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0 질투해주겠어! =========================================================================
“형 뭐해?”
로이는 수혁이 전화를 받자마자 말을 꺼냈다. 진짜 그가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서 묻는 것이 아니었다. 보고 싶고 말 걸고 싶어서 이런 말을 하는 거였다. 그러나 남자란 원래 그런 깊은 뜻을 알아차릴 수 없는 화성인이었다. 그가 한참이나 있다가 책 읽고 있었다고 답했다. 왜 전화했냐고 물었다.
“그야 보고 싶어서.”
“로이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잖아요.”
“응. 근데 보고 싶어서 전화했어.”
“……역시 전 세컨드입니까. 본부인인 리나씨로부터 절 만나지 말라는 협박을 당했던 거죠. 그래서 제 집안 사정을 듣고 마침 잘 되었노라 헤어지자고 말했던 거면, 리나씨한테 절대 첫 번째 자리는 안 노릴 테니 봐달라는 이야기 좀 전해주시겠습니까.”
“형! 진짜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해. 리나는 나 스캔들 막아주려고 여친인 척하는 거 뻔히 알면서 또 그런다. 아, 젠장. 미안하다고. 매번 쉽게 헤어지자고 말하는 거 고칠 게. 근데 연예계 대표 커플 공주연이랑 송수람도 13년간 사귀면서 9번이나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다~. 그게 언론에 보도된 횟수만 따져서 그렇지 사실 그 커플, 수십 번은 더 헤어지고 만났어.”
“그래서 저희가 공주연, 송수람 커플처럼 연예계 공식 커플이 되려면 수 십 번 헤어지고 다시 만나야겠네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또 꼬투리다. 남자가 자꾸 사소한 걸로 남편 바가지 긁으면 안돼요. 나 바깥일 하는 사람이야.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은 줄 알아?”
“…풋! 로이가 제 남편님이니 이번은 넘어가 드릴게요. 하지만 앞으로는 함부로 헤어지자고 말하지 마세요. 절 조금만 더 아껴주세요.”
“엉. 엉. 알았어. 내가 무지 형을 아끼고 있으니 걱정 붙들어 매. 근데 우리 집에는 언제 들어올 거야?”
수혁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형 엄마가 우리 집에 와서 크게 깽판치고 갔거든. 아, 오해하지 마. 우리 무지 좋게 끝났어. 서로 뽀뽀도 하고 아주 분위기 좋았다고. 형 엄마가 나 스폰서 서주겠다고 하고, 아이도 낳기 싫으면 안 낳아도 된데. 민호 병실에서 본 그, 쌩또라이 삼촌. 민호 형이랑 헤어지고 딴 여자랑 결혼했나봐. 민호 형, 그런 내색 전혀 없던데 쯧! 잘됐지 뭐. 미친놈이랑 헤어져서. 그 생또라이가 이번에 아이를 가질 거라고 하더라고.”
“……이상하네요. 백민호씨를 위해 절 협박할 정도로 삼촌이 아끼는 것 같았는데. 정말 어머니께서 삼촌이 아이를 가진다고 말하고 가셨습니까?”
“어, 그렇다니깐. 내가 금발에 푸른 눈으로 생기기는 했어도 한국말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하잖아. 제대로 알아들었으니 걱정 마. 나보고 형이랑 살림 차리라며 형 물건 세팅하고 가던데. 난 또 형이 다 알고 있는 줄 알았지.”
“그렇군요. 잘 됐네요.”
“그렇지? 그러니깐 빨랑빨랑 기어와. 밤새도록 예뻐해줄게.”
“로이, 우리 아직 결혼도 못했는데 동거는 아니라고 봅니다. 또 남자가 여자 집에 들어가는 건 무슨 경우입니까. 혹시라도 동거를 하면 당연히 로이가 제 집으로 들어와야죠.”
서른 살까지 동정이라고 해서 설마 했지만 이렇게까지 꽉 막혔을 줄이야. 그래서 안 올 거냐고 물으니 하니 그가 한참이나 있다가 정말 자기 예뻐해줄 거냐고 물었다. 아, 젠장. 이 아저씨 왜 이렇게 귀여운 거야.
“어. 졸라 예뻐해주지. 당장 짐 싸!”
“그럼 염치 불구하고 신세를 지겠습니다.”
통화를 마치고 로이는 핸드폰을 붙잡은 채 웃었다. 한참을 웃었더니 하루 동안 먹은 양배추와 사과, 블랙커피, 자몽 한 개가 금방 꺼져버려 배가 고팠다. 로이는 꼬르륵 소리를 내는 배를 꾹 눌렀다. 이제 컴백이니 참아야지. 살 쪄서 가슴이라도 생기는 날에는 모든 걸 송두리째 잃을 것이다. 대신 휴식기엔 치킨, 피자, 탕수육, 떡볶이를 모조리 먹어주겠다.
수혁이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밤늦게 집에 왔다. 주안이 자다가 일어나 문을 열어줬다. 미리 말해둔 터라 주안은 수혁의 가방을 받아들고 손님방으로 그를 안내해줬다. 로이는 수혁의 캐리어를 뒤지며 뭘 가지고 왔나 확인했다. 누가 야쿠자 아들 아니랄까봐 돈이다. 십 원짜리로 가득 채워서 와서 혹시 우리 집에서 은밀한 불법거래라도 약속했나 싶을 정도였다. 도대체 이걸 어디다 쓰려고 가져온 것일까. 동전의 양이 어마어마하니 꽤나 큰 액수이겠지 싶다.
누구 엿 먹이기 딱 좋을 방법이다.
“형!”
“어, 왜?”
“네. 로이.”
형이라고 부르니 주안과 수혁이 다 자기를 부르는 줄 알고 뛰어왔다. 로이는 배시시 웃으며 손안에 동전을 넣고 흔들어보였다. 역시 돈 냄새는 돈 주고도 못 살 만큼 향기롭다. 냄새만으로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비록 이것들이 십 원짜리라고 해도 돈은 돈이다.
“이거 뭐야?”
“아…. 주안씨의 한 달 월급입니다. 로이.”
역시 엿 먹이려는 게 김주안이었구나 싶어 심각하게 수혁을 보니, 그는 순진무구한 눈으로 웃을 뿐이었다.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나 상당히 재미있었다. 대단히 흥미가 끌린다. 주안이 이런 돈 못 받는다며 캐리어를 수혁에게 넘겼다. 수혁은 이제 충분히 받을 만큼 자기가 부려먹을 예정이니 받아달라며 답했다. 역시 김수혁이 생각보다 강적이다.
“나 말이야. 궁금한 게 있는데 질문 하나 해도 될까. 생활을 어떻게 하기에 이 많은 돈을 싸서 온 거야? 혹시 집에서는 폭군? 악질 고용주였어?”
“글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절 돌보던 식구들에게 로이네 간다고 하니 돈을 챙겨주더라고요. 제 수발을 들어줄 사람에게 그 정도는 줘야 한다고.”
수혁이 주안을 돌아보며 싱끗 웃었다.
“주안씨, 참고로 전 아침을 7시, 점심은 12시, 저녁은 5시에 먹습니다. 주로 일식을 먹으며 생선은 가시를 발라서 밥에 올려주셔야 합니다. 반찬은 매 끼니마다 새로 만드시면 되고, 일곱 가지면 적당합니다. 양말은 항상 다림질 해주십시오. 제가 가진 와이셔츠는 색깔별로 한 벌씩 새벽 4시에 가져오시면 됩니다. 운동하는 시간에는 같이 킥복싱을 해주시면 되고, 제가 있는 공간에 먼지가 있는 걸 두고 보지 못하는 성격이라 1시간 마다 손 걸레질을 해주시면 됩니다. 그 정도만 지켜주시면 전 별로 까다로운 사람이 아닌데, 모두들 주안씨께 죄송하다고 전해달라더군요.”
수혁이 주안에게 따스한 미소와 함께 캐리어의 손잡이를 억지로 쥐어줬다.
“받아주시죠. 주안씨. 당신의 몫입니다.”
주안은 동전 다발을 받아든 채 얼떨떨했다. 지금 자신더러 수발을 들라고 이러냐고 물었다. 수혁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정령 그걸 몰라서 물으냐는 듯. 로이는 과연 도련님은 다르구나 싶었다. 맙소사! 뼛속까지 남을 하인처럼 부려먹고 곱게 자란 수혁이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물을 떠오라며 주안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주안이 한숨을 푹 쉬며 캐리어를 끌고 물을 뜨러 주방으로 향했다.
로이는 그녀가 만나는 남자가 생각보다 쉬운 상태가 아님을 간파했다. 설마 연애할 때는 애지중지하다가 결혼하면 소파에서 손가락 까닥 안하는 남편으로 돌변하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주안이 고분고분한 태도로 수혁에게 잔을 넘겼다. 그가 물을 마시고는 목욕을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요? 그럼 목욕하세요.”
그런 주안을 보고 수혁이 지금 뭐하냐며 ‘당장 욕조에 물 받아주셔야지요.’ 라는 부연설명을 덧붙여줬다. 주안 형이 잠깐 자기가 시대를 잘못 찾아온 것 같다며 머리를 짚었다. 21세기를 가야했는데 잘못했던 신분제 시대로 온 것 같단다. 수혁이 올 때 눈 맞아서 당장 씻고 싶다고 주안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실로 기개가 넘치는 주인의 모습이었다. 자기는 혼자서 목욕 못하니 시중을 들란다.
주안이 화장실로 가서 욕조에 물을 담는 소리가 났다. 그가 다시 돌아와 수혁에게 캐리어를 넘겼다. 그는 ‘안녕히 계세요, 수혁씨.’라며 자기 집에 가서 자겠다며 작별인사를 했다. 앞으로 여기를 못 올 것 같단다. 로이는 그럼 그녀의 빨래며 식사 준비며, 집 청소는 누가 하냐고 다급히 주안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수혁이 그런 그녀의 손을 잡고 주안에게 흔들어줬다.
“네. 주안씨. 다시 안 오셔도 됩니다. 여기는 너무 걱정 마시고. 집에서 푹~ 쉬세요.”
뻔뻔한 얼굴로 주안은 마중한 수혁이 현관문에 달린 장금장치를 죄다 잠가버렸다. 도대체 뭔 꿍꿍이가 있어서 저러나 싶었다. 그가 로이를 보며 씨익 웃었다.
“목욕하고 오겠습니다.”
혼자서는 목욕 못한다는 남자가 어찌나 잘 혼자 목욕하겠다고 욕실에 들어가는지, 황당했다. 로이는 늦은 밤에 와서 터줏대감 김주안을 집에서 내쫓아버린 수혁이 무섭도록 지능범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이가 쓰던 바디 워시 냄새를 풀풀 풍기는 수혁이 목욕을 끝마치고 나왔다. 그는 젖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 올렸다. 외국 모델이 걸어오는 모습이었다. 옷은 어디다 팔아먹고 수건만 두른 채 나왔냐고 물으니 그가 싱긋 웃으며 ‘어차피 벗을 테니 안 입었습니다.’라고 답했다.
와! 진짜 제대로 작정하고 집에 들어왔다.
“약속대로 절 귀여워해주시겠습니까. 로이.”
수혁이 야한 미소로 입맞춤을 해왔다. 안에서 양치를 한 모양인지 치약 맛이 났다. 그가 로이를 안고 침실로 향했다. 문 따위는 발로 차서 연다. 누가 누구더러 귀여워해달라는 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오늘 밤은 잠자기 그렀다는 건 확실했다.
============================ 작품 후기 ============================
라라크로프트wind님 게이 태형이의 아들 제조설은 사실 ‘아저씨, 나 좀 사주세요.’에 나와 있답니다. 근데 그게 BL이라 보러 가기 부담스러울 테니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태형이가 대리모를 사서 아이를 낳아요.^^....(민호 엄마가 죽은 게 자기 때문이니 언젠가 민호가 떠날까봐 벌벌 떨음..아이 낳으면 절대 안 떠날 거라는 걸 영악한 태형이는 알고 있음.) 선녀 백호는 하늘로 못 날아가오! 랄까? 이미 완결난 소설이기에 이거 네타 아니죵?
로이가 수혁이를 따를지 말지의 행방은....결말이니 비밀><
너는샛별님ㅎㅎㅎ그러시구나...저도 그런 악덕 회사에 다니는데...동지였네요. 반가워요. (와락 안김)ㅜㅠ
바쁘셨는데 보고싶다고 징징거려서 죄송해요. 앞으로는 기다릴 테니깐 충분히 휴식 취하시고 오셔요♡ 피로 풀리라고 활력 뽀뽀 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