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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4] 첫 영화촬영(3)
한 달의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어느덧 봄이 지나가고 여름이 다가오는 6월 초, 우현은 별이를 데리고 일산 영화촬영장으로 향했다.
“벌써 마지막이라니…”
‘밀실’의 남녀주인공인 강소연과 박형석에 비해 비중이 적은 별은 오늘 촬영이 마지막이다. 앞으로 보름 정도의 촬영 후 CG작업에 들어간다.
“고생 많았다.”
“고생은요, 연기가 이렇게 재밌는 줄은 몰랐어요.”
그녀는 촬영을 해오면서 스스로 연기가 늘었음을 느낄 정도로 급격히 성장했다. 원체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뛰어난 연기력을 가진 강소연과 계속해서 붙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녀의 장점을 흡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진짜 다른데서 연락이 오긴 했어요?”
운전석 뒤에 바짝 달라붙으며 물어왔다.
“왔을 거 같아?”
제작발표회 이후 몇몇 군데에서 그녀를 섭외하기 위한 전화가 걸려오긴 했다. 하지만 대부분 시청률도 안 되는 케이블 예능프로가 대부분이었다. 그 중 한 군데는 지역 케이블tv에 나오는 대형음식점 광고에 출현해달라는 어이없는 연락도 있었다.
“포털에 떴잖아요!”
그녀가 본 기사는 그 중에 MBS에서 하는 대표 주말 예능인 ‘우리 결혼할까요’에 출연 확정된 남자아이돌인 양준호가 원하는 배우자 몇몇을 공개했는데 그 중에 김별이 있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김별의 이름이 포털사이트 실검 10위권에 잠시 노출된 적이 있어서 한동안 별이가 우현을 붙들고 환호성을 지르기도 했다. 물론 우현은 시큰둥하게 넘겼지만.
“기대하지 마. 난 너 그런 거 시킬 생각 없어.”
“왜요?”
혹시나 하고 기대를 했던 별은 단호한 우현의 말에 실망한 것 같았다. 출연하면 분명 인지도 측면에서 엄청난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인데 말이다.
“잘 들어. 나는 앞으로 너 예능 출연시킬 생각 없어.”
“신비주의… 뭐 그런 컨셉이에요?”
“하하하, 지금이 무슨 90년대도 아니고 신비주의는… 그런 게 아니라, 예능에 출연하는 건 득도 있지만 실도 많아.”
“득은 인지도 상승, 뭐 이런 거죠?”
“그렇지, 이미지 개선도 되고.”
“그럼 나쁜 건요?”
“예능을 하게 되면 기본적으로 네가 평소에 하는 편한 말투와 행동을 하게 되는데 이게 정극을 할 때 안 좋은 영향을 끼쳐. 물론 예능과 연기를 구분해서 보기는 하지만 시청자들의 뇌리에 남는 건 어쩔 수 없어.”
“그래도 요즘 연기자들도 예능을 필수로 하잖아요.”
“인기가 정말 많은 톱급 주연배우가 예능 나오던?”
별이는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아주 톱급 배우들은 안 나오네요.”
“예능은 자신이 없을 때 나가는 거야. 이 작품으로 뜬다는 확실한 자신이 없을 때, 어떻게든 다른 작품을 잡으려고 인지도 좀 높여보기 위해 하는 게 예능이야. 너, 아이돌이 왜 연기하기 힘든 줄 알아?”
“그야 연기를 잘 못하기 때문이잖아요.”
“그렇지 대부분은 배우들에 비해 연기가 부족해. 하지만 그것보다 연기를 더 못해 보이게 하는 게, 평소에 보았던 예능에서의 이미지가 뇌리에 남아있기 때문에 드라마에 나와서 하는 연기를 보면 손발이 오그라드는 거야. 한 마디로 몰입이 안 되는 거지. 그런 면에서 너는 연기에 유리한 부분이 있지.”
“망한 아이돌이라 얼굴이 안 팔렸다 이거죠?”
“그렇지, 하하하.”
“맞는 말이지만 가슴이 아프네요.”
“전화위복이라고 생각해. 그런데 난 그것보다 왜 양준호가 너를 찍었는지가 궁금한데? 진짜 만난 적 없어?”
그 기사가 뜨자마자 우현은 별이를 앉혀두고 한 시간 동안 훈계했다. 절대 다른 남자배우나 아이돌과 엮이면 안 된다고. 안 걸리는 건 불가능하니 절대로 만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진짜, 진짜 만난 적 한 번도 없어요. 맹세 할게요. 저도 궁금하다니까요? 마음에 있었으면 진즉 연락이라도 주든지. 이제 와서 마음에 든다고 하네, 웃기게…”
“연락 오면 만날 태세다?”
“이제는 아니죠. 진짜 딱 두 달 전에만 연락 왔어도 모를 일이었지만…”
사실 우현은 그녀가 톱스타가 될 재목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녀가 자신 모르게 어떤 잘못을 하고 있었을지 알 수 없기에 불안하기는 했다. 전 소속사인 유디 엔터에서 이상한 일을 시키지는 않았을지 불안했지만 차마 물어볼 수 없기에 그저 그녀를 믿는 수밖에 없었다.
촬영장에 도착하니 지금껏 순조로웠던 진행 탓인지 분위기가 좋았다. 물론 강소연과 박형석에게서는 지금도 냉기가 풀풀 풍기지만 그렇다고 전처럼 대놓고 싸우며 깽판을 치지는 않았다.
“오늘이 마지막인가? 이제 올 겨울에나 얼굴 보겠네.”
최 감독이 시원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생각보다 훨씬 잘 따라와 준 별이 대견하고 고마웠다.
“네, 제가 홍보 시작하면 정말 열심히 할게요.”
"그럼, 그럼. 혹시 후시녹음 하게 될 수 있으니까 부르면 와서 목소리 좀 들려주고.“
“물론이죠.”
“그리고 우현이는 나랑 이야기 좀 하자.”
별이와 코디를 놔두고 최 감독과 자리를 옮긴 우현은 똥마려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보고 자신에게 무언가 부탁할 일이 있음을 눈치 챘다.
“뭔데요?”
“야, 아니, 김 대표. 나 한 번만 도와주라.”
“아, 김 대표는 무슨… 왜 이래요? 무섭게…”
“이번에 내 후배가 KBC 단막극을 하게 됐는데, 아 글쎄 거기 주연 하나가 펑크를 냈다네?”
“설마…”
“그래, 거기에 한 번만 껴줘.”
단막극을 통해 얼굴을 알릴 수 있다는 건 신인 배우에게 있어 그리 나쁘지 않은 기회다. 그렇기에 아직 중요한 내용을 말하지 않았을 거다.
“그게 다예요? 우리도 좋아요. 안 그래도 오늘 촬영 끝나면 스케줄 없는 거 아시면서… 뭐가 또 있는데요?”
“그게… 거기 상대역이 이현민이야.”
“아, 씨! 안 해! 그 새끼 또 무슨 짓을 저지를 줄 알고, 별이랑 붙여요?”
20대 후반의 배우인 이현민은 이 바닥에서 악명이 높다. 일단 싸가지 없는 것은 기본으로 장착하고 있으며 연기는 데뷔한지 5년이 넘었으면서도 아직 제자리다. 하지만 우현이 질색하는 이유는 그의 난봉꾼 기질 때문이다.
같은 남자가 봐도 그의 얼굴은 흠 잡을 데 없을 만큼 잘생겼다. 그가 연기력이 아주 조금만 더 받쳐줬어도 지금보다 훨씬 더 잘 나갈 수 있었을 거다.
그 잘생긴 얼굴로 연기에 힘을 쏟지, 여배우 꼬시는 데만 힘을 쏟으니 결국 모든 매니지먼트사들이 이현민이 상대역이면 소속 여배우의 출연을 거부하는 사태까지 가고 말았다. 물론 기사화 되지는 않은 내용이다.
“걔 1년간 작품도 못 찍고 놀았데. 반성 했겠지, 지도 사람이면… 안 그렇겠냐?”
“안 돼요. 별이 이제 이 바닥에 발 들였어요.”
“네가 단단히 단속해봐.”
“단속이 될 거면 뭐 하러 다른 회사에서 출연거부를 했겠어요?”
“하… 미치겠네… 내 후배 10년간 방송국 따까리만 하다가 이제 입봉하는 거야. 이번에도 꼬꾸라지면 언제 작품 할지 몰라.”
“아… 정말…”
“김 대표, 내가 진짜 이런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별이 아무것도 아닐 때, 내가 우리 박철용 제작피디 설득해서 그대로 꽂았다? 너 알지? 박 대표가 얼마나 까다로운지?”
“알죠, 그럼요.”
우현은 느꼈다. 이렇게까지 나오면 거절은 물 건너갔다는 것을.
“너도 이번 한 번만 눈 딱 감고 해줘라. 사실 16부작 같은 경우면 모르겠지만 1회 단막극에서 사고 치겠냐?”
“워낙에 다이내믹한 놈이라야 말이죠.”
“딱 사흘에서 나흘이야. 내가 빡세게 촬영해서 사흘 안에 끝내라고 할게.”
“알았어요, 어쩔 수 없죠. 대신, 후반 작업에서 우리 별이 잘 살려줘요.”
“당연하지 인마! 이게 개봉되면 주인공은 강소연, 박형석이지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건 별이가 될 거야. 걔가 생각보다 카메라를 더 잘 받아. 그래서 그 묘한 분위기가 더욱 잘 살더라. 뜰 수밖에 없어, 내가 장담해.”
어차피 ‘밀실’이 흥행에 성공할 거라 장담하고 있지만 최 감독의 그런 확신어린 말이 우현에게 상당한 위안을 주었다. 영화가 흥행하는 것과 내 배우가 스타가 되는 건 다른 문제라 후반기 작업에서 잘 살려준다면 별이의 몸값이 더욱 탄력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럼 최 감독님만 믿어요.”
“걱정 말라니까. 나야말로 김 대표만 믿을게.”
그날 밤 10시를 기해서 별이의 촬영분량이 마무리되었다. 별이는 감사의 의미로 스태프들 한 명 한 명에게 인사를 하며 감사를 표했다. 함께 출연한 주인공 5인방 중 중년배우 두 명은 별이가 연기를 훌륭하게 잘했다며 계속 칭찬을 했다.
아직도 연신 NG퍼레이드를 내고 있는 박형석은 별이의 인사를 그냥저냥 흘려보냈고 강소연은 인사를 하는 별이 대신 우현을 빤히 바라보며 주변 스태프를 물렸다. 그녀는 별이까지 물러나게 하고서야 입을 열었다.
“들어보니 마이더스에서 쉽게 갈 수 있었다는데 참 어렵게 사시네요.”
“누구나 사연이라는 게 있죠.”
“이 바닥에 사연 없는 사람 있나요?”
소연은 쪽지 하나를 우현에게 건넸다.
“그냥 궁금해서 알아봤던 거예요.”
쪽지를 열어보니 전화번호 하나와 강벽두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이름은 우현에게도 익숙했다. 바로, 전 파인 엔터의 부사장.
“이 사람이 왜요?”
“그냥… 우리 회사 고문이 되어 있길래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낀 우현이 소연에게 다가가 오직 그녀만이 들을 수 있도록 작게 소리쳤다.
“강벽두가 마이더스 고문이 되어 있단 말인가요?”
“저도 얼마 전에 알았어요.”
“저에게 이걸 알려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소연은 가까이 다가온 우현의 가슴을 슬쩍 밀어 거리를 벌어지게 했다. 그리고 그녀 특유의 도도한 미소를 지었다.
“그냥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그건 그렇고 은하를 거의 혼자 키우셨다면서요?”
“매니저로 있었던 거야 아실 텐데…”
“작품 선정부터 모든 걸 결정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찬찬히 은하의 필모를 생각해봤죠.”
뭔가 그녀에게 말려드는 느낌이 들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난 운이 좋은 사람을 좋아해요.”
“그래서, 원하는 게 있습니까?”
그녀는 이미 자신에 대해 알아본 것이 분명했다. 왜, 어째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글쎄요. 한 번 더 당신의 운을 시험해 보고나서 원하는 걸 말할게요.”
“혹시 ‘밀실’의 흥행결과를…”
“이 바닥에 이런 말이 있어요. 연기 잘하는 년은 예쁜 년을 이길 수 없고, 예쁜 년은 연기 잘하고 예쁜 년을 이길 수 없다. 그리고 연기 잘하고 예쁜 년은 운 좋은 년을 이길 수 없다. 사실 제가 운이 좀 없어요.”
“마이더스를 떠날 수도 있다는 말이군요.”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녀의 눈빛은 말과 달랐다. 분명 무언가 결심을 굳힌 것이 분명했다.
“아직 추가 영입은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럴만한 돈도 없구요.”
“내가 고작 돈 몇 푼으로 움직일 것 같아요?”
그녀는 꼬았던 다리를 풀고 우현에게 슬쩍 상체를 기울였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향기로운 냄새가 그의 코를 자극했다.
“나 강소연이에요.”
물고기, 그것도 한 마리에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씨알급 돌돔이 물 밖의 낚시꾼에게 말한다. 나 좀 낚아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