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2] 세상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 3년전 -
“내가 그럴 줄 알았다.”
우현은 3평짜리 고시원 침대에 누워 컴퓨터로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그가 좋아하는 여배우인 한지애가 ‘사랑한다면’이라는 작품으로 3년 만에 브라운관으로 복귀한다는 이야기에 그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랑한다면’의 메인 작가가 누군지 밝혀지면서 우현은 일찌감치 기대를 놓았다. 그 작가는 예전에는 잘 나갔지만 지금은 감도 없고 대사도 맛깔나게 쓰지 못하는, 우현의 기준에서는 그저 그런 로맨스 작가였기 때문이다.
“혹시나 기대한 내가 바보지.”
오로지 한지애였기 때문에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가졌다. 특히 유독 작품 운이 없어 대표작이 없는 그녀였기에 이번만은 잘되기를 바랐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첫 방. tv가 없어서 컴퓨터로 다운을 받아 보는 그는 다음날 오후가 되어서야 그것을 볼 수 있었다.
스포가 될까봐 일부러 포털 사이트조차 보지 않고 혹시나 하며 시청했는데 역시나 그 작가는 자신의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캐릭터는 구리고 개성이 없었으며 대사도 톡톡 튀지 못했다. 스토리마저 너무 올드해서 마치 90년대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였다.
“잘 좀 고르지, 왜 저런 작품을 해서는…”
그래도 팬심으로 첫 방을 끝까지 시청한 그는 컴퓨터를 끄고 나갈 준비를 했다. 그의 생계수단인 대리운전 일을 하러 나가는 것이다.
깨끗이 씻고 와이셔츠에 조끼, 정장바지로 깔끔하게 입었다. 이래야 손님이 안심하고 차를 맡기며 가끔 팁을 주기도 한다. 특히 여자 손님이라면 이렇게 단정하게 입었을 때 거부감을 덜 느낀다.
고시원을 나와 전철을 타고 논현동 방향으로 향했다. 이제 막 퇴근하는 사람들을 보며 감상에 젖어 들었다. 자신의 인생이 왜 저들과는 다른지.
그는 원래 평범한 집에서 태어나 자랐다. 중소기업에 다녔던 아버지와 주부인 어머니, 그리고 우현. 비록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충분히 화목했던 가정이었다. 하지만 그의 나이 14살에 교통사고로 그만 살아남고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말았다.
결국 고모집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예상했듯이 우현에게 그리 친절하지 못한 고모와 고모부는 그를 돌봐주며 부모님의 사망보험금으로 사업을 하다 날려먹었고 그가 대학생이 될 나이 때에 더 이상 그를 돌봐줄 수 없다며 내쫓아버렸다.
우현은 원망하지 않았다. 그들은 남이었으니까. 물론 부모님의 사망보험금은 큰 돈이었지만 이상하게 그 돈이 욕심나지 않았다. 그걸 가지는 순간 부모님의 죽음과 자신이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원망하지 않은 이유는 또 하나 있었다. 바로 그가 가진 재능. 아마도 사고 이후에 생긴 것 같다. 이상하게 그가 뜰 거라 생각한 드라마나 영화, 노래는 거의 다 맞추어냈다.
작가의 수준과 피디의 성향 등을 파악해내서 성공여부를 맞추어냈고 신인은 얼굴과 말하는 것만 봐도 톱스타가 될지 아니면 조연급이 될지 맞추어냈다. 성공을 자신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첫 발부터 잘 못 디뎠다. 별다른 기술이 없어 군대부터 다녀오고 막노동으로 돈을 모았던 그는 주식으로 부자가 되기로 했다. 자신의 느낌과 분석력이라면 주식시장에서 충분히 통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주식은 그의 분석력과는 맞지 않았다. 3개월 만에 두 번의 깡통을 경험했다.
다음에는 생각을 바꿔 엔터주식을 공략하기로 했다. 첫 방도 보기 전에 피디와 작가, 출연진만으로도 대략 성공을 예측할 수 있었기에 가능할 거라고 봤다.
처음에는 그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싸인의 ‘오빠는 강남스타일이야’이 나오자마자 대박을 점치고 주식을 몰빵했다. 결과는 500%의 수익.
그 때부터 1년간 무려 1억이 넘는 수익을 올렸고 그는 이제 자신의 인생이 불행 끝 행복 시작일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사장의 횡령, 소속 가수의 마약, 소속 배우의 성매매가 연달아 터지며 해당 주가는 폭락하기 시작했고 우현은 하한가에 물려 팔지 못하고 그 돈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 한 채 날려버리고 말았다.
그제야 주식은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지만 이미 그의 나이는 20대 후반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현은 이번에 소설을 써보기로 결심했다. 어떤 시나리오든 보기만 하면 대박을 점칠 수 있으니 당연히 그에 걸맞는 소설도 쓸 수 있다고 믿었다.
2년이 허무하게 흘러갔다. 무려 네 편의 소설을 써봤지만 이상하게 남들이 쓴 소설이 대박 나는 것은 예측하면서 자신이 재미없는 소설을 쓰고 있다는 건 알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애초에 처음부터 엔터업계에 진출해 매니저일부터 시작했어야 했다. 어린 마음에 처음부터 대박을 꿈꿨기에 10년의 시간이 허무하게 지나버리고 만 것이다.
우현은 자신의 능력을 펼칠 만한 곳이 없다고 절망했다. 그의 학벌에 투자회사를 간다는 건 언감생심 말도 안 되는 일이고 이제 와서 대학에 갈 수도 없는 일이다. 잘나가는 엔터테인먼트사에 지원해봤지만 나이가 많다고 받아주려 하지 않았다.
결국 모든 걸 체념한 그는 외제차 영업사원이 되기로 결심했다. 밤 10시 이전에 퇴근한 적이 없을 정도로 이를 악물고 노력했기에 1년이 지나자 꾸준히 월 300 이상 벌 수 있었다. 모든 게 잘 풀린다고 생각했을 때 다시 한 번 악재가 덮쳤다.
그가 다니던 자동차 회사가 연비를 속여 팔다 고발된 것이다. 새로운 손님이 끊긴 건 물론이고 단골들도 그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나라에서는 재판 결과가 나올 때까지 판매 중지를 때려버렸다. 우현은 다시 한 번 절망했다.
몇 달을 드라마와 영화만 보며 폐인처럼 지내다 집을 고시원으로 옮기고 대리운전 일을 시작했다. 다시 한 번 시작해보자는 마음은 아니었다. 그저 먹고 살기 위해 시작한 일이다. 자신의 능력으로 성공하자는 생각은 접었다. 그저 이것이 자신의 운명이라며 모든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밤 10시. 벌써 세 탕이나 뛴 우현은 또다시 뜨는 콜에 오늘 운이 좋다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목적지는 선릉역 룸싸롱. 룸싸롱 한 번 안 가본 그도 알 정도로 유명한 곳이다.
5분여를 뛰다 걷다를 반복하니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랐다.
“4757 대리 부르셨습니까?”
“어, 맞아! 여기야!”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와 있는 것을 보고 소리치니 양복을 쫙 빼입은 젊은 남성이 손들 들었다. 반말 정도로 기분 나빠질 우현이 아니다. 영업사원을 하며 더한 것도 숱하게 겪었기에 이 정도는 웃으며 넘길 수 있다.
그 젊은 남성이 키를 주고 길가에 서 있는 차를 가리켰다.
“저 차야. 귀하신 분이 나오시니까 조심해서 모셔! 알았어?”
“네, 물론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쇼.”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밝게 웃음을 보이자 그 자도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잠시 기다리자 룸싸롱 입구가 열리며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왔다. 우현은 직감적으로 자신이 누구를 모셔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대략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성은 키는 그리 크지 않지만 전체적으로 살집이 두둑했다.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나오는데 어디 가서 인상 안 좋다는 소리는 듣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자네만 믿어. 응? 잘 할 거지?”
“물론입니다. 믿어 주십쇼.”
그 살집 두둑한 중년의 남성이 젊은 남자의 어깨를 툭툭 치며 웃었다. 한 눈에 봐도 갑을 관계가 분명했다.
“대리기사 대기시켰습니다.”
“음, 좋아. 그래, 난 그럼 자네만 믿고 가네.”
“편안한 밤 보내십시오.”
중년의 남성이 손을 흔들며 90도로 인사하는 젊은 남자를 뒤로 하고 차에 올랐다. 우현은 얼른 차 문을 닫아주고 운전석으로 자리하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반포동으로 갑시다.”
“예, 알겠습니다.”
우현은 운전 중에 웬만하면 손님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으려 한다. 괜히 말꼬리를 잡혀 기분이 나쁘네 어쩌네 소리가 나올 수도 있고, 듣는 것도 고역일 만큼 쓸데없는 말을 길게 이어가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조용히 운전에만 집중하는데 그 중년의 남자가 핸드폰으로 연예 뉴스를 보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리는 음성으로 보아 그도 종종 보는 ‘한밤중의 연예 이야기’였다.
‘저 나이에 무슨 연예 뉴스야?’
의아하게 생각하는데 kbc에서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 ‘운명’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특히 이번에 박민희씨가 검사 역할로 나온다고 하는데요. 그 어마어마한 카리스마 같이 보시겠습니다.”
20대 중반의 여배우 박민희는 쌍꺼풀 없는 전형적인 동양미를 지닌 여배우다. 그녀는 지금까지 고아, 발칙한 여고생, 복수에 사무친 자객 등 여러 역할을 맡으며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다. 그런데 이번에 검사역에 발탁되며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연기 변신을 기대한다는 내용이었다.
“에휴… 이번에도 망하겠네.”
우현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뱉어놓고 곧바로 아차 하는 마음이 들었다. 마음속으로 한다는 말이 자신도 모르게 입으로 나왔던 것이다.
“아유,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런데 왜 망하겠다는 거죠?”
백미러로 슬쩍 보니 눈을 가늘게 뜨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실수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서 ‘그냥 농담입니다, 하하.’ 이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게… ‘운명’을 집필하는 작가는 원래 장르물을 잘 못 쓰더라구요. 로코도 그리 잘 쓰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평타는 치는데 반해 전작인 ‘표적’은 거의 망한 거나 다름없었죠.”
“전작이 잘 안됐다고는 하지만 이번에는 잘 쓸 수도 있지 않나요?”
그 남자는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처럼 점잖아서 불편할 수 있는 말에도 결코 말을 놓지 않았다.
“물론 그럴 수 있죠. 하지만 그 작가는 2013년 ‘판타지아’ 이후로 쭉 내리막길이잖아요. 그 작품이 워낙 임팩트가 강해서 아직까지 대단한 작가로 인식되고 있기는 하지만 냉정하게 봤을 때 이번 작품도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게다가 피디도 문제인 게, 그 사람은 전체적인 스토리보다는 화면의 아름다움을 굉장히 우선으로 하는 감독이잖아요? 그럼 스토리가 잘 살지도 모르겠고 특히 박민희씨 같은 경우는 발음은 정확해도 발성이 아직 전문가다운 느낌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검사 역할에 잘 어울릴지는 모르겠네요. 게다가 박민희씨 얼굴이 좀 어려보이는 편이기도 하고…”
우현은 한 번 이야기를 시작하자 전부터 생각했던 것들이 주르르 흘러나왔고 뒷자리에 앉은 40대 남자는 우현의 폭포수처럼 토해내는 부정적인 말에 몇 번이나 끼어들려다 말았다.
잠시 대화가 사라지고 공백시간이 생기자 우현은 괜한 말을 주절거렸다는 생각이 들어 곧바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원래 이런 거에 관심이 많다보니 괜한 말을 했네요. 조용히 모시겠습니다.”
“아니 아니… 괜찮아요. 사실 민희가 어울릴까 고민하기도 했었으니까.”
“네? 그게 무슨…”
“내가 민희가 있는 소속사 사장이에요.”
“아이고… 죄송합니다. 주제도 모르고… 정말 죄송합니다.”
우현은 놀라서 핸들을 쥔 손이 가늘게 떨렸다. 입을 잘못 놀려서 이번 대리비는 완전히 날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요. 아까 말했듯이 사실 고민이 많았어요. 그런데 그쪽 친구들이 워낙에 강한 자신감을 보여서 이번에는 한 번 더 믿어볼까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 쪽 말을 듣고 보니 생각을 다시 해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