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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 크랭크인에 들어가다(2)
강소연이 옷을 고르기 위해 자리를 뜨자 우현이 별이의 어깨를 토닥였다.
“잘 참았어. 아주 잘했어.”
“이것보다 더 모욕적인 것도 견뎠어요. 이제 시작인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우현의 생각보다 더 강했다. 억지로 참는 게 아니라 진짜로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멘탈까지 이렇게 좋으니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강소연이 옷을 고를 때까지 기다렸다. 왜 기다려야 하냐면 별이가 마음에 드는 걸 골라봤자 강소연이 찜하면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별이 마음에 드는 옷을 알려줄 필요가 없다.
30분 정도를 고르던 소연이 다 골랐는지 가게를 나가려했다. 별이가 재빨리 다가가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였다.
“제작발표회 때 뵙겠습니다.”
“그래. 은하도 너처럼 예의가 있으면 좋았을 텐데.”
우현은 앞으로도 그녀의 꼬장이 지속될 거라는 걸 알았다. 은하와 소연의 사이가 안 좋다는 건 이 바닥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래도 우현이 있을 때는 은하를 말릴 수 있었는데 이제는 말릴 사람이 없어졌으니 그 때보다 더 할 터였다. 그런데 그 화살이 별이에게 올 줄이야.
“그러니까요. 은하 걔가 좀 그렇죠?”
눈 질끈 감고 위험천만한 말을 내뱉었다. 소연도 우현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깔깔대며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그러니까요. 걔가 좀 개념이 없다니까요. 우현씨 마음에 드네.”
“감사합니다. 그럼 그 때 뵙겠습니다.”
“그래요.”
기분이 좋아졌는지 그녀는 발걸음도 경쾌하게 가게를 나갔다.
“우현씨 미쳤어? 방금 그 얘기 은하 귀에 들어가면 어쩌려고 그래?”
석준은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있었다. 별이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영문을 모르고 있을 뿐.
“알아요, 미친 짓 한 거.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요? 안 그래도 저도 할 말 많아요. 나라고 당하기만 하고 살 것 같아요?”
하지만 우현은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음을 알았다.
“난 몰라. 난 못 들은 거야. 야! 너희들 지금 여기서 들은 얘기 입 밖으로 내기만 해 봐!”
석준이 직원들을 닦달하고 나서 우현은 별이를 데리고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이거 완전 예뻐요!”
별이가 핑크빛 옷을 들고 외치자 석준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다가와 미안한 듯이 말했다.
“저기… 이건 아까 소연이가 찜해놓고 갔어.”
“그래요?”
“그럼 이건?”
그녀가 두 번째로 마음에 들었던 옷을 가리키니 석준의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그것두…”
“선생님 혹시 아까 걔가 여기에 있는 거 다 찜해놓고 간 건 아니죠?”
아주 간혹 그런 경우가 있다. 일단 다른 여배우가 입지 못하게 특출나게 예뻐 보이는 옷은 전부 찜해놓고 당일에 결정하는 것. 그렇게 되면 꽤 잘나가는 톱급 여배우가 아닌 이상 찜해놓은 옷을 제외한 옷을 고를 수밖에 없다. 언제 어떤 옷이 남을지 알 수 없으니까.
“당연히 아니지. 딱 세 개 찜하고 갔어.”
석준이 나머지 하나의 옷을 들고 왔다. 우현이 별이의 눈치를 보니 그녀도 그 세 개의 옷이 가장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우현이 봐도 이 세 개의 옷이 다른 옷들에 비해 고급스러우면서 여성미를 한껏 강조한 옷들이라 여배우들이 충분히 탐낼만했다.
다른 옷들도 괜찮았지만 비슷한 컨셉의 옷들 중에서는 저 세 개의 옷만한 것이 없었다.
“미안해서 어쩌지? 자기도 내 마음 알지?”
“그럼요. 별아 그럼 이렇게 하자.”
우현이 머리를 긁적이며 별이를 바라보았다.
* * *
시간이 흐르고 제작발표회 날, 새벽 3시에 일어난 우현은 별이를 픽업해서 청담동으로 향했다.
“대표님은 안 피곤하세요?”
“네 첫 데뷔전이라 그런지 하나도 안 졸린다.”
진심이다. 어제도 잠을 설쳐 12시 넘어 잠들었지만 전혀 졸리지 않았다.
“저도 이상하게 안 졸려요.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니까요?”
“긴장하고 있어서 그래.”
“그나저나 윤정이가 계약되니까 저도 어쩐지 더 힘이 나는 것 같아요.”
며칠 전, 윤정이가 부모님을 모시고 사무실로 찾아왔다. 더 빨리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시간이 걸려서 의아했던 참이었는데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니까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윤정이 부모님만 그러겠느냐만은 그녀의 부모님은 자신의 아이가 헐벗고 춤추는 가수가 되는 것을 극렬히 반대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울고불고하며 기어코 걸그룹으로 데뷔했기에 그냥 인정하려 했었단다. 하지만 다른 걸그룹들이 tv에 나올 때 자신의 딸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아 더 실망했다고 한다.
곧 스타가 될 것처럼 주위에 자랑도 해뒀는데 결국 연예인 한 번 해보려다가 이도저도 안 된 불쌍한 애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번에는 절대 안 된다는 부모님을 제발 대표님과 만나서 얘기만 해보라는 윤정의 협박 비슷한 설득에 억지로 나왔다고 했다.
몇 번의 가출과 버팀, 통곡, 싸움을 거쳐 왔기에 윤정의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고 부모님은 우현을 순진한 아이를 꼬드긴 다단계회사 직원처럼 보았다.
“진짜 얘가 연예인이 될 수 있긴 한가요?”
윤정의 어머니가 우현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래서 우현은 부모님을 설득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지 않으면 제가 계약 하려고 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저번 회사도 작긴 했는데 이번 회사는 어째 더 작아 보이는데…”
“회사가 크면 좋은 점이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작은 회사라도 소속 연예인을 띄우는 경우는 아주 흔합니다.”
“그럼 전처럼 몇 년 연습생 생활을 해야 하는 건가요?”
“비슷하지만 조금 다릅니다. 윤정이는 걸그룹으로 데뷔시킬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컬 연습 위주로 하게 될 겁니다. 물론 연습에 필요한 경비는 저희가 부담합니다.
“그래서 정산되는 비율이 적다는 얘기를 한 건가요?”
“맞습니다. 물론 다른 대형기획사에 비해 적다는 거지 비상식적인 비율을 지급하지는 않습니다. 그 부분은 자신할 수 있습니다.”
“이것 하나만 제대로 말해줘요. 우리 애가 진짜 연예인이 될 수 있는 거죠? 왜 tv에도 자주 나오고 음악프로에도 나오는…”
“걱정 마세요. 윤정이는 웬만한 걸그룹보다 더 잘 될 겁니다.”
우현의 한 마디에, 내내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윤정의 아버지가 계약을 허락했고 결국 우여곡절 끝에 계약이 성사됐다.
그 다음날 곧바로 이 바닥에서 나름 알아주는 보컬 트레이너를 구해 윤정에게 붙여주었다. 상당한 금액이 지출되었지만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투자니 감수하기로 했다.
은하를 데리고 있을 때 벌어뒀던 돈이 거의 떨어져 오피스텔을 처분하고 아주 작은 골방으로 집을 옮겼다. 아쉬움은 없었다. 성공한다면 금방 회복될 것이고 실패한다면 어차피 바닥으로 떨어질 테니까.
“이제 윤정이랑 같이 열심히 해서 꼭 성공해보자.”
“그럼요. 오늘 다 죽여 버릴 거예요.”
주먹을 불끈 쥔 그녀는 각오를 단단히 한 것 같았다.
새벽 5시도 되기 전에 샵에 도착한 별은 메이크업과 헤어를 만지기 시작했고 우현은 그 사이에 황석준의 부티크로 가서 오늘 입을 옷을 가져왔다.
헤어세팅과 메이크업이 끝났을 때가 8시. 가져온 옷을 입고 제작발표회에 도착하니 9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장소는 중구의 비즈니스 호텔. 주차장부터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스태프가 눈에 띈다.
제작발표회 시간은 정각 10시다. 넉넉잡아도 50분은 넘게 시간이 남았다.
“늦지 않게 도착했네. 잘못해서 길이 막혔다가 늦기라도 하면… 온갖 욕은 다 뒤집어쓰는 거지.”
신인은 절대 실수하면 안 된다. 한 번 실수로 앞으로 얻을 기회를 몽땅 날려버릴 수도 있기에 조심에 조심을 거듭해야 한다.
“잠깐 눈 좀 붙이고 있어. 내가 분위기 좀 보고 올게.”
행사장인 1층으로 올라가니 이미 감독과 프로듀서가 와 있었다. 최 감독은 깡마르고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인 사람인데 반해 그 옆의 프로듀서는 전체적으로 듬직하고 넉넉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파인 엔터 김우현입니다.”
최 감독이야 잘 아는 사람이니 간단하게 눈인사만 했지만 이곳에서 그 다음으로 중요한 인사인 프로듀서에게 잘 보이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아, 네. 반가워요. 박철용이에요.”
위아래로 빼입은 정장이 슬쩍 보기에도 수백만 원은 넘어 보였다. 지금까지 A&S 프로덕션에서 진행한 작품이 연달아 흥행에 성공하면서 그도 상당한 돈을 만진 것으로 보였다.
“이번에 좋은 작품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저희 애가 영화가 처음인데 좋은 배역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능력이 있으니까 하게 된 거죠. 저도 김별씨와 최 감독한테 기대가 커요.”
사실상 최 감독이 오디션도 없이 별이를 주인공 중에 하나로 찍어 넣었으니 그도 불안하긴 할 거다. 그래서 살짝 뼈가 있는 말을 내뱉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 겁니다.”
“자신감이 대단하네요? 은하씨 매니저였다고 들었는데… 부디 이번에도 은하씨 같은 스타가 됐으면 좋겠네요.”
“물론입니다, 하하하!”
시시껄렁한 농담으로 친분을 다지는 동안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낸 기자들이 어느 새 준비된 의자들을 모두 점령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럼 별이 스탠바이 시키겠습니다!”
주차장에 내려오니 몇 대의 스타크래프트 밴이 눈에 들어왔다. 강소연을 비롯해서 주연배우들이 탄 차량일 것이다.
은하였다면 가장 늦게 가려고 눈치 싸움을 벌였겠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어서 마음이 편했다. 신인 연기자이기에 가장 먼저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게 맞았다.
“자신 있지?”
혹시 긴장하고 있을까봐 슬쩍 물었지만 의외로 별이는 굉장히 차분했다. 오히려 입가에 편안한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이상하게 떨리지가 않아요. 그냥… 기대 돼요.”
“내가 사람은 참 잘 봐, 그치?”
“인정. 후훗!”
그녀를 데리고 나오는데 마침 차에서 내리려는 강소연과 눈이 마주쳤다. 우현과 별이 그녀를 향해 얼른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봤어?”
“네.”
강소연의 눈에 담긴 당혹감과 놀람, 그리고 초조함. 우현은 모두 읽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별이가 입고 있는 의상은 그녀의 생각 밖이었을 테니까.
“쟤 누구야?”
“이번에 신인여배우 하나 나온다고 하더니 쟤인가 본데? 몸매 좋은데?”
행사장에 도착하니 모든 기자들의 눈이 별이를 향했다. 지금 별이가 입고 있는 옷은 보통 여배우들이 제작 발표회 때 입는 퍼진 원피스가 아닌, 쫙 달라붙어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붉은 시스루 원피스였기 때문이다.
사실 아이돌이 아무리 예쁘다고 해도 여배우와 함께 투샷을 받으면 생각보다 훨씬 얼굴이 죽는다. 그만큼 여배우는 웬만한 아이돌들이 넘기 힘든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데, 그럼에도 한 가지 아이돌이 더 나은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몸매. 여배우들도 물론 몸매관리를 철저하게 한다. 하지만 아이돌은 평소 춤 연습을 통해 엄청난 운동량과 유연함을 가지고 있고 몸이 둔해지지 않도록 식단을 더욱 까다롭게 관리하기에 몸의 탄력은 필연적으로 아이돌이 더 좋을 수밖에 없다.
물이 담길 정도로 예쁘게 파인 쇄골이 잘 드러나는 오프숄더, 오프숄더 덕분에 더 잘록하게 보이는 허리 골반 라인, 그리고 매끈하게 쭉 뻗은 별이의 다리를 강조하기 위한 미니스커트. 제작발표회 의상치고는 과해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겉감으로 쓰인 붉은 레이스가 고급스러움을 배가시켜 과하다는 느낌보다는 세련되어보였다.
우현의 바뀐 전략은 바로 그 틈을 파고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