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5 그 남자의 사정 =========================================================================
옥상에 나오니 너무 추웠다. 겨울이라는 걸 깜빡 잊었다고 하기에는 눈에 파묻혀 뱃가죽이 구멍 나고, 택시에 치이는 일을 겪었다. 이렇게 추울 때는 보드카가 딱인데, 하며 수혁은 먼저 나와 담배를 피우고 있던 남자에게 다가갔다. 붉은 머리통을 한 것을 봐 그다지 건전한 부류에 속한 이 같지 않았다.
“담배 한 대만 빌려주시겠습니까.”
요즘 담배 값이 많이 올라 한 개비를 얻어 피는 것조차 힘들게 된 세상이지만, 역시 애연가들은 척박한 삶에서도 나눌 줄 아는 마음씨 착한 이들이었다. 수혁은 얼른 담배를 입에 물었다. 라이터 좀 빌려달라고 하니, 그가 ‘없는데.’라고 답했다.
“그 담밴 어떻게 불을 피우셨습니까.”
“난 일행한테 빌렸었지.”
옥상에 수혁과 붉은 머리뿐이었다. 그의 일행은 추위를 참지 못하고 먼저 내려간 모양이었다. 할 수 없이 붉은 머리와 담배를 맞대고 숨을 깊게 빨았다. 몇 번 담배를 빠니 소싯적의 솜씨가 되살아났는지 수혁의 담배에도 불이 옮겨왔다.
“그런데 당신 많이 본 얼굴이네.”
수혁은 붉은 머리가 그를 배우로서 알아보는 거라 여기고 난처함을 느꼈다. 한국인들이 바라는 김수혁의 이미지는 올곧은 성인군자였다. 그가 술과 담배와 오토바이를 좋아하는 폭주족 출신임을 알면, 팬들이 배신당했다고 엉엉 울지 모른다.
“당신, 로이 남친이지? 난 리나 전 남친.”
전 남친? 그럼 헤어졌다는 뜻인가?
빨간 머리는 수혁에게 의문만 남기고 깁스를 한 한쪽 다리를 질질 끌고 가버렸다. 수혁은 이게 담배 연기인지, 입김인지 모를 정도로 강추위 속에서 오들 오들 떨며 담배 한 개비를 다 태우고 나서야 내려갔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싸움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기 무서울 정도였다. 그들이 저렇게 잘 싸우는 것쯤이야 지겨울 정도로 본 일이니 별 걱정은 없었다. 저러다 언제 이혼하냐 마냐 했냐는 듯 둘이 마작을 하며 놀겠지. 병실 문에 기대어 싸움이 끝나길 기다렸다. 간호사가 수혁에게 왜 병실에 안 들어가냐고 물었다.
“쉿!”
검지로 조용히 해달라 신호를 보내고 수혁은 문 안쪽으로 귀를 기우렸다. 환자가 보호자 때문에 몸조리조차 못하고 서있어야 되는 억울한 사연에 대해 이 간호사에게 다 설명해주려면, 어머니가 자기 남동생에게 보이는 비이성적인 애정부터 시작해서 혈연에 집착하는 김씨 집안 풍토까지 모조리 이야기 해줘야 했다. 역시 아버지도 수혁처럼 의심스러웠던 거다. 30년 넘게 그런 의심을 품고 꾹 참았으니 그도 할 만큼 한 것이다.
그야 김태형이 김연희의 남동생이라고 하기에는 그는 너무 아들 뻘이었다. 장모가 태형을 임신했을 때의 나이를 추정하면 대략 마흔 정도이다. 아프고 나이든 장모 보다 장인과 아내의 부도덕한 성교합을 통해 김태형이 태어났다고 보는 편이 더 현실적이게 보였다. 그 가설에 더불어 아버지는 수혁마저 그의 친아들이 아닌 걸로 여기는 듯했지만, 수혁은 누가 뭐라고 해도 속일 수 없이 야마구치의 아들이었다. 타인의 눈으로 보기에도 그는 아버지와 닮아있었고, 본인이 보기에도 그는 거울 속 아버지의 젊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눈에 뻔히 보이는 것도 의심이 있으면 일그러져 보이는 법이다. 아버지가 그렇게 생각하면 켄이치로는 야마구치의 아들이 될 수 없었다. 피와 족보가 이어져있다고 해도 진심으로 아들이라고 여기지 않는데 다른 남자의 아들과 친아들이 뭐가 다르겠는가.
“그래서 지금 김태형 새끼가 더 좋다는 거야!”
“그래. 어쩔래. 그리고 김태형이 니 새끼냐! 자꾸 새끼 새끼하지 마! 이 새끼야! 다시는 나한테 말 걸지 마! 너랑 결혼한 게 내 인생 최고의 실수였어!”
“가지마! 김태형이 도대체 뭐라고! 걔가 네 아들이야? 뭐야!”
차라리 속 시원히 김태형이 수혁의 형임을 알려줬으면 싶었다. 그러면 대놓고 그를 증오할 수 있을 텐데 어머니는 말이 없었다. 문이 열렸다.
“아픈데 우리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 미안하다. 아들.”
“아닙니다.”
“넌 저 새끼 아들 아니야. 넌 내 아들이야.”
“…예.”
“우리 이혼하기로 했어. 웃기게도 네 아빠는 네 얼굴이 안 보이나 보다. 눈 병신새끼.”
그러게요. 데칼코마니라고 놀려도 할 말 없는 부자인데 말이죠.
수혁은 그 대답 대신 안에 있던 아버지에게 이만 나가달라고 했다. 그러나 진짜 김태형이 어머니의 아들인지 아닌지는 수혁도 의심스러웠다. 본가에 가있겠다는 어머니의 팔을 잡았다가 놓았다. 그 집에 김태형이 있어서요, 라는 물음은 불필요했다. 분명 그 집에는 김태형이 있을 테니깐.
“왜?”
“……조심히 들어가시라고요.”
“녀석. 싱겁긴. 그래, 너도 어서 들어가서 쉬어. 하루 빨리 몸 회복해서 엄마한테 손주 보여줘야지.”
결혼도 못한 아들에게 벌써부터 손주 타령하는 어머니였다. 로이가 일주일 사이 점수를 많이 따놓았는지 참한 아가씨라고 로이를 칭찬하고 가버렸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수혁이 그의 아들이라는 점에 긍정해주지 않아 정말로 그 망상을 진실이라고 믿는 듯 보였다. 너희 김씨 집안의 씨를 다 말려버리겠다고 병실에 들어온 수혁의 입을 막아버렸다. 이런다고 죽는 게 아닌데 칼 놔두고 괜한 짓이었다. 완전 민폐 덩어리였다.
“だましやがったな。(속였구나.) うまくだましこめる。(감쪽같이 날 속였어.) そのかおをみただけでもへどがでそうだ。(그 얼굴 보기만 해도 구역질 날 것 같아.)”
“오…또…우…상. おとうさん。(아버지)”
“크으흑. 윽. 연희야. 연희야.”
아버지가 수혁을 놓아줬다. 사랑을 잃고 버림받은 남자는 일본 최고의 야쿠자라고 알려주지 않고서는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작고 초라해보였다. 수혁은 우는 야마구치를 모른 척 내버려두고 침대에 누웠다. 30년을 자기 아들이라고 여기지 않았고, 수혁 또한 30년 동안 그를 친아버지라고 여기지 않았다. 어차피 얕은 부모 자식 간의 정이었다. 오히려 적이라고 보아도 모자람 없는 자이기도 했다.
집은 부자였으나 그 돈은 남의 것을 빼앗아 피눈물로 이룩된 재산이었다. 부모는 겉 보이게 서로 다정했으나 뼛속까지 자기들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족속들이라 매번 싸우고 화해하는 걸 반복할 때마다 자식 따위는 방치해뒀다. 학창시절에는 친구 사귀기도 힘들었다. 야쿠자의 아들이라 불량서클밖에 가입할 수 없었다. 그나마 같이 폭주를 뛰며 만나던 아이들은 켄이치로와 어울려주기는 했으나, 그들이 바란 건 야마구치의 힘을 등에 업은 도련님이었다.
의지할 곳 없고, 그럴수록 수혁과 같은 상황에 놓인 로이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에게 더 큰 애정을 가지고 지켜주고 싶어졌다. 딸을 돈 벌이 수단으로 써먹는 엄마. 로이를 버리고 미국으로 떠나버린 아빠. 사람들은 그녀가 버림받았음에도 텔레비전에 나오는 화려한 로이의 모습만 보고 그녀가 행복할 거라 여기고, 그까짓 일에 상처받지 않았을 거라고 취급했다. 그야 로이는 부모님이 이혼한 날에도 뽀뽀뽀에 출연해 사르르 애간장이 녹아내릴 것 같은 미소로 춤을 추었으니깐. 다들 어린 아이는 역시 아무것도 모른다고 치부했겠지.
하지만 수혁은 그만이 그녀의 마음은 알고 있노라. 오직 수혁만이 로이를 제대로 안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기쁨을 느끼곤 했다.
그건 잘못된 사랑이었다. 과연 그걸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렇게 유치하고 추악한 마음을?
부끄러움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을 죽였다. 아직 수혁은 어른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로이가 더 어른스러웠다. 부모의 불화가 아이의 삶을 이토록 지배할 수 있음을 어째서 그들은 모를까. 눈물은 메말라 나오지도 않게 되었다. 그 점을 수혁은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었으나 배우가 되고나서는 그게 정상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아프면 울고 슬프면 울고, 그래야 다시 딛고 일어설 수 있는데 그의 눈은 아직도 물기를 머금지 못했다.
“아버지, 어머니는 삼촌을 모욕해서 화가 난 거예요. 말끝마다 김태형 새끼, 라고 말했잖아요. ‘김태형 새끼가 좋아 내가 좋아?’가 아니라 ‘귀여운 태형이 보다 날 더 좋아해주면 안 돼?’ 라고 한번 말해보세요.”
아버지가 일어서서 뛰어나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수혁은 이불을 내리고 후 한숨을 내뱉었다. 저들이 아무리 싫다고 해도 수혁의 부모인 점은 변함없었다. 그렇다면 잘 댈래주는 수밖에. 그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지금 입원하고 있는 병원에서 친부 검사도 해주나 알아보려는 거였다. 서류라도 내밀면 그만 좀 닥치겠지 싶었다.
============================ 작품 후기 ============================
너는샛별님..전편에서 주인공 비중이 참 적었죠?ㅎㅎ이제 로이만 주구장창 나올 겁니다^^
라라크로프트windy님 감사합니다^^ 다시 정주행해주신 라라님을 위해 특별히 엔딩을 알려드리겠습니다. 해피엔딩~♥입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