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3 I LOVE YOU =========================================================================
“2010년 3월 20일. 사망 시간은 15시 추정으로 쓰고. 아, 진짜. 나 이러다 의사 면허 파지는 거 아니야. 이거 원수 같은 친구 때문에 개 같은 짓이나 하고 있네. 야, 넌 누워있어. 하여간 요즘 어린 것들은 발랑 까져서 스무 살짜리가 벌써 임신이야. 임신. 젠장. 인생 헛살았어. 로이 테일러가 설마 여자였을 줄은. 젠장. 씨발. 내가 앞으로 다시 아이돌 좋아하나 봐라.”
믿을 수 있는 의사라고 했다. 로이의 가짜 사망 신고서를 써주는 내내 그는 구시렁거리며 욕을 해댔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걱정스럽게 의사를 보아서일까 수혁이 괜찮다고 그녀의 손을 잡아줬다.
“헐~. 이것들 봐라. 신성한 병실에서 스킨십 하는 거 봐. 아, 졸라 빡친다. 김수혁이 김태형 조카라서 하는 말이니깐 잘 들어라. 너 지금 임신 초기다. 유산하기 딱 좋은 둘도 없는 기회이니깐 둘 다 뻑킹질 잘 해보던가. 내가 보기에는 넌 애 포기하고 컴백 활동하는 게 좋을 거 같다. 이건 주제 넘는 충고이기는 하지만 넌 노래는 쥐뿔도 모르는 의사 나부랭이가 봐도 졸라 아까워. 고작 김수혁 아내로 인생 종치고 싶냐? 물론 저 새끼가 얼굴 반반하고 김태형 조카라 하반신 마비가 되기 전까지 절륜하겠지만. 이건 아니라고 본다.”
수혁이 의사를 노려봤다. 로이는 아무리 흰 가운을 입고 있다 해도 저 의사가 돌팔이라고 확신했기에 그가 뭐라고 하던 상종하고 싶지 않아 가만히 있었다. 의사가 ‘그래. 그래. 인생의 절반은 섹스를 하며 허비하지. 야, 너 이제 죽었어. 잘 죽어라.’ 라며 종이 쪼가리를 들고 나갔다. 어쨌든 로이 테일러의 사망 선고가 내려진 거다. 머리에 붕대를 둘둘 말은 주안이 사전에 포섭해놓은 병원 장의사를 만나겠다며 나갔다.
집 앞에서 교통사고를 내고 병실에서 식물인간인 척 거의 20일 넘게 갇혀 지냈다. 드디어 엄마가 시작하고 로이가 키어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커졌던 로이 테일러의 일생일대의 거짓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거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인데 아쉬웠다. 좀 더 남자로 있고 싶었던 걸까. 로이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수혁의 손이 갑갑해 풀어냈다. 그저 귀찮아서 뿌리친 것뿐인데 그의 눈이 검게 죽어버렸다.
“이제 제가 싫으신 겁니까.”
“……그냥. 손에 땀 차서.”
아무런 땀 없이 말끔한 손이었으나 그렇게 변명했다. 수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냉동실에서 얼음을 꺼냈다. 얼음물에 손을 담근다. 한 10분 정도 가만히 있다가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고 다시 로이의 손을 잡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그의 손이 빨갛게 물들어 있어서 더 이상 뿌릴 칠 수가 없었다.
“나랑 헤어지면 삼천궁녀 만들 수 있어.”
“전 의자왕이 아니라서 삼천궁녀가 필요 없습니다.”
“나 살찌면 형 졸라 괴롭힐 거야.”
“화난 로이도 예뻐요.”
“형 엄마가 로지 죽였다고 매일 형을 때릴 질도 몰라.”
“걱정 마세요. 저 맷집 좋아요.”
로이는 아무리 그를 밀어내도 수혁이 눈을 피하지 않아 결국 울어버렸다. 절대 떨쳐낼 수 없다. 이 스토커. 그녀가 좋아 배우까지 할 정도로 무지 지독한 놈이라 그녀가 행복해지려면 그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왜 하필 날 사랑했냐고 물었다. 그는 아무 대답도 못하다가 ‘로이라서요.’라고 답했다.
“제가 있던 세상에 어느 날 당신이 태어났고 그게 제 운명이 되었습니다.”
“그래. 그거 참 속 시원한 대답이네. 난 형 얼굴이 예뻐서 좋았는데. 몸매 잘 빠지고 특히 엉덩이가 죽여줘서 좋았지. 앞으로도 나한테 사랑받고 싶으면 그 미모 잘 이유해. 뱃살 나오면 가차 없이 버릴 테니깐.”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로이는 그녀의 손을 꽉 쥐고 있는 수혁에게 그만 놓으라고 했다. 그가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듯한 눈으로 그녀의 손을 놓아줬다. 로이가 수혁의 손을 덥듯 그의 손을 잡았다. 수혁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제 모든지 내가 리드할 거야. 형은 그냥 따라와. 난 다시 스타가 될 거고, 형도 나 따라 미국에서 스타가 되기 위해 노력해. 난 이제 형만의 아이돌이 될 테니깐.”
“네…네. 로이. 꼭 당신을 따라 할리우드 배우가 되겠습니다.”
“근데 나 영어 존나 못하니깐. 노래랑 연기는 영 글러먹었다. 젠장, 아무래도 모델 해야겠지?”
“모델이어도 로이라면 멋져요.”
“알아. 그래서 걱정이 없는 거라고. 난 얼굴부터 발끝까지 빛나니깐. 그래도 노래하고 싶을 땐, 다시 아이돌 할래. 역시 난 노래하고 춤추는 게 제일 좋아.”
수혁이 환히 웃으며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너무 바보 같아서 로이는 크게 웃어버렸다.
***
로이 테일러의 장례는 일주일 내내 연예 뉴스에 똑같은 장면이 반복되면서 MC들의 멘트만 바뀌어 나왔다. 케이블 채널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로이의 죽음에 대한 특집이 방송되었으며, 지상파에서는 한류붐을 일으킨 로이 테일러의 일대기를 찬양하는 다큐가 왔다. 그들의 관심이 조금이라도 사그라지길 바랐으나 로이의 처녀작부터 시작해 모든 앨범이 재판에 들어갈 정도로 로이 테일러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관심사가 되었다.
모두 주안이 말했던 대로였지만 당사자로서는 피곤했다.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만 좀 신경 꺼달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본인 장례식을 주구장창 보려니 상당히 이상했다. 화면 속 팬들은 매번 그녀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울어댔다. 친하게 지내던 연예인 동료 선배 후배들이 꺼이꺼이 목을 놓아 울고, 그 속에서 유일하게 울지 않는 사람은 김주안 혼자였다. 사람들은 소속 가수를 죽게 한 사장에 대해 비난을 해댔다. 맹렬한 독설로 네가 죽고 차라리 로이가 살았어야 했는데 라며 그를 나무랐다.
깁스를 한 주안은 그들이 던지는 욕설과 매질에도 꿋꿋이 견디며 장례를 치러냈다. 로이 대신 관속에 꽃과 함께 파묻힌 밀랍 인형이 잠시 화면에 공개되었다가 급히 주안에 의해 가려졌다. 혹시라도 가짜라는 걸 들킬까봐 그런 거겠지. 그 인형이 참 잘 만들어졌는데 진짜 로이 테일러는 지을 수 없는 온화한 미소를 만면에 띠고 있었다. 골수팬들이 보면 가짜라고 부를 법했다.
우리 오빠는 절대 헤프게 웃지 않아! 츤데레라고!
엄마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긴 모피 코드 자락과 함께 여배우처럼 굽이치는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멋지게 등장해주셨다. 샤넬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 손에는 에메랄드와 다이아 반지가 겹겹이 끼어져 졸부로 보였다. 그녀는 신파극의 한 장면처럼 과장되게 울었다.
“안 돼! 안 돼! 내 아들! 엉엉엉. 내 분신. 내 사랑! 넌 절대 죽어서는 안 돼. 너처럼 완벽한 스타는 절대 죽어서는 안 된다고.”
딸이 죽었다는데 옷 꼬라지하고는.
로이는 혀를 차며 후루룩 된장국을 들이켰다. 수혁이 밥을 떠서 입에 넣어줬다.
“계란말이는요.”
“닥치고 있어. 나 지금 완전 재미있는 거 보잖아.”
벌써 5번째 보는 거였지만 수혁은 알겠다며 조신하게 두 손을 무릎에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확실히 기가 죽었다. 버림받을까봐 두려운 기색이 역력했다. 로이는 한숨을 푹 쉬고 ‘저 여자 짜증나서 그랬어. 미안해.’ 사과를 했다. 그녀는 죽어서도 엄마에게 아들이었다. 내 아들을 목 놓아 부르며 우는데 과연 저 명품 선글라스를 벗은 그녀의 눈이 슬픔으로 젖어있을까 매번 궁금해, 저 장면을 반복해서 보는 로이도 과연 악취미다.
“계란말이.”
“네.”
당연히 슬프겠지. 영원한 연금인 줄 알았던 돈줄이 끊겼으니깐.
로이는 신경질적으로 리모컨 버튼을 눌렀다. 텔레비전을 끄고 입을 벌렸다. 수혁이 계란말이를 입에 넣어줬다. 소금이 아니라 설탕으로 만든 계란말이다. 누가 일본 사람 아니랄까봐 변태 입맛이었다. 매섭게 째려보니 그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짜증나니깐 자꾸 사과하지 마.”
“네. 죄송합니다.”
죄인처럼 고개만 숙이고 사과만 해서 화가 났다. 몇 번 때렸더니 버릇이 들었는지 또 손이 올라갔다. 로이는 그 사실을 깨닫고 급히 손을 내렸다.
“미안. 앞으로는 안 때릴게.”
“괜찮습니다.”
“제발 매 맞는 아내처럼 굴지 마. 나 형 때문에 스스로가 인간말종처럼 느껴진다고. 그렇게 혼자 피해자인 척 굴래? 나도 괴로워. 괴롭다고!”
“죄송합니다.”
화를 내자마자 바로 후회가 되었다. 로이는 울먹이는 수혁이 안쓰러워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가 또 맞을까봐 움찔했다. 손을 거두고 화를 냈다. 왜 내 마음을 몰라줘. 난 형 머리 쓰다듬어줄려고 그랬던 거였어. 그가 울었다. 미안하다고 계속 울었다. 로이는 짜증이 나서 밥그릇을 던졌다.
“꼴도 보기 싫어. 왜 다들 나 죽었는데 시도 때도 없이 내 삶을 갈가리 해체해. 나한테도 프라이버시가 있다고. 왜 본인이 알리고 싶지 않은 걸까지 까발리는 거냐고. 아빠 따위가 장례식에 안 와도 괜찮아. 애초에 난 혼자였으니깐. 엄마가 날 아들이라고 불러도 난 아무렇지 않아. 엄마 아빠 따위 필요 없어. 지들 좋을 때로 나 버리고 자기들 삶만 살았잖아. 아무도 날 돌보지 않아. 아무도 날 걱정하지 않는다고. 차라리 진짜 죽을 걸. 죽고 싶어. 죽고 싶어.”
사랑받고 싶어서 꿋꿋이 버티고 당당한 척 했던 멋쟁이 아이돌 로이 테일러의 자아는 그의 장례식 이후로 무너졌다. 진짜 로이 테일러는 엄마한테 칭찬받고 싶어서 필사적으로 연기하고 노래하고 춤을 추는 꼬마다. 혹시라도 미국에 있는 아빠가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방송 출연을 닥치는 데로 하고 CF를 무자비하게 찍어 돈로이라고 욕먹는 애정결핍자다.
수혁이 그런 진짜 로이 테일러를 두 팔로 부드럽게 안아줬다. 지금의 그녀는 그가 봤던 멋지고 쿨하고 섹시한 아이돌이 아닌데도 정신 나간 여자가 좋다고 키스를 해줬다.
“로이, 로이. 그렇지 않아요. 정말로 아버님은 로이를 사랑합니다.”
“아니. 그렇지 않아. 흑. 아빠는. 나 버리고 로지만 데리고 미국 갔단 말이야. 아빠가 미워. 나 죽었는데. 나 이렇게 아픈데 전화 한 번 안 해. 미워. 흑흑. 미워.”
수혁이 그녀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고 큰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그가 천천히, 그리고 아주 정확한 발음으로 로이에게 발음했던 아빠의 ‘fault’의 진정한 뜻을 일러주었다.
“로지를 차로 뺑소니한 건 제 어머니입니다.”
“흑…. 그래. 알아.”
“그런데 아직 죽지 않았던 로지의 호흡기를 떼어낸 건 로이의 아버지입니다. 더불어 로지의 사망선고를 안 해주셨고요. 로이,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까.”
로이는 눈의 초점을 잃은 채 그를 올려다봤다.
“몰라. 나 몰라. 모르겠어. 왜 그렇게 어렵게 말해. 지금 한국말 하는 거지? 영어 쓰는 거 아니지?”
“로이. 맞아요. 로이의 생각이 맞다고요. 다 로이 때문입니다. 이게 아버님이 말했던 로이의 your fault입니다.”
울음 속에서 비집고 나오는 잔혹한 웃음을 손으로 가려냈다. 아무리 꾹 눌러 담아도 웃음이 터져 나왔고 등이 들썩여졌다. 수혁이 이해한다는 듯 그녀의 등을 껴안았다. 둘은 둥글게 몸을 말고서 울고 웃었다.
그래요, 우리는 모두 사랑 앞에서 다 잔혹해집니다. 그래도 괜찮아요. 우리뿐만 아니라 다들 그러니깐요. 최민도 로이도 저도, 어머니도, 아버님도 모두 모두 다. 이 세상에서 결백한 자는 없습니다. 저희만 더러운 게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는 나지막한 수혁의 바리톤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감미롭다. 악마가 영혼을 빼앗기 위해 유혹하는 것처럼 상냥하다.
평생 버림받았다고 여겼다. 로지만이 사랑받는다고 생각했다.
“하하하. 하하하.”
그런데 정말 바보 같다. 여동생이 죽었는데 웃음만 나왔다. 로이는 밥풀이 나뒹구는 바닥을 보며 밥알의 개수를 세다가 수혁에게 물었다.
“우리 오늘 미국 갈까.”
수혁이 환히 웃는다.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졌던 세상이 그의 미소에 암운을 드리우던 커튼을 걷어내고 밝아졌다. 커튼콜이다. 그 멋진 타이밍에 로이의 뱃속에는 아이까지 있다. 지금의 로이는 너무나 완벽하다. 그의 품에 안겨 창밖에서 쏟아지는 빛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자, 봐봐. 승냥이들. 너희가 사랑하는 진정한 이데아가 여기 있어. 그녀의 외침에 팬들이 환호성을 부르짖는다. 콘서트 위의 아이돌이 노래를 한다. 춤을 춘다. 그리고 로이는 웃는다. 손끝에 닿은 태양빛이 너무도 뜨겁다.
-끝-
============================ 작품 후기 ============================
라라크로프트windy님 안타깝게도 로이의 맘이 편해질 일은 없을 듯. 로지를 아버지가 죽였습니다.>< 우와 우와 우와~~~이런 막장이!...그리고 오늘편이 완결이지만 노블에는 에로 에필로그를 올리도록 할게요. 우리 노블 특전을 누려보아요^^
너는샛별님 저도 그렇더라고요. 원래 개막장이 꿀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