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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 새로운 시작(2)
유디 엔터와 마무리 지은 다음날, 미리 계약했던 강남의 한 작은 사무실의 인테리어가 마무리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도 개업이라고 사무실 한켠에 돼지머리를 올려놓고 고사를 지내는데 고작 대표인 우현과 별이 뿐이라 절하는 내내 민망했다.
“지금은 만원이지만 나중에 누나가 톱스타 되면 백만 원짜리로 꽂아줄게!”
함박웃음을 지으며 돼지 입에 배춧잎 하나를 꽂은 그녀는 아직 어려서인지 창피해하기 보다는 처음 지내는 고사에 종일 신기해했다.
별이에게 유디 엔터테인먼트와의 모든 계약이 종료됐다고 말해주었다. 그녀는 후련하다고는 했지만 더 이상 걸그룹을 할 수 없다는 것 때문인지 목소리에 아쉬움이 묻어나왔다.
최철성 감독과의 약속 날짜가 다가오기 전까지 미친 듯이 연기공부를 시켰다. 별이는 우현이 이렇게나 빨리 일을 진행시킬 줄 몰랐기에 얼떨떨해 했지만 무언가 일이 되려나보다 하는 마음에 최선을 다해 연습에 매진했다.
하루에 세 시간도 못자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시켰다. 약속 날짜를 하루 앞둔 날에는 아예 사무실에서 새벽까지 연습시켰다.
별이가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왔다고 투덜댔지만 우현은 화장으로 커버된다며 가볍게 무시했다. 그리고 아침 8시, 메이크업과 머리손질을 위해 청담동의 한 미용실로 향했다.
“반가워요.”
우현은 한창 머리를 만지고 있는 별이를 두고 미용실 원장과 독대했다.
“자기 안 죽었구나?”
겉으로 보기에는 상당히 젊어 보였지만 실제로는 40대 중반이나 되는 그녀는 이 바닥에서 알아주는 메이크업 아티스트 겸 헤어디자이너로, 미용실의 이름은 그녀의 이름을 따 ‘한미홍 뷰티페이스’다.
그녀와는 은하를 데리고 있을 때부터 상당한 친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지금, 얼굴에 철판 깔고 대뜸 찾아온 것이다.
“미안해요, 연락 못해서.”
“은하가 자기 새로 시작한 거 알아?”
“아직 모를 거예요.”
“그러다 여기서 마주치면 어쩌려고?”
“여기 아직도 다녀요? 마이더스는 전속 미용실 따로 있다던데?”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우현이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그런데 자신을 보며 빙그레 미소 짓는 미홍을 보자 이내 장난임을 알아차렸다.
“아… 장난이구나?”
“푸훗! 자기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은근히 순진한 구석이 있어. 맞아, 은하 마이더스 전속 미용실로 옮겼어.”
“크흠… 하여튼 장난은… 어쨌거나 나 한 번만 도와줘요.”
“뭐가 이쁘다고?”
“에이 왜 이래요? 제가 그냥 이대로 사라질 사람으로 보여요? 미래의 고객에게 투자한다고 생각하세요.”
“칫! 그놈의 허풍은… 알았어, 이리로 보내.”
“배우 얼굴은 보고서 콜하는 거예요?”
“자기 눈썰미가 어느 정도인지 나만큼 아는 사람이 있을까?”
생각해보니 은하를 데리고 있을 때 이곳에 오며 그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쟤는 뜰 것 같다’, ‘쟤는 곧 집에 가겠다’ 그런 식으로… 그 때는 장난 식으로 툭툭 던진 말인데 그녀는 그것을 다 기억하는 모양이다.
“그래도 누님밖에 없네요. 감사합니다!”
우현은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90도로 허리를 굽혔다.
“됐어. 내가 조폭 보스니? 그런 식으로 인사하게? 나중에 근사한 곳에서 밥이나 사.”
“그럼요. 제가 남편분까지 확실하게 대접하겠습니다.”
“당연하지.”
메이크업과 머리손질에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가격에 비한다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한창 수다를 떨다 밖으로 나오니 별이의 헤어 세팅이 마무리되어 있었다. 걸그룹 때는 짧은 머리에 금발 염색을 했었는데 지금은 어깨에서 조금 내려오는 길이에 웨이브를 넣어 러블리하게 꾸며 놓았다.
“이야… 이 친구가 자기 배우구나? 너는 어디서 왔니? 너무 예쁘다, 얘.”
우현의 뒤에 있던 미홍이 별이를 보며 감탄했다.
“감사합니다.”
별이도 거울을 보고 자신이 이렇게 예뻤나 스스로도 감탄했다.
“잘 나왔다. 시간 됐으니 이대로 바로 가자. 그럼 다음에도 잘 부탁드려요.”
우현이 별이를 데리고 나오는데 미홍이 밖에까지 나오더니 소리를 죽이고 말했다.
“그래. 그리고… 이제 소문 돌 거야. 자기 이 바닥에 다시 뜬 거. 은하가 가만있지 않고 꽤 골치 아프게 굴 거야. 그래도 알지? 걔 센 척 하지만 여리다는 거. 미워하지는 마. 그냥 투정 부리는 거라고 생각해.”
“알고 있어요. 그래도 경우가 없는 애는 아니니까 괜찮을 거예요. 한 가지 걱정인 건 별이랑 은하랑 부딪히게 될까봐… 그게 조금 걸리네요.”
우현은 은하가 마이더스 쪽에 자신의 능력을 이야기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사실 그녀 스스로도 긴가민가 싶을 정도로 믿을 수 없는 일이니까. 그래서 자신과 은하 사이에 마이더스가 끼어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마이더스만 끼어들지 않으면 그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불편한 관계, 그것이 전부일 뿐이다.
별이를 카니발에 태우고 논현동으로 향했다. 그녀는 미용실에 올 때까지 전혀 긴장하지 않았는데 어째 얼굴이 잔뜩 굳어 창밖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래? 긴장했어?”
“조금요.”
“긴장하지 마. 그 감독님 나랑 친해.”
“그래두요. 괜히 낙하산이라고 욕먹는 거 아닐까요?”
“하하. 너 연예계에 낙하산이 얼마나 많은 줄 아니?”
“그래요?”
“웬만한 드라마 조연들, 전부 소속사에서 배역 맡게 해달라고 밀어붙여서 꽂히거나, 작가가 마음에 들어 해서 꽂히거나, 피디가 마음에 들어 해서 꽂히거나 등등… 심지어 투자자가 밀어붙여서 주연 따내는 건 너무나 흔해서 얘깃거리도 안 되는 곳이 이 바닥이거든. 오디션보고 합격한 주연배우도 갈아 치워. 그렇게 해서 작품이 망해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다음에도 또 그 짓거리를 하지. 웃기지? 그래서 뻔뻔해져야 해. 낙하산을 타고 작품을 하는 건 중요한 게 아니야. 그 낙하산에서 내려온 다음에 어떤 연기를 하느냐가 중요한 거지.”
“알았어요.”
“너는 너 스스로가 얼마나 특별한지를 알아야 해. 네 자신이 특별한지를 모르면 어떤 것도 보여줄 수 없어.”
“네, 이제부터 아주 특별하게 생각할게요. 한국의 톱스타가 될 몸이니까요.”
그제야 별이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 나왔다. 예약한 한정식 집에 도착해 별이를 데리고 식당에 들어서니 사람들의 시선이 점차 별이에게 모이기 시작했다.
옷은 일부러 캐주얼하게 청바지와 흰 티셔츠만을 입혔다. 신인 연기자 주제에 수백만 원짜리 옷을 걸치고 돌아다니면 오히려 반감을 사게 되니까. 지금은 그녀가 얼마나 매력적인지만 보여주면 된다. 그런 면에서 청바지와 흰 티셔츠는 젊은 여자의 내추럴한 매력을 드러내기에 최적의 룩이다.
사람들을 지나쳐 방으로 들어가니 약속 시간 10분 전인데도 이미 최 감독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 벌써 와 있었어요?”
“차가 안 막히더라고… 이야… 너 진짜 재주 좋구나?”
“안녕하세요. 김별이라고 합니다.”
최 감독은 풀메이크업한 그녀를 보고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반가워요, 최철성이에요. 일단 앉을까요?”
코스로 나오는 음식을 다 먹을 때까지도 그들은 이번 영화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시시껄렁한 잡담으로 시간을 때우다가 식사가 끝나고 후식이 들어오자 점차 분위기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래, 우현이가 하도 밀어붙여서 보러오긴 했는데, 비주얼로 보면 오길 잘했다는 생각은 드네요.”
“감사합니다. 말씀 낮추세요.”
“아뇨, 일단 캐스팅 확정되기 전에는 그럴 수 없죠.”
예상하고 있었다. 아무리 우현이 강하게 밀어붙인다고 해도 신인배우다. 아무런 검증 없이 꽂아 넣기에는 최 감독도 위험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연기가 궁금하다 이거지?”
“응. 준비해 온 게 있어요?”
당연히 준비했다. 우현이 별이를 슬쩍 바라보자 그녀가 감정을 잡으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최 감독은 이 자리에서 바로 연기를 시작할 줄은 몰랐기에 말리려다가 그만 두었다. 사실 궁금했던 것이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별이는 양손을 모아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미안해.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런데 생각해봐. 이게 다 내 잘못이겠어?”
고개를 쳐든 그녀의 눈빛이 번들거리며 최 감독에게 꽂혔다.
“나는 아무 잘못 없어. 민정이 걔가 너를 꼬시니까 홧김에… 뭐야? 너도 내가 잘못했다는 거야? 왜 아무 말도 안 해? 그년이 먼저 꼬리친 거 맞잖아! 너는 가만히 있는데 걔가 막… 막… 이렇게… 만지고, 눈웃음 치고…”
최 감독은 갑자기 자신에게 달려드는 그녀를 제지하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는 곧바로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여기까지입니다. 시끄러울까봐 그 뒤에 있는 대사까지 하기가…”
“아, 네. 충분해요. 수고했어요.”
우현은 처음부터 끝까지 끼어들지 않고 가만히 최 감독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확신했다. 그녀가 통했다는 걸.
“신기하네. 연기가 거칠긴 한데… 묘하게 빨려드네. 연기 공부한지 얼마나 됐어요?”
“아주 예전에 잠깐 한 달 정도 학원에 다녔고 다시 학원에 다닌지 일주일이 조금 안 됐습니다.”
“그래서 연기가 거칠었구나.”
최 감독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을 끄덕였다. 우현과 별이는 앞에 놓인 차를 마시며 그가 입을 열기까지 기다렸다.
“운이 좋다고 치부하기도 그렇고… 이쯤 되면 네 능력인 거겠지?”
“좋게 봐주는 거예요?”
이미 그의 마음에 들었다는 것을 직감했지만 그래도 직접 말을 들어야 뒤끝이 개운하기에 최 감독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래, 이번에도 넘어가 줄게.”
“하하하. 다행이다!”
우현은 가슴을 쓸어내렸고 별이는 환하게 웃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최 감독은 그런 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잘 해보자. 크랭크인 들어가기 전까지 연기 연습 많이 하고.”
최 감독이 마음을 정했다는 듯 말을 놓았다.
“진짜 열심히 하겠습니다. 말 편하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네가 잘 한 거지. 그럼 그 때 보자. 스케줄은 여기 있는 대표에게 알려줄 거야.”
별이를 데리고 사무실로 복귀한 우현은 같이 환호성을 질렀다. 우현은 ‘밀실’이 상당한 흥행을 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기에 환호성을 질렀고 별이는 연예계에 들어와 처음으로 무언가를 이루게 됐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생각보다 잘 했어. 아주 잘 했어.”
“떨려서 혼났어요. 그런데 막상 대사를 치기 시작하니까 긴장감이 확 줄어들더라구요.”
확실히 집중력이 남달랐다. 아무리 준비한 대사라고는 하지만 연기 경력도 얼마 없으면서 음식점에서 감독을 상대로 저 정도까지 한다는 건 대단한 재능이다.
별이는 일주일간 오로지 연기만을 생각하며 연습에 매진했다. 그러면서도 체중조절까지 해야 했는데 그녀의 어머니가 이제야 뭐가 되는 거냐며 식단조절까지 해주신다고 했다.
연예 기사를 보지 않아도 최 감독이 하나, 둘씩 캐스팅 되어가는 것을 문자로 알려줬다. 굳이 그렇게 해주지 않아도 되는데 괜히 불안해 할까봐 챙겨주는 것이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을 때 생각지도 못한 번호가 핸드폰에 떴다.
‘은하!’
이걸 받아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했지만 어차피 겪어야 할 일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여보세요.”
“번호 안 바꿨네?”
언제나 맑고 청아했던 그녀의 목소리는 변함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