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이돌이다-80화 (80/104)

00080  그 남자의 사정  =========================================================================

눈이 내렸다. 페라가모 구두를 신는 남자는 무조건 게이라고 토크쇼에 나와 주장하던 로이로 인해 그는 십대 이후 어울리지도 않던 운동화를 신고, 눈길을 걸었다. 뽀드득, 눈이 잘게 부셔져나갔다. 발걸음을 옮길 때 마다 신발 밑창에 눈이 붙었다가 떨어지며 그가 지나가는 흔적마다 사내의 발자국을 남겼다.

수혁은 겨울의 매서운 추위에 캐시미어 코드를 여미고, 차갑게 식어 끝이 얼어붙어버린 손끝으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매달리는 남자는 매력 없다. 여유 없는 남자도 매력 없다. 남자가 자존심이 있지, 여자친구 집 앞에서 기다리는 건 병신이나 할 짓이다. 이 말 모두 로이가 그에게 한 말이었다. 어찌나 매정한지. 매일 그는 그녀가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통화하고 싶은데 그녀는 그렇지 않은 듯했다.

연애하면 항상 함께하는 줄 알았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사랑한다 말하고 키스하고, 같이 손 붙자고 다니는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아이돌이라 일하는 게 바쁜 줄은 알지만 너무 만나기 힘들었다. 간신히 연락을 받은 그녀에게 데이트 신청이라도 하며, 나 오늘 2시간밖에 못 잤다며, 힘든 거 모르냐며 뭐라고 한 소리 듣고 자기 애인의 일을 이해 못 해주는 남자 취급했다.

‘제발 그만 좀 해. 하아…. 진짜 미치겠다. 날 사랑해주는 건 고마운데 네가 자꾸 이러면 너무 힘들다.’

그녀는 말하지 않았지만 ‘너도 배우이면 알 거 아니야.’ 로이의 지친 목소리는 그렇게 묻는 듯 했다. 그래서 수혁은 알았노라 답했다. 미안해요. 로이. 그럼 다음에 시간나면 만나요.

물론 그도 이해심 깊은 남자라 그녀가 홍콩으로 MAMA에 참석하기 위해 새벽까지 연습하는 것쯤은 알고 있고, 원래 로이가 예민한 성격인지라 그런 일로 그녀가 짜증을 부린다고 해서 싫어질 정도로 그녀에 대한 사랑이 깊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보고 싶은 걸 어쩌란 말인가. 그저 얼굴 한번 보고 목소리 몇 번 듣는 것도 안 되나. 그러나 그녀를 만나고 싶어 매달리는 그에게 돌아오는 소리가 고작 그 정도였던 거다.

‘아아, 정말 싫어. 전화 좀 그만해. 고소하기 전에. 나 더 이상 네 이상한 소리 들어줄 기력 없어. 힘드니깐 이만 끊자.’

이런 게 고작 10년을 짝사랑해온 결과라니. 이런 낭만적이지 못한 결말을 위해 자신은 그 누구와도 사귀지 않고, 그녀를 기다렸던 게 아니다.

수혁은 두 손으로 바람이 매섭게 때려대는 얼굴을 가려냈다. 불이 꺼진 로이의 집 앞에는 수혁 말고도 소녀 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두꺼운 패딩을 입은 소녀들은 자기네들끼리 낄낄거리며 그들의 우상 ‘로이 테일러’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너 오빠, 얼굴 봤냐? 완전 외계인 줄. 토 나오게 잘생겼어. 씨발. 뭘 처먹어서 여자보다 예쁜 건데. 나 오징어 돼서 대 굴욕 당했잖아. 뭐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그는 구두가 눈 속에서 축축이 젖어갈 때까지 로이의 집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혼자 그녀를 사랑했을 때보다 더 외로웠다. 우리 지금 사귀는 데 왜 이리 차갑나요? 로이.

“야! 너 뭐야. 아까부터 우리 오빠 집을 왜 이렇게 노려보는데! 너 수상하다! 네가 요즘 울 오빠 괴롭힌다는 스토커지!”

수혁은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다가 그에게 다가온 불량한 소녀떼를 봤다. 눈매를 완전히 가려버린 야구모자와 더불어, 목도리를 둘둘 말아 얼굴을 가렸는지라 다행히 그가 배우 ‘김수혁’이라는 걸 알아보지 못 했다. 그는 잽싸게 달려 도망쳤다. 로이 팬들이 그를 죽이겠노라 ‘씨발새끼야~’하며 달려와 쫒으려 했지만 연예계 대표 몸짱으로 이름난 수혁을 따라오기에는 턱도 없이 부족한 체력이었다.

그런데 그가 붙잡혀버렸다. 소녀들의 집념은 역시 대단했다. 수혁의 목을 두르고 있던 목도리가 소녀의 손에 의해 풀려 눈길로 떨어져버렸다. 소녀들의 눈이 커졌다. 수혁은 씨익 웃으며 야구 모자를 들어올렸다. 그는 한류스타다. 그것도 안티 없기로 유명한 국민 배우 김수혁. 그런데 소녀들의 표정은 험악했다.

“이 씨발년이 감히! 울 오빠가 너 때문에 얼마나 힘든 줄 알아!”

발길질이 날아왔다. 수혁은 아무리 몸이 좋은 사내라 할지라도 다섯 명을 동시에 이길 수 없어 몸을 잔뜩 웅크리고 맞았다. 그는 킬킬거리며 웃었다. 소녀들이 미친년이라고, 이 년 진짜 무섭네, 하며 울 오빠 얼마나 무서웠을까, 씨발 개발 족발, 별 욕을 다 하며 그를 때렸다. 수혁은 흠신 두들겨 맞고 그녀들이 떠나기를 기다렸다. 한참을 죽은 듯이 기다리니 흥미를 잃은 소녀들이 그에게 침을 뱉고 ‘너 다시는 울 오빠 앞에 나타나지 마라.’하며 가버렸다.

수혁은 비틀거리며 주차되어 있던 차를 집고 일어섰다. 흘러내리는 코피를 주먹으로 거칠게 닦으며 차장을 확인하니 이상하게도 못생긴 여자 하나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주먹으로 유리를 쳤다. 도난방지 벨이 울렸다. 차 주인인 듯 누군가 그에게 ‘내 차에 무슨 짓이야.’하며 달려왔다. 수혁은 칫, 침을 뱉고 도망쳤다. 아직은. 아직은 아니다. 로이는 지금 너무 바빠 힘들어서 그런 것뿐, 조금 더 그녀를 기다려야 했다.

수혁은 달렸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차 주인은 자기 차에 이상 없나 살펴보고, 다행히 아무 이상 없다는 사실에 그의 차에 테러를 하고 도망친 여자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하여간 요즘 별 이상한 사이코가 다 있어, 하고.

***

“도련님 식사하세요.”

수혁은 앞치마를 맨 철구가 부르는 소리에 쓰고 있던 팬픽을 저장하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요즘 한창 그가 주력하고 있는 로맨스 소설로, 유감스럽게도 남자 여자 주인공이 학교에서 풋사랑을 키워나간다는 순정만화삘의 내용이어서 ‘전체이용가’였다. 그래서 그는 요즘 소설 쓰는 맛이 안 났다.

김씨 집안은 대대로 제왕의 재질과 함께 양기가 많아 그들의 넘쳐 오르는 성욕을 잠재우고자 십대 때 합방을 이루지 못하면 요절한다는 루머가 조폭들에게 떠돌 정도로, 본명은 켄이치로 야마구치이지만 본인은 어머니인 김씨의 피를 이어받아 절대 김 씨라며, 대한민국 군대까지 다녀올 정도로 열혈 한국인인 김수혁의 몸에도 그가 바라는 대로 김 씨의 피가 반이나 흐르고 있었고, 그런 나머지 수혁 또한 무절제한 성생활을 하는 그의 삼촌을 경멸하는 동시에 제 삼촌 마냥 야한 걸 좋아하는 종족이었다.

그러니 그가 사랑하는 여자를 옆에 두고 순한 양인 양 수줍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거나, 데이트를 하고 헤어지기 아쉬워 잠깐 그녀의 집에서 차를 마시다가 가벼운 입맞춤 정도를 한다고 그의 욕구가 완전히 해소될 리 없었다.

그렇다면 야한 팬픽이라도 써서 대리만족을 해야 하는데, 그것도 불가능하니 그는 지금 죽을 지경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가 만든 팬카페에 로이가 활동하고 있는 듯싶었기 때문이었다. ‘수혁룡이’라는 아이디가 한때 등장해 로이와 리나의 사진을 올렸던 사건은 ‘수혁룡이’가 로이 스스로 제 정체를 밝히지 않았어도 그의 전화를 받았던 그녀의 반응을 통해 그녀가 ‘수혁룡이’라는 확신을 그에게 주었다.

조심 또 조심해야 했다. 그녀가 만약 수혁이 자길 소설 속에서 강간하고, 납치하고, 굴려 먹는 변태 소설가라는 걸 알아차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당장 이별통지표를 받는 날이 될 것이다. 덕분에 그는 요즘 한참 요구불만으로 몸이 달아오른 상태였다. 이런 몸이라면 그를 유혹하기 위해 알몸으로 그의 침대에서 기다리던 미녀 군단들을 어머니가 예전처럼 보내오면 속절없이 당하고 말 것이다. 수혁은 더욱 문단속을 철저히 하야겠다 싶었다.

“상민아, 문단속 잘해라. 혹여 어머니가 온다 해도 절대 문 열지 말고.”

“예! 도련님. 로이 아가씨가 오신다 해도 절대 열지 않겠습니다.”

눈치 없는 상민은 참으로 유도리가 없는 놈이었다. 수혁은 발길질로 그를 부엌 구석으로 몰아놓고, 로이가 왔을 때 1초라도 기다리게 하면 넌 홋카이도 눈에 묻혀 오뎅을 찾게 될 거라 일러줬다. 그가 알기로는 유도리가 없을 때 약은 매요, 겁대가리가 없을 때의 약도 매요, 조폭들의 모든 약은 매로 통하고 있었다. 수혁의 가벼운 발길질에 맞던 상민은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다. 로이 아가씨가 오시면 당연히 문을 열어야죠, 암.

“크흠~. 그러게 아침부터 왜 절 품위 없는 놈으로 만듭니까. 상민씨.”

“헤헤. 죄송합니다. 도련님. 제가 워낙 빡큐가 모자라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모자란 아이큐로 잘도 내 스케줄은 외우고 다닙니다. 모자란 상민씨. 오늘 스케줄은 뭡니까.”

수혁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듬고 아무런 일 없었던 것 마냥 식탁 의자에 앉았다.

“아. 넵! 오전 10시, 일산에서 화보 촬영 있고요. 12시에 잡지 인터뷰, 13시에 드라마 촬영하시다가 짬 내서 영화 인터뷰하시면 되고요. 15시에 보스 만나서 긴급 간담회 하신 다음에, 17시에 회사로 오디션 프로그램 촬영 오면 잠깐 출연해서 Kene 녀석들이랑 어울리는 것 좀 찍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19시에 S백화점 본점에서 싸인회 있습니다. 22시에 라디오 방송하고, 24시에 방송국에서 새해 축하 기념으로 특별 방송 촬영 온다니깐. 그건만 끝내시면 됩니다.”

수혁은 눈을 감았다. 아무리 봐도 너무 많지 않는가. 그는 눈을 뜨고 상민을 다정하게 바라봤다.

“상민씨.”

“네엡! 도련님.”

그의 부드러운 부름에 상민은 벌벌 떨었다. 도련님에게 다정함은 사람들 사이서 흔히 통용되는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제가 말했지요. 상민씨처럼 모자란 사람은 하루에 한 개밖에 못 외운다고. 자, 다시 한 번 말해보세요. 오늘 제 스케줄은 어떻게 됩니까.”

“………보스와의 간담회 밖에 없으십니다.”

“네, 잘 알았습니다. 그럼 오늘은 그렇게 가도록 하죠. 이만 앉으세요. 국이 식겠습니다.”

순순히 물러날 매니저 상민이 아니지만, 아까 그가 글을 쓸 때부터 안절부절 못하며 방안에 있던 수혁의 기색을 살폈던 걸로 봐 오늘이 ‘그날’이니 미리 스케줄을 빼놓았으리라. 수혁은 애썼을 상민을 위해 그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상민, 상철, 철구는 조용히 수저를 들었다. 원래 삼촌 태형의 밑에서 일하던 조폭들이었지만 연예인인 수혁을 돕기위해 지금은 그를 위해 일하고 있는 자들었다.

수혁을 부려먹으려는 제 주인과 일하기 싫어 방콕만 하는, 제 주인 보다 위대한 이연희 누님의 아들 사이에서 그들이 참 고생이 많았다. 그는 자신의 철없는 투정에 반항 한번 안 하고 받아준 착한 식구들을 위해 그들이 좋아하는 사악한 악당의 얼굴을 연기해줬다. 수저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며 조폭들이 붉어진 눈시울을 주먹으로 문질렀다.

“크흑. 도련님! 이 철구. 감동 또 감동입니다. 이토록 멋진 오야붕의 얼굴을 보이시다니.”

“맞습니다. 그까짓 연예인 그만 때려치우고 어서, 야마구치파를 이어주십시오.”

“아아~, 도련님. 도련님의 섹시한 발길질 보다 보스의 빠다가 무서움에도 왜 전 도련님의 스케줄을 뺄 수밖에 없을까요. 수혁~ 수혁 수혁 수혁~ 수혁 수혁 수혁 수혁~.”

박수를 치며 그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 상민을 보며 수혁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침부터 밥 맛 떨어지게 못 볼 것을 봤다. 창밖으로 눈이 내렸다. 밤사이에 수북이 쌓인 눈은 그가 오늘 스케줄을 빼기 참 잘했노라 생각하게 만들어줬다. 그는 눈이 싫었다. 그 질척임도, 신발을 젖히는 차가움도, 금방 사라져버리는 허무함도, 깃털보다 가벼운 주제에 온 세상을 짓누를 수 있는 함을 가진 것도. 모두 다.

수혁은 눈이 오면 밖에 나가지 않았다. 하얀 눈이 갑자기 빨갛게 보인다거나, 노랗게 보인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그는 눈이 꺼림칙했다. 그래서 그가 성인이 된 이후 유일하게 눈을 맞으며 제 옷과 신발을 더럽혔던 적은 사랑하는 로이와 결혼하기에 부끄럽지 않도록 한국 군대에 입대했던 시기뿐이었다. 수혁은 피식 웃으며 ‘이만 먹도록 하죠.’로 식사에 전념할 것을 제안했다. 조폭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밥을 우적우적 먹어댔다.

수혁은 젓가락으로 우엉조림을 집어먹었다. 그때, 철구가 우리 도련님은 어쩜 젓가락질이 황새의 가랑이를 찢어발기는 것 마냥 섹시하냐며, 저 젓가락처럼 어서 빨리 로이 아가씨의 가랑이를 찢어 후사를 보라고 은근슬쩍 야한 농을 건네 왔다. 그는 멈칫, 젓가락질을 멈추고 사내를 빤히 쳐다봤다. 그의 눈빛에 부끄럽다는 듯 몸을 배배 꼬는 조폭의 모습이 매를 열렬히 구애하는 개새끼처럼 퍽 요사스러웠다. 수혁은 그 구애에 응해주기로 했다. 타이밍 좋게도 그는 지금 매우 욕구불만이었고, 어떻게 해서든 이 뜨거운 욕정을 풀어내 대상이 필요했다.

“こういちろう, 前に 出ろ。(고이치로, 앞에 와.)”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보니, 알아서 무릎 꿇은 채 엉금엉금 기어서 수혁의 곁으로 왔다. 철구는 도련님의 명이면 죽는 시늉을 할 만큼 충직한 개였다. 수혁은 발을 들어 그의 머리통을 내리찍었다.

“ロイを ぶじょくするな。(로이를 모욕하지 마라)”

“……으윽. はい, まっぴら おゆるしください。(예. 제발 용서해주세요.) わたくしが ちがいです。(제가 잘못했습니다.) もうしわけございません。 (대단히 죄송합니다.) でも, ロイさまと はやく セックス してください。 (하지만, 로이님과 빨리 섹스해주세요.)”

고이치로가 바닥에 이마를 쾅쾅 찢으며 사죄를 고했다. 고이치로는 마치 사랑하는 주군의 아내가 변변치 못해 그녀의 시해를 꾸미다 걸린 것 마냥 비록 주군을 배신하기는 했지만 충성을 다했노라 비장하게 그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내는 한편, 반드시 해내고야 말겠다는 식의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수혁은 고이치로의 눈빛 때문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의 빌어먹을 삼촌 때문에 수혁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김태형이 외국에 나가 로이의 스타일리스트와 결혼식을 올리고 와서는, 자기는 이제 한 남자만을 사랑하는 순결남이 되겠노라 조직원들에게 공표하는 사건을 벌여 조폭들을 두려움에 빠지게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지금 김씨 집안에서 대를 이을 자는 김연희의 아들 수혁, 그밖에 남지 않았다.

다행히 조폭들에게는 아직 변변치 않은 반쪽짜리 도련님이 있지 않는가. 비록 그 도련님이 한국 아이돌에게 빠져 자기가 한국인이라고 주장하며 지낸다고 하지만, 그는 본래 일본 야쿠자 야마구치의 외동아들이라 언젠가 야쿠자들에게 질질 끌려가 일본 규수 가문의 여식과 혼례를 올리고 야마구치 가문을 이어야 하는 자이기는 하지만, 일단 여자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 점이 중요했다.

그러니 그 도련님이 야마구치로 돌아가기 전에 김씨 가문의 후사를 보게 할 수 밖에. 그들의 입장에서는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야마구치 놈들에게 빼앗기기 전에 김씨 가문의 아들 하나라도 건지자는 심상인 거다. 과연 수혁이 로이와의 자식을 순순히 내어줄까 싶지만, 김씨 가문에서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일단 후계자는 낳고 보자는 식이었다.

“…네 마음은 잘 안다. 어서 빨리 가문을 이어주길 바라는 거겠지. 그렇지만 로이는 미래에 야마구치파의 안주인될 여자다. 네 목이 떨어져나가지 않은 걸 감사히 여기도록.”

“ぼっちゃん…。(도련님.)”

서운하다는 듯 그를 보는 철구의 눈빛이 눈물로 글썽였다. 아버지가 보내온 끄나풀 주제에 어느새 완전히 흑룡파 식구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수혁은 그의 아버지가 어떤 자인지 너무도 잘 알았다. 지금은 그를 내버려두고 있지만, 그는 야쿠자가 되기 싫다는 자신에게 후계자의 문신을 새기기 위해 당시 10살이었던 로이를 납치해 3일간 물만 주었던 악독한 자였다. 그는 그런 아버지를 절대 존경할 수 없으며, 벌레보다 상종하기 싫었다. 그와 아버지는 물과 기름처럼 절대 섞일 수 없는 사이였다. 그렇지만 수혁은 로이를 살리기 위해 그에게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었다. 반드시 당신의 뒤를 잇겠으니 그녀를 놓아주라고.

아버지는 그 시기까지는 정하지 않았으나, 수혁의 윤기 나는 흑발 아래에는 그가 반드시 일본으로 돌아가 야마구치 가문의 오야붕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새겨 넣었다. 비록 그건 머리카락에 감추어져 그 누구에게도 드러나지 않았지만 수혁은 단 한시도 그 검은 용의 존재를 잊지 않았다. 어찌 잊겠는가. 로이의 그 곱던 입술이 메말라 갈라지고, 푸른 눈에 눈물이 번져 잿빛이 되었는데. 그것이 연기돌 로이가 야쿠자는 싫다며, 조폭은 싫다고, 그들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사회악이라며 조폭영화가 판을 치던 시기에 인터뷰에서 대작 영화에 대한 캐스팅 거절 이유로 당당히 외쳤던 원인이었다.

다행히 어렸던 로이는 그때의 사건을 단순히 무서운 야쿠자 영화를 보았던 것이라 착각하게 되었지만, 수혁은 알고 있었다. 그건 영화가 아닌 실제였음을.

수혁은 단 한순간도 자신의 머리에 내려앉은 흑룡의 무게를 잊은 적 없었다. 그가 연예인으로서의 활동에 그의 명성과 달리 적극적으로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도 다 그 이유였다. 그는 그저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고 싶어, 그녀의 곁에 머물고자 연예인이 될 것일 뿐 결코 배우일 수 없었다. 그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었다. 누구 마음대로 그 일이 즐겁다고 자기 업으로 삼으려 한단 말인가. 그는 언젠가는 연예계에서 사라져야 할 사람이었다.

일본에서 건너온 어린 도련님을 보며 귀엽다, 사랑스럽다, 누님. 우리 도련님, 제가 돌봐도 되겠습니까. 온갖 미사여구로 그를 찬양하며 수혁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던 어느 조폭은 제 주제도 모르고, 자기 주인을 스스로 수혁으로 삼아버렸다. 그는 그저 일본에서 한국으로 왔다 갔다 하며 어머니댁에 머무는 것뿐인 그를 위해 야마구치 두목에게 자기 네 번째 손가락을 바쳤다.

‘오야붕, 부디 이걸로 참아주십시오. 도련님을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아직 어리신 분입니다.’

‘고작 야마구치라는 이름이 네까짓 놈의 손가락에 비할까. 그래, 어디 네놈의 목숨이라도 바치며 생각해보지. 저 버러지 같은 놈도 내 아들이라 누군가가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노라 네가 증명해 보이면, 나도 저 녀석을 완전한 오야붕으로 여겨 존경을 표해주마. 그는 네 오야붕인가?’

‘예. 야마구치.’

그를 지키기 위해 충직한 개가 되다 못해 바보 개가 되어버린, 그 조폭은 간간히 한국으로 놀러오던 도련님을 위해 기꺼이 타지의 땅에서 할복을 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수혁은 이를 악물고 베란다에서 내리는 눈송이들을 노려봤다. 그 조폭 따위, 신경도 안 쓰던 수혁인데 괜히 나서서 도련님을 위해 할복을 하겠노라 하여 괜히 눈이 싫어지게 만들었다. 그 남자만 나서지 않았으면 지금쯤 수혁은 로이를 데리고 도망쳐 그린란드에서 그녀와 함께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었을 거다. 눈을 얼마나 좋아하던 수혁인데, 감히 조폭 따위가 싫어하게 만들어!

“도련님, 커튼 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상민이 얼른 커튼을 쳐버렸다.

그 자가 죽었다. 수혁의 정수리에는 흑룡이 새겨지게 되었고. 오야붕으로서 언젠가 일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되어 버렸다. 못난 놈의 목숨 따위, 하찮게 여기고 아버지와의 약속을 어겨도 되지만 매년 눈이 내린다. 도련님을 위해 할복한 바보 개를 잊지 말라고.

그 자가 죽었던 날에도 눈은 내렸고, 아버지는 그의 시체에 정중히 절을 하고 성대히 장례를 치러줬다. 그의 장례식에서 그 누구도 울지 않았다. 제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어서 부럽다는, 장하다는 분위기만 슬픔을 가득 채워야 할 빈소를 대신했다. 조폭들이란…. 야쿠자들이란…. 정말 싫다.

하지만 그의 도련님은 멍청한 그가 바친 목숨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자였다. 그저 사랑하는 여자의 뒤나 쫓기 바쁜, 그런 쓰레기였다. 그러기에 수혁은 눈이 오면 집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 작품 후기 ============================

제가 무지 오랜만에 돌아왔죠? 하하 죄송합니다.

내마음대로거든님>< 사과 뽀뽀 쪽!

제가 시간 날 때마다 공모전 준비를 하고, 무지 많이 도전하고 있는지라...끄응..

소득이...없지만...뭐..도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니 계속 도전!

조아라 공모전은 다음에 낼 공모전까지 텀이 생겨서 하게 되었는데 역시나 인기가 없어 이미 써놓은 분량에서 완결지고 땡, 하고 연차 써서 많이 생긴 쉬는 날에 아이돌을 완결짓자고 돌아왔습니다. ^^

지금 이따 또 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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