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0 I LOVE YOU =========================================================================
“그 양배추 너무 많아 보이네요. 같이 먹도록 하죠.”
수혁이 젓가락으로 그녀의 양배추 채를 집어먹었다. 그는 생긋 생긋 웃으며 빠른 속도로 양배추를 맛있게 먹었다. 로이는 이대로 있다가는 모두 빼앗길 것 같아 얼른 포크로 양배추들을 찍어 우적우적 입에 넣었다. 이상하게 평소에 먹던 양배추 보다 맛있었다. 로이는 수혁과 접시를 다 비워낼 수 있었다. 그가 배고프다며 그녀의 앞에서 바나나를 까서 먹기 시작했다.
“바나나는 다이어트 식품입니다.”
로이도 바나나를 하나 집어 슬쩍 눈치를 보고 먹었다. 수혁이 냉장고에서 삶은 고구마를 꺼내 껍질까지 먹었다
“고구마는 다이어트 식품입니다.”
“어. 알아.”
고구마 껍질 까는데 온 정신을 몰두하고 있어서 수혁이 뭐라고 하던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로이는 달달한 고구마의 맛에 느껴지는 행복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활동기간에 이렇게 먹는 건 처음이었다. 음악방송 없이 드라마 촬영만 하면 이런 식단까지 가능하지만, 노출이 많은 무대 의상을 소화하려면 최대한으로 몸의 체지방을 빼야 해서 엄격한 식단 조절을 해야 했다. 먹으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수혁이 냉장고 안의 음식들을 다 먹어버릴 기세로 먹방을 찍어 로이도 먹고 말았다. 다 먹고 나니 후회되었다. 수혁에게 이 사태를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화냈다.
“형 때문에 살쪘어!”
“먹자마자 살찌는 겁니까.”
“그래. 나 지금 엄청 살쪄서 가슴 나온 것 같아.”
수혁이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며 식탁을 가로질러 손을 뻗었다. 덥석 그녀의 가슴을 잡고 주물렀다.
“오! 그러네요. 진짜 커졌습니다.”
신기하다는 듯 말하지만 그럴 리 없다. 누가 배우 아니라고 발굴의 연기력이었다. 로이는 먹었으니 운동을 하기 위해 스포츠 가방에 옷과 속옷을 넣었다. 수혁이 뒤따라와 밤에 어딜 나가냐고 물어서 헬스장 간다고 답했다.
“도대체 살이 어디 있다고 자꾸 빼겠다는 겁니까! 로이가 지금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 줄 알아요!”
“위험하긴. 나 거식증은 아니야. 지금도 치킨 먹고 싶어. 내가 나이가 나이인지라 성욕만큼 식욕도 왕성하거든. 이번 활동 끝나면 외국으로 맛난 거 먹으러 나가자. 이탈리아에 피자 먹으러 가고 일본에는 우동 먹으러 갈 거야. 미국은 햄버거, 영국은 피쉬 앤 칩스. 벨기에에 초콜릿 먹으러 갈 거라고. 그러려면 지금 빡세게 돈 벌어야지. 안 그래?”
수혁의 로이의 손목을 잡고 안 놓아줬다.
“걱정 마. 금방 다녀올 게.”
“제발요. 제발 나가지 말아주세요.”
“왜 그래. 아직 여덟시밖에 안됐어.”
“…그냥요. 그냥. 이상하게 너무 불안해서 그래요. 안 가면 안 될까요?”
위험한 건 로이가 아니라 수혁이었다. 그가 엉엉 울며 제발 가지 말라고 했다. 그녀는 할 수 없이 가방을 놓았다. 서른 살 아저씨가 아니라 세 살 아들이라고 말해야 될 듯싶다. 할 수 없이 같이 소파에 앉아 영화나 봤다. 수혁이 싱글 벙글 웃으며 로이가 살쪘으면 좋겠다고 개소리를 해대서 몇 대 때렸다.
화면에서 남자가 침대에서 자고 있던 남자의 머리에 친절하게도 베개를 넣어줬다. 그리곤 총으로 머리를 쏴서 죽였다. 도대체 왜 저런 식으로 죽이나 싶었다. 수혁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무서우면 다른 거 보자고 했다. 그가 갑자기 베란다로 나가 핸드폰으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더니, 담배 몇 개비를 다 태우고 나서야 돌아왔다. 추위로 파랗게 질린 얼굴로 로이에게 이젠 활동 안 해도 된다고 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주안씨랑 방금 통화했습니다. 이카루스는 이미 본전 뽑았고, 활동 쉬어도 된다고 허락받았습니다.”
“미쳤어? 형이 뭔데 나한테 쉬래! 나 오늘 컴백한 사람이야! 내가 얼마나 미친 듯이 굶었는지 봤잖아. 배고파서 잠 안 오고, 토할 때까지 런닝머신 뛰었어. 근데 형이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쉬래! 건방진 새끼! 너 앞으로 내 얼굴 다시는 안 보고 싶지? 내가 너 좋다고 매달리고, 존나 니 밑에서 앙앙 대니깐 만만하지!”
수혁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콕 콕 찍으며 모욕을 줬다. 그러나 단호하게 더 이상의 활동은 없단다. 로이는 당장 주안에게 전화를 했다. 버럭, 화를 내며 왜 김수혁 따위가 남의 소속사 일에 상관하게 두냐고 뭐라고 했다. 주안은 그저 미안하다고 했다.
“미안해. 로이야. 미안한데 형은 너 지켜주고 싶다. 우리 이번만 쉬자.”
“도대체 뭐야. 뭐한테서 날 지켜주고 싶어. 나 거식증 다시 안 걸렸어. 약 잘 먹고 있어. 흑. 또 요양원 보내려고 그러지. 살찔 게. 살 찔 테니깐 나 버리지 마. 나 거기 싫단 말이야. 무서워. 이젠 리나도 없어서 다시 그곳에 갔다가는 진짜 죽어버릴 거야.”
“알아. 너 약 잘 챙겨먹고 이제 거식증 아닌 거. 그런 거 아니야. 그러니깐 울지 마.”
“흐앙앙앙. 죽어버릴 거야! 나 죽을 거야! 내가 왜 멈춰야 해. 나 이대로 추락하기 전에 한번만 더 빛나고 싶단 말이야.”
수혁이 우는 로이를 안으려고 해서 뺨을 때렸다. 그는 뺨을 맞고도 그녀를 안아줬다. 한참을 끅끅거리며 숨넘어가도록 핸드폰만 붙잡고 울었다. 주안이 작게 웅얼거렸다.
“로지가 죽었어.”
“……뭐라고?”
“네 여동생. 로지 테일러. 교통사고로 식물인간 됐다가 죽었다고. 하아~. 미안하다. 이런 말 들으면 네가 무서워할까봐 도저히 말할 수 없었어. 그냥 네가 아무것도 모른 채 웃으며 지낼 수 있도록 수혁씨랑 지켜주고 싶었는데. 갑자기…로지 죽고 나니깐 너 못 지킬까봐 너무 무섭더라. 자세한 내용은 수혁씨한테 들어. 전화로 들을 수 있는 내용은 아니니깐.”
로이는 통화가 종료된 전화기를 들고 멍하니 그녀의 눈물로 일그러진 액정을 바라봤다. 왜 멀쩡한 로지가 죽는단 말인가. 우리 로지는 금발의 쭉쭉빵빵 예쁜 치어리더라 아빠의 사랑을 독차지해서 죽도록 얄미운 동생인데 말이다. 아빠가 로지만 좋아해줘서 한국은 안 찾아와 너무나 미운 동생인데.
뉴욕에 있는 아빠 집에 전화를 걸었다.
“hello, its me. How are things with my sister?” (안녕. 나야. 내 여동생은 잘 지내?)
어렸을 때 로이를 버린 아빠다. 오랜만에 하는 전화이건만 아빠 앞에서 놀랍도록 침착하게 이성을 유지하며 여동생의 안부를 물을 수 있었다. 그가 로이에게 로지가 죽었다고 알렸다. 너 때문에 죽었다고, 모든 게 너의 ‘fault(잘못)’라고 그녀에게 전화를 할 자격이 없다고 로이에게 화를 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아임 쏘리만 반복하다가 통화를 끊었다. 수혁은 아무 말도 안 해서 그냥 그를 때렸다. 배를 발로 차고, 올라타서 주먹으로 얼굴을 때렸다. 그는 아무런 반항 없이 맞았다. 한참이나 때리다가 힘들어서 포기해버렸다.
로이는 울음을 멈추고 그에게 물었다. 왜 로지가 죽었는지. 그런데 왜 그녀가 활동을 쉬어야만 하는지.
“꽤나 오랜 인연입니다. 최민 기자. 기억나나요?”
“아니.”
“네. 당연하죠. 그녀는 그저 로이에게 스쳐지나가는 무수히 많은 방해물 중의 하나이니깐요. 어쩌면 그녀는 로이가 더욱 빛나기 위해 등장했던 엑스트라에 불과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니깐 그 최민이 날 원망해서 로지를 죽였다는 거지?”
“아니요. 그녀는 오히려 로이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무서운 거라고요.”
수혁이 기운이 빠진 로이의 눕히고 그 위에 올라탔다. 그녀가 때린 것에 대한 복수를 하려는 것 같아 눈을 감았다. 그녀가 수혁의 배를 때렸기에 그는 그녀의 배에 키스를 했다. 그녀가 뺨에 주먹을 날렸기에 그는 그녀의 볼을 입술로 빨아들였다. 수혁의 찢어진 입술에서 비릿한 혈향이 느껴졌다.
“그녀 또한 로이처럼 남자로서 가수 활동을 시작했었죠. 하지만 최민과 로이 테일러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그녀들은 똑같은 인생을 살 수 있었지만 한쪽을 빛을, 한쪽을 암흑으로 치닫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최민 잘못되라고 어떻게 한 적 없거든.”
시건방진 말투로 톡 쏘아붙였다. 그가 안다고 답했다.
“맞아요. 그저 그녀들은 운명이, 타고난 재능이 달랐을 뿐입니다. 꿈을 버리고 기자가 된 최민 앞에 어느 날 자신과 같다고 느꼈던 로이가 나타나게 되죠.”
“그게 그 인터뷰 사건이군. 나 여자라는 거 알고 협박했던 그 기자, 그게 최민이지?”
“네. 드디어 기억하시네요.”
그녀 때문에 로이는 김주안이랑 세미 누드를 찍어야 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그전부터 솔솔 불어오던 로이 테일러 여자설을 완벽하게 잠재울 수 있어서 그녀에게는 전화위복이자 큰 득이었던 사건이었다. 그리고 수혁이 오늘 받은 장미에 대해 언급했다.
“그 장미, 최민씨가 가져다 놓은 겁니다.”
“……그럴리 없는데. 내 팬이 준 거야. 나 완전 사랑한다고 써놓았다고.”
“로이 테일러를 괴롭혔던 여기자는 팬들에게 끌려가 폭행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요. 로이가 생각하는 그런 사건들입니다. 그녀가 사는 집의 현관에 라커로 낙서를 당한 건 귀여운 축에 속했습니다. 왜 그녀가 이민을 갔다는 소식이 들렸는지 이제야 깨달으셨습니까. 감히 우리 로이 오빠를 건드린 년 따위, 죽어 마땅하니깐. 로이의 팬들이 존재하는 한, 최민은 더 이상 한국에서 살 수 있었던 겁니다.”
로이의 흔들리는 눈빛을 본 수혁이 눈 밑을 쓸어줬다.
“제가 알아본 결과, 그녀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돌에 얼굴이 찍히고 여러 사내에게 강간을 당했습니다.”
“몰랐어.……그건 내 잘못이 아니야.”
“알아요. 울지 마요. 로이. 로이의 말대로 그건 로이의 잘못이 아니에요.”
“최민. 이민 가서도 날 못 잊었구나. 그래서 로지를. 내 동생을 죽였어. 그치? 맞네. 그런 거네.”
수혁은 대답을 안했다. 하지만 로이는 그게 수혁이 긍정한 것이라고 느꼈다. 모두다 그녀의 잘못이다. 아이돌인 스타가 대놓고 한 여자를 상대로 ‘싫다고’ ‘역겹다고.’ ‘거짓말쟁이라고.’ 서슴없이 말해서 로이 테일러를 숭배하는 팬들이 최민의 인생을 파괴시켰다. 그러니 아빠의 말대로 로지가 죽은 건 로이가 아이돌이어서 벌어진 일이었다. 로이가 로지를 죽인 거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안 슬픈 게 아니라 이제 그녀에게는 울 자격이 없음을 알아서였다.
“날 죽도록 미워해도 이상할 거 없네.”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걱정하는 건, 말했다시피 그녀가. 아니 그가 로이를 너무나 사랑해서입니다.”
어느새 수혁이 최민에 대한 호칭을 바꿨다. ‘그’라니. 최민이 남자라도 되었다는 건가?
============================ 작품 후기 ============================
라라크로프트windy님...낮밤이져 수혁이가 알고 보면 무지 무서운 놈이었다는 걸 이제 알게 될 거랍니다. 헤헤...이거 로맨스인데 달달함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