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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 크랭크인에 들어가다(3)
“김별? 뭐하던 애야?”
“왜, 라라걸즈의 김별이라고 있었잖아?”
“라라걸즈는 어느 걸그룹이야?”
기자들은 아직 단상에도 오르지 않은 김별을 향해 연신 셔터를 눌러대며 자신들끼리 정보를 주고받았다.
“우현씨, 이거 노린 거예요?”
박철용 제작 프로듀서가 슬쩍 다가와 말했다. 그는 별이와 인사하면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거부감을 확 날려버렸는지 싱글벙글했다.
최 감독이 강력히 밀어서 캐스팅을 허락하긴 했지만 내심 불안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작도 하기 전에 이렇게 화제를 만들어주니 고마울 수밖에.
“아닙니다. 워낙 몸매가 좋다보니 살려주려고 한 건데 기자님들이 좋아해주시네요.”
제작발표회 때 기자들의 행태는 사실 어제오늘일이 아니다. 일부러 계단을 높게 만들고 그 계단을 오르는 여배우의 치마를 촬영하며 뽑아내는 제목이 ‘짧아도 너무 짧은 치마’, 이 짓거리를 해대니까.
그래서 원래 이런 컨셉은 하지 않으려 했다. 자칫 잘못하면 싸구려 배우 만들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소연이 별이가 원하는 옷을 가로채면서 상황이 꼬였고 자칫하면 강소연의 기에 밀려 존재감 없는 그저 그런 배우로 전락할까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었는데…
“저기요! 이쪽 한 번만 봐주세요!”
“손 한번만 흔들어 주세요!”
생각보다 반응이 더 좋다. 단순히 몸매만 좋은 것이 아니라 별이 특유의 신비한 매력이 더욱 두드러지니 저들도 영화계에 물건 하나가 나타났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강소연을 비롯한 배우들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기자들의 관심이 그들에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떠오르는 충무로 젊은 남자배우인 박형석, 충무로에서 인정받는 몇 안 되는 젊은 여배우 중 한 명인 강소연, 연기파 중년배우 임호준, 신이 내린 애드리브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중년배우 김철균, 그리고 마지막으로 김별. 이렇게 다섯 명이 ‘밀실’의 주인공 5인방을 맡았다.
조각처럼 생긴 박형석은 언제나 밝은 웃음이 끊이지 않는 호감형 배우다. 어디서도 안 좋은 얘기가 들리지 않는 바른 청년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굉장한 인기를 끌고 있었다.
지금도 깔끔한 검은 정장을 입고 왔는데 넥타이를 하지 않아 단정하면서도 자유로운 느낌을 주었다.
반면 별이가 그토록 입고 싶어 하던 자주색 블라우스와 투톤의 시스루 치마를 입은 강소연은 여신처럼 빛나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웃고 있어도 어딘가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짜증이 나겠지.’
우현은 기자들의 시선이 별이에게 분산되면서 그녀가 상당히 짜증났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걸로 자신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티는 절대로 내지 못할 것이다. 꼴사나운 것은 둘째 치고 자신의 몸매가 별이보다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거니까.
오히려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 별이에게 더 잘 대해줄 것이다. 물론 둘만 있을 때는 다르겠지만.
배우와 감독까지 함께한 포토타임이 끝나고 본격적인 질문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밀실’의 시나리오에 대한 관심이 주를 이뤘지만 점차 배우들에게 질문이 옮겨졌다.
“박형석씨는 전부터 강소연씨와 함께 작품을 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이번에 그 바람을 이루신 것 같네요?”
“맞습니다. 그런데 로맨스가 아니라 공포, 스릴러 장르라 아쉽네요.”
“키스신이 없으신가 보죠?”
“제가 그것 때문에 시나리오를 정독했는데 없더라구요.”
“하하하.”
“강소연씨는 주로 로맨틱코메디에서 두각을 드러내셨는데 이번 작품을 결정하게 된 이유가 있으신가요?”
“개인적으로 이런 작품을 굉장히 좋아해요. 그런데 스케줄대로 소화하다보니 작품을 하게 될 기회가 없었는데 이번에 아주 좋은 작품을 하게 된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이런 좋은 작품 만나게 해 주신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앗! 감독님도 너무 감사드려요.”
강소연의 저 자본주의적 미소는 우현도 인정하는 바다.
“박형석씨와 만나신 소감은 어떻습니까?”
“워낙에 연기를 잘하셔서 저도 편하게 연기에 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저 역시 키스신이 없는 게 안타까웠습니다, 하하”
“하하하.”
“김별씨는 원래 걸그룹이었다고 하는데 연기에 도전하게 된 소감이 어떠신가요?”
드디어 기자들의 시선이 다시 별이에게 모아졌다.
“사실 저는 제가 연기를 하게 될 줄 전혀 몰랐습니다. 그래서 라라걸즈의 계약이 끝나가면서 이제 연예계를 떠나야 하는 줄 알았는데 저희 대표님께서 제 진짜 재능이 연기라고 하시면서 저를 채찍질해 이곳까지 끌고 와 주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이 제 인생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진심을 다 해 연기해보려고 합니다.”
“감동적이네요. 그렇다면 최 감독님께 여쭤보겠습니다. 김별씨가 신인 연기자인데도 불구하고 ‘은혜’역으로 전격 캐스팅한 이유가 있을까요?”
최 감독은 잠시 고심하더니 입을 열었다.
“처음 김별씨를 봤을 때는 마스크에서 보여지는 신비한 매력에 감탄했습니다. 하지만 제 앞에서 자유연기를 해 보이는데 묘하게 시선을 빨아들이더란 말이죠. 그래서 ‘밀실’ 속 순수하면서 광기어린 성정을 지닌 ‘은혜’에 정말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군요. 굉장히 궁금한데요. 혹시 김별씨 연기를 아주 간략하게라도 볼 수 있을까요?”
기자들이 김별을 향해 질문했다. 하지만 최 감독은 다시 마이크를 잡고 강경하게 말했다.
“이곳은 제작발표회입니다. 이런 자리에서 배우에게 연기시키는 건 어디에서도 없던 일이고 예의도 아닙니다.”
그 기자는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우현은 멀리서 최 감독을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저런 싸가지 없는 새끼.’
그저 자기들을 갑으로 생각하고 신인이나 인기 없는 연예인들과 소속사를 을로 생각하니까 저런 개념 없는 행태가 나오는 것이다.
제작발표회는 순조롭게 끝났다. 마지막으로 감독과 배우들이 모여서 파이팅포즈를 취하는 사진을 찍는 것으로 행사를 마무리했다.
“일 한 번 잘하시네요.”
강소연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우현에게 말했다.
“잘하기는요. 별이가 잘 살린 거 아니겠습니까?”
“은하 그 싸가지 없는 게 뜬 이유가 있었네. 다음에 봐요.”
그녀는 별을 슬쩍 바라본 후 타고 왔던 밴에 올랐다.
“다음 주부터 촬영 들어갈 거야. 정확한 스케줄은 조연출이 메일 보낼 거니까 잘 숙지하고 늦지 않게 보내.”
최 감독은 우현과 헤어지며 신신당부했다. 영화촬영은 단 하루가 늦어져도 최소 수백만 원, 많게는 수천만 원이 깨진다. 스케줄을 준수하는 것도 예산을 아끼는 방법이다.
“걱정하지 마십쇼. 저는 은하 데리고도 지각 잘 안 했어요.”
“그랬어?”
“그럼요. 스케줄 갈 때마다 전쟁이 따로 없었죠. 그래도 어떻게, 어떻게 맞춰가면서 했어요. 그래서 저랑 일해 봤던 스태프들은 다 저를 좋아했죠.”
“크… 이거 사회생활 할 줄 알았구나?”
“대신 은하랑 트러블이 많긴 했어요. 자기 편 안 돼준다고… 그래서 이 모양이죠.”
“그래도 넌 잘 될 거야. 그래, 다음 주에 보자.”
아마도 첫 촬영은 일산에 있는 영화촬영장이 될 확률이 높았다. 그곳에 세트장이 한창 지어지고 있다 했으니까.
별이를 데리고 사무실로 와 옷을 갈아입혔다. 별이는 그 옷이 마음에 드는지 꽤 아까워했다. 그런데 부티크로 막 출발하려는 우현에게 석준의 전화가 걸려왔다.
“됐어, 오지 마. 그거 가져도 돼.”
“네? 진짜 주시는 거예요? 별이 신나겠네.”
“오늘 아침에 기사 뜬 거 봤어. 세상에, 강소연이 입은 옷보다 별이가 입은 미니원피스를 찾는 사람이 더 많더라니까? 홍보비라고 생각할게.”
“고마워요.”
역시나 별이는 수백만 원짜리 옷이 생겼다고 방방뜨며 기뻐했다.
“앗싸! 나 이거 입고 집에 갈까요?”
“아서라. 그거 입고 돌아다니면 술집아가씨인줄 알아. 잘 간직했다가 나중에 중요한 자리에 입고 나가.”
“네. 이건 세탁소에 맡겨야겠죠? 물빨래하면 안 되려나?”
부산스러운 그녀를 연기학원에 보내고 나서 찬찬히 기사를 검색하니 포털사이트에 별이에 관한 기사가 메인에 걸려있었다.
클릭하니 역시나 기사 제목이 ‘’밀실‘의 김별, 너무 짧은 원피스’였다. 사진은 그녀가 허벅지를 가리며 높은 계단을 오르는 장면. 이 사진을 찍은 기자를 향해 한심한 새끼라며 혼자서 욕설을 내뱉었지만 이런 사진이니까 포털 메인에 오를 수 있었다는 건 알고 있다.
댓글을 보니 벗고 싶어 환장했다며 욕하는 글도 있고 너무 예쁘다며 찬양하는 글도 보였다. 예상했던 반응이다. 이것으로 김별을 화제의 중심에 올렸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딱 이정도가 좋다. 더 이상 화제가 돼 봤자 아무 의미 없다. 이런 건 그냥 한 순간의 시선몰이일 뿐. 진짜 승부는 ‘밀실’이 개봉한 다음이다.
우현은 한숨을 쉬며 또 사람을 구했다. 별이에게 코디를 붙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촬영에 들어가면 계속 메이크업을 고쳐야 해서 코디 말고도 더 붙여줘야 하지만 아직 신인이기에 그 정도는 혼자서 해야 한다. 헤어, 메이크업까지 붙여줬다간 점심, 저녁을 삼각김밥으로 때워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시간은 쏜살처럼 흘러가 어느덧 첫 촬영하는 날짜가 다가왔다. 어제부터 바짝 긴장한 우현은 별이와 코디를 데리고 일산으로 향했다. 7시경에 현장에 도착하니 8시 콜타임에도 불구하고 강소연과 박형석을 제외한 모든 배우들이 도착해 있었다.
“야! 전기가 왜 안 들어와? 설치 똑바로 한 거야?”
“8시에 시작 안 할 거야? 특수분장팀 숫자가 왜 이것밖에 안 돼?”
수십 명의 스태프와 십여 명의 단역 연기자들이 정신없이 오갔다. 전쟁터 같은 현장에 별이 바짝 얼어붙었다.
“긴장하지 말고 일단 인사부터 하자.”
별이를 데리고 감독을 비롯한 스태프들에게 일일이 인사시켰다.
“안녕하십니까!”
그 때마다 우현이 미리부터 준비한 캔커피를 들고 일일이 스태프들에게 돌렸다. 따뜻한 커피를 건넬 때마다 별이를 잘 부탁한다며 허리를 숙이니 팽팽한 줄처럼 긴장된 분위기가 조금 풀렸다.
30분쯤 지나니 박형석과 강소연이 도착해 8시 콜타임 전에 모든 배우가 모일 수 있었다.
“정확히 8시에 슛 들어갑니다! 별이랑 소연씨 준비하세요!”
조연출이 촬영스케줄을 다시 한 번 인식시켰다. ‘밀실’이라는 작품은 5명의 배우가 쉴 새 없이 대사를 주고받아야 해서 누구 하나만 촬영을 미뤄달라고 할 수 없었다. 차이가 나 봤자 몇 씬 먼저 찍는 정도다.
“긴장 돼?”
첫 씬부터 강소연과 붙는다. 긴장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할 거다.
“조금요. 대사로 노래를 부를 수 있을 정도까지 외웠는데 긴장이 안 풀리네요.”
“당연한 거야. 그래도 잘 해야 해. 스타가 되고 싶지? 내가 봤을 때, 너는 분명 스타가 될 자질이 있어. 그러니까 긴장 돼도 최고의 연기를 보여줘야 해.”
“이럴 때는 보통 편하게 하라고 말해주지 않아요?”
“하하. 편하게 하라고 해서 편하게 되면 이미 대배우지. 중요한 일을 앞두고 긴장되는 건 모두 마찬가지야. 그리고 스타는 그런 긴장을 즐길 줄 알아야 해. 수많은 사람이 너 하나만을 주목하는 와중에도 몸이 굳으면 안 돼. 그게 스타야.”
별이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우현을 향해 배시시 미소 지었다.
“제가 타고났다고 하셨죠? 알았어요. 대표님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보여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