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5] 새로운 시작(1)
김별이 소속사와의 계약기간이 만료되기까지는 별로 안 바쁠 것 같지만 우현은 오늘만 벌써 30번째 통화다.
“안녕하십니까? 저 파인 엔터의 김우현입니다. 네, 기억나시죠? 하하, 네. 다름 아니라 이번에 괜찮은 작품 하나 하신다고 들어서요. 제가 조연으로 쓰기에 괜찮은 친구를 데리고 있는데요.”
“안녕하세요? 파인 엔터의 김우현입니다. 임영미 작가님 되시죠? 네, 이번에 신작 들어가신다고… 하하, 네. 아유… 주연감을 소개시켜드리려는 건 아니니까 부담 가지지 마세요. 네. 그냥 대본만이라도 받아볼 수 있을까요? 네. 아유, 그럼요.”
아무에게나 무작위로 연락하는 것 같지만 철저하게 고르고 고른 사람들에게만 연락을 취하는 중이다.
보통 신인 연기자면 좋은 작품이든 아니든 상관하지 않고 일단 되는대로 다 하려고 한다. 하지만 우현은 철저한 원칙을 가지고 최적의 작품을 찾는다. 물론 하고 싶다고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좋은 작품에는 수백의 지원자가 몰려드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 연기자의 재능이고 매니저의 능력인 것이다.
일단 제작에 들어가지 않은 피디에게는 연락할 필요가 없다. 드라마는 절대적으로 작가 놀음, 어떤 작품을 맞느냐에 따라 흥행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물론 관리차원에서 유대관계를 맺는 것과 캐스팅을 위한 작업은 다르다.
드라마 작가면 어지간한 작가들한테는 전부 연락해본다. 신인이 처음부터 시청률 대박 작품을 찍으면 당연히 좋겠지만 아니라도 상관없다. 문제는 어떤 캐릭터를 하느냐다. 그렇기에 우현이 알고 있는 거의 모든 작가에게 연락해 시작할 드라마의 대본을 먼저 받는다.
영화감독은 드라마로 따지면 피디와 작가가 하는 일을 혼자 한다고 보면 된다. 요즘에는 영화 시나리오 작가를 따로 두는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감독의 손을 거친다. 그렇기에 괜찮은 감독은 무조건 연락을 해보지만 몇 가지 경우에 해당하는 감독만큼은 철저하게 거른다.
첫 째, 성인영화나 19금 장면을 과도하게 넣는 감독. 설명이 필요 없다.
두 번째, 자기 작품을 위해 배우들이 어떻게 되든 관심 없는 감독. 이런 경우는 배우가 다치거나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세 번째, 90년대 감성을 아직까지 가지고 있는 감독. 대부분의 경우 흥행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 감독들이 대부분이며 설사 흥행한 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10년도 훨씬 더 전의 일인 경우가 만다.
네 번째, 특색이 없는 감독. 작품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때는 모두 재미가 없기 때문만은 아니다. 시나리오도 어중간하고 캐릭터도 매력이 없으며 결정적인 장면도 없는, 그저 그런 영화를 만드는 감독은 흥행에 감이 없는 건 물론이고 배우를 살려주지도 못한다.
이런 감독들을 배제한 알짜배기 감독들에게만 연락해서 다음 작품에 대한 정보와 오디션에 관한 소스를 받는 것이다.
아주 다행스럽게도 우현이 은하를 데리고 있을 때 가장 잘 했던 것 하나는 결코 적을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흥행을 예측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건 오로지 대표와 은하밖에 없었다.
어디서도 자신의 능력을 떠벌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다른 이들은 그의 노력과 은하의 타고난 재능이 그녀가 톱스타가 된 비결이라고 믿었다.
“어이! 김우현이! 웬일이야? 너 이 바닥 떴다는 소문이 쫙 깔렸던데?”
‘살벌한 연애’의 감독 최철성이다. 그와는 한 달에 못해도 꼭 한 번은 소주를 마실 만큼 친분을 쌓았다. 다 미래를 위해서였다. 은하를 데리고 있을 때는 막상 작품 한 번 같이 해본 적도 없었지만 말이다.
“아… 루머예요, 루머.”
“루머치고는 너무 디테일하던데? 너 인마, 나랑 소주 안 마신지가 언제야? 나 너 정말 이 바닥 뜬 줄 알았어. 네 번호 뜬 거 보고 부고 전화 아닐까 철렁했다, 야.”
“아이고 감독님, 무슨 그런 섬뜩한 소릴 하십니까?”
“크크큭! 그렇다는 거지. 하여튼 어쩐 일이야? 소주 한 잔 하자고? 아니면? 너 새로 시작하는 거야?”
“네, 저 새로 시작합니다. 파인 엔터 그대로 물려받았어요.”
“물려 받긴 개뿔… 소문 들어보니까 회사 다 털렸다던데? 다 네 돈 가지고 하는 거지?”
“모르는 게 없으시네요.”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 전처럼 시나리오 보내줘?”
“이번에 새로 시작하는 거 있어요?”
“사실 이번에 작게 시작하는 게 있어. 배우만 정해지면 투자받을 수 있을 것 같아.”
“어떤 내용인데요?”
“전화로 말하기는 그렇고, 시나리오 보내줄 테니까 보고나서 연락해. 새끼… 은하 데리고 있을 때는 그렇게 붙여달라고 해도 쌩까더니…”
“그 때는 제가 주연이 붙여줬었잖아요?”
“그래, 네 말대로 주연이가 잘 하긴 했지. 됐고, 보고 연락하기나 해. 메일로 보낸다.”
“알겠습니다. 들어가십쇼!”
최철성 감독은 시나리오가 촘촘하고 디테일이 좋다. 스케일 큰 작품보다는 작고 소소한 이야기를 주로 쓰는 감독인데 아직까지 대박난 작품은 찍지 못했다. 하지만 우현은 그가 뜨지 못 한 이유가 대중적이지 못한 시나리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깊은 생각을 요구하는 내용 때문에 관객 동원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얼마 후 그의 메일계정으로 문서 하나가 도착했다. 제목은 ‘밀실’. 출력하기 귀찮았던 우현은 그 상태 그대로 문서를 읽어나갔다.
“뭐야, 이거… 이 아저씨 이런 것도 쓸 줄 알았어?”
놀랍게도 지금까지 해왔던 작품과는 전혀 다른 장르인 공포, 스릴러물이었다. 시나리오를 읽는 내내 소름이 돋을 정도로 몰입감이 대단했다.
‘이거 무조건 대박이다! 4백만? 5백만? 아니야, 최소 7백만 이상이야!’
우현은 반사적으로 달력을 찾았다. 김별이 소속사와 공식적으로 결별하는 날은 이제 딱 일주일하고 6일 남았다.
의자에 앉아 손톱을 깨물며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해서든 이 작품을 잡아야 한다. 하지만 2주의 시간은 너무 길다. 우현은 다시 전화를 걸었다.
“형, 이거 얼마나 돌렸어요?”
전화를 걸자마자 대뜸 물어오는 우현의 질문에 최철성 감독이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글쎄… 일단 일해 봤던 기획사에 먼저 돌렸어.”
“그럼 아직 대형 매니지먼트에는 안 갔겠네요?”
“왜? 좋아?”
“형, 이거 나랑 해요. 내가 여기에 나오는 은혜에 딱 맞는 친구 데리고 갈게요.”
“아무리 그래도 오디션은 봐야지.”
“형, 지금까지 내가 형한테 꽂아줬던 배우들 중에서 조금이라도 이상했던 친구들 있었어요? 진짜로.”
“그러고 보면 네가 배우들은 진짜 딱 맞춰서 붙여주긴 했지.”
“이번에도 나 한번만 믿어 봐요. 형이 아닌 거 같으면 내가 깔끔하게 포기할게.”
“알았어. 그럼 데리고 와봐. 근데 투자자가 싫어하면 어떡하냐?”
“다른 애들은 이름 있는 친구들 쓰면 되지. 다른 거 안 바랄게. 은혜 이거 하나만 나한테 맡겨줘요. 캐스팅 언제까지 마무리 될 거 같아요?”
“안 그래도 몇몇 회사에서 연락이 오고 있어. 내일도 당장 미팅 잡혔거든.”
우현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번 작품의 캐스팅은 2주도 안 걸리고 마무리 될 것이다. 이걸 보는 순간 다들 느낄 테니까. 자신 만큼은 아니라도 시나리오를 보고 마음에 들어 하는 친구들이 많을 게 분명했다.
특히 6명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은혜는 일주일도 채 걸리지 않아 마무리 될 게 분명했다. 그만큼 매력적이었으니까.
“언제 시간 돼요?”
“월요일 괜찮아.”
“그럼 논현동 한정식집에서 봐요. 내가 주소 찍어줄게요.”
“너 무리한다. 됐어, 삼겹살이나 하지 뭐.”
“그러지 말아요. 나도 가오가 있어. 형한테도 그렇고 내 배우한테도 가오 한 번 세워야지.”
“하하, 그래. 이제 네가 대표지? 좋아, 그 때 보자.”
“들어가십쇼!”
전화를 끊은 우현은 곧바로 오피스텔을 나섰다. 얼마 전 중고로 얻은 진주색 카니발을 타고 홍대로 향했다. 목적지는 김별의 소속사인 유디 엔터테인먼트.
가는 동안 미리 그쪽에 연락했다. 김별의 계약관련 문제로 이야기하고 싶다고… 그쪽에서는 다행이라는 듯 흔쾌히 오라 했다.
그들에게도 라라걸즈가 아픈 손가락이다. 잘 키워보고 싶었지만 잘 안됐고, 이제 모두 내보내야 하는 입장인데 이렇게 데리고 가주겠다니 얼씨구나 하는 것이다.
“반갑습니다. 파인 엔터 김우현입니다.”
“파인 엔터요? 아… 예, 반갑습니다. 유디 엔터 이해명 팀장입니다. 그런데… 제가 알기로 파인 엔터는 마이더스랑 합병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내부적으로 복잡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제가 대표를 맡고 있구요.”
“하여튼 알았습니다. 별이를 데리고 가시겠다구요?”
“네, 제가 키워보려고 합니다.”
“실례지만 걸 그룹 경험은 있으신가요?”
그는 의혹이 가득 담긴 눈으로 우현을 바라보았다. 우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배우로 키울 겁니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자면 14년도부터 16년 중반까지 유은하의 영업과 스케줄 매니저를 제가 담당했습니다.”
참고로 영업매니저는 드라마나 영화, 광고 감독들과 유대를 다지며 소속 배우의 일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하고 스케줄 매니저는 스케줄 관리와 연예인의 이동에 신경을 쓴다.
그 밑에 있는 현장매니저는 촬영 현장에서의 전반적인 일을 담당한다. 마지막으로 총괄매니저가 이 모든 매니저를 관리하게 된다.
우현은 파인 엔터에서 매니지먼트 2본부 실장이 되며 총괄매니저까지 했었다.
“아하… 그러셨군요.”
그제야 그의 눈에 의구심이 사라지고 호감이 깃들기 시작했다. 이 바닥이 원체 사기꾼도 많고 허세가 가득한 곳이라 이렇게 자신의 이력을 정확히 밝혀야 한다. 그래야 상대방이 인정하기 때문이다.
“저희 입장에서 이렇게 별이를 데리고 가준다니 감사할 뿐입니다. 저희도 계속 도와주고 싶지만 워낙 걸그룹들이 많이 생기다보니 더 이상 지원해줄 여력이 안 돼서요. 그런데… 별이가 연기 쪽으로 소질이 있나 보죠?”
이번에는 그의 눈빛에 한 가닥 기대의 감정이 담겼다.
“그렇다기보다 제가 회사를 세우면서 조연급으로 괜찮은 인재풀을 만들려고 합니다. 사실 톱스타를 키우기 위해서는 회사에 조연들이 많이 받쳐줘야 해요. 회사에 끊임없이 일이 돌아야 튼튼해지거든요.”
“아… 그렇군요.”
가수들을 주로 키우는 회사라 그런지 배우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김별을 조연급이라고 거짓말을 한 이유는 저들 입장에서 자신들이 모르는 매력이 있나 하는 의문 때문에 되지도 않는 이유로 별이를 붙잡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 그런 경우도 몇 번 봤다.
“그래서 그런데 이번에 몇 개 오디션을 보내려고 하는데… 아직 이곳 계약기간이 끝나지 않아서요. 아시잖습니까? 회사에 돈 나갈 곳은 많은데 돈 들어올 곳은 얼마 없는 거…”
우현의 엄살 연기에 그는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죠. 그럼 어떻게… 계약을 여기서 마무리 지을까요?”
“그게 서로 좋지 않겠습니까? 별이도 이제 새롭게 시작해야 하고… 들어보니 거의 1년을 반백수로 지냈다고 하던데…”
그는 우현의 말에 미안한지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게 됐네요. 알겠습니다. 그럼 계약서 가져오겠습니다.”
그와 우현은 서로 보는 곳에서 계약서를 찢고 각서를 적었다. 이후로 계약하게 되는 모든 일은 유디 엔터와는 관계가 없다는 내용으로.
절차를 마무리한 둘은 똑같이 후련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유디 이해명 팀장은 데리고 있어봐야 짐밖에 안 되는 친구들을 보낸 것 때문이고 우현은 중요한 고비를 무사히 넘긴 것 때문이다.
이해명 팀장은 웃으며 배웅했지만 우현은 회사를 나오며 문득 궁금해졌다. ‘밀실’이 개봉될 때 저 팀장의 얼굴이 어떻게 바뀔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