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 내가 스타로 띄어줄게-9화 (9/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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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 크랭크인에 들어가다(1)

“계약할 거예요?”

“네!”

“좋아요, 그럼 부모님 모시고 오세요. 그리고 알아둬야 할 건, 우리 회사가 작은 회사이기에 대형기획사만큼 정산을 잘 주지 못할 수 있어요. 이건 반드시 부모님에게 주지시키세요.”

“알겠습니다.”

그녀는 데뷔할 수 있다는 말에 정산이 적을 수도 있다는 말에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일부 양아치 같은 기획사들의 정산 행태는 비난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이제 갓 회사를 세운 소형기획사에서 대형기획사들이나 지급할 만한 정산율을 지급하다간 망하기 십상이다. 구멍가게가 마트랑 같은 제품을 팔면서 가격을 똑같이 받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윤정이 가고 그녀를 배웅하고 온 별이는 우현의 눈치를 슬쩍 보며 물었다.

“그런데 왜 윤정이한테는 존댓말 써요?”

“말 편하게 하라는 말을 안 했잖아. 너는 나 만나자 마자 말 놓으라고 했고.”

“그것 때문에?”

“그럼. 그리고 이 바닥은 누가 언제 스타가 돼서 나타날 줄 모르는 데야. 자기가 나이 많다고 깝죽거리다가 언제 뒤통수 맞을지 모르거든. 그러니 너도 절대 너보다 나이 어리다고 말 놓거나 함부로 말하면 안 돼. 알겠니?”

그가 다방면으로 적을 만들지 않고 친분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 중의 하나였다.

“알겠어요. 말 놓으라고 하면 그 때는 편하게 해도 되죠?”

“그럼. 하지만 그것도 네 선배가 아닐 경우일 때만이야. 아직 고등학생도 안 된 애들이면 몰라도 그 이상 나이를 먹었는데 너보다 선배면 절대 말 놓지 마. 알았지?”

“네. 아… 저도 언젠가 대접받을 날이 오겠죠?”

“당연하지. 안 그럴 거면 내가 왜 너를 키우겠냐?”

“후훗! 전 대표님만 믿을게요.”

“그래. 이제 크랭크인 얼마 안 남았으니까 연습 열심히 해라. 안 그러면 된통 깨질 거야. 이번 영화에서 네 배역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

“네, 알고 있어요. 그래서 요즘 잠도 못 자고 연습하고 있어요.”

“너 부담 주기 싫어서 얘기 안 하려고 했는데, 하나만 알고 있어. 강소연이 ‘밀실’에 캐스팅 됐다고 기사 뜰 거야.”

“강소연요? 꺅! 대박! 내가 강소연하고 연기한다는 거예요?”

별이는 상황파악도 못하고 좋아서 폴짝폴짝 뛰었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별이도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듯 어정쩡하게 멈췄다.

“일단 이 것 하나만 먼저 말하자. 너, 이제부터 배우야. 가수 아니라고. 강소연이 대단하든 아니든 너는 같은 여배우야. 절대로 어디 가서 그렇게 팔랑거리지 마, 알겠니?”

정색하는 우현의 말에 그녀도 자신의 실수를 느껴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강소연 그렇게 쉬운 상대 아니야. 자신보다 못 한 상대는 용납을 안 해.”

“그게 무슨…”

“잡아먹으려고 든다고. 네가 이 영화에서 아주 묻혀버리게끔 한다니까?”

그제야 별이도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

“다른 건 몰라도 연기에서 밀리면 안 돼, 잡아먹히기 싫으면.”

그렇게 경각심을 단단히 심어주고 일주일이 지났을 때, ‘밀실’을 제작하는 A&S 프로덕션에서 연락이 왔다. 크랭크인 준비가 끝난다는 것.

우현이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이미 촬영준비를 위한 인선과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빨리 진행된 것으로 보였다. 특히 어려울 것으로 예상됐던 캐스팅과 투자부분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며 시간을 대폭 앞당길 수 있었을 것이다.

“다음 주 금요일에 제작발표회 있습니다. 준비해주세요.”

드라마뿐만 아니라 영화도 제작발표회를 통해 사전 홍보 기회를 갖는다. 따라서 별이에게 있어 제작발표회는 처음으로 얼굴을 알릴 수 있는 기회이다.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제작발표회를 기점으로 사무실에는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별이는 식단조절을 더 까다롭게 했고 어떤 간식도 먹지 않았다. 그리고 우현은 또 다시 핸드폰을 붙잡고 비굴모드에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예, 파인 엔터 김우현입니다. 회사 안 없어졌습니다, 하하. 다름 아니라 저희 소속 배우가 다음 주 제작발표회에 참여하게 돼서요. 아…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처음 얼굴을 알리는 자리인데 아무 옷이나 입힐 수 없다. 그러니 그럴듯한 곳에서 협찬을 받아야 하는데, 아직 신인 연기자이자 신생 회사에 덜컥 수백만 원짜리 옷을 빌려주겠는가?

“안녕하세요. 파인 엔터 김우현입니다.”

“김우현? 아! 유은하 매니저! 기억난다, 그래!”

요즘 한창 뜨는 패션디자이너인 황석준이 우현을 반겼다. 대개 패션업계에 있는 남자들은 일반인들이 느끼기에 뭔가 부담스럽고 어색한, 속칭 게이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이건 그들이 진짜 게이라서가 아니라 여성스러운 느낌과 분위기에 감성적으로 많이 동화돼서 그런 면이 크다. 그런 감성 없이 좋은 여성복을 만든다는 것도 웃기지 않은가? 물론 진짜 게이도 있기는 하다.

“직접 뵙고 인사드려야 하는데 워낙 바쁘셔서 이렇게 전화로 인사드리네요.”

“됐어, 됐어. 그건 그렇고 은하랑 헤어졌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이제 다른 애 맡은 거야?”

“네, 맞습니다. 회사 세우고 새로 시작하려고 해요.”

“힘들겠다. 그래도 자기는 잘 할 거야. 워낙 싹싹하고 인맥을 잘 쌓아 왔잖아. 그래, 협찬해달라고?”

“하하. 네, 맞습니다.”

“남자야? 여자야?”

“여배우예요. 이제 23살 됐어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앞으로 빵 뜰 겁니다.”

“알았어. 오후에 보내. 사이즈 재야지.”

“아… 감사합니다. 역시 황 선생님 밖에 없네요.”

“그런 말 하지 마. 내가 아직 이 바닥에서 못 뜨고 있을 때 한창 뜨던 은하 옷 맞추러 왔었잖아. 그 때 내가 얼마나 고마웠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사실 우현은 옷을 보는 안목이 없다. 그 때도 황석준 디자이너의 옷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 아니라 원래 오기로 했던 드레스가 코디 실수로 펑크 나면서 대체해야 할 드레스를 찾아야 했다.

청담동을 미친 듯이 돌아다니던 중 로드샵에 비치된 드레스가 그럴듯해 그 자리에서 은하를 데리고 들어간 곳이 황석준이 연 부티크였던 것이다. 그 때 재빨리 검색을 통해 그의 이력을 살피고 일부러 찾아왔다는 식으로 얘기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 게 이런 식으로 스노우 볼이 굴러갈 줄은 우현도 몰랐다.

“아니에요. 그럼 이따가 오후에 데리고 가겠습니다.”

학원에서 돌아온 별이를 데리고 청담동으로 향했다. 사이즈는 처음에만 재면 되고 나중에는 그 사이즈대로 옷을 가지고만 오면 된다. 급할 때는 쓰리 사이즈와 키만 가지고 옷을 가지고 오기도 하지만 제작발표회처럼 중요한 자리에는 그런 옷을 입지 않는다.

“그럼 사이즈만 재고 오면 돼요?”

“옷도 골라야지.”

“시간 아직 많이 남아있는데 벌써 옷을 골라요?”

“네 마음에 든 옷은 다른 사람도 마음에 들어 하는 경우가 많아. 그래서 옷 싸움도 엄청 치열해. 아직 스케줄이 널널한 이때에 마음에 드는 옷 먼저 찍어야 하지 않겠어?”

“아… 역시 대표님!”

별이는 우현이 백미러로 잘 볼 수 있도록 엄지를 치켜세웠다. 샵에 도착하니 이미 황석준 디자이너가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와, 어서와. 연락 좀 하지, 못 됐어. 어머! 이 친구가 오늘의 주인공이야? 진짜 예쁘다!”

그는 전부터 그랬지만 한 시도 말을 쉬지 않는다.

“잘 부탁드려요.”

“그럼, 당연하지. 일단 기다려봐. 유정아! 유정아! 너는 손님 왔는데 차도 안 내오고 뭐하니? 지연이는 어서 데려가서 사이즈 좀 재고, 응?”

저 부산스러운 것도 여전했다. 하지만 변한 것이 없기에 마음이 편해졌다. 익숙한 공간인 것 같았으니까.

“선생님은 변함없으시네요.”

“변하면 죽어야지, 호호호!”

다시 말하지만 남자 디자이너들이 조금 다르다고 해서 결코 거부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물론 처음에 조금 당황하기는 했었다.

“그런데 자기는 참 재주도 좋아. 어디서 저런 물건을 찾았어?”

“유디 엔터라고 거기서 라라걸즈라는 걸그룹 하던 애예요. 그래서 그런지 몸매도 괜찮은 거 같죠?”

“모델 해도 되겠어! 거기다 눈매를 보니까 보통 아니겠네. 잘 키워. 또 홀랑 날려 보내지 말고.”

“글쎄요. 그게 맘처럼 되는 게 아닌 거 같아요.”

“하긴, 지 자식도 내 맘대로 안 되는데 다른 사람이야 오죽하겠어.”

딸랑!

한창 수다를 떠는 중에 가게 문이 열렸다. 그리고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어머? 소연씨! 여긴 어쩐 일이야!”

석준이 연신 박수를 치며 달려 나갔다. 톱스타 강소연이 옷을 보러 온 것이다.

‘아… X됐다.’

은하 다음으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상대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고야 말았다. 식은땀이 그의 등을 타고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누구…? 어!”

은하와 한 번 부딪힌 적이 있으니 당연히 우현의 얼굴을 모를 리 없다.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생각났는지 우현을 가리키며 손가락을 내뻗었다.

“안녕하세요. 파인 엔터 김우현입니다.”

“어머! 소연씨도 우현씨 알아? 둘이 구면이었네? 호호!”

소연의 성격을 알고 있는 석준도 괜히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과장된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 사이즈를 재는 직원에게 연신 손짓을 하며 빨리 마무리하라고 재촉했다. 하지만 강소연의 시선이 이미 우현과 사이즈를 재는 별을 훑고 지나간 뒤였다.

“반가워요. 전에 은하 매니저였던 분이죠? 새로 시작하신다고 하던데.”

“네,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에 ‘밀실’을 같이 하게됐습니다.”

“들은 적 없어요.”

“네?”

북극에 휘몰아치는 바람도 그녀보다는 따뜻할 것 같았다. 별이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이쪽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안절부절했다.

“누가 참여한다는 말을 듣기는 했는데, 제가 좀 정신이 없어서요.”

“아! 그럴 수도 있죠. 다음 주에 확정된 제작발표회 때 만나게 될 줄 알았는데 벌써 뵙게 되네요.”

“그러게요.”

그녀의 눈빛은 벌써 만나서 기분이 나쁘다는 것이 팍팍 드러났다.

“게다가 선배가 온 걸 알면서도 인사도 안 하는 후배가 내 작품을 하게 되다니 정말 흥미롭네요.”

이번엔 우현도 한 방 먹었다. 그녀의 카리스마에, 빨리 인사시켜야 한다는 것도 까먹은 것이다. 사이즈 재는 줄자를 끊어서라도 데리고 와야 했다.

“안녕하십니까! 신인 배우 김별입니다!”

그런데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별이 소연의 앞에 나타나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하마터면 ‘세입!’이라는 말이 나올 뻔했다. 그만큼 재빨랐다.

“반가워, 강소연이야.”

“영광입니다. 평소에 팬이었습니다.”

얼씨구 좋다. 숙이고 들어갈 때는 확실하게 숙여야 한다. 어중간하게 숙이면 분명 반발심만 더 키워줄 뿐이다. 자존심은 배우 스스로가 세우는 게 아니다.

“그래? 잘 가르치셨네요?”

우현을 돌아보는 소연의 얼굴에 드디어 미소가 번져 나왔다.

“그럼요! 이 바닥에서 인사는 기본 아니겠습니까!”

배우의 자존심은 오직 팬들의 인기와 출연료가 세워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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