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2 그 남자의 사정 =========================================================================
“그게 무슨 말이야. 다시 한 번 말해봐.”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끌어내 말하려니 목이 아팠다. 목젖을 긁듯 나온 낮은 바리톤의 목소리는 사납기 보다는 되려 전투력 상실한 패잔병의 울음 같았다. 태형이 턱을 괴고 수혁을 봤다. 빙그레 웃는 사내의 낯짝을 뭉개버리고 싶었다.
“못 들을 수 없는데, 또 듣고 싶은 거냐. 하여간 메져 녀석. 이번에는 귓구멍 열고 잘 들어라. 내 말 안 들으면 네 여자친구를 죽일 거니 개기지마. 난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살인마 개싸이코라는 거 잘 알잖아. 사람 죽이는 게 무서운 건 너 같은 놈이나 그런 거지, 나 같은 놈한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다. 난 이미 여기가 맛이 가버렸어. 탕!”
손가락으로 총을 쏘듯 제 머리통을 날리는 태형이 히죽 히죽 웃었다. 궁지에 몰린 제 피붙이를 보는 걸 그는 어려서부터 좋아했다. 수혁이 화를 내고, 분해하고, 그러다 태형에게 굴복할 때면 김태형은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진귀한 걸 얻은 양 환희에 차서 콧노래를 불렀다. 저 듣기 싫은 소리. 저 끔찍한 정체 모를 김태형 작곡의 허밍. 그걸 부르는 걸 보니 이미 수혁의 얼굴은 포커페이스를 잃어버려나 보다.
“그러기만 해봐. 너 다시는 안 봐! 씨발, 죽여버릴 거야. 김태형!”
수혁은 태형에게 달려들어 그의 목을 졸랐다. 고생이란 모르고 자란 그의 곱고 뽀얀 손등에 푸른 혈관이 뛰어나올 정도로 최대한 악력을 짜내, 반드시 저 악마를 죽이겠노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사내는 당황하지 않았다. 눈을 까뒤집고 질식으로 오는 오르가즘을 느끼는 듯 고개를 젖혔다. 죽일 거다. 반드시 죽여버릴 거다. 하지만 수혁의 손은 스르르 힘을 빼고 태형의 목을 놓았다. 사내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으로 수혁을 지그시 보며 목 언저리를 쓰다듬었다.
“벌써 항복이야? 삼촌한테 개기는 거 처음인데 좀 더 해봐야지.”
“……죄송합니다. 삼촌.”
“킥. 그래. 조카. 이리 와 앉아봐. 내가 너한테 해가 될 일을 하겠니? 그리고 너랑 그 양년이 잘되길 내가 얼마나 바라는데. 넌 좀 더 하나뿐인 삼촌에게 고마울 줄 알아야 해. 우리 김씨 가문에 그런 잡종을 섞어도 내가 안 된다고 안 하니깐 아버지고, 누나고, 다 너희를 내버려두는 건데 그 계집 목숨이 붙어있게 해준, 고마운 생명의 은인에게 너라고 부르지를 않나. 반말을 하지 않나. 목을 조르지 않나. 네가 생각해도 네가 무지 개망나니 같지?”
“……….”
의자에 앉은 수혁은 주먹을 무릎 위에 두고 부들부들 떨었다.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저 말끔한 와이셔츠 목깃 위로 붉은 손자국이 남은 김태형의 목덜미에 당장이라고 볼펜을 박아 넣을 수 있음에도 그러지 못하는 건, 그의 말대로 로이에 대한 김씨 집안의 태도가 변하리라는 걸 알아서였다.
손주라면 버선발로 뛰어나올 정도로 김씨 핏줄 사랑이 대단한 외할아버지와 무조건 김씨 가문을 이어야 한다고 혈통주의를 고집하는 어머니를 제외하더라도, 그에게는 일본에 있는 아버지라는 큰 장애물이 있었다. 그들이 수혁에게 거는 기대는 컸다. 제대로 된 아들 하나 자기네 집안에 낳아 달라. 요즘 같은 시대에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그들은 수혁이 어렸을 때부터 밖에 나가서 여자랑 사고라도 쳐오길 바랬다. 그럼 그의 사상아를 납치하다가 금이야 옥이야 기르려고. 어머니는 너 나가서 방탕하게 살아도 된다고 은근한 강요까지 했을 정도였다.
김씨 가문이건, 야마구치 가문이건, 손이 귀한 집안들이라 자식에 대한 애착이 크다. 남자랑 결혼한 태형 때문에 온 집안이 다 수혁만 바라봤다. 넌 야마구치이니, 당연히 내 손자를 낳아야지! 아버지는 그랬고, 네 삼촌이 게이이니 너라도! 어머니는 김태영이라고 벌써 수혁의 아들이름까지 지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그렇게 수혁만 바라봤다. 그게 얼마나 스트레스인지 누가 알까.
남들 다 하는 연애를 서른까지 못하다가 시작하니 양 가문이 수혁에게 무서울 정도로 달려들었다.
어서 아들을 내놓으라고.
현존하는 배우 중 최강의 비주얼이라 불리며 얼굴 하나로 한중일 일대를 평정한 수혁이건만 고자설에 휩쓸려 어머니가 끓여주는 정체 모를 한약을 먹고 있었다. 아버지에게는 남자 아이돌을 좋아하는 정신 빠진 못난 원수새끼에서 남자 같은 여자 아이돌을 좋아하는 울 착한 아들로 강제 승진되었다. 야마구치 왈, 난 널 믿었어. 넌 역시 내 자랑스러운 아들이야. 어린 시절, 로이를 죽이겠다고 납치하고 수혁에게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를 심어주었던 무서운 아버지가 그리 말하고 있었다.
어서 하루 빨리 일본으로 돌아와 후사를 낳아야지.
“죄송합니다. 삼촌.”
로이가 그런 수혁의 집안 사정을 알고도 그와 결혼을 해줄까 싶었다. 분명 그녀의 성격이라면 단번에 ‘헤어져.’라고 말하겠지. 아이 낳고 나 돼지 되면 형이 책임질 거야? 다이어트에 목숨 거는 그녀라면 이렇게 말하고 화내지 않을까 싶다.
“그래, 새끼야. 넌 내 말만 잘 들으면 돼.”
태형이 툭 고개 숙인 수혁의 머리를 쳤다. 모욕감으로 이를 악물고 숨을 깊게 내뱉으며 화를 참았다. 그러다 번뜩, 기발한 생각이 들어 수혁은 고개를 들어 태형을 봤다.
“지금 제 머리를 때리신 겁니까.”
“아니, 때린 거 아니라 칭찬해준 거지.”
“전 맞았는데 왜 이게 칭찬이 되는 겁니까. 백민호씨한테 이를 겁니다. 민호씨가 제 팬이라 제 드라마랑 영화 블루레이 다 가지고 있는 거 아시죠?”
“……………김수혁!”
그의 이름을 섬뜩하게 살기를 담아 부른 태형이 버럭 호통을 치듯 계약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래서 내가 여기 사인하라고 했잖아! 우리 강아지가 너 좋다고, 어! 나보다 좋다고, 네 드라마 보겠다고 하는데. 넌 씨발. 방에만 처박혀 아이돌 덕질이나 해대고, 울 강아지는 수혁씨 언제 작품 들어 가냐고 징징거리고! 넌 내가 졸라 싫어하는 찌질한 조카놈이지만. 백민호는 울트라 킹왕짱 멋진 나보다 네가 더 좋다고 하잖아! 이 아이돌 변태야!”
수혁은 억울했다. 로이를 죽이네 살리네, 협박을 해대면서 하던 오늘 태형의 지독한 괴롭힘이 결국 백민호씨의 징징거림으로부터 시작된 거였다니.
“너 지금 당장 드라마 찍어. 우리 강아지, 드라마 봐야 하니깐! 어서 빨리 재계약하고 촬영 나가! 방송국에 편성 잡게!”
언제나처럼 삼촌이 버럭 화를 내는데, 왜 이리 웃기게 느껴지는지 수혁은 이해할 수 없었다. 방금 태형에게 맞은 머리가 잘못된 게 확실했다. 자기가 진정한 사랑에 빠졌노라 커밍아웃을 하더니 제대로 미쳐서 저러는 모양이었다. 참으로 추했다.
수혁은 결코 사랑에 빠져도 제정신을 차려야지 싶었다.
“글쎄요. 제가 사랑하는 여자가 댁한테 생명의 위험을 당해서, 제가 연기를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싶네요.”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시를 읊듯 말하는 그 순간의 수혁은 지독히 아름답고 고상했다. 오만한 태도를 보이는 그의 빈정거리는 말투와는 반대로, 추운 날씨 탓에 청초할 정도로 창백한 뺨의 조화는 회의실이라는 현실적인 장소마저 비현실적으로 만들 정도 수려했다. 그만큼 수혁은 비현실적인 미남이었다.
하지만 긴속눈썹을 내리깔고 우아하게 앉아있는 조카 수혁의 자태는 삼촌인 김태형에 의하면, 한 대 조 패고 싶은 여우상일 뿐이었다. 그렇다. 지금 조카 김수혁은 삼촌 김태형을 엿 먹이는 중이었다. 둘이 앙숙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거였다.
수혁은 상대방의 잘못과 실수를 보고도 온화하게 덮어둘 것만 같은 그의 고운 인상과 달리, 사람 열 받게 만드는 재주가 탁월하게 발달된 수재였다. 오히려 그가 가진 아름다움을 십분 발휘해 상대를 광분상태로 만들길 잘하는, 겉만 착한 재수 없는 조카새끼, 아니 좆까새끼다.
“………씨발. 생명의 위험 가한 적 없거든. 그런다고 말한 거였지. 이프. 메이비. 몰라? 그리고 내가 걔를 뒤에서 얼마나 챙겨주는 줄 알아. 요즘 스토커 때문에 존나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조폭들 보내서 잘 돌봐줬다고!”
============================ 작품 후기 ============================
너는샛별님 그러셨구나ㅎㅎ그럼 너는샛별님 뽀뽀 쪽!^^ 오랜만이어요. 수혁이의 찌질함은 뭐...전 개인적으로 찌질이 캐릭터를 좋아해서 제 개인의 취향이 듬뿍 들어간 남주라 그렇습니다...에반게리온 신지라던가, 햄릿이라던가..그런 류를 좋아합니다.
그런 캐릭터가 현실에 있으면 복창이 터지고 한 대 뒤통수를 날려버리고 싶어지겠지만 어차피 이건 소설이니깐^^
아이고, olvian님 반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시 제 독자님들은 천사님들입니다. 감사의 키스 쭈앙>< 앞으로 완결까지 힘차게 달려보아요!ㅎㅎ
그리고 태형이는 원래 개쓰레기인 거 맞아요.ㅋㅋ 특히 효준이랑 태형이 러브 스토리에서 그 점이 더 두드러질 것 같은데 쩝~...이미 벌려놓은 소설들이 많아 완결을 내야 뭘 하든 할 텐데...알다시피 그 둘은 새드 엔딩이라 독자님들이 싫어할 거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