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이돌이다-93화 (93/104)

00093  발라버리겠어  =========================================================================

한참 연습을 하고 있던 때, 수혁이 연습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당연히 로이의 몸 상태는 병맛이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이라면 안무가에게 쉬운 동작은 내가 하고, 힘든 건 뇌출혈이 할 테니 안무를 수정하자고 해놓은 상태라는 점뿐이었다. 그는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홍콩 영화배우처럼 비장하게 등장해줬다. 한 마디로 우수에 찬 젖은 눈동자로 삘 충만하게~말이다. 쓸데없는 곳에 외모를 낭비하는 연예계 대표 낭비벽 스타라고 봐줘야 될 듯싶었다.

텔레비전에서 그렇게 봐놓고는 김수혁이 뭐가 그리 신기하지 백댄서들이 수혁을 보며 웅성거렸다. 진짜 스타는 그녀이건만, 슈퍼 아이돌을 옆에 두고서도 옆집 남동생 취급이나 해대는 그들이니, 그들의 모자란 안목을 로이로서는 해결해줄 도리가 없었다.

“뭐야. 왜 온 건지? 우리 회사랑 계약했다고 하더니만 역시 로 대표 만나려고?”

누가 저런 말을 꺼내기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권력의 맛을 제대로 아는 자라고 생각되었다. 제대로 김수혁이라는 대형 스타가 REVE에 올 수밖에 없는 이유를 파악해냈다. 비록 핀트가 어긋나기는 했어도 수혁이 로이를 만나러 온 건 확신했다.

로이는 대표님 아니 아니 아니죠~, 라며 손가락을 흔들며 노래를 불렀다. 백댄서 형들이 킬킬 웃었다.

“노 노~. 내가 그랬잖아. 나 대표라고 부르지 말라고. 최대주주님. 오케이? 갑부 이미지는 좋아도 권력자 이미지는 만들어봤자 노땅 티밖에 더 나. 나 아직 해먹어야 하는 게 너무 많은 사람이야. 가뜩이나 데뷔 20년차라 다들 선생님이라고 불러서 고민이구만.”

“하하하. 대박이다. 너 선생님 맞잖아.”

다들 20살인 그녀에게 언제 은퇴할 거냐며, 너 너무 우려먹는다고 놀려댔다. 로이는 닥치고 날 위해 개같이 연습하라고 호통을 쳤다. 형들은 킬킬 웃으며 로이의 등살에 못 이겨 수정한 안무에 맞춰 팔 다리를 움직이는 척했다. 호영은 관계자 외의 사람이 지켜봐서 기분 나쁘다며 자기 연습 안하겠다고 바닥에 앉아버렸다. 저런 리더를 둔 불쌍한 영준만이 로이의 눈치를 보며 열심히 그를 달래봤지만 소용없었다.

수혁이 몹시 화난 얼굴로 걸어와 로이를 끌어안았다. 안무가의 입이 쩍 벌려졌다. 백댄서들은 춤추다가 온몸이 굳은 채 그들을 쳐다봤다. 호영이 벌떡 일어나 수혁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포커페이스인 김수혁이야 그가 그러든 말든 로이만 보고 울먹였다.

“집에 돌아왔는데…. 갑자기 사라져서. 너무…놀랐습니다. 제가 못마땅하니깐. 제가 많이 모자라니깐. 절 버린 줄 알고…흑.”

누가 한류스타 김수혁을 보고 못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다못해 눈이 없어 보지를 못해도 그의 목소리만 들어도 사랑에 빠질 듯 호소력이 깊어 일본에서는 성우로서도 활동하는 그이다. 드라마만 촬영했다 하면 여성 시청자들에게 ‘너 때문에 미쳐 버리겠어~.’를 울부짖게 하는 그이건만 도대체 남의 소속사 연습실에 와서 이게 뭔 지랄인지, 헛소리를 하는 수혁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었다.

반어법이겠지. 내가 너무 잘나서, 너무 인간 같지 않게 잘생겨서 나의 긴 다리와 근육질 몸매가 근사한 나머지, 라는 식이라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앞뒤 전후 상황이다.

“하, 이 자식! 웃기네. 어디서 연기질이야! 너 로이가 약한 사람한테 약한 거 알고, 우는 거지! 존나 웃긴 새끼. 누가 연기자 아니랄까봐 여기가 안방극장이냐!”

호영이 수혁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청초하게 울던 수혁이 호영의 주먹을 움켜잡았다. 주먹이 잡힌 호영이 아프다고 비명을 질렀다. 순식간에 언제 울었냐는 듯 말끔한 표정으로 변한 수혁이 손을 털어대는 호영을 넘어트리고 그의 손 위에 발을 올렸다. 그리곤 지그시 호영의 손등을 지르밟았다. 호영이 다리를 동동 굴리며 발버둥 쳤다. 그를 내려다보는 수혁의 얼굴은 아무런 감정을 담지 않아 지켜보는 이들을 더욱 소름 돋게 만들었다.

“시끄럽네. 닥치지 않으면 손가락 부러트릴 줄 알아.”

“……….”

“그래. 그래야지.”

한순간에 배우 김수혁에 대한 바른 이미지를 바꿔놓을 만큼 큰 사건이었다. 수혁이 발을 떼고 싱끗 웃었다. 호영을 일으키기 위해 손을 뻗었으나 그는 그걸 거절했다.

“사이코새끼. 울면서 턱 각도 조절까지 하는 걸 보면, 넌 네가 잘생긴 걸 누구 보다 잘 아는 영악한 새끼야. 아주 대단한 분 나셨군. 네가 얼마나 잘생겼는지 모두에게 듣고 싶나 보지? 이 나르시스?”

“나르시스라…. 글쎄요. 다른 건 몰라도, 그 오해는 풀어드리겠습니다. 절 저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증오하는 쪽이죠. 제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로이뿐입니다. 그래서 비록 마음에 안 드는 얼굴이라 해도 이 아름다움으로 로이를 얻을 수 있다면 백배 천배 이용할 생각이고요. 이 얼굴, 로이의 취향이라서 말입니다. 그렇죠, 로이?”

불똥이 갑자기 로이에게 튀었다. 그녀는 두 남자를 모른 척하려 했으나 연습실에 있는 모두가 질투에 미쳐 치정극을 벌이는 호영과 수혁에 대해 설명하길 눈빛으로 강요해댔다. 로이는 으아악, 우악스럽게 머리카락을 털어내고 자포자기 했다. 어차피 팬들에게 수혁과의 동거 사실이 들켜 세상에 밝혀질 일이라면 식구들만이라도 먼저 알아서 공범자로 만들고 도움을 받는 게 나았다.

“그래. 우리 사겨!”

“네. 저희 사귑니다.”

로이가 대답하길 기다렸다는 듯 수혁이 손을 들고 네 번째 손가락에 낀 반지를 흔들어보였다. 그녀가 주문한 대로 아무런 장식이 없는 평범한 실 반지였다. 호영이 엉엉 울며 자기 말리지 말라며 뛰쳐나가버렸다. 달려가는 그의 등에 로이가 너 1시간 내에 안 돌아오면 죽여버리겠다고 사망소식을 알려주니, 시간 맞춰 돌아오겠다고 대답하고 다시 뛰어갔다. 하여간 말은 안 들어도 협박은 잘 들어서 좋은 녀석이었다.

영준이 눈치를 보며 그룹의 리더를 달래기 위해 뒤쫓았다.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로이는 게이가 되었다. 백댄서 형들이 놀라는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이럴 줄 알았지. 로이가 보통 애가 아니잖아. 가만히 있어도 야시꾸리한 색기가 철철 흐르는데 난 애가 이렇게 비범할 줄 알았지.”

“그러게. 드디어 인정하는 구나. 하하. 근데 이거 우리한테 비밀로 해달라는 거지? 뭐, 전국민이 다 알고 있는 것 같지 하지만 일단 함구할게. 괜히 로 대표 심기 건드려봤자 이 바닥에서 좋은 거 없지.”

“아아~, 소녀들이여. 너희들은 우상은 게이~. 니들이 하도 팬픽에서 김수혁이랑 굴려먹어서 너희 소원대로 그게 현실이 되었구나~.”

“축하한다. 로이야. 드디어 너의 정체성을 온세상에 까발렸구나. 아니, 우리끼리만 있으니 집에만 까발렸네.”

연예인들 중에서 게이가 적은 건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받아들여질 만큼 양지의 영역인 것도 아니었다. 로이는 다들 조용히 닥쳐달라고 부탁했다. 형들이 알았다며, 부디 날 엉큼한 눈길로 쳐다보지 말라고 해 발차기로 응징해줬다.

“어디서 오징어 주제에 감히!”

“으악. 사람 살려! 악덕 대표가 직원을 폭행하네! 아이고, 나 죽네.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개같이 부려먹으면서 이제 때리기까지 하네. 네가 우리 회사 간판스타면 다냐! 최대주주면 다냐고! 우리 먹여 살리면 다냐고! …어. 그러네. 열심히 때려주세요. 로느님.”

“하하하. 새꺄. 로이가 건드려도 너 같은 걸 건드리겠냐. 무려 인간이 아닌 남신이랑 사귀는데. 하여간 이 어린놈의 녀석이 얼굴을 더럽게 밝히네. 야, 너 김수혁 얼굴 파먹고 살아서 좋겠다.”

수혁은 백댄서들의 수다를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그의 이중성이 까발려졌던 말든 염려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또한 로이와 수혁의 연애가 더 큰 화제여서 다들 그 점을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본인은 신경 쓰지도 않는 이미지이건만 로이가 더 챙겼다. 생긴 거와 달리 전혀 연예인으로서의 자각이 없는 수혁이었다.

“호이짜! 호이짜! 다 죽여버리겠다! 감히 우리 로이를 빼앗다니! 호이짜! 호이짜!”

“아따따 뚜겐~.”

“에네르기 파~~~.”

백댄서 형들이 우스꽝스러운 포즈로 수혁에게 시비인지 장난인지 모를 짓들을 해댔다. 오늘 연습은 그렀다. 다들 춤출 생각을 안 했다. 로이는 이런 분위기에서 그들을 다그쳐 꾸역꾸역 연습을 시킨다고 해봤자 부상밖에 안 당한다는 걸 알아 이만 해산하라고 했다. 다들 좋아서 역시 남편이 좋다고, 수혁씨 자주 좀 와달라며 농담을 건네며 뿔뿔이 흩어졌다.

백댄서 무리들이 빠져나간 공간이 갑자기 너무나 휑하게 느껴졌다. 수혁이 로이에게 몸도 안 좋은데 왜 연습을 나왔냐고 물었다.

“몰라서 물어? 컴백이 얼마 안 남았는데 연습해야지.”

“하지만 어제, 아니 오늘 새벽까지 전 로이를 안았습니다.”

그거 안 알려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로이는 서있기조차 힘들었다.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지 보라고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내밀었다. 수혁이 안색이 창백하다며 뺨을 감쌌다.

“이런 날쯤은 저와 온전히 로이의 시간을 나눌 순 없는 겁니까. 제가 일 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압니다. 그래도……우리들의 특별한 기념일이니깐 제발 저한테도 기회를 주세요. 모두가 로이에게 의지하고 있어도 로이는 저에게 실컷 어리광부릴 수 있는, 그런 기회.”

“…어리광 따위 무리야.”

불가능한 부탁이었다. 로이는 한참이나 땅만 내려다봤다. 그리고 수혁의 신발이 그녀가 벗어놓은 운동화라는 걸 발견하고 고개를 들었다. 구두밖에 안 싣는 남자라 유일하게 운동화 CF를 안 찍었는데 많이 놀랐나 보다. 조금 미안했다.

“팬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그들은 절대 실망하지 않습니다.”

“달콤한 말로 현혹해봤자 소용없어. 난 너무나 잘 알 거든. 20년 동안 수 없이 사그라진 아이돌들을 봐왔어. 오빠라고 부르던 스타들이 인기 떨어지고 산산조각 나면 팬들은 새로운 대타를 찾겠지.”

“로이는 대체 불가입니다.”

“예전에 회사에서 키우던 녀석들이 있어. 아주 회사를 박살내놓고 사라졌지. 그런데 리더 녀석은 지금도 잘 나가서 배가 아파 죽을 지경이야. 스폰서를 제대로 잡았거든. 그 녀석 1위 못하게 내가 1등 해야 해. 그 녀석이 우리 회사 나간 걸 죽도록 후회하게 만들려면, 내가 무참히 발라버려야 한다고!”

“……울지 마요. 로이. 도와주고 싶은 겁니까. 그런 자를 상대로 지금 가는 길이 잘못된 길이라 알려주고 싶은 겁니까.”

“아니야! 아니라고! 펜……. 그 녀석…. 내가 죽여버릴 거야. 스폰서 따위가 그 녀석을 망가트리기 전에. 내가 죽여. 녀석은 아티스트인데, 점 점 펜의 음악이 죽어가. 녀석이 죽기 전에 내가 죽여야 해.”

로이는 죄 없는 수혁을 때리다가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아주……흑. 아주 잘난 녀석이란 말이야. 그런 도움 없이. 충분히. 흑. 스타가 될 놈인데. 리언 형한테 가버렸어. 작곡해야 하는 시간에 사모님들한테 술이나 따르고, 그게 뭐야. 바보 녀석. 나한테 있었으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로이는 마지막 말을 삼키고 눈물을 거칠게 닦았다. 펜이 배신자인건 틀림없고 그의 사그라지는 재능이 안타까워 해봤자 등쳐 먹히고 또 당하고 싶어 하는 꼴밖에 지나지 않았다. 수혁이 그만 집에 돌아가자고 했다. 그러나 춤 출 때는 멀쩡하더니만 다리가 후들거려서 서있을 수도 없었다. 그가 그런 로이를 보고 살포시 웃으며 등을 내밀었다.

“업히세요.”

“미쳤어. 우리 그러고 나갔다가 스캔들 터지면 어쩌려고.”

“그럼 로이의 이번 앨범이 더 화제를 끌겠죠. 절 철저히 이용해주세요.”

마냥 호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면 강단이 있고, 잘 운다고 여겼건만 그건 다 연기다. 게다가 로이가 수혁의 얼굴을 무척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꺼리지 않아한다. 되레 얼굴이라도 좋아하니 좋단다. 같이 섹스를 하고 난 뒤엔 자기를 공짜로 뮤직비디오에 써먹을 생각을 하는 로이에게 순순히 그러겠다고 말하고, 추문 정도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자기의 존재를 이용해 먹으란다. 그리고 그게 다 로이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가능한 일이라는 듯 수혁이 웃었다. 그래서 로이는 그의 미소만 보며 미안해서 슬퍼졌다.

등에 업히고 손을 내밀었다. 그가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 손가락에 끼어줬다. 이제 그들은 갈 때까지 간 사이이건만, 괜히 부끄러워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수혁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분명 가늘고 가벼운 반지인데 지금 그녀의 손가락은 감기는 눈꺼풀처럼 수혁의 마음을 담아 무겁기만 했다. 로이는 수혁이 건물을 나서자 눈이 내리는 걸 확인하고 잠에 들었다. 조심히 그녀를 차안에 눕히는 것 같았다.

============================ 작품 후기 ============================

너는샛별님 그러니깐요. 해골 반지...~.~그걸 추천해준 민호는 역시 스타일리스트 그만 두고 태형이 강아지로 전직하길 잘했음ㅋㅋ

라라크로프트windy님ㅎㅎㅎ이번 챕터에서는 로이가 더 멋져질 것 같아요. 기대해주세요..^^ 컴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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