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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 첫 영화촬영(1)
“자! 스탠바이 합니다!”
허름한 거실, 강소연과 별이 식탁에 마주앉아 있다.
“대사는 다 외웠니?”
무심하게 물어보는 강소연은 단정하게 묶은 머리에 투피스의 깔끔한 정장을 입고 있었다.
“다행이도요.”
미친년처럼 아무렇게나 풀어진 머리는 별이의 신비한 매력에 기묘한 분위기를 더했다. 저 머리를 한다고 두 시간이 넘게 부산을 떨었다.
“실수하지 마. 난 촬영 길어지는 거 제일 싫어하니까.”
“네.”
전이었다면 주눅 들어서 기가 팍 죽었을 테지만 우현과의 대화 때문인지 그녀는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강소연은 그런 별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꼭 누구를 보는 것 같았으니까.
“슛 들어갑니다!”
둘은 가면을 쓴 것처럼 감정을 잡았다. 이어서 조감독의 슬레이트가 떨어졌다. 그리고 최 감독은 화면에 보이는 둘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하이, 큐!”
“하… 미안하게 됐어. 하지만 일부러 그런 건 절대 아니야. 그냥… 인연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면 안 되겠니?”
소연이 두 손을 모아 간절한 표정을 지으며 애원했다.
“일부러… 일부러… 그래, 넌 언제나 일부러 그런 적은 없었어. 고등학교 때 내 그림을 망쳤을 때도 그랬고, 내 첫사랑이었던 승현이와 보란 듯이 키스를 할 때도 일부러 한 것은 아니었지.”
별은 맞은편에 앉은 소연을 보는 듯하면서도 허공을 바라보는 것처럼 초점 없는 공허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은혜야, 그게 언제 적 일이니? 다 어릴 적 아무것도 모를 때 그런 거잖아. 벌써 10년도 더 지난 일을 가지고… 하여튼 미안해.”
“정말 미안하긴 하니? 나쁜 년…”
별이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오며 소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눈에 담긴 일렁이는 감정의 파도. 소연은 순간 대사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어…”
“컷! 소연씨 긴장했네. 시간 좀 줄까?”
최 감독의 말에 소연은 대꾸도 못하고 얼굴만 벌개진 채 별을 바라보았다. 별은 그런 소연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감정 잡기에 여념 없었다. 그리고 최 감독 뒤에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우현은 어째서 소연이 NG를 냈는지 눈치 챘다.
‘연기인지 아닌지 헷갈렸구나!’
완벽한 연기였다면 오히려 그대로 대사를 이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무언가 서투른 그녀의 연기에도 불구하고 소연을 바라보는 시선에 담긴 감정이 그녀의 감정을 흐트러뜨린 것이 분명했다. 그게 아니면 저렇게 당황하며 실수할 리 없다. 영화판에서 강소연하면 싸가지와 연기, 이 두 가지는 알아주는 여배우니까.
고개를 숙이고 소연과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 별이를 보며 그 멘탈에 속으로 감탄을 했다. 분명 미친 듯이 떨리고 긴장될 터였다. 게다가 대선배가 자신과 대사를 치다가 NG까지 냈다.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도 모를 것이고 어떻게 리액션을 해줘야 할지도 모를 것이다. 그래서 아예 눈을 아래로 깔고 감정을 잡는다. 너야 어찌되든 자신은 다음 슛에서도 절대 실수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인 것이다.
우현은 별을 보며 다시 한 번 자신의 능력을 생각했다. 어떤 마스크냐, 어떤 발성과 발음을 가지고 어떤 표정으로 어떤 눈빛을 보내느냐를 보면 스타가 될지 조연이 될지 단번에 맞출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인성이나 어떤 생각으로 연기를 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은하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자신을 인정해주길 바라는 마음. 그것을 알아주지 못한 그를 향한 원망과 미움, 우현은 그 어떤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그녀의 몸값을 올려줄 수 있는 작품만을 찾아 헤맸을 뿐. 그녀가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건 누구의 잘못이 더 컸을까?
어쩌면 은하도 저럴 때가 있었는지 모른다.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저렇게 필사적으로 노력하던 순간이…
“다시 갈게요.”
싸늘한 표정의 소연이 외쳤다. 최 감독은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자, 감정 잡고… 하이, 큐!”
“정말 미안하긴 하니? 나쁜 년…”
다시금 마주한 별의 눈빛에 다시 한 번 감정이 흔들릴 뻔한 소연은 가까스로 멘탈을 잡고 차분하게 대사를 쳤다.
“나쁜 년? 솔직히 너 명진씨랑 결혼한 것도 아니었잖아. 그래, 결혼 이야기까지 나왔던 것은 나도 인정해. 하지만 아주 우연찮게도 나를 만난 후에 내가 자신의 마지막 사랑이라고 느꼈다고 하잖아? 나도 그런 명진씨를 사랑하게 됐구. 하… 그래, 내가 나쁜 년이다. 그러니까 그만 우리를 놔줬으면 좋겠어.”
“나쁜 년…”
“그만! 그만 좀 해! 어차피 너랑 명진씨랑 어울리지도 않았어. 지금 네 꼴을 봐! 도대체 며칠 동안 안 씻은 거니?”
별이의 눈에 눈물이 그득 차올랐다. 그리고 시선을 천장에 두고 입을 열었다.
“그래. 알았어. 다 내 잘못이지. 어차피 내 허락 따위는 필요 없잖아? 그러니까 그만 가. 설마 내 축하까지 바라는 건 아니지?”
“명진씨가 많이 미안해 해. 너에게 이런 부탁하는 게 정말 미안하지만 명진씨에게 전화해서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말해줘.”
“호호호.”
별이는 천장을 쳐다보며 미친년처럼 웃어재꼈다. 그리고 고개를 내려 소연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녀의 눈빛에는 원망이나 괴로움이 담겨있지 않았다.
“축하해 줄게, 진짜야. 진심으로 축하해. 그리고 내 가장 친한 친구인 너희 둘에게 해주고 싶은 게 있어. 명진씨도 하나도 괴로워 할 필요가 없어. 원한다면 내가 직접 전화로 얘기해줄 수도 있어.”
“진… 짜야?”
“그럼. 행복하길 빌어, 진심으로.”
별의 요사스러운 눈빛을 클로즈업으로 땡기던 최 감독이 주먹을 움켜쥐며 소리쳤다.
“컷! 좋았어!”
우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별이에게 달려가 퍼프로 그녀의 눈물을 찍어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녀와 소연과의 시선을 차단했다.
“잘했어, 아주 잘했어.”
“진짜요?”
“그럼. 최고였어.”
둘은 주변 사람들이 들리지 않도록 아주 작게 속삭였다.
“아이씨! 화장 떴잖아!”
강소연이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자리를 벗어났고 밖에서 대기하던 그녀의 스태프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한동안 저 히스테리를 다 받아야 할 것을 생각하니 불쌍해졌다.
이후부터의 촬영은 한시도 쉬지 않고 지속됐다. 하지만 첫 시작을 잘해서 그런지 별이는 별다른 NG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진행할 수 있었다. 반면 강소연과 박형석은 촬영 내내 서로 으르릉 거리며 현장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NG없이 한 번에 가자.”
“누가 할 소리를 하고 있네. 이는 닦았니? 냄새 좀 어떻게 해봐.”
“웃기고 있네. 누구 좋으라고? 싫으면 코 막고 연기하시던지.”
둘 사이에 키스신은 없지만 ‘밀실’ 초반부에 둘은 내내 깨가 쏟아지는 신혼부부 역할이다. 당연히 둘이 붙는 씬이 많은데 둘의 사이가 영 좋아 보이지 않았다.
“혹시 둘 사이에 뭐 있어요?”
보는 사람이 불안할 정도로 으르렁거리니 별이 우현에게 슬쩍 물었다. 하지만 박형석은 그가 은하를 데리고 있을 때, 이 정도까지 톱스타가 아니었고 같이 부딪혀본 적도 없었다.
“나도 몰라. 너는 그냥 너 할 것만 제대로 해. 신경 쓰지 마.”
별이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해놨지만 우현도 사실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서 슬쩍 촬영감독에게 다가가 물었다.
“둘이 왜 그래요?”
촬영감독인 김석준은 우현과도 작업한 적이 있는데 경력이 20년이 넘고 작년까지 천만 영화 두 개를 진행한 적이 있을 정도로 베테랑이다. 스태프들과 항상 사이가 좋았던 우현은 당연히 김석준 촬영감독과도 술을 몇 번 마셨었다.
“아, 너는 모르겠구나. 쟤네 사이 더럽게 안 좋아. 형석이는 소연이가 싸가지가 없다고 싫어하고 소연이는 형석이가 연기 못한다고 싫어해.”
“아하…”
“거기다 네 배우가 소연이한테 기름을 부어버렸잖아. 그것도 드럼통으로… 그러니 활활 타오를 수밖에 없지 않겠어?”
“마이더스에서 먼저 캐스팅하지 않았어요?”
“소연이가 캐스팅되고 나서 형석이가 캐스팅 됐는데 처음에는 둘 다 상대편 안 된다고 깠대. 그런데 형석이 입장에서는 인기는 많아도 연기가 부족하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도는 입장이라 이 작품을 꼭 하고 싶었나봐. 그러니 울며 겨자 먹기로 할 수밖에 없었지.”
“강소연은요?”
“너도 알다시피 요즘 영화판에 여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게 흔하냐? 다들 남자영화들이지. 그러니 소연의 입장에서 이런 좋은 시나리오를 놓치기 힘들지. 제발 자기한테 달라고 아우성치는 여배우들이 한 트럭이나 기다리고 있는데…”
“결국 예정된 일이었네요?”
“제작피디도 그것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지. 혹시나 제작발표회에서부터 진상부리면 어떡하나 했는데, 역시 프로는 프로들이야. 그렇지?”
“깨가 쏟아졌었죠.”
“그래. 난 둘이 결혼하는 줄 알았다니까? 하하하.”
강소연이 싸가지가 없기는 해도 또라이는 아니다. 차라리 안 나타나면 안 나타났지 기자들 보는 앞에서 그런 짓을 할 사람은 아니다.
“대사 또 틀렸잖아! 너 바보야! 대사 몇 줄 되지도 않는 거 왜 자꾸 씹어 먹고 지랄이야!”
입에서 불을 토하는 걸 보니 또라이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아, 시팔! 감독님 조금만 쉬었다 가요.”
계속된 NG에 강소연이 폭발했고 박형석은 분에 못 이겨 감독의 말을 듣지도 않고 본인 차량에 쏙 들어가 버렸다.
“망했다. 오늘 찍어야 할 게 다섯 씬이나 남았는데.”
다시금 현장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강소연은 박형석을 향해 자기가 연기 못해놓고 왜 지랄이냐며 길길이 날뛰었고 박형석 매니저는 최 감독을 붙들고 강소연 좀 말려달라고 애원했다.
“쟤 말릴 수 있으면 감독하고 있겠냐? 정신과 의사 돼서 분노조절 치료하고 있겠지.”
김석준 촬영감독이 애원하는 박형석 매니저를 불쌍하게 바라보았다.
“큰일이네요. 벌써 해가 지려고 하는데… 밤 씬은 두 개밖에 없잖아요?”
“두 개는 어찌 처리한다고 해도 씬 세 개는 찍어야 안 밀려. 이거 첫날부터 하나, 둘씩 밀려가면 대책 없는데…”
촬영지연으로 제작비가 올라가면 결국 편집 과정에서 CG부분에 대한 제작비를 줄이게 되고 완성도가 떨어지게 된다. 투자금을 더 받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다.
“어? 저거 누구야? 오늘 또 누가 와?”
멀리서 갈색 스타크래프트 밴 하나가 들어왔다. 이미 모든 배우가 참석한 마당에 더 올 배우가 없어서 의아해하는 찰나, 밴의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은하?”
검은색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지만 누가 봐도 유은하였다. 갈색에 웨이브진 머리, 엉덩이를 덮는 검은색 티셔츠와 청바지만을 입고 있지만 그녀에게서 뿜어지는 아우라는 모든 촬영스태프의 시선을 끌어 모았다.
“안녕하세요.”
“아… 그래요, 반가워요.”
그녀는 최 감독에게 고개를 까딱거리며 인사하고는 곧바로 우현을 향해 걸어왔다. 그리고 그녀의 양 손에 들린 커피 중 하나를 내밀었다.
“아직도 라떼만 마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