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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 새로운 시작(4)
며칠 뒤, 최 감독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역시나 생각했던 대로였다.
“너 재주 좋다?”
“무슨 일인데요? 혹시 그쪽에서 배역 양보하기로 했어요?”
“응. 무슨 짓을 한 거야? 혹시 네 엉덩이라도 대 준거야?”
“푸하하! 그런 말을 그렇게 진지하게 할 거예요?”
“궁금해서 그러지 인마! 무슨 마법을 부린 거야?”
사실 장태현을 협박할 때 쓴 usb는 집에 굴러다니는 것 중에 하나를 주워갔을 뿐이었다. 그 때는 당황해서 엿듣기만 했지 녹음할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뻥카로 질러본건데 바짝 쫄았던 장태현이 알아서 기었던 것이다.
“그런 거 없어요. 어쨌든 다행이네요. 언제 크랭크인 들어가요?”
“이달 말까지 스태프 확정짓고 다음 달 초에 들어간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잘 된 것 같아. 마이더스에서 강소연을 붙였거든.”
“강소연? 배역이 뭔데요?”
다 해결 됐다고 생각했는데 슬그머니 불안감이 치솟았다. 강소연은 원톱 여주인공이 아니면 어지간해서는 작품을 하지 않는다. 그 자존심에 은혜 역을 갓 신인 여배우가 하게 둘 리 없는데…
“‘미영’역을 강소연이 하게 됐어. 이제 기사 나갈 거야.”
“혹시 시나리오 수정했어요?”
“그건 어쩔 수 없었다. 비중을 더 늘려달라니 어쩔 거야.”
“아… 형! 그거 시나리오 딱 좋은데. 내용 늘어지는 거 아니에요? 그대로만 가면 진짜 대박인데!”
“나도 그래서 이번에 주인공을 6명에서 5명으로 줄이고 ‘미영’역을 조금 늘렸어. 그래도 내용 안 늘어지게 했으니까 걱정하지 마. 나도 이거 고치느라고 이틀 밤을 샜다. 나도 이번 작품에 사활을 걸었어. 대책 없이 지고 들어간 거 아니야.”
“그럼 다행이네요. 형! 이번에 우리 진짜 잘해 봐요!”
“그래. 너도 살고 나도 함 살아보자.”
말투를 들어보니 시나리오를 엉망으로 만든 건 아닌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앞으로 강소연과 별이가 부딪힐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왔다. 분명 엄청 깨질 텐데…
“대표님!”
이 아이도 양반은 아닌가 보다. 어디서 맛있는 걸 먹고 왔는지 생글거리며 다가왔다.
“오늘 무슨 날인지 아세요?”
그제야 얼마 전에 그녀와 한 약속이 생각났다.
“데리고 왔어?”
“안 까먹으셨네? 그럼요! 후우…”
왜 자기가 떨리는지 별이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숨을 가다듬었다.
“사무실 밖에 있는 거 아니야? 데리고 들어와.”
“알았어요. 긴장할 수도 있으니까 너무 몰아붙이지 마세요.”
“아이고, 네 걱정이나 하세요. 얼른 들여보내.”
밖으로 총총거리며 뛰어나간 별은 160도 안 돼 보이는 작은 소녀의 손을 끌며 들어왔다. 확실히 사진에서 보던 귀여움과는 다른 생동감이 있었지만 그래도 역시나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최윤정입니다.”
“반가워요. 파인 엔터 김우현이에요. 연기를 하고 싶다구요?”
“네.”
수줍은지 얼굴이 빨개진 채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이 확실히 귀엽긴 했다.
“그럼 준비해 온 거 있겠네요?”
“네.”
“그럼 해볼래요? 너는 밖에 나가있어.”
소파에 앉은 우현이 별이를 내보냈다. 아무래도 아는 사람이 지켜보고 있으면 더 부끄럽고 긴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잠시 숨을 고른 윤정은 곧 허리에 손을 올리며 눈을 치켜떴다.
“흥! 웃기지 마! 내가 헤어지자면 울면서 잡을 줄 알았니? 웃기고 있어, 한 번만 사겨달라고 징징대기에 사겨 줬더니 분수도 모르고. 나 아니면 누가 너 거들떠나 볼 것 같니?”
아니다. 혹시나 하며 기대했지만 전혀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발성도 좋지 않았고 대사 처리도 별로였으며 시선처리도 불안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얼굴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전달이 없었다.
그 이후로도 대사는 계속됐지만 어린 친구가 마음에 상처를 입을까봐 중단시키지 않고 끝까지 진지하게 들었다.
“음… 내가 솔직하게 이야기해줘야 윤정양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솔직하게 말해도 되죠?”
“네.”
윤정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걸 느꼈는지 금방 눈에 눈물이 한가득 찼다.
“내가 볼 때 윤정양은 배우와는 맞지 않아요. 단순히 예쁘고 아니고를 떠나서 연기에서 매력도, 존재감도 느껴지지 않아요. 물론 5년이고 10년이고 이 바닥에서 계속 노력한다면 조연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주연배우는 힘들 거예요.”
“알겠습니다.”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이건 그녀를 위해서도 진실을 이야기해줘야 했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있다는 건 젊을 때는 낭만일지 몰라도 나이가 들어서는 후회와 원망만 남을 테니까.
그럼에도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는 그녀를 보면서 칭찬 하나라도 해주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에 한 마디를 더 보탰다.
“그래도 목소리는 정말 좋았어요. 아주 맑기만 한 음성은 금방 질리는데 윤정양의 목소리는 뭐랄까? 속삭이는 듯하면서 부드러운… 어찌 들으면 순수하고 어찌 들으면 섹시한 음성이라 누구나 한 번 들으면 잊기 힘든 목소리예요.”
이건 진심이다. 그래서 앞의 연기와 더 어울리지 않았다. 노래로 따지면 선곡 미스와 비슷하다고 할까? 하지만 캐릭터 선택을 잘 했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미니주연(미니시리즈 주연배우)을 맡기에는 부족했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대표님! 그럼 노래는 어때요? 얘가 작사랑 작곡 다 하는 애거든요!”
이미 밖에서 귀를 기울이고 엿듣고 있던 김별이 부리나케 달려와 외쳤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는 의아하게도 통기타가 들려 있었다.
“노래? 그 건 어디서 난 기타야?”
“이거 얘가 항상 메고 다니던 거예요. 야, 일단 한 번 불러봐.”
별이는 사무실 한 쪽 책상에 있던 의자 하나를 가지고 와서 억지로 윤정을 주저 앉혔다.
“우리 회사가 언제부터 배우랑 가수를 동시에 키웠냐?”
“혹시 모르잖아요? 한 번만 들어봐요, 딱 한 번만!”
별이는 검지를 세워 우현의 눈앞에 꼿꼿하게 세워 보이며 딱 한 번을 강조했다. 그 기세에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어 승낙하고 말았다.
“알았어, 들어볼게. 알았다니까. 자, 한 번 해봐요. 긴장하지 말고.”
별이는 친구가 노래하는데 거슬리지 않게 뒤쪽 벽에 딱 붙어 섰다. 윤정은 다시 숨을 고르더니 천천히 기타를 튕겼다.
“Please don't see just a girl caught up in dreams and fantasies.
Please see me reaching out for someone I can't see…”
영화 비긴어게인의 OST인 ‘lost stars'다. 그녀 특유의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부르는데 우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원석을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노래의 하이라이트 부분인 고음 부분도 전혀 무리 없이 부드럽게 넘어갔다. 오히려 남자가 부를 때보다 더 달달한 감성이 느껴지는 것이 완전히 자신만의 색깔로 녹여냈다고 느꼈다.
노래가 다 끝나고 윤정이 슬쩍 우현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우현은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하지 않고 고심했다. 분명 키워만 주면 뜰 것 같았다. 하지만 우현은 가수를 키워본 경험이 없다.
“너 자작곡도 있잖아. 한 번 해봐.”
우현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별이가 윤정의 어깨를 툭 쳤다. 하지만 윤정은 자신의 실력에 대한 무력감을 느꼈는지 또 다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울지 말아요. 안 좋아서 그런 게 아니라,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랬어요. 자작곡 한 번 들려줄래요?”
당황한 우현은 얼른 그녀를 진정시켰다. 그냥 달래주려고 하는 말이 아닌 것 같자, 윤정은 울음을 그치고 다시 마음을 다스린 후 기타를 튕겼다.
“그대는 알고 있나요? 저 별의 아름다움을…”
자작곡은 솔직히 별로였다. 하지만 노래야 그녀에게 잘 맡는 노래를 붙여주면 되는 거니 큰 상관은 없었다.
노래가 끝난 뒤 사무실은 적막감이 감돌았다.
“나이가 어떻게 돼요?”
시간이 한참 흐르고서야 우현의 입이 열렸다.
“열아홉이에요. 별이 언니는 같은 라라걸즈 멤버였구요.”
“라라걸즈에서 뭘 맡고 있었어요?”
“메인보컬 맡고 있었습니다. 요리 예능에 몇 번 나간 적 있구요.”
우현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 말았다. 이런 목소리를 가진 그녀를 온통 EDM의 흔들어대는 노래를 부르게 했으니 자신의 재능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우리 회사가 이제 시작하는 단계라는 건 알고 있죠? 왜 다른 큰 기획사를 안 찾아가고 이곳으로 온 거예요?”
“언니랑 같이 하고 싶어서…”
생각지도 못한 참으로 단순한 답변이다.
“아…”
“다른데 오디션 가보기도 했어요. 그런데 잘 안 돼서…”
“물어봐도 돼요? 어디 가봤는지?”
“음… YC랑 JGP랑, SN이랑…”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기획사를 다 읊을 태세다. 결국 갈 데가 없어서 온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기가 막혔다. 이런 인재를 받지 않다니… 아마도 기존에 데뷔한 경험이 있어서 받지 않았을 것이다. 오디션 볼 때, 진심을 가지고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도 않았을 거다. 어차피 탈락시킬 거니까.
데뷔한 경험이 있는데 뜨지 못한 중고 신인들은 타 기획사에서 어지간하면 받지 않으려 한다. 대개의 경우 뜨지 못하면 못 뜬 이유가 있는 법이고 잘못된 습관이 들린 경우가 많아 고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새로울 것이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다.
“내가 볼 때는 가능성이 많아요. 마음 같아서는 정말 크게 키워주고 싶어요.”
“정말요?”
그녀는 처음 듣는 칭찬에 반쯤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런데 알다시피 우리 회사가 이제 시작하는 단계에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밀어주기 힘들어요. 그래서 시간이 조금 걸릴 수도 있어요.”
“얼마나요?”
그녀로서는 되지도 않을 거면서 괜히 붙잡아두고 시간만 끌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글쎄요. 한 1,2년 정도?”
“그 정도면 데뷔할 수 있다는 건가요?”
생각보다 짧은 기간에 오히려 별이와 윤정이 놀랐다. 한 3,4년 고생하라고 할 줄 알았을 거다.
“더 걸릴 수도 있지만 웬만하면 그 안에는 데뷔할 수 있을 거예요.”
이건 오로지 우현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 드라마 OST에 곡하나 끼워 넣는 것 정도는 인맥으로 어떻게 하면 될 수도 있으니까. 더군다나 가이드음악만 들으면 이 노래가 뜰지, 안 뜰지 판단이 가능하니 시청률 20% 넘어가는 작품에 노래만 잘 꽂아 넣으면 음악차트에 이름을 올리는 것 정도는 충분히 자신할 수 있었다.
물론 기존의 걸그룹이나 솔로가수들이 버린 노래 중에 금쪽같은 노래를 찾는 건 오로지 그의 몫이지만. 귀에 피딱지가 앉도록 음악을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