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9 질투해주겠어! =========================================================================
하루 종일 묘기를 부렸더니 허리가 시큰거렸다. 로이는 침대에 누워 주안을 불렀다. 그가 젖은 수건은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그녀의 허리에 올려줬다.
“으~. 좋다.”
“로이야, 우리 안무 수정할까? 너 그러다가 허리 나가겠다. 너 부상 때문에 활동 쉬어서 소속사 망하는 것보다 그게 훨씬 낫겠다.”
“웃기는 소리하지 마. 내가 고작 이따위 위기에 무너질 줄 알아? 반드시 펜 녀석을 발라버리겠어. 그 새끼, 다시는 연예계에 못 기어오게 쫄딱 망하게 해줄 거야.”
“……뭐. 네가 그러고 싶으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나한테는 펜에게 복수하는 것보다 네 건강이 더 중요해.”
주안이 허리를 주물러줬다. 로이는 간지러움을 참으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수혁과는 만났다가 헤어지고 그러다 다시 만나고 또 헤어졌다. 이 정도면 둘이 할 만큼 했다고 봐도 무방한데 언제나 그와는 미련이 남았다. 설마 아들 타령하는 집안에서 태어났을 줄이야. 병실에서 수혁을 간호하던 어머니의 태도로 봐서는 그다지 아들에 대한 애정이 없었던 것 같은데 이상했다. 그래도 자손남기기에 미친 것 같기는 했다.
확실히 수혁의 말대로 어머니가 보여주는 사진 속 수혁은 잠들어 있었고, 여자들은 깨어있었다. 수혁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진실이 보였다. HEAVEN의 파동 때문에 로이는 수혁도 그들과 똑같다고 여겼다. 친절함 속에서 간혹 보이는 냉혹함과 사랑스러움으로 가장한 그의 내재되어있는 어둠을 로이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게 단순히 리언처럼 그가 인간쓰레기임을 감추고 있어서라고 여겼다. 리언은 팬들에게 본인의 정체를 철저하게 숨기고 젠틀맨인 척 하고 있지만 그의 대표작들은 죄다 조폭 영화이다. 결국 사람은 완벽하게 제 정체를 숨길 수 없다. 그러니 김수혁도 그가 가진 어둠이 분명 구린 무언가를 내포하고 있으리라 싶었고, 그의 소속사는 연예인들을 팔아 넘겼던 악질 집단이었기에 그녀가 작성한 시나리오는 상당히 신빙성 있어 보였다.
그곳의 간판만이 무고하다고, 오직 수혁만은 깨끗하다고 믿는 것이 더 억지였다. 성상납 파문 이전, HEAVEN의 주식을 BD엔터테이먼트가 은밀히 사들여 은근슬쩍 회사가 넘어갔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더욱 그랬다. BD엔터테이먼트는 제3금융권인 BD금융에서 만든 회사다. 한 마디로 조폭을 끼고 있다는 뜻이다. 그녀의 예상대로라면 수혁은 다른 소속사들의 꿀 흐르는 제안에도 불구하고 BD엔터테이먼트와 계약할 것이다. 뒷배를 봐주던 조폭을 배신하는 것만큼 무서운 건 없으니, 그녀의 예상에 따르면 그랬다.
수혁과 헤어지고, 그의 어머니를 만나기 전까지 로이는 수혁이 HEAVEN에서 조폭을 끼고 포주 노릇을 했을 거라 판단했다. 그가 그녀에게 보여주는 순진하고 착해빠진 모습은 배우이니 충분히 꾸며낼 수 있다고, 대한민국을 뒤흔든 파문 속에서도 잠잠한 그를 보며 조폭의 비호 아래 무사한 거라고 그리 생각했다. 그가 나쁜 남자라고 알았지만 상관없을 정도로 수혁이라면 그 모든 사실들이 상관없었다. 수혁만이 그렇게 연예계에서 살아남는 게 아니니깐, 리언도 그랬는데 김수혁도 그럴 수 있다고 그가 저질렀을지 모르는 만행들에 대해 미리 변명해줬다.
하지만 아무리 최악의 시나리오를 적어내도 언제나 로이는 그녀를 사랑하는 수혁의 모습만큼은 거짓이 아니었노라 믿고 있고 있었다. 모든 게 거짓이어도 그것만은 사실이라고 믿을 만큼 그의 맹목적인 애정은 부모에게조차 받을 수 없었던, 그리고 금세 식어버리는 팬들의 사랑을 보상해주는 기분이었다. 사랑이 쉽게 식는다고 말하면서 진실은 영원한 사랑을 믿었던 거다. 이 얼마나 모순된 인간이란 말인가.
그의 사랑은 매일 매일 모두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죽을 듯이 노력하고 있는데 다들 몰라줘, 가장이자 아이돌이며 동시에 소속사 최대주주인 그녀가 느껴야만 했던 억울함을 조금 보상해주곤 했다. 비록 수혁이 REVE로 놀러와 직원들의 사랑을 독차지해버리긴 했지만, 그게 다 직원들의 회사에 대한 애사심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알아 수혁에게 삐질지언정 그가 싫어지진 않았다.
수혁의 말이라면 그가 아무리 조폭들을 끌고 다녀도 그의 말대로 경호원이라고 믿고 싶었고, 낯선 일본말을 할 때면 그가 야쿠자처럼 보여도 그저 평범한 배우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 부질없는 믿음은 말 그대로 부질없었다.
수혁은 HEAVEN에서 조폭을 끼고 포주 노릇을 하던 쓰레기가 아닌, 지상 최악 인간쓰레기들이 모시는 조폭 형님 보다 높은 님, 즉 그들의 도련님이었다. 그는 로이가 작성한 최악의 시나리오처럼 거짓된 양면 얼굴로 남을 속이고 짓밟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그게 다행인 한편,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진짜 조폭일 줄이야. 사실, 이미 알고 있었다. 그저 모른 척 했던 것일 뿐. 차라리 수혁이 리언 형 같길 바랄 정도로 믿고 싶지 않던 사실이었다. 어린 시절 잃어버린 기억 속에서 ‘조폭’ ‘야쿠자’는 ‘피’ ‘죽음’ 이라는 단어와 함께 끊임없이 맴돌았다. 그들에 대한 항상 알 수 없는 무서움이 로이를 질겁하게 만들곤 했다. 그들은 존재 자체만으로 숨이 턱 막히게 한다.
수혁과 결별을 하고 로이를 찾아온 수혁의 어머니는 집안에 들어오라는 허락도 안했는데 제멋대로 그녀의 집에 들어왔다. 어머니는 조폭들을 끌고 왔었다. 로이의 집안을 휙 둘러보더니 수혁의 옷가지와 칫솔, 소지품을 그녀의 집 곳곳에 배치해뒀다.
“내 집에 뭐하는 짓이에요.”
“뭐하는 짓이긴. 너희 동거하라고.”
어머니는 의자를 끌어다가 앉았다. 다리를 꼰 자세는 수혁을 떠올리게 할 만큼 우아해 그녀를 귀부인처럼 보이게 했다. 하지만 귀여운 파우치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자,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순진한 인상의 아름다운 중년 여자가 혀 밑에 독을 품고 있는 암살자처럼 살벌한 인상으로 변했다. 그녀는 모든 걸 이해해주겠다고 했다. 너의 이상한 남장취미도, 지랄스러운 성격도, 그리고 감히 내 아들 김수혁에게 헤어지자고 말한 끔찍한 실수까지도.
“다 잊어주지. 그러니 당장 전화해서 다시 만나겠다고 해. 안 그러면 그 곱상한 얼굴을 아스팔트에 갈아버리겠어.”
겁먹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조폭들 열 명 정도가 거실에서 누님을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오줌을 지릴까 걱정될 정도였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겪었던 조폭에 대한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수혁의 어머니에게 못나 보이고 싶지 않았다.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라는 듯 웃어버렸다. 그러자 정말 그들은 더 이상 로이에게 무서운 존재가 되지 못했다. 그녀를 해를 입히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조폭들도 사람이었다. 꿈속에서 아이를 잡아먹는 괴물이 아닌, 사람. 그 사실을 왜 이제와 깨달았는지 이상할 정도였다. 오랫동안 고통을 주던 조폭에 대한 억눌린 공포가 쉽사리 해체되었다. 조폭이, 그녀가 수혁의 어머니라는 사실만으로 안심이 되어서 그럴 수 있었던 거였다. 김수혁이 로이를 ‘조폭 공포증’으로부터 구해낸 것이다.
조폭은 무서워도 그들의 도련님은 안 무섭다. 그럼 조폭도 무서운 존재가 아니다.
“그래보시던가요. 과연 저한테 그러면 수혁 형이 제정신으로 버틸지 모르겠지만. 분명 자살한다고 울어대겠죠. 형이 울보인 건 어머니도 잘 아실 테니, 형이 죽는 꼴 보고 싶으면 저한테 해보세요.”
“………네 앞에서는 잘 울었나 보구나. 나한테는 아닌데.”
그녀가 울어버렸다. 로이는 조폭들의 눈치를 보며 재빨리 현관문을 향해 달릴 준비를 했다. 무서움증이 많이 가라앉았다고 해도 목숨 귀한 줄은 알았다. 수혁의 어머니가 손을 들어 움찔 움찔 몸을 들썩이던 조폭들을 멈춰 세웠다. 하얀 손수건을 쥔 손은 역시나 고왔다. 조폭과 관련된 아줌마로 보이게는 무리인 곱상한 비주얼이다.
“그런데 그 아이가, 너랑 헤어졌다고 날 찾아와서 울더구나.”
울 때는 언제고 싱끗 웃어 보이며 수혁의 어머니는 손거울을 꺼내 담배를 피우다가 지워진 립스틱을 정갈하게 바르고, 다시 담배 한 대를 꺼내 피웠다.
“내가 너한테 아이를 낳으라고 강요할까봐 미리 집안 사정을 말했더니, 네가 헤어지자고 했다며 펑펑 울어대는 거야. 너랑 헤어지면 죽겠다고, 다른 여자는 절대 안 만날 거라고, 어머니가 아버지만큼 싫다고 하는데, 왠지 안심이 되더군. 그 아인 절대 자기 속내를 표출하지 않았으니깐. 항상 부모가 원하는 대로 착한 아들인 척 연기를 해대서 속이 터졌거든. 고맙구나. 아가.”
어디가 고마운 포인트인지 모르겠으나 수혁의 어머니는 아들이 우는 걸 보고 흡족해보였다.
“그래. 그 바보 같은 표정을 보니 네가 얼마나 장한 일을 해냈는지 모르는 모양이네. 하하. 재미있어. 도대체 수혁이는 너 같은 아이가 뭐가 좋다고 그렇게 떼를 썼던 것일까. 역시 이 반반한 얼굴이겠지?”
그녀가 일어섰다. 담배 연기를 로이를 향해 후 내뱉고 기침하는 그녀와 짧게 입맞춤을 했다.
“아들이 떼쓰는 귀여운 모습을 25년 만에 봤는데 당연히 어미로서 기쁠 수밖에. 김수혁이 5살 이후로 그렇게 엄마를 부르짖으며 우는 모습을 보게 해줬으니 상이야.”
이따위 상 받고 싶지 않았다. 로이는 붉은 립스틱이 묻어난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 이런 새디스트 어머니를 둔 수혁이 불쌍했다. 항상 그 형이 매저인 것 같기는 했는데 이런 어머니 밑에서 자라서 그런 거라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현상이었다.
“너희를 두고 보도록 하지. 계속 네가 아이돌로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어. 나이도 있으니 군대 영장이 나오면, 널 할리우드로 보내줄 거고. 네가 원한다면 그 작품이 어떤 거라고 널 꽂아 넣어주마. 대신, 네가 사랑해야 할 남자는 오직 김수혁뿐이다. 네 사정 때문에 둘이 결혼은 못하겠지만 그 녀석만이 너의 남편이야. 아이 또한 재촉하지 않으마. 아무래도 태형이가 조만간 아이를 가질 것 같아서 말이야.”
마지막 말에 수혁의 어머니는 진심을 기뻐보였다. 그녀의 웃는 모습에서 살짝 수혁의 얼굴이 떠올랐다. 태형이라는 이름을 말하는 것만으로 그녀가 행복해보였다. 이 모습을 매번 수혁이 보았다면 그는 그때마다 행복에 겨운 어머니와 달리 절망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의 설명되지 못했던 어둠이 조금 이해됐다. 그의 짙게 가라앉은 눈빛에서 봤던 상처받은 아이가 여기서 왔구나 싶었다.
“당신이 도대체 누군데. 뭐하는 사람인데 그게 가능한데요? 말로 떠든다고 그게 가능한 줄 알아요?”
로이의 태클에 그녀가 가소롭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과연 김수혁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티클 만치도 아들을 더럽히지 않은 자신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녀는 정녕 수혁이 야쿠자와 조폭 딸의 아들인지 몰랐냐고 물었다. 로이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수혁의 정수리에서 흑룡이를 보고 이미 알고 있었으나 인정하기 싫어 내가 당신 아들을 조폭 끼고 여자 파는 개쓰레기 양아치로 생각했었다고 말했다가는 왠지 키스로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시어미의 복수는 키스든, 어떤 형태이든 무서운 법이었다.
“대한민국과 일본의 숨은 돈은 다 우리 가문에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지. 이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안 그래?”
실로 믿음이 가는 말이라 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수혁을 일주일내로 보내겠다고 했다. 너희는 이제 부정할 수 없이 사실혼 관계라고 못 박고 조폭들을 끌고 가버렸다. 집에 들어 올 때처럼 갈 때도 거침없는 수혁의 어머니였다.
로이는 주안에게 앞으로 김수혁과 동거를 하게 될 사실을 통보했다. 그녀의 집에 밥하고 청소하러 출근하는 사장님인데 그 정도 사실은 미리 알려야 할 것 같아서였다. 허리를 마사지해주던 주안의 손이 잠시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그가 이야기의 주제를 바꿔 ‘이카루스’ 춤에서 힘든 동작은 뇌출혈 놈들에게 맡기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그런 말을 하는 몸종의 손은 아픈 마님을 주물러주는 걸로 보기에는 너무 성의 없었다. 로이는 주안에게 그만 하라고 했다. 주무르기 싫으면 말을 할 것이지!
“영준이랑 호영이랑 같이 어때. 걔네 곡예로 유명하잖아. 분명 이슈가 될 거야. 로이 테일러와 NATURAL의 만남. 소속사 옮기고 처음 활동하는 거니 걔네한테도 좋을 거고. 넌 부상 없이 이카루스 활동 마칠 수 있어. 둘 다 Win-Win 하자고.”
“뭐. 나쁜 생각은 아닌 거 같네. 형이 뇌출혈 놈들한테 이야기해봐. 좋다고 하면 난 무조건 콜~! 이번엔 펜을 이겨야 하니깐 치사해도 뭐 어때. 당장 뇌출혈한테 연락해봐.”
“그 놈들이야 너 좋아서 우리 회사 온 놈들인데 물어보나 마나지. 이만 쉬어. 너 요즘 너무 무리했어. 내일부터 연습 나오라고 할게.”
주안이 미지근해진 수건을 들고 일어났다. 로이는 축 처진 어깨로 뒤돌아서서 문을 닫던 주안을 급히 불러 세웠다.
“형.”
“왜.”
“그냥 미안하다고. 미리 상의 없이 수혁 형 집에 불러들여서. 근데 이게 자의는 아니고,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달까? 아무튼 그런 깊은 사연이 있어. 다 이해하지?”
“칫, 몰라. 늦었으니 이만 자! 참고로 나 김수혁, 이 집에 들어오는 거 완전 환영이다. 그 아름다운 비주얼을 매일 영접한다는데 땡큐지. 우리 수혁씨, 이참에 열심히 꼬셔서 게이로 전향시켜버려야찡~ 김수혁이 나 좋다고 너 차도 미워하지 마~ 알아찡~”
주안이 수혁을 자기 남자로 만들겠다는 위대한 포부를 밝히고 문을 닫았다. 로이는 피식 나오는 웃음을 베개로 막고 핸드폰을 들었다. 일주일이나 안 봤더니 보고 싶어서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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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 코멘트가 없네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