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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새로운 시작(3)
“어. 이것도 영업직이나 마찬가진데 번호를 바꿀 수는 없잖아.”
“오빠, 내가 그 때 한 말을 장난으로 들었나 봐?”
“네가 아무리 마음이 상했어도 생계를 가지고 그러면 못 쓰는 거야.”
타이르는 듯한 우현의 목소리에 그녀는 답이 없었다. 그렇게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다시 그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래, 그 같잖은 충고 잘 받아들일게. 어디 잘 해 봐.”
“고맙다.”
생각지도 못하게 그녀가 숙이고 들어오자 우현이 당황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고맙긴. 그런데 어떡하지? 우리 회사 애가 그거 꼭 해야 한다고 하던데… 오빠네 배우 까이겠던데?”
“뭐?”
“이번에 최철성 감독 신작에 꽂았다며? 장태현이가 그걸 듣고 와서는 길길이 날뛰면서 입에 거품을 물던데?”
대표를 쓰러지게 만들고 파인 엔터를 말아먹었던 장본인이 바로 장태현과 그를 조종한 일당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화가 머리끝까지 뻗쳐올랐다.
“그 새끼… 설마 너랑 같이 일해?”
“응, 내 매니저야.”
마이더스에서 일하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것과 담당매니저인 건 차원이 달랐다.
“하…”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왜? 화나? 그러게 오빠가 그 때 그만두지 않았으면 이런 일도 없었겠지.”
“그 얘긴 그만하자. 그래서… 마이더스에서 자기네 배우를 꽂아야 하겠데?”
“그럴걸? 최 감독이 거부하기 힘들 거야. 투자자까지 물고 왔거든.”
“몇 명이나 꽂을 건데? 거기 주연이 6명이잖아.”
우현은 최악의 경우까지 생각했다.
“두세 명 생각하는 거 같던데? 나도 자세한 건 몰라.”
“너는 아니지?”
“내 성격 잊었구나?”
그제야 은하가 공포, 스릴러물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것이 생각났다. 어릴 때의 트라우마로 인해 공포, 스럴러 영화를 보는 건 물론이고 촬영도 절대 거부했다.
“아… 맞다, 너 이거 못 찍지. 그래, 하여튼 고맙다.”
“고마워하라고 말해준 거 아니야. 엿 먹으라고 말해준 거지. 내 기분 망치고 싶지 않으면 그딴 재수 없는 대답은 하지 마.”
“크흠… 알았다.”
말이 길어 질까봐 그대로 수긍했다.
“그럼… 끊어.”
우현이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전화가 끊겼다. 피식 웃음이 나왔지만 다시 정색하고 최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마이더스에서 돈 준데요?”
“나도 방금 전에 알았는데 너는 어떻게 그렇게 빨리 알았냐? 내 방에 cctv 달아놓은 거 아냐?”
최감독에게 컨택한 것은 얼마 안 된 모양이다.
“은하한테 들었어요.”
“걔가 그래도 네 생각은 하는 구나. 그래도 전 매니저라고, 의리가 있어.”
“그런 거 아니에요. 행여나 마이더스 쪽에 그런 말 가지 않게 하세요.”
우현과 은하의 사정을 잘 모르는 최감독이 어떤 말을 할지 몰라 단속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새끼… 바짝 쫄아서 전화해놓고는…”
“쫄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 마이더스 HQ인데… 걔네가 이 바닥에 얼마나 영향력이 큰지 아니까요.”
“네 말처럼 거절하기가 쉽지 않아. 너도 알다시피 내가 전 영화가 쪽박까지는 아니더라도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한 건 사실이잖아. 그래서 투자받기가 그리 쉽지 않은 게 사실이야.”
“알고 있죠. 그래도 진짜 은혜 역할에 우리 별이가 딱이잖아요?”
“그렇긴 하지. 나도 마음 같아서는 네 배우랑 촬영 들어가고 싶지만 돈줄을 그쪽에서 쥐고 있으니 어쩌겠냐?”
영화 개봉 시에 감독 이름보다 투자자 이름부터 나오는 한국 영화계의 비정상적인 구조상 투자자의 의견을 개무시하고 촬영에 들어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박찬옥, 봉준후 같은 엄청난 명성을 가진 감독들은 예외지만.
“아, 그러고 보니까 이상하네.”
“뭐가요?”
“내가 얼핏 듣기로 이 마이더스 쪽에서 이 영화를 강하게 추천한 사람이 은하라고 하던데?”
“네? 은하가 이 작품을 추천했다구요? 걔 공포, 스릴러 시나리오는 돈 주고 보라고 해도 안 보는 애예요.”
“그래? 그럼 더 이상하네… 왜 너한테 이런 정보를 줬을까?”
우현은 바로 깨달았다. 자신을 물 먹이기 위해 은하가 꾸민 것이라는 걸.
“알았어요, 형! 일단 확정짓지만 말아줘요. 내가 마이더스 쪽이랑 합의 볼 테니까.”
“자신 있어? 괜히 개창피 당하는 거 아니냐?”
“가오가 있지. 걱정 말아요”
전화를 끊은 우현은 고민에 빠졌다. 은하가 마이더스를 부추겼다면 은하를 설득하는 게 맞지만 그녀를 마주한 채 이야기를 나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턱 막혀왔다. 그녀가 밉기만 하다면 욕이라도 퍼부어 줄 테지만…
“대표님 무슨 걱정 있으세요?”
언제 다가왔는지 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아니야. 그래, 수업은 잘 받았어?”
“네, 요즘 연기수업을 받다 보니까 제가 확실히 노래보다는 연기 쪽이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선생님들도 칭찬 많이 해주시고.”
“그럼, 내가 널 괜히 데리고 온 게 아니야.”
“저기 그럼요…”
몸을 배배 꼬며 말끝을 길게 늘어뜨리는 걸 보니 뭔가 바라는 게 있는 모양이다.
“뭔데?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하하하. 그게요… 제 친구 중에 한 명이 연기 쪽으로 소질이 있을지도 몰라서… 아무래도 저 혼자만 이렇게 잘 되나 싶기도 하고…”
“너 아직 영화 크랭크인도 안 들어갔어. 얼굴도 못 내밀었다고.”
“죄송해요.”
단호한 우현의 말에 금세 시무룩해진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누군데?”
“네? 아, 이 친구예요.”
그녀가 핸드폰에 있는 사진을 우현에게 내밀었다. 보아하니 스튜디오에서 찍은 것 같은데 별이와는 다른 매력을 지닌 소녀였다. 전체적으로 동글동글한 것이 귀염상이라고 해야 하나?
“귀엽게 생겨서 남자들이 좋아하겠네. 그런데 미안하지만 배우 할 상은 아니야.”
우현은 솔직하게 자신의 감상을 말했다. 귀여움의 대명사인 박보연 같은 여배우가 있지 않느냐고 항변할 수 있지만 그건 박보연이 귀여우면서 예쁘기 때문이다. 여배우는 결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그래요? 사진으로만 봐서 그런 거 아닐까요?”
“아닐걸?”
물론 사진보다 실물로 보는 게 정확하다. 하지만 사진빨이나 조명빨, 카메라빨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지금껏 사진과 실물 차이로 생각이 바뀌었던 경험은 몇 번 되지 않았다.
“그래두요.”
좀처럼 포기를 못하는 별을 보며 결국 항복하기로 했다.
“그래, 한 번 보기는 하자. 다음 주 초에 오라고 해봐.”
“앗싸!”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성을 터뜨리는 그녀를 우현이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제 친구가 안 될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흥! 막상 보면 계약하고 싶은 마음이 막 솟아오를걸요?”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안 그래도 회사에 배우가 너 하나밖에 없으니.”
“다음 주면 두 명이 되겠네요. 후훗!”
별이는 뭐가 그리 좋은지 방긋 웃으며 어디론가 전화를 하러 나갔다. 분명 그 친구한테 전화하는 것이리라. 우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이와 이야기를 하면서 마음을 정했다.
“나 나갔다 올 테니까 연기 연습 쉬지 마.”
“그럼요!”
사무실을 구하면서 20평정도 되는 커다란 공간을 만들었다. 한 쪽 벽면 전체를 거울로 만들었기 때문에 연기와 춤, 걸음걸이, 제스처 등을 연습할 수 있었다.
그녀를 두고 나온 우현은 차에 오르며 전화를 걸었다. 마음 같아서는 평생 얼굴은 물론 목소리조차 듣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네가 어쩐 일이냐? 나한테 전화도 다 주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장태현 실장이다. 지금 마이더스로 갔으면 직책이 바뀌었으려나?
“만나죠, 우리.”
“내가 왜 너랑 만나? 왜? 마음같이 안 풀리는 일이라도 있나 보지?”
무슨 일인지 뻔히 알면서 비꼬는 것이다. 우현이 은하와 같이 잘나가면서부터 항상 자신을 질투해왔다는 것을 알기에 이건 웃어넘길 수 있다.
“만나야 할 걸요? 안 그러면 후회할 텐데요?”
“내가 후회할 거라고?”
“네, 안 그럼 바로 은하를 만나러 갈 테니까.”
그 말이 정곡을 찔렀는지 잠시 머뭇거린 그가 거친 목소리를 토했다.
“시팔… 이제 와서 네가 은하를 데리고 갈 수 있을 것 같아?”
“그럼 마음대로 하시든가. 지금 청담동 가고 있으니까 회사 앞 커피숍에서 보죠. 30분 뒤에 봅시다.”
우현은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나올 것이다. 그는 자신과 은하의 관계를 항상 의심했으니까. 그래서 가장 불안할 것이다.
청담동 마이더스 HQ의 회사 앞에는 상당히 고급스러운 커피숍이 있다. 아메리카노 한 잔에 만 원이 넘는 건방진 가게지만 커피 맛은 물론이고 분위기도 고급스러워 사람이 끊이질 않았다.
먼저 와서 라떼 한 잔을 음미하고 있는데 역시나 30분도 되기 전에 갈색머리로 염색한 장태현이 들어왔다.
“너 이 새끼… 끈 떨어진 연 주제에 협박하면 뭐라도 나올 줄 알아?”
“그건 제가 걱정할게요. 그러니까 목 아프니 이제 앉아요.”
앉아 있는 우현을 씩씩거리며 노려보던 태현이 맞은 편 자리에 앉았다.
“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
“알잖아요? 최 감독이 들어가는 ‘밀실’, 거기 은혜는 우리 별이가 맡을 거예요. 나머지는 그쪽에서 꽂든 말든 알아서 하세요.”
“이 새끼가 완전히 미쳤네? 너 영화 촬영하는 데 돈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알아?”
“오래전이라 까먹으셨나본데 저도 은하 데리고 영화 해봤습니다.”
“하… 그래, 아니까 말도 안 된다는 거 알고 있겠네? 수십억을 갖다 박는 투자회사에서 얼굴도 모르는 애를 주연으로 쓰는 걸 두고 볼 거라고 생각해?”
“주연이 6명이에요. 한 명 정도는 괜찮아요.”
“거기서 은혜가 극의 키를 쥔 인물이야. 그냥 6명 중에 하나가 아니라고. 알면서 모른 척하네. 게다가 이건 은하의 입김이 들어간 거야. 걔가 투자자 충동질한 거라니까? 날 잡고 붙들어져봤자 아무것도 안 돼. 너 감이 많이 떨어졌구나.”
우현은 그의 비아냥에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달콤 쌉쌀한 라떼를 한 모금 마셨다.
“박재연 알지?”
순간 그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우현이 그를 향해 반말을 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가 놀란 건 반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게 누군데?”
“알면서 시치미 떼시네. 2년 전에 은하 데리고 궁전에서 박재연이랑 붙여 줄려고 했잖아. 그 때 내가 있는지도 모르고 계속 통화하던데?”
우현이 품에서 작은 usb 하나를 꺼내보였다.
“그 때 네가 박재연이랑 통화하는 걸 옆에서 녹음했거든. 그 때 은하를 나가요 취급했던 것도 고스란히 들어있지. 어때? 이거 은하한테 가서 들려줄까? 비록 네 목소리밖에 안 담겨 있지만 그래도 내용 파악하는 건 문제 없을 걸?”
그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이게 알려지는 순간, 은하와의 관계는 물론이고 이 바닥에서 매장당할 것이 틀림없다.
“이것으로 내 용건은 끝났어. 난 별이가 최 감독이랑 영화 촬영하는 데 아무 문제없는 것으로 알고 있을게.”
일어서는 우현의 소매를 태현이 붙잡았다.
“난… 난 힘이 없다니까? 은하가 원한거야. 게다가 지금은 은하만 설득해도 안 돼. 이미 투자계획서까지 나왔어.”
“설득해, 그럼.”
“투자자까지? 어떻게?”
“그건 네가 생각해야지. 그리고 머리가 그게 뭐냐?”
우현이 그의 손을 뿌리치고 가게를 나왔다. 잘 해결될 거다.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간이라도 팔아먹을 자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