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1 그 남자의 사정 =========================================================================
엔터테이먼트 HEAVEN. 사실 일본인인 수혁이 한국 연예계에 발을 붙이기 위해 그의 삼촌이 만든 회사다. 그리고 그 웃기지도 않는 창립 이유와는 달리 김수혁이라는 한국 연예계에 걸쭉한 톱배우를 배출하면서, 이젠 명실상부하게 HEAVEN은 거대 회사가 되어 연예인 지망생은 물론, 소위 잘나간다는 연예인들에게도 꿈의 엔터테이먼트가 되었다.
HEAVEN이라는 집단이 워낙 폐쇄적이라 여러 소문들이 많았다. 그곳 회사식당은 호텔 주방장 출신의 세프들이 일식 중식 한식 프렌치 요리를 내보낸다는 설 하나를 제외하고는 죄다 부정적인 소문들이었다. 그 중 대표적인 한 가지가 바로, HEAVEN 출신의 연예인들이 ‘나가요걸’과 ‘호스트’라는 거였다.
하지만 그게 마냥 웃어넘길 수 없는 말인 듯, 일이 벌어졌다. 소위 암흑세계에서 잘 나간다는 룸걸들이 예쁘다는 건 룸주도, 술을 사먹는 손님도, 그녀들도, 하다 못 해 HEAVEN의 실질적인 주인도 알고 있는 사실이어서 그렇게 신흥기획에 채워 넣어졌던 연예인들이다. 그들이 신비주의 콘셉트로 한창 몸값을 높여 갈수록 HEAVEN의 주가도 폭등해갔다. 하지만 세상만사 절대 남 잘되는 꼴을 못 보겠다 싶은, 아니 절대적으로 악한 자를 처벌하겠노라 성적 학대를 받았던 여배우 A가 자살을 하며 남긴 유서로 그들의 정체가 세상에 빵 하고 터져 나오고 말았다.
HEAVEN의 연예인들이 정치가, 성공한 기업인을 상대로 몸 로비를 했더라. 그것이 지금 잠잠하던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놓은 사건의 개요였다.
“수혁아, 걱정 말고. 김 회장님 왔으니 만나봐.”
그곳에는 한때 잘나가는 가수이자 현역 바지사장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그 바지사장이 수혁이 회사 로비를 걸어가는 와중 경찰에게 붙잡혀 끌려 나가며 남긴 말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간담회라는 말에 회사에 왔던 수혁은 지금 이게 무슨 일인지 하며 바지사장을 봤다. 검찰이 박스에다 회사 문서를 담고 있고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던 안내 데스크 직원이 주위를 살피고 있다가 수혁을 회의실로 안내했다. 회의실에는 김태형이 태연스럽게 커피를 마시며 책을 보고 있었다. ‘실락원’이라니. 천국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에서 읽기에는 부정절한 제목이었다.
“왔냐? 앉아.”
“…무슨 일입니까.”
“일은 무슨 일. 그저 내 걸 되찾을 때가 되었으니깐. 이제 나도 가정을 이뤘는데 양지에서 안전을 도모해야 하지 않겠어?”
“그게 정 사장님이 잡혀가는 거랑 무슨 상관인 겁니까!”
“킥. 발끈하긴. 왜. 저 꼰대가 네 타입이었어? 그렇게 꼴렸으면 진작 대주지 그랬어. 네 예쁜 얼굴이면 분명 그놈도 좆질 해줬을 텐데.”
“…….”
환멸감이 치밀어 올랐다. 사내에 대한 분노로 속이 메슥거릴 지경이었다. 김태형은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자였다. 그런 자를 상대로 그가 뭐라고 말해봤자 괜히 수혁의 입만 아플 뿐이었다. 어떻게 자길 위해서 일 해주는 정기만 사장과 조카를 상대로 그런 역겨운 농담을 건넨단 말인가. 수혁은 짜증스러움에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삼촌을 노려봤다. 정 사장은 친아버지에게조차 받을 수 없었던 ‘정’을 주었던, 그가 믿고 의지하던 아버지 같은 존재이다. 김태형 따위에게 그런 대우를 받을 자가 아니었다.
“개소리 집어치워.”
“오호~. 웬일? 네가 그렇게 섹시한 소리도 해댈 줄 알고. 아아, 오늘 그날이구나. 킥. 하여간 계집애 마냥 옛일을 마음에 담아두는 건 누굴 닮아서 그러냐. 그래도 오늘 나머지 스케줄은 제대로 이행해야지. 안 그래, 을 김 수혁? 이제 네 마음대로 스케줄 빼는 일은 안 될 줄 알아.”
“웃기지마. 난 내가 일하고 싶을 때만 해. 정 사장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도, 그가 무사하지 못하면 너도 무사하지 못할 줄 알아.”
수혁은 정 사장을 위한 변호사를 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형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조카를 향해 물었다. 태형이 알기로, 그의 조카가 유일하게 발끈하는 건 ‘로이 테일러’라는 튀기에 관한 일뿐이었다. 그런데 지가 완전히 연예인이라도 되는 양 소속사 사장을 챙기는 꼴이 우스웠다. 뭐, 좋은 쪽으로 돌아가는 듯싶었다. 이 인간 같지도 않은 놈이 연애를 하더니 드디어 웃고 화내고, 감정을 표했다. 그전에는 그를 볼 때면 공손한 말투와는 달리 싸늘한 조소만 보내 개짜증났는데 이제야 조카새끼로 느껴졌다.
“야, 너 지금 빡 돌았냐? 감히 하늘같은 삼촌한테 반말 찍찍하고, 개기네.”
태형은 그런 조카의 반응이 재미있어 실실 웃었다. 수혁은 입술을 깨문 채 태형을 노려봤다. 형은 제법 날카로운 눈매를 가지고 있어 웃지 않으면 무서워 보인다고 로이가 그랬는데, 그녀를 위해 달콤한 미소를 항상 짓고 다니기에는 김태형이 가진 모든 게 수혁은 너무 싫었다. 그는 너무나 저열하며, 세속적이고, 타락했으며 그 어떠한 것보다 더럽고 추악한 악인이었다. 만일 그를 죽일 수 있었다면 진작 수혁이 죽였을 거고, 그를 때릴 수 있었으면 그를 매일 때렸을 것이며, 그가 세상에 없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빛으로 물들어질 거다. 그러함이 정의롭고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그러지 못했다. 어머니가 저 김태형을 제 아들 보다 귀이 여기고, 제 자식의 운동회는 한 번도 참석하지 않으면서도 김태형이 같은 반 남학생을 성폭행하면 교무실에 달려갔기 때문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인 수혁 보다 그녀의 동생인 태형을 더욱 아꼈다. 그렇다고 그녀가 수혁을 사랑해주지 않은 건 아지만, 어머니는 김태형과 있으면 하도 얼굴을 보여주지 않아 어미가 보고 싶어 한국으로 찾아온 아들을 안전에도 두고도 동생만 챙겼다. 밥을 먹을 때면, 수혁에게는 ‘넌 생선 안 좋아하지?’라 말하면서 아들 같은 동생의 밥 위에는 굴비의 가시를 발라 올렸다. 그저 가시 바르기 귀찮을 어머니를 위해 어린 마음에 한 말이었건만, 진짜로 일본인인 그가 생선을 싫어하리라 여기는 어머니다.
그건 진실을 말하지 않은 수혁의 잘못도 있으니 그렇다고 치고, 다른 일만 비교해도 어머니에게는 수혁 보다 태형이 우위였다. 밤이 되면 수혁에게는 이만 자라고 말하는데, 태형에게는 그가 잠들 때까지 침대 옆에 누워 자장가를 불렀다. 씨발. 듣기 싫다고. 누나 꺼지라고. 김태형은 그랬고, 어머니는 웃었다. 우리 태형이 부끄럽구나, 하고.
수혁은 뚝, 눈물이 떨어져 고개를 돌렸다. 정말 김태형이 싫다. 그런데 그가 혹시 자신의 …가 아닐까 의심하고 있는 자신은 더더욱 싫었다. 태형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정수리에 손을 올렸다.
“…뭡니까.”
“정 사장은 걱정 마. 일종의 쑈맨쉽이지. 아무리 나라도 네가 아끼는 걸 부수진 않아. 한 달 동안 감방에 집사 변호사 넣어서 편이 모실 테니. 넌 내가 새로 작성한 계약서에 사인만 하면 돼.”
태형의 얼굴은 여전히 그가 싫어하는 악인의 표정을 짓고 있음에도 수혁은 그 속에서 난처함, 혹은 말이 되지 않지만 부끄러움을 읽어낼 수 있었다. 삼촌이 맑은 눈물이 흘러내리는 그의 볼을 굳은살이 깊게 박인 사내다운 손으로 단단히 잡았다.
“야, 울지 마. 너 내 앞에서 울면 죽여버릴 거라고 했지.”
삼촌이 토닥, 토닥. 서툰 손으로 어깨를 두드리며 넌 날 닮아 울면 졸라 섹시하니깐, 어디 나가서 울지 마, 라는 웃긴 소리를 해댔다.
“삼촌. 그 손 이만 치우시죠. 불쾌합니다.”
“킥. 그래. 이래야 내 조카지.”
태형은 새초롬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는 조카의 모습에 크게 웃어버렸다. 수혁은 기분이 나빠졌다. 아니, 어쩐지 조금 후련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김태형과 관련된 일은 모조리 불쾌해 그의 기분은 나쁜 쪽에 속하다고 여기기로 했다.
“그래서 지금 회사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겁니까.”
“별거 아니고. HEAVEN 연습생이랑 연예인으로 내가 몸 로비 시켰잖아. 근데 웬 병신 같은 년이 구질구질하게 유서를 남기면서 ‘파라다이스’의 존재가 수면 위로 드러나 버렸거든. 기사는 한 5시쯤에 나올 거고, 한동안 떠들썩하겠지만 HEAVEN이 BD엔터테이먼트로 인수되며 잠잠해질 예정이니 걱정 마. 정 사장도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날 거다.”
무시무시한 내용을 태형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 수혁도 이게 아무렇지 않은 사항인가 싶어졌지만, 입이 떡 벌어지는 건 역시 그가 정상인이라서 어쩔 수 없는 거였다.
“뭐야. 나 이미 다 아는 줄 알았는데. 어째 HEAVEN 간판이라는 놈이 회사 돌아가는 사정도 몰라. 뭐, 그만큼 정 사장이 널 애지중지해줬다는 거겠지만, 하다 못 해 네 양년. 아니 네 여자도 알고 있는 거구만.”
“로이가…알고 있었다고요?”
“어. 걔 REVE 최대주주잖아. 아마 몇 달 전부터 HEAVEN이 이제 BD엔터테이먼트라는 거 알았을 거다. 이건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라 천천히, 순차적으로, 벌어진 일이니깐 나 너무 미워하지 마라. 난 기자 새끼 똥구녕에 돈 처넣어서 최대한 시간 끌어줬다. 이 세상에 나같이 모자란 조카를 졸라 아끼는 삼촌이 어디 흔한 줄 알아? 감사히 여겨.”
태형이 사인하라며 계약서를 그에게 건네 왔다. 지금 벌어진 일들이 죄다 김태형 때문에 벌어진 일이고, 그걸 그가 처리했으니 수혁이 굳이 고마워할 필요 없는데 그와의 대화에서 수혁은 항상 삼촌을 등쳐먹는 조카였다. 누가 누굴 등쳐먹는데. 주객전도다.
“야, 빨리 끝내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사인해.”
깨알 같은 글씨가 족히 20장은 넘어 보이는 계약서는 갑과 을에 대해 빽빽이 적혀있었다. 삼촌은 굳이 읽어볼 것 없이 사인하라고 했다. 설마 조카인 널 상대로 자기가 노예 계약서를 작성했겠냐며, 은근히 혈연 중심적인 발언으로 수혁을 무지 아끼고 있다는 척 해왔다. 수혁은 켕기는 게 많아 보이는 삼촌의 태도에 선뜻 펜을 들 수 없었다. 제 발로 도살장에 걸어가는 소가 될 수는 없었다.
“싫습니다. 전 로이 회사에 들어갈 겁니다.”
“지랄 떨지 말고 어서 사인 못해!”
태형이 버럭 역정을 내며 눈을 부라렸다. 수혁은 못 들은 척 뒤돌아 회의실 문고리를 돌렸다.
“씨발. 별 수작을 다부려. 너 지금 나한테 몸값 올려달라는 거냐? 좋아. 계약금 10억 어때?”
“그런 몸값 필요 없습니다. 10억은 저도 있습니다.”
“그럼 뭘 어쩌려고. 나 떠나서 진짜 그년한테 가겠다고?”
“어차피 당신한테 나 같은 놈은 찌질한 쓰레기에 불과하잖아. 날 위해 연예 기획사를 차렸다고? 내 핑계되지 마. 그 더러운 수작으로 몸집을 키워놓고 날 위해, 모든 게 날 걱정해 그랬노라 어머니께 말하지 말라고!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 놈이 된 줄 알아? 네 삼촌이 널 걱정해 회사 차려준 거 봐. 수혁아, 삼촌한테 잘해. 김수혁! 삼촌한테 무슨 눈빛이니? 네 삼촌이 널 위해 얼마나 노력하지는 지 알고나 그러는 거니? 누가 그런 부탁했어? 내가 다른 사람들 팔면서 나 연예인 시켜달라고 너한테 시켰냐고! 역겨워. 더러워. 추잡해. 너 따위가 내 삼촌이라는 사실이 너무 싫어!”
십대 때도 안 하던 짓을 서른 살이 되고서야 하고 말았다. 수혁은 씩씩거리며 울분을 토해내고 스스로의 모습이 너무 유치하게 느껴져 창피함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분명 주먹이 날아오리라 여겼다. 그가 아는 김태형이라면 당연히 그러고도 남을 존재였다. 그런데 그는 ‘미친놈. 한심하긴.’이라는 표정으로 철없는 조카를 보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너의 흑역사를 길이 남겨 나중에 놀려먹고 싶으니, 어디 다시 한 번 해봐.”
태형이 스마트폰을 꺼내 동영상 촬영을 시작했다. 수혁은 도저히 그에게 자신은 상대할 가치가 없는 놈이라는 걸 깨달았다. 문을 열었다. 이 회의실을 나가는 순간부터 그와 의절하리라. 그러나 수혁은 그럴 수 없었다. 태형이 그의 유일한 약점인 ‘로이 테일러.’에 대해 말을 꺼냈기 때문이었다.
“너 지금 나가면 그 양키 죽는다. 내가 그년 죽여.”
============================ 작품 후기 ============================
원래 노블이 로이와 수혁이 베드씬 때문에 팠는데 이 소설의 진도가 너무 느려 여태 없었다는..허허~.~죄송합니다. 일반판보다 좀 더 빠른 진도로 나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