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이돌이다-79화 (79/104)

00079  나도 여자랍니다  =========================================================================

로이는 소녀팬에게 이 상황을 뭐라 설명할까 빠르게 머리를 굴려봤다. 공식적으로 여자친구라고 발표한 리나는 집 앞에 쪼그려 앉아 속옷 차림 위에 바로 코트만 입은 채 담배를 피우고, 방금 전 톱스타 김수혁이 자신의 집에서 빠져나갔으며, 집 주위에는 조폭들이 득실거리는데 자신은 옆트임이 있는 검은 원피스 차림이었다. 아주 총체적 난국이었다.

“하이~, 마이 네임 이즈 로지.”

여동생 로지인척 영어를 해봤다.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꽤나 귀여운 척을 해봤는데 소녀팬이 ‘오빠, 전 오빠의 취미를 다 이해할 수 있어요. 전 진정한 팬이니깐요.’라며 사람을 무안하게 했다. 그래서 그냥 그러냐고, 그런데 이건 나의 취미가 아니라 송리나의 취미라고 답해줬다. 소녀팬은 자신의 말에 리나를 한번 쓱 보더니 ‘언니 존경하겠습니다. 언니 짱!’하고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쨌든 리나는 자신 덕에 존경받게 되었다. 도대체 이게 존경받을만한 짓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로이는 리나에게 얼른 집에 가라고 했다. 그런데 리나가 시름시름 앓는 소리를 내며 배고파서 한발자국도 못 움직이겠단다.

“그래서 어쩌라고. 나도 배고파 뒤지겠어.”

“밥 좀 줘라.”

“우리 집에 밥 없어. 오이 먹을래?”

“젠장, 젠장. 젠장! 그 놈의 오이! 내가 왜 발레를 그만두고 싶은지 알아? 빌어먹을 선생이 꿈 많고 먹고 싶은 것도 많은 5살짜리한테 ‘이제부터 집에 가서 오이랑 당근만 먹어.’ 라고 했었다고. 그걸 평생 해야 한다고 했다고. 그래서 내가 그때 그만 둬야지 싶었는데 엄마한테 졸라 쥐어터지고 발레 교실에 다시 끌려갔지. 무슨 놈의 학원비를 반 년 치씩이나 받아. 거기다 환불도 안 해준데…. 아아~씨발. 졸라 배고파. ………로이야, 우리 피자 한판만 시켜먹자.”

“너 가.”

이런 악마를 상종했다가는 자신도 피자를 먹어버릴 것 같아 얼른 문을 닫았다. 그러자 리나가 문 안 열어주면 여기서 스트립쇼를 하겠다고, 자동차 안에서 대기하고 있는 보안 업체 직원들과 조폭들 앞에서 큰소리로 떠들어댔다. 로이는 얼른 문을 열어 원수 같은 친구를 집으로 들여 보내줬다.

“그런데 피자는 칼로리가 너무 높아. 우리 다른 걸 생각해보자. 지금 네가 나트륨이 많은 고칼로리 음식을 원한다는 건, 마그네슘이 부족하다는 의미야. 토마토 먹을래?”

“……내 몸이 마그네슘이건 마그네틱이건 뭘 원하든, 난 그저 피자나 치킨이 먹고 싶을 뿐이고 그건 토마토로는 대체될 수 없는 거라고! 아, 젠장. 다음 생에는 남자로 태어나서 미친 듯이 처먹어야지. 도대체 왜 여자는 평생 다이어트를 해야 해? 왜 발레 따위를 해야 하냐고! 매일 라면이랑 과자랑, 피자랑 치킨 먹고 돼지 되면 군대 가서 쫙 빼고 나와야지. 아 참, 로이 너는 군대 가서 괜찮겠다. 가기 전에 많이 먹어둬. 군대 가면 살 다 빠진데.”

리나의 무개념 소리에 로이는 그럼 너나 많이 처먹고 군대 가라고 했다. 가뜩이나 영장 나오면 어쩌나 걱정인데 말이다. 물론 소속사 사장이자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주안은 자신의 군대 빼는 방법을 알아봤었다. 그런데 예전이면 빠질 수 있었을 텐데 하도 정신병이건 뭐건 온갖 방법으로 스타들이 군대 면제를 받고, 문제 일으킨 게 많아, 국방부 쪽 사람들이, 그것도 특히 자신과 같이 세간의 관심을 너무 많이 받는 거물급 스타 같은 경우는 부담스러워서 꺼려한다고 했다. (김주안이 말하길, 그 새끼들이 말은 그렇게 해도 결국 빼주는 놈들은 빼준다고. 넌 자기들 홍보용으로 싼 값에 써먹고 싶어 혈안이 되어 안 빼주려는 거라고 했다.)

아아~, 인기도 적당히 있어야지 술에 물 타듯 돈만 주면 넘어갈 수 있는데 자신은 너무 인기가 많아 문제였다. 거기다 그런 식으로 빠지면 비난의 도마에서 악플러들이 자신을 신나게 썰며 난타 공연을 할 텐데, 자신을 홍보용으로 써먹겠다고 벼르고 있는 군방부도 있어 나중에 입국금지 당하게 생겼다. 그러니 자신의 인기는 영장 나오기 직전까지였다. 나오면 어쩌겠는가. 미국으로 도망가서 할리우드 스타 로이 테일러를 하는 수밖에.

자신의 심각한 표정에 리나가 농담이었다고 했다.

“나도 알아. 군대란 톱스타를 일반인으로 만들어내는 장소라는 걸. 거기 가서 조현성 완전 일반인 됐잖아. 도대체 왜 그렇게 늙고 못 생겨져서 나왔데? 훈련도 안 받고 군대 행사 뛰었다고 하더니만, 완전 겉늙어서 아주 못 봐주겠더라.”

“닥치고, 피자 사줄 테니깐 그거 먹고 가.”

“꺄아아~, 로이야. 사랑해.”

리나가 자신에게 안겨서 뽀뽀를 해댔다. 로이는 저리 꺼지라고 하고, 그녀에게 카드를 건네준 후 옷 갈아입으러 드레스 룸에 갔다. 그러다 허벅지에 약간 흘러내린 핏자국을 보고 ‘이거 참’ 싶었다. 할 수 없이 욕실에 들어가 샤워을 하고 나왔는데 도대체 여자 둘이서 얼마나 먹는다고 피자가 4판이나 도착해 있었다. 자기 돈 아니라고 이딴 식으로 시켰지 싶어 송리나의 목을 팔뚝으로 죄며 달달 털고 있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리고 뇌출혈들이 무대 의상 그대로 입은 채 문을 열고 들어왔다.

“로이야, 안녕~.”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도대체 쟤네는 왜 부른 거냐, 리나에게 눈짓을 보내자 그녀가 자신의 폰을 흔들며 ‘그야 실물로 보고 싶었단 말이야.’ 라더니, 풋 웃었다. 뭔가 더 남은 가 싶어 리나에게 어서 이실직고 하라고 하자 아직 초대 손님이 남았다고 했다. 그 다음으로 차승주 형이 왔다.

“로이가 홈 파티를 다 하다니. 이거 어쩐 일이야? 집에 꿀단지 모셔놔서 아무도 안들이잖아.”

언제 봐도 멋진 모델 출신이었다. 걸어오는 품새가 완전 런웨이 위였다. 근데 형의 옆에 진드기처럼 붙여있어야 하는 수정 누나가 없어서 어디 갔냐고 물으니깐, 승주 형이 수정이는 지금 가구랑 그릇 세트 구경 하느라 정신없다고 했다. 어쩐지 무척 피곤해보여서 피자나 한쪽 먹고 가라고 했다. 역시 결혼 준비는 들리는 소문과도 같이 힘든 모양이었다. 그 후, 아이돌 스네이크가 음료수를 싸들고 왔고, 그 다음으로 연예계 최고의 게이 홍준호가 왔다가 리나의 ‘실물은 별로네. 탈락.’하며 내쫓겼지만 휴식기라 살 찐 거라며 봐달라는 그의 애원에 간신히 연예인 무리에 합류할 수 있었다.

사람이 많아서 집이 아주 시끌벅적해지고 정신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연락할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던 게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라, ‘나…, 혼자는 아니었구나.’ 싶어져 리나의 장난이 조금 고맙기까지 한 즐거운 소음이었다.

리나가 피자 한쪽을 들어올리고 ‘다들 우리 로이를 보기 위해 치킨 배달부 보다 빨리 와줘서 고맙고, 이 송리나님께서 거룩한 피자를 쏘겠습니다. 다들 맛나게 즐겨주셔요.’라 했다. 그 말에 로이는 어의가 없어져 ‘지금 내 카드 긁었잖아.’라고 그녀의 말에 태클을 걸었고, 리나는 아직 카드 안 긁었다며 곧 올 치킨을 그걸로 긁겠다고 했다. 로이는 여기에 치킨까지 먹겠다는 건가 싶어 이 많은 음식을 누가 다 먹나 걱정스럽게 피자 상자를 쳐다봤다가, 거지새끼 마냥 굶주린 아이돌 7명이 2쪽을 하나로 겹쳐 먹는 걸 보고 역시 남자 아이돌은 다른 건가 싶었다.

뇌출혈과 뱀 다섯 마리가 피자를 폭풍 섭취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피자 2판이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래도 배우라고 우아함을 지키는 홍준호와 차승주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맛 한번 못 볼 뻔 했다.

로이는 얼른 그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피자를 들어올렸다.

오메, 맛난 거.

하마터면 이런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낼 뻔 했다. 자신이 그런 피자가 자꾸 사라지는 게 아까워 야금야금 먹고 있자 승주 형이 그런 자신을 보고 ‘로이가 참 여성스러워.’라고 했다. 옆에 있는 리나가 야성미 넘치게 우적우적 피자를 먹다가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자 같이 씹어 먹는 걸 보고 그런 소리를 하는 모양이었다. 홍준호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점점 예뻐지는 것 같아. 로이야, 너 호르몬 주사 맞냐? 그거 맞을 때 반짝하고 급 늙는다. 잘못하면 턱이 자라는 수 있어.’라는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걸신들린 뱀새끼들은 그의 말을 듣고 자신을 보더니 ‘선배님은 태어날 때부터 우월합니다.’라고 로이 찬양질을 했다.

뇌출혈은 골든타임이 한참 지나 수술이 불가능한 환자들이니 신경 쓰고 싶지 않지만, 호영의 ‘로이가 여자보다 예쁜 건 지당한 말씀이지. 그래서 내가 게이 됐잖아. 킥, 사실 게이가 아니었지만.’이라고 말해, 홍준호가 눈빛을 빛내니 조심하라는 뜻에서 닥치라고 해줬다. 도대체 쟤는 어떻게 자신이 여자인 줄 알았는지 모르겠다. 분명 최민 사건으로 온 국민이 로이 테일러가 상남자라고 알게 되었는데 말이다.

“그래서 로이가 예쁘다고 지금 나 같은 미소녀를 앞두고 다들 그러는 거지요? 다들 게이야?”

사람이 너무 많아 바닥에 피자 박스를 펼쳐두고 먹었기에 양반다리를 했던 리나가 갑자기 코트 너머로 각선미가 쫙 뻗은 다리를 내놓고 ‘게이 더 월드~ 게이 더 월드~’ 하며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만한 공간이 있었고, 그녀는 그게 가능하다고 굳이 실천해 자신에게 창피함을 안겨주었다. 승주 형이 슬쩍 다가와 네 여자친구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며 귀뜸을 했다. 로이는 맞는 말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리나에게 이 자리에서 게이는 뱀새끼들이랑 홍준호밖에 없다고 방금 전의 말을 정정해줬다.

“뭐? 스네이크가 단체로 게이였어? 거기다 청초청초청초 우리 준호까지 게이라고?”

스네이크 리더와 홍준호 사이에서 콜라를 마시던 영준이 쿨럭하며 기침을 하더니 슬그머니 일어나 호영의 뒤로 가서 앉았다. 스네이크들이 단체로 자기네 게이 아니라고 우겼다. 그래서 너희 숙소에서 있던 그 공주님은 뭐냐고 물으니깐, 자기들이 사랑하는 건 그 단 한 사람뿐인데 그게 하필 남자인 거지, 자기네들은 전부터 여자가 좋았다고 답했다. 그래서 자신이 그걸 세상 사람들은 게이라고 부른다고 알려줬다. 그 와중에 승주 형이 홍준호가 진짜 게이냐며 자신의 옆구리를 찌르며 물어봤다. 그 유명한 루머를 모르고 있다니, 이 형이 참으로 순진하기도 했다. 그러니 김수정 같은 마녀에게 홀라당 넘어가 결혼을 하는 거겠지만 말이다.

“로이야, 나 게이인거 특급 비밀인데 이렇게 막 말하면 어떻게.”

홍준호가 안색이 파리해져서 자신을 나무라기에 이 사실은 여기 있는 바보 차승주 말고 연예계 인간들은 다 안다고 본인에게 알려줬다. 그렇게 남자들에게 껄떡거리는데 누가 알아차리지 못하겠는가. 혀를 쯧쯧 차며 홍준호에게 그건 굳이 게이더를 세우지 않아도 안다고, 그만 좀 연예인들이랑 사귀라고 하니 그가 입 닥쳤다. 앞으로도 남자 연예인들을 만날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주변에 제대로 된 남자들이 없었다. 이 무슨 박복한 일인지 모르겠다. 잘생기면 임자 있거나 게이라는 속설이 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로이 넌 아니야?”

홍준호의 물음에 모두가 자신을 쳐다봐왔다. 도대체 뭘 아니냐고 묻는지 원. 방금 전의 주제가 계속되는 거라면 지금 자신더러 게이가 아니냐고 묻는 건데, 분명 여기, 기자들이 자신의 여자친구라고 불리는 송리나가 있는데도 다들 그걸 궁금해 하는 거였다.

“아쉽게도.”

“음…. 이상하네. 다들 김수혁이랑 너, 사귄다고 하던데.”

“앗, 그건 저도 들었습니다. 선배님 그거 진짜입니까?”

홍준호가 어서 말해보라는 식으로 자신을 떠봤고, 스네이크 리더는 자신이 아는 내용이라며 반색을 표했다. 그러자 호영이 그 두 사람한테 아니라고 박박 우기며 난리를 쳤다. 로이랑 사귀는 거는 김수혁이 아닌 자기란다. 리나가 콜라 한 병을 통째로 들이키고 진하게 커헉~ 트림을 했다.

“어째서 그런 오해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김수혁씨와는 좋은 형 동생 관계일 뿐입니다.”

뭔가 캐묻는 듯한 분위기여서 본능적으로 환하게 웃는 가면을 뒤집어쓰고 기자들에게 대답하듯 하니깐, 리나가 ‘도대체 치킨은 언제 오는 거야! 나 피자로 배 다 채웠잖아!’라고 화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토하고 올 테니깐 치킨 배달 오면 자기 닭 날개와 다리는 찜해놓고 있으라고 했다. 자신이 알겠노라 답하고, 치킨 배달이 와 결제 후 리나의 다리와 날개를 잘라서 아무도 못 건드리게 지키고 있자, 다들 ‘그러게 그건 다 루머였군.’하며 다들 로이가 여친한테 잡혀 산다고 그랬다.

“그래도 수정이가 낫지.”

승주 형이 고개를 끄덕끄덕, 토를 하고 나와 바로 입 주위에 양념을 묻히며 치킨을 먹는 리나와 그런 그녀의 입가를 닦아주는 자신을 보고 ‘수정이 같은 여자 만나기 힘들어.’라고 했다. 자기 최면 중인 모양이었다. 하긴 나이가 더럽게 많고 있는 거라고는 하이힐뿐인 난쟁이 똥자루 노처녀랑 잘나가는 배우가 결혼하려고 하니, 얼마나 망설여지겠는가. 그야말로 지금 살짝 미쳐서 가능한 거지, 시간이 지나 제정신으로 돌아오면 김수정이랑 결혼 안 할게 뻔했다.

그래서 자신이 노처녀 스타일리스트 하나 시집보내려고 일부로 리나를 극진히 보살피며, 옆에서 차승주가 김수정이랑 결혼할 수 있도록 엄청 송리나가 사랑스러워 보이는 것처럼 눈빛과 행동을 연기해냈다. 다들 자신이 특이한 취향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호영이 그 모습을 보다 못해 벌떡 일어나 ‘로이 테일러는 나랑 결혼할 거야’라며 어린아이처럼 외치고 도망쳐버렸다. 영준이 꾸벅 인사를 하고 뒤따라갔다. 누가 도련님 아니랄까봐 하는 짓이 완전 지진아였다.

치킨 2마리를 다 뜯어먹은 스네이크는 이제 배부르다고 집에 가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가라고 했다. 차승주는 전화가 와서 ‘쭈우우우운~’하는 미저리 수정의 목소리가 들려 어서 가라고 했다. 홍준호만이 혼자 안 가려고 뻐팅겨서 계속 여기 있으면 송리나 같은 여자 소개시켜준다니깐 도망갔다. 리나가 그의 꽁지가 빠지게 도망가는 모습에 깔깔거리며 재미있어 했다. 로이는 순식간에 왔다가 또 다시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그들의 텅 빈 자리가 느껴질 틈도 없을 만큼 아직도 정신이 사나워 혼자가 아닌 것 같았다. 도저히 외로움을 느낄 새가 없었다.

이렇게 오랜만에 무언가를 마음껏 먹고, 웃고 떠들고, 놀아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배가 부르니 움직이고 싶지 않아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리나도 자신의 옆에 누워 천장을 보다가 ‘재미있었어.’라고, 그리고 ‘이제 외롭지 않지?’라고 중얼거렸다. 역시 자신을 위해 이랬던 거였다.

로이는 단 하나뿐인 친구의 손을 꼭 잡고 힘들면 놓아주겠다고 했다. 다시 일반인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진짜 남자친구와 손을 잡고 당당하게 거리를 걸어 다닐 수 있도록, 그녀에게 자유를 돌려주기 위해 그리 하겠노라 했다. 하지만 거절당했다. 이유는 자기도 유명한 게 좋단다.

“유명하면 얼마나 좋은데. 초등학교라도 지나갈 때면 막 애새끼들이 싸인 해달라고 난리야. 식당가면 서비스도 많이 주고, 너도 알다시피 나도 너밖에 친구 없잖아. 그래서 발레 아카데미 얘들이랑 하나도 말 안 섞고 지냈거든. 근데 다들 널 물어보느라고 나한테 잘 보이려고 들어. 로이는 실제로 어때? 역시 잘생겼지? 예쁘지? 하긴, 그건 너무 당연한 거니깐. 음식은 뭘 좋아해? 그런 건 인터뷰에 없더라 등등. 이 좋은 걸 왜 포기해.”

이 말이 자신을 위한 친구의 배려라는 걸 알지만, 하도 리나가 천방지축에 똘아이라 참말인가 싶기도 했다. 그래도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우울해하는 자신을 위해 찾아와준 것도, 같이 쇼핑을 하고 여자 옷을 입게 해준 것도, 김수혁을 불러 화해하게 해준 것도, 동료 연예인들을 불러 혼자가 아니라고 느끼게 해준 것도. 그게 아무리 자기 재미를 위해 인형놀이하듯 백화점에서 자신을 창피준 거라 할지라도, 김수혁을 좋아해 얼굴 한번 보고 싶어 그런 거라 할지라도, 연예인이 신기해서 부른 거라 할지라도, 그녀의 의도가 그런 거라 할지라도 고마운 거는 고마운 거였다.

리나가 뭘 그런 걸 가지고 고마워하냐며 벌떡 일어나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자신의 노래를 불렀다. 그녀는 스트립 걸 마냥 과장되고 화려하지만 왠지 모르게 쓸쓸한 뒷모습으로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너는 그게 사랑이라 했지만, 그건 아니야. 그 사람 말고 나와의 사랑을 꿈꿔. 난 너만을 위해 살고, 너만을 위해 생각해. 내 입술에서 나오는 건 모두 너에 대한 투정뿐이야. 하지만 그건 내 본심이 아니지. 네가 다른 남자를 만나서 그런 거야. 이 바보야. 난 너로 인해 진정한 여자가 되었어. 헤이~ 유, 그러니 나 좀 봐줄래? 네 옆에 있는 그 멋진 남자는, 사실 내가 되었어야 했지. 너와 키스하는 것도, 너와 손을 잡는 것도. 하지만 네가 행복하다고 하니, 난 이만 바이 바이~.”

로이는 ‘설마….’하면서 리나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김수혁이 오자 자신의 집 앞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는 거라든지, ‘너의 남자이고 싶었던 나’라는 곡을 부른 것도 못내 마음이 쓰였다. 혹시나 해서 ‘나 사랑하는 건 아니지?’라고 물었다. 그러자 자신의 발레 소녀가 정색하며 ‘미안, 난 가슴 큰 여자는 싫어.’하며 달려 나갔다. 지금 이걸 개그라고 친 건가 싶어 로이는 쾅하고 닫힌 문을 쳐다봤다. 아무튼 결론은 송리나는 돌아이일 뿐이라는 거였다.

로이는 거실에 널리 피자 상자와 치킨의 뼈들을 치우기 위해 새로 온 매니저에게 카톡을 날렸다. 어서 와서 집 치워, 라고 하니깐 바로 와서 뒤처리를 했는데 그가 배고프다며 쪼그려 앉아 남은 치킨을 뜯어먹었고 그게 참으로 처량 맞아 보였다. 그래서 다음에는 같이 먹자고 했다. 그러자 매니저가 감동해서 고맙다며 엉엉 울었다. 어지간히도 구박받고 산 모양이었다.

로이는 도대체 누가 구박해서 이 형을 이렇게 불쌍하게 만들었나 싶었다가 그 장본인이 김수혁의 연애설로 주변 사람을 들들 볶았던 자신이었던 걸 깨달았다. 알게 모르게 자신이 그 노땅 후배를 참 많이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뭐, 이제 다시 사귀게 되었으니깐, 새로운 매니저랑 스타일리스트한테 잘 해준 거다.

로이는 이런 식으로나마 김수혁을 떠올리자 그가 또 보고 싶어졌다. 그런데 전화할 건덕지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사귀게 된 기념으로 전화를 걸기로 했다. 간단히 카톡을 할 수도 있으나 그냥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여보세요.”

낮고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는 성우를 해도 좋을 만큼 멋있어 괜스레 볼이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로이는 부끄러움에 뚝 끊어버렸다. 그리고 왜 내가 전화를 끊었는데 다시 전화를 안 하는 걸까 싶어 핸드폰을 쥐고 뚫어지게 쳐다봤다. 혹시 누가 전화했는지 모르나 싶었지만 자신의 번호가 저장되어 있을 텐데 그럴리 없지 않는가. 그래서 자신이 다시 한 번 해보기로 했다. 그에게 왜 내가 전화 끊었는데 전화 안하냐고, 내가 안 보고 싶냐고 막 뭐라고 하니깐, 목소리를 죽인 수혁이 ‘로이, 방송 중이에요.’라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신이 전화를 걸었는데 보고 싶었다던가, 다시 사귀게 되어 영광이라던가, 그런 말쯤 해줄 거 있는 거 아닌가. 방송이야 잠깐 쉬자고 하고 자신의 전화를 받을 수도 있는 걸 텐데, 물론 그건 프로답지 못하고 말도 안 되는 투정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이렇게 때를 쓰고 싶었다. 자신이 찡얼거리며 ‘몰라! 나 삐졌어. 형이 왜 잘못했는지 생각해봐.’라고 외치니깐 수화기 너머에서 김수혁이 당황해서 ‘방송 중이라고요!’라고 한 번 더 외쳤다.

“그래서 어쩌라고. 앞으로….”

로이는 말하고 있는 중간에 낌새가 이상함을 느꼈다. 방송 중……. 그런데 이 방송이 생방송인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의 내공도 만만치 않아서 별로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지금 김수혁이야 똥줄 타겠지만 말이다. 이미 머릿속으로는 방금 전 연예인들 모임 있었던 거를 방패삼아 말할 대사가 다 짜였다.

“피킨 모임에 안 끼어줄 거야. 스네이크랑 홍준호랑 차승주랑 Natural이랑 오늘 다 모인 거 알지? 근데 형만 빠져?”

“………네. 로이, 죄송해요. 매니저가 실수로 그만 생방송 스케줄을 잡아서 그만.”

눈치 빠른 수혁이 지금 자신이 생방송이라는 것을 알림과 동시에 자신의 상황극에 동조해줬다. 옆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로이씨? 진짜 로이 테일러 맞으세요? 생방송 연애 톡톡 mc 김현주입니다. 통화 가능하신가요?”

“…네? 아, 네.…… 으윽. 어떻게. 지금 방송 나가는 거 맞아요?”

울먹이는 목소리와는 다르게 자신의 얼굴이 무표정한 걸 보고 매니저가 ‘독해~’라며 중얼거렸다.

“예. 당혹스러우시겠지만, 김수혁씨 인터뷰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로이씨, 방금 말씀하신 분들이 정말 어마 어마한 분들이시네요. 피킨 모임? 무슨 모임인지 여쭤 봐도 될까요?”

“아…. 네. 그냥 친한 사람들끼리 피자랑 치킨을 먹으며 친목을 도모하는 모임입니다. 근데 형이 오기로 해놓고선 안 나와서. 하하하.”

로이는 웃으며 거실에 놓인 텔레비전을 켜 생방송 연애 톡톡 채널을 틀었다. 백짓장이 된 김수혁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무척 유쾌해졌다. 왜 이렇게 김수혁이 난처하고 곤란해 하는 게 좋은지 모르겠다.

“수혁씨. 아무리 우리 연애 톡톡에 나오기 위해서였더라도 국민 아이돌 로이를 바람맞히고 오시다니, 큰 잘못을 저지르셨는데요. 다음에 한턱 쏘셔야겠습니다.”

mc가 갑작스러운 질문에 응해줘서 고맙다고 자신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무래도 방송 분량 때문에 전화 통화는 여기서 끝인가 보다. 로이는 ‘형, 방송 끝나고 연락해.’라며 통화를 끊었다.

아, 재미있다.

로이는 김수혁을 자신이 골려줬다는 사실에 너무 신이나 소파 위를 뒹굴며 난리를 쳤다. 매니저가 조용히 피자 박스를 들고 나갔다. 마치 못 볼 걸 봤다는 식이어서 잠깐 불러서 혼낼까 했다가, 그냥 놔두기로 했다. 이제 김수혁이 인터뷰하는 거 보고 김수혁이랑 전화할 거라 자신이 무지 바쁘니 말이다. 아무래 자신은 S인가 보다. 왜 이렇게 당황한 김수혁이 안 그런 척 하는 게 귀여운지 모르겠다.

============================ 작품 후기 ============================

오랜만에 왔지만 용량 짱짱. ^^

너무 피곤한 관계로 이만 쓰러지겠습니다. 여러분도 굿 밤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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