 시청률정도에만 관여할 뿐이다. 아무리 발연기가 문제라고 해도 스토리가 좋으면 그 발연기하는 연기자의 멱살을 잡고 끌고 갈 수 있는 게 바로 작가의 힘이다.
그래서 오늘 우현은 이주희 작가와 친분을 다지는 걸 오늘의 목표로 삼고 나왔다. 고작 단막극 하나 하고 끝낼 분(?)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식사를 마친 그들은 근처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겨 이번 단막극에 대한 서로간의 애정을 드러냈다.
우상민 피디는 첫 입봉작이기에 반 년 넘게 자신과 함께할 작가를 찾았다고 한다. 그러다 이주희 작가를 만났는데 그녀는 지금껏 예능프로그램에서 작가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럼 이 대본은 예능 프로그램 하면서 틈틈이 쓰신 건가요?”
“네, 사실 예능작가가 돈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평소 드라마 작가를 꿈꾸면서 틈틈이 글을 써왔어요.”
우현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이디어가 좋다면 특색 있는 내용으로 눈을 끌 수 있다. 하지만 상황전개와 대사, 인물의 감정표현까지 섬세하게 건드릴 줄 아는 건 충분한 훈련이 필요하다고 알고 있었다.
반대로 생각하면 훈련된 작가가 아님에도 이렇게 정돈된 작품을 쓴다는 건 보통 센스가 아니다. 그리고 이 모든 원동력이 월급이 적어서였다니…
“우연히 이주희 작가가 이번 드라마 공모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어서 재미삼아 평가해줄려고 봤는데 범상치가 않더라구요.”
우상민 피디의 입장에서는 호박이 넝쿨째 들어온 격일 터였다.
“국장님께 주희씨의 극본을 보여주니까 단박에 오케이 싸인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캐스팅부터 심혈을 기울였는데… 글쎄 일한지 얼마 안 된 조연출 하나가 사정도 모르고 이현민에게 대본을 보냈더라구요. 그쪽에서 하겠다고 하니 원래 확정된 여주인공이 하차를 하겠다고…”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알았다. 이현민이 소속된 소속사도 이 바닥에서는 알아주는 대형매니지먼트사다. 단막극 피디가 마음대로 깔 수 있는 레벨이 아니다.
이제 와서 누가 잘했니 하는 건 아무 의미 없으니 작품을 잘 마무리하고 이주희 작가와 친분을 계속 유지하기만 하면 된다.
“저희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별이도 이 작품을 마음에 들어하구요. 그러니 이왕이면 제작기간을 최대한 짧게만 해주시면 됩니다.”
“그럼요. 최 감독님께서 어렵게 연결해 주셨는데 아무 사고 없게 빠르게 마쳐드리겠습니다.”
“아, 그런데… 혹시 극에 쓰실만한 음악은 정하셨습니까?”
우현이 조심스레 물었다.
“아니요. 1회짜리 단막극에 따로 음악을 만들 수도 없고 긴장감을 조성할 때는 대중적으로 많이 퍼져있는 음악을 쓰려고 합니다.”
“그럼 저희 쪽에서 멜로디를 좀 드려도 될까요? 들어보시고 괜찮다 싶으시면 쓰시고 마음에 안 드시면 안 쓰셔도 무방합니다.”
“흠… 글쎄요…”
소속사에서 아무리 싫으면 하지 말라고 해도 피디나 작가 입장에서는 압력으로 비춰질 수 있다.
“진짜 안 쓰셔도 됩니다. 정말 편하게 들어보세요. 부담 안 가지셔도 됩니다.”
“그러고 보니 가수는 안 키우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아, 얼마 전에 괜찮은 재능을 가진 아이를 키우고 있는데요. 그 친구가 작곡에 상당한 재능이 있어서요. 전에 만들어 놓은 멜로디 중의 하나가 이 작품과 꼭 맞는 것 같아서 그런 거니 너무 부담가지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그럼 하나 보내보세요.”
그렇게 사전미팅을 마무리하고 스케줄을 확정했다. 원래는 상대배우와 같이 만나는 것이 맞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각기 따로 만났다고 한다.
우현은 윤정이를 데리고 가까운 녹음실로 가 전에 들려줬던 멜로디 중 하나를 녹음했다. 윤정은 영문을 몰랐지만 무언가 일이 되는구나 싶어 하루 종일 힘든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다.
우현으로서는 되면 좋은 것이고 아니면 마는 마음가짐으로 보냈다. 사실 이걸 피디가 쓴다고 해도 대단한 반응을 얻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1회짜리 단막극에 쓰인 OST를 누가 찾아서 듣는단 말인가?
중요한 건 단막극에 쓰인 OST를 제작할 정도로 작곡에 상당한 능력이 있다는 것, 그것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이다.
일주일이 훌쩍 흘러가고 첫 촬영 날짜가 다가왔다. 아침부터 미용실에서 메이크업과 머리를 만지고 난 그녀와 여대생들이 입을 만한 옷을 구해온 코디를 데리고 촬영장으로 향했다.
“상대배우가 이현민이에요? 우아…”
별이 코디의 이름은 윤민정, 27살이고 경력 4년차인데 이현민이라는 이름에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좋아했다.
“언니는 그 사람 소문 모르나 봐요?”
별이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경력이 4년차라고 들었기에 당연히 알 줄 알았던 것이다.
“뭐? 바람둥이인 거? 그럼 어때? 잘 생겼잖아. 어차피 나랑 사귈 것도 아닌데 누굴 만나든 무슨 상관이겠어. 나에겐 관상용이니까.”
“관상용? 하하하.”
별이와 민정이는 꽤 잘 맞는지 항상 수다가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너는 조심해. 그 인간 소문 안 좋아.”
“안 그래도 대표님께서 단단히 주의 주셨어요.”
“그럼 다행이구.”
빨리 움직였기에 콜타임 1시간 전에 미리 도착할 수 있었다. 별이를 데리고 스태프들에게 일일이 인사시키며 전처럼 캔커피를 돌렸다.
코디가 준비한 옷을 입고 피디와 동선을 맞추며 촬영준비를 하는데 별이와 콜타임이 동일했던 이현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창석아! 전화 해봤어?”
“아까부터 전화 했는데 계속 다 와간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어디라는데?”
“그게… 얘기를 안 합니다.”
“시팔! 오늘 촬영 안 한데?”
우현은 조연출을 갈구는 우상민 피디를 보며 속이 타들어갔다. 사흘 만에 촬영을 마무리하기 위해 스케줄을 빡빡하게 짜놨는데 그걸 비웃기라도 하듯 첫날부터 지각인 것이다.
결국 촬영을 하네, 못 하네 난리를 치다 콜타임에서 1시간이나 지났을 무렵 그의 밴이 현장에 도착했다. 밴에서 이현민과 그의 매니저가 내렸는데 이현민이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우 피디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그 뻔뻔한 태도에 사람들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그는 아무것도 못 본 것처럼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현민의 매니저는 한숨을 쉬며 우 피디에게 늦어서 죄송하다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확실히 연예인은 연예인인 게, 180이 넘는 훤칠한 키에 조각 같은 외모에서 뿜어지는 아우라는 마치 후광이 비치는 것만 같았다. 남자인 우현이 봐도 그러니 여자들이 보면 반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현민은 계속해서 대사를 외우고 동선을 체크 중인 김별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네가 김별이구나. 이름처럼 예쁘네.”
“아, 네. 안녕하세요.”
별이는 우현이 신신당부한 내용이 떠올라 시선을 다른 데로 두며 대사를 외우는 척했다. 하지만 이현민은 별이의 시선을 따라 얼굴을 들이밀었다.
“겁먹지 마. 안 잡아먹을 테니까.”
그의 미소는 진정 백만 불짜리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우현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