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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 인연이지만 악연이었다(2)
그 때는 그녀와의 만남이 그의 인생 최대의 기회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장태현 실장이 우현을 보고 으르렁 거린 이유는 금방 드러났다. 알고 보니 장 실장은 재벌 3세에 끈을 대고 있었고 유은하를 보고 한 눈에 반한 재벌 3세가 장 실장에게 은밀하게 제안을 했던 것이다.
대표가 알지 못하게 그녀를 그 재벌 3세와 엮어야 했던 장 실장은 낙하산 타고 들어온 우현을 곱게 볼 수 없었다. 결국 몇 차례의 우여곡절 끝에 우현이 은하를 장 실장의 마수에서 구해내고 그 해 케이블tv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던 드라마 조연으로 화려하게 눈도장을 찍는다.
그때부터는 모든 일이 쉽게 풀렸다.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부산으로’의 출현으로 영화계에도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고 케이블 역사상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응답하세요. 1988’에 여주인공으로 발탁돼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여주인공의 이름인 ‘유정이 신드롬’을 일으키며 일약 톱스타로 발돋움했으니 우현이 그토록 바라던 일이 현실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 때는 유은하뿐만 아니라 우현도 상당한 돈을 벌었다. 고시원에서 탈출해 강남에 작은 오피스텔을 얻고 약간의 돈도 저축할 수 있었다.
또한, 유은하를 톱스타로 키우는데 가장 공헌이 컸던 우현이 매니지먼트 2본부 실장으로 승진하며 회사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에까지 올라가게 된다.
그게 바로 반년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그가 이뤄냈던 모든 게 한순간에 허물어지고 말았다.
대표가 난데없이 횡령으로 구속된 것이 시작이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대형 매니지먼트사에서 합병을 시도했고 주주들은 약속했던 것 마냥 한 명의 반대도 없이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됐다.
충격을 받은 대표가 구속수사 중 뇌출혈로 쓰러졌지만 누구 하나 그를 챙기는 이는 없었다.
우현은 이를 악물고 유은하를 회사에서 데리고 나오기로 결정했다. 그녀만 남아 있다면 다시 재기하는 건 문제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건 너무나도 차가웠던 그녀의 미소.
“오빠, 우리 쿨하게 헤어져. 이런 거 너무 구질구질해.”
“네가…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우현은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내가 뭘? 누가 들으면 내가 되게 못된 년인 줄 알겠네? 솔직히 오빠가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어? 내가 하고 싶다는 영화나 드라마 하나라도 하게 해줬어?”
“네가 하려던 작품들은 너랑 안 어울렸어!”
“뭐가 안 어울려? 혜수언니가 했던 ‘밤의 여왕’, 그거 내가 그렇게 하게 해달라고 했잖아. 언니가 그거 하고 칸에 갔을 때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알아?”
“넌 아직 준비가…”
“또! 또! 또! 그 소리! 내가 왜 준비가 안 됐는데? 내가 혜수언니에 비해서 못 한 게 뭐야? 내가 언니에 비해 못생기기를 했어? 나이가 많아? 연기가 달려? 뭐가 부족한데?”
“넌…”
“아… 연기가 달린다 이거지?”
그녀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거 알아? 오빠는 항상 날 부족해 했어. 날 떠받들어주는 척했지만 언제나 날 바보 취급했지.”
“그러지 않았어.”
“그러지 않았다고? 아니, 언제나 내 능력에 선을 그어놓고 딱! 아주 딱! 그것에 맞는 작품만을 골라 왔어. 단 한 번도 날 믿어주지 않았어!”
얼마나 꽉 쥐었는지 그녀의 주먹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것 따위는 느끼지 못하는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너 손에서 피나. 마스카라 다 지워졌어.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 흥분하지 마.”
“시끄러! 위하는 척하지 마! 나는 오빠에게 있어 배우가 아니었어. 나는… 그저 오빠가 성공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던 거야.”
그녀는 휴지로 손을 닦아주려는 우현의 손을 강하게 뿌리쳤다.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난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됐어. 우리 애들도 아니고 너무 웃긴다, 그치? 구질구질하게 이러지 말자. 난 이곳에 남을 거야. 그러니 오빠는 나가고 싶으면 나가. 단, 이 회사 나가면 나 절대 오빠 안 볼 거야. 아니, 오빠가 다신 이 업계에 발붙이지 못하게 할 거야.”
그녀의 눈빛은 우현을 잡아먹을 것처럼 살벌했다.
“대표님이 쓰러지셨어. 분명 장 실장이 걔네들하고 짜고 이렇게 만든 거야. 그걸 뻔히 알고 있는데 내더러 이곳에 남으라는 거야?”
“그게 뭐 어때서? 대표님이 오빠 아버지야? 아니잖아? 내가 남으라고 하는데 그깟 이유 하나로 나를 버리고 나간다는 거야?”
“미안해. 몰랐다면 몰라도 알면서 이곳에 남을 수는 없어. 아무것도 아닌 대리기사를 이곳까지 올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분이야. 난 그 분을 배신할 수 없어.”
“날 진짜로 못된 년 만드는구나… 그래? 그럼 가. 꺼져버려. 그리고 다신 내 눈 앞에 나타나지 마.”
그 때 그녀의 눈빛을 과연 잊을 수 있을까?
이후 회사를 나온 우현은 다시 폐인처럼 집에만 있었다. 단지 그녀와 헤어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에게 당한 배신의 아픔 때문일까? 어떤 의욕도 생기지 않았다. 먹을거리를 사러 마트 가는 걸 제외하고는 오로지 영화와 드라마만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쓰러졌던 대표가 그를 찾아왔다. 수술의 후유증으로 말도 제대로 못 했지만 폐인이 된 그를 보고 다시 일어서라 말했다.
우현이 같이 시작하자 하니 대표는 이제 모든 걸 접고 쉬고 싶다 했다. 하지만 우현이 성공하는 건 꼭 보고 싶다고 했다. 그 재능이 아까우니 자신을 위해서라도 성공해 달라 했다.
그렇게 대표는 시골로 요양을 떠나고 남은 우현은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없어졌던 파인 엔터를 다시 세웠다. 대표는 그였고 직원도 그 혼자였다. 하지만 문제 되는 건 없었다.
그의 핸드폰에는 수많은 피디와 작가, 감독들의 연락처가 적혀 있으니까.
“여보세요? 김별씨 연락처 맞습니까?”
“네?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파인 엔터 김우현이라고 합니다. 전에 유은하씨 매니저를 했어요.”
“아… 기억나요. 그런데 왜…?”
“만나죠, 우리.”
1년 전 회사 막내 매니저가 아파서 대신 땜빵을 서준 일이 있었다. 그 때 그가 데리고 간 연기자가 했던 단막극, 그 곳에서 김별을 보았다.
대사는 몇 줄 되지 않았다. 씬은 단 한 컷. 그럼에도 그는 그녀에게서 후광이 비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오직 그만이 느꼈을 것이다. 하필 그녀의 씬이 도시에서 내려온 젊은 여자가 실수로 뻘에 빠지는 내용이었으니까. 남자 주인공에게 버럭 화내는 것이 바로 그녀의 대사였다.
사실 그녀에 대한 존재 자체를 몰랐던 우현은 그녀가 아이돌 멤버라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그 때 얼마나 놀랐는지 한동안 그녀를 찾아 예능과 가요프로그램을 뒤졌다. 그런데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오로지 행사 현장에나 간간히 모습을 보일 뿐.
새로 회사를 일으키려 마음먹었을 때 가장 먼저 그녀를 찾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와 소속사의 계약기간이 끝난다는 아주 작은 단신 기사, 그걸 본 우현은 처음 은하를 봤을 때를 떠올렸다. 마치 운명의 이끌림 같았으니까.
“진짜로 저 배우하면 잘 될 수 있어요?”
“하하하. 의심하지 마. 너, 내가 띄워줄게!”
그렇게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그녀를 연기학원에 등록시켰다. 당연히 그의 돈이다. 어차피 그녀의 소속사인 유디 엔터테인먼트는 그녀가 뭘 하든 신경 쓰지 않았으니까 문제가 생길 것이 없었다.
연기학원은 그가 아주 잘 아는 학원이다. 유은하가 다녔던 학원이었으니까. 그리고 유일하게 은하의 현 소속사인 마이다스HQ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 학원의 원장이 워낙 깐깐하고 대쪽 같아서 누구 말에 휘둘릴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안심하고 그녀를 그곳에 맡겼다.
그녀를 맡기고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데 마침 그 학원의 원장을 만날 수 있었다. 새하얀 머리가 인상적인, 팔순을 앞둔 그의 이름은 박순재. 모든 연기자의 존경을 받는 그는 아직도 드라마를 쉬지 않고 있다.
“재기한다고?”
“네, 새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쟤는 너희 회사 그렇게 된 거 알고 있냐?”
“이제 천천히 말해야죠.”
“대책 없구만.”
“하하, 제가 좀 그렇잖습니까?”
“하긴… 아무것도 모르니 저렇게 순진한 표정을 지으면서 왔겠지. 나도 입 다물고 있으면 되는가?”
“오늘만 참아 주십쇼. 학원 끝나고 저녁이라도 먹으면서 얘기할 거니까요.”
“그러다 훌렁 날아가면 어쩌려고?”
“그럼 제 팔자려니 해야죠.”
“쟤 날아가면 내가 잡아가도 되지?”
“하하하, 그럼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어르신이면 괜찮습니다.”
“에잉… 재미없는 놈 같으니라고… 그나저나 어디서 저런 아이를 찾았어?”
“괜찮죠?”
“잠깐 봤는데 집중이 빠르던데? 게다가 눈빛이 좋아, 마치 은하처럼…”
“에이… 그 친구 얘기를 왜 또 꺼내십니까?”
우현이 슬쩍 그의 눈길을 피했다. 아직 우현에게 아물지 않은 상처인지 마음이 아팠다.
“왜? 후회되나?”
“후회는 없습니다. 저나 그 친구가 갈 길이 다른 거니까요.”
“걔는 그런 생각 안 하는 거 같던데? 아직도 자네를 찾아 눈에 불을 켜고 찾는다는 소리를 들었던 거 같은데? 아마 저 친구를 여기에 맡겨놓은 걸 알면 자네를 죽이려고 들 걸? 하하하.”
“악연이 깊었나봅니다.”
“악연도 인연인 게지. 그나저나 이번에는 실수하지 말게. 그 악연에는 자네도 책임이 없었던 건 아니야. 알지?”
“알고 있습니다, 제 잘못도 있다는 걸.”
“그래, 어련히 잘 하겠지. 그럼 난 이만 가네.”
“들어가십시오, 어르신.”
두 시간 정도가 지나 그녀를 데리고 근처 고깃집으로 향했다. 체중 조절이 필수인 여배우를 끌고 갈 장소는 아니었지만 첫날이기에 데리고 갔다. 그리고 걸그룹 생활을 오래도록 해왔던 그녀이기에 너무 말라있다는 생각도 했다.
“계약하기 전에 할 이야기가 있어.”
“무슨 이야기요?”
그는 파인 엔터가 예전과는 달리 완전히 새로운 회사가 됐으며 그가 대표이자 매니저를 맡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의외로 그녀는 큰 충격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사실 알고 있었어요. 미리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봤거든요. 유은하선배 소속사가 합쳐졌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어서… 그런데 오히려 작은 회사라고 하니 안심은 돼요. 저… 이상한 곳에 보내고 그런 건 안 시킬 거죠?”
그녀는 고기를 먹으며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봤다. 그녀의 그런 걱정이 충분히 이해됐다. 이 바닥이 원래 그런 곳이니까.
“걱정하지 마. 회사는 작아도 내가 반드시 너 띄울 테니까. 유은하 봤지? 걔도 다 내가 띄운 거야.”
“알았어요.”
그녀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니 믿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럴 만했다. 이 바닥에서 누가 누굴 띄웠니 하는 말은 너무도 흔한 멘트였으니까.
그래도 우현은 좋았다. 그녀도 혹시나 하는 마음은 있는 게 확실해 보이니까. 그거면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