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3 나도 여자랍니다 =========================================================================
어쩜 이렇게 매력적으로 보이는지 모르겠다. 로이는 꺼진 불도 다시 보라는 표어처럼 버린 남친도 다시 봐야한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너무나 완벽한 그에게 로이 테일러라는 유명인이 없다한들 김수혁이라는 이름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일 정도로 그는 잘나가는 배우이며, 특별한 존재였지만 어느 정도 내 사람이다 싶어서, 그리고 완전히 나에게 빠졌구나 싶어서 쉽게 생각했던 구석도 없지 않아 있었다.
처음은 오히려 그의 ‘잘남’이 비호감이었다. 제아무리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나타내는 한류 제왕이라도, 자신과 사귀지 않았을 때는 그저 수혁의 미모가 눈의 가시 에 불과했다. 그만 없어도 자신은 영원히 독제체제로 국민들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을 테니깐. 그런데 한번 ‘내꺼’라는 인식을 가지고 나자 그의 ‘잘남’은 불안감이 되었다. 하수연에게 잘해주는 수혁의 친절함이 못 견디게 아깝고, 그녀가 결혼할 거라는 걸 알지만 무지 질투 났다.
연예계가 결혼한다고 해서 스폰서 안 받거나 애인 안 만드는 곳도 아니고, 하수연 정도라면 대기업 도련님을 남편으로 만들어 든든한 스폰서 삼고 미친 미모를 가진 김수혁을 애인으로 두는 게 가능해 더욱 그런지 모르겠다. 지금 둘의 표정만 보면 완전 사랑에 빠진 연인 사이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수연의 여우 짓은 그럴 목적으로 만들어진 가식이 틀림없었다. 뭐가 그렇지 좋은지 하하호호, 아주 정분이 났다. 이거 빨리 기자들이 스캔들 터트려야 하는데 다들 어디 갔나 싶다.
로이는 잔뜩 뾰로통해져 분장을 받았다. 안 하던 인조 속눈썹, 아이 쉐도우, 아이 라인, 눈밑 애교살 하이라이터 등등을 하느라 눈이 매웠다. 여자는 어떻게 매일 이러고 사는지 모르겠다. 여배우들은 참 고생이 많을 듯싶었다. 스타일리스트가 뽕브라를 줘서 너나 입으라고 얼굴에 던졌다. 새로운 아이라 참 자신의 비위를 못 맞췄다. 백민호라면 애교라도 떨며 기쁨조로 활동해줄 텐데 영 눈치가 없었다.
“하영아~.”
“왜 돼지야.”
“네. 감독님.”
한 감독이 템페스트의 극중 배역인 하영의 이름을 불러 자신과 수연이 동시에 답했다. 그녀가 계속 정하영을 연기했으니 당연한 거겠지만, 결말과 에필로그 만큼은 자신이 정하영 역이었다. 검은색 긴 생머리 가발을 뒤집어쓰고 돼지 삼촌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니, 모두들 자신을 쳐다봤다.
“이야~, 우리 조카 캡 예쁜데. 누가 보면 진짜 여잔 줄 알겠어.”
“아잉, 로순이 부끄럽잖아.”
자신이 지방 두둑한 배때기를 주먹으로 치며 장난치자, 삼촌이 호통하게 웃었다. 수연이 예쁘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조명 감독이나, 조감독, 기타 등등도 로이 좀 보자고 몰려들어서 정신없었다. 덜렁 김수혁만 자기 자리에 앉아서 대본을 읽었다. 제일 먼저 자신의 여장을 보고 싶어 할 줄 알았는데, 헤어졌다고 쌩까는 게 아주 개싸가지다. 저 도도한 태도라니. 이러면 자신이 더 그를 좋아하는 것 같고, 신경 쓰는 것 같지 않는가.
“삼촌 나 예뻐?”
“어. 예뻐.”
“졸라 예쁘지?”
“어, 졸라 예뻐.”
“내가 예뻐? 진짜야?”
“…그만하자 조카야. 마이 먹었다 아이가.”
자신이 얼마나 예쁜지 알아달라고, 여기 관심 좀 가져달라고 삼촌한테 되물으며 수혁의 관심을 끌어봤지만 소용없었다. 자신이 먼저 헤어지자고 했지만, 그거야 스타일리스트를 하다 보면 욕먹는 것 마냥 사귀다가 보면 헤어지자는 말도 듣는 거 아니겠는가. 물론 울 엄마 아빠는 그게 너무 빈번하여 이혼했지만, 남자가 죽자 살자 매달릴 줄도 알아야지 헤어지자니깐 진짜 가버리는 건 무슨 똥매너인지.
그 일을 생각하자 또 울컥했다. 감정을 도무지 주체할 수 없어 가발을 집어던지고 삼촌을 때렸다. 여기서 자신의 화를 받아줄 사람은 그밖에 없지 않는가. 주안이 있어야 하는데, 민호가 있어야 하는데, 수정이 있어야 하는데 세상에서 제일 믿고 의지하던 자들이 모르는 사람한테 자신을 맡겨버렸다. 마치 아빠처럼. 김수혁은 자신을 그렇게 떠나버렸다.
“내가 왜 예뻐! 안 예뻐! 안 예쁘다고!”
“로이야, 정신 차려. 여기 촬영장이다.”
“안 해. 그럼 나 안할 거야. 그만 할 거야. 재미없어. 다 싫어. 삼촌 미워. 삼촌 때문에 내가…, 야망의 눈물만 안 찍었어도 금방 잊혀졌을 텐데. 흑. 엄마 보고 싶어. 나 이제 그만 할래. 다 싫어. 왜 내가 다 책임져야 해. 왜 나만 보고 그러래.”
사실은 우는 자신을 몇 시간이고 달래 아이돌로 성장할 수 있게 해준 삼촌이 고맙고, 자신을 절대적으로 믿어주는 소속사 식구들이 좋지만 즐겁던 연예계 활동이 갑자기 싫어졌다. 이게 다 김수혁 때문이었다. 왜 안쳐다본단 말인가. 모두가 날 사랑하고, 날 쳐다보고, 나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데, 왜 없는 사람 취급한단 말인가.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주인공이 아니게 되는 게 무서운데 그는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했으면 그 제일 무서운 짓을 벌이고 있었다.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다.
“나 촬영 안 해. 김주안 불러.”
“네 사장 다리 부러졌다며. 로이야, 왜 그래. 삼촌이 그만 물으라고 해서 화났어? 예뻐. 네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
한 감독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달래기 위해 비굴할 정도로 예쁘다고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수혁은 안 쳐다봤다. 너무 열 받아서 목 놓아 울었다. 자신의 팬인 하수연은 이런 자신의 모습을 처음 봐 어쩔 줄 모르고 눈알을 굴려댔다. 그녀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컨디션 나쁘면 다음에 촬영하라고 그랬다. 그래서 대꾸도 안 해주고 그냥 울었다.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가, 하수연이 딱 그 짝이었다.
Reve에서 파견된 로이 담당 크루가 주안에게 전화를 거는 모습이 보였다. 그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자신이 뚝 울음을 그치자 정우 삼촌이 괜찮아진지 알고 안심하려고 해서, 김사장 올 때 다시 울려고 체력 비축해두는 거라고 했다. 기가 막힌 듯 어이없어 하는 표정이 참 볼만 했다. 그래도 김주안은 각성해야 한다. 자신을 내팽겨 치고, 이게 뭐란 말인가.
마음을 가다듬고 1시간을 기다렸다. 목발을 짚고 주안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를 보자 안심이 되었다. 김주안 눈에는 오직 자신만 있지 않는가. 달려가서 안겼다. 자신이 우니깐, 주안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차마 김수혁이 나 무시해서 그랬다고 말하기에는 심하게 쪽 팔려 감독을 들먹였다.
“한 감독이 나 무시했어. 나 보고 닥치래. 씹창새래.”
“이봐요 감독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다시는 우리 로이, 감독님이랑 작품 안 할 겁니다. 애들아, 짐 챙겨. 위약금은 바로 쏴드리죠. 이제 템페스트 촬영 안할 겁니다.”
“………농담이야. 그냥 형 보고 싶어서 구라 쳤어. 짜짠~ 다들 속았지~.”
너무 거세게 반응하니 더 이상 어리광을 부릴 수가 없었다. 주안이 못된 망아지라며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자신의 거짓말 때문에 소속사 사장이 죄송하다며 감독에게 허리 숙여 사과했다. 삼촌은 무례한 주안의 태도와 자신의 언행을 문제 삼지 않고 좋게 좋게 넘어졌다. 핏줄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스텝들은 로이가 몰래카메라 벌였다며 우하하 웃었다. 어떻게든 이 사태를 작게 축소하고 싶어 하는 게 보여서 눈물겨웠다.
조용히 있던 수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작은 행동만으로 그는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존재감 하나는 대단했다. 그가 자신에게 와서 ‘로이씨, 예쁘네요.’라고 했다.
두근. 심장 뛰는 소리에 그가 뭐라고 말하는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멍하니 수혁을 보며 그의 입술만 쳐다봤다. 자신이 저 입술에 키스를 했었다. 넥타이를 잡아당기고, 입안에 혀를 집어넣고 진짜 키스를 했다. 그런데 그랬던 입술이 덤덤하게 ‘그런데 다시는 이런 장난으로 촬영 중단시키지 마십시오.’라며 혼냈다. 뚝, 하고 눈물이 저도 모르게 흘러내렸다. 주안이 왜 그러냐고 물었다.
“……아파.”
“어디? 어디 아파? 병원 갈까?”
주안이 걱정스럽게 자신의 돌아보며 업히라고 했다. 자기 몸도 제대로 몸 가누는 환자 주제 말이다. 로이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손으로 눈가를 더듬어보니 꽤나 축축했다.
“……렌즈 아파.”
아니, 마음이.
주안이 눈에서 검은색 렌즈를 빼줬다. 하지만 계속 눈물이 나왔다. 자신을 울린 건 그게 아니니 말이다. 수혁이 감독 보고 어서 촬영 들어가자고 했다. 삼촌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촬영 가능하겠냐고 물었다. 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불러 화장을 수정했다. 거울 속 여자가 무척 초라해보여서 과연 ‘카렌이었던 정하영’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잠시 카렌를 떠올려봤다. 전혀 집중이 안 됐다. 그런데 저기 있는 건 더 이상 김수혁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준호가 되어서 따스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봤다.
“하영아, 울지 마. 오빠 마음 아프다. 뚝!”
저 정도면 이중인격이 버금가는 자아 변신이었다. 하지만 수혁은 다시 검은 가발과 검은색 렌즈를 낀 자신을 못 견디게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다가 껴안았고, 볼에 입을 맞췄다. 김주안이 지금 촬영 들어간 것도 아닌데 뭐하는 짓이냐고 하니깐, 수혁이 ‘내 아내다.’라며 완벽히 준호로 빙의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저 정도로 연기에 집중하다니! 과연 톱!’이라는 표정들이었지만 자신은 안다. 저들은 김수혁이 남자 아이돌인 로이 테일러를 상대로 이러는 걸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저런다는 것을.
수혁이 우리 하영이, 하영이, 하면서 막 자신을 안은 채 사랑한다고 해댔다. 너무 대놓고 하니깐 다들 이상하기는 하지만 ‘정말인가?’라는 얼굴로 자기합리화를 끝냈고, 자신들의 썸씽을 의심하지 않았다. 주안이 김수혁에게 떨어지라며 막 자신을 잡아당겼다. 하수연만이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볼을 붉히며 ‘꺄아~ 너무 좋아. 로수 로안이라니. 역시 총수였어.’라는 게이들의 용어를 말해서 백민호를 소개시켜주고 싶었다. 연예계 최고 게이 홍준호가 말하길 ‘단언컨대, 백민호야 말로 완벽한 수입니다.’라고 했다.
“베베러블리님, 로안이라는 얼토당토 않는 말씀 마시죠. 이 세상에는 온리 로수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김수혁이 정색하며 하수연에게 따졌다. 뭔가 싶었다. 베베러블리는 뭐고, 헤어진 와중에 ‘로수’라니. 둘이 뭐하냐고 물자 그가 몰라도 된다고 했다. 입을 삐죽 내밀고 주안에게 김수혁 혼내달라고 하니깐, 야쿠자라 무섭지만 노력해보겠다고 했다.
“이봐, 김수혁씨! 지금 우리 로이한테 무슨 말 본새야!”
“だまれ。(입 닥쳐)”
수혁이 한 마디 하자 주안은 바로 ‘네, 조용히 하겠습니다.’라며 꼬리를 내렸다. 뭐하는 거냐며 옆구리를 찔러봤지만, 무섭다며 김수혁이랑 친하게 지내라고 했다.
“로이야, 네가 수혁씨 보다 나이도 훨씬 어린데 너무 고분고분하지 못할 것 같아.”
“형, 미쳤어? 내가 왜 김수혁한테 기어. 난 애 선배고, 앤 내 후배야.”
황당하다 못해 어이가 없었다. 설마 정말 야쿠자라는 소문을 믿는 모양이었다. 조폭 아저씨들이랑 같이 지내지만 그는 일반인…아니 연예인이었다. 결코 폭력과 범죄에 관련된 일을 할리 없지 않는가. 어쩌면 부모가 조폭일 수도 있다. 아님 스폰서가 조폭이던가.
만약 전자의 경우라면, 자신은 그의 출신성분을 이해해 줄 수 있다. 그건 자기가 선택하고 싶어서 그렇게 태어난 게 아니니 말이다. 다행히 할아버지가 교육자이니 적어도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자랐을 거라 믿는다. 물론 삼촌이라는 자가 쓰레기이기는 하지만, BD그룹 회장이니 그의 인간성이 아무리 바닥을 기어도 이해해 줄 수 있다. 원래 돈과 권력만 있으면 모든지 용서되고, 허용되는 세상이지 않는가. 하지만 후자라면 김수혁 따위 앞으로 상종도 안할 거다.
어디 네가 반항해 보고 싶으면 해보라는 눈초리로 수혁을 쳐다보자, 그가 자꾸 그렇게 쳐다보면 확 뽀뽀해버리겠다고 했다. 이 멀쩡한 얼굴과 기럭지 때문에 잠깐 잊었는데 김수혁은 상당한 변태였지 말이다. 그런데 지금 밀땅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뭔가 싶었다.
………밀땅…이라고?
로이는 혹시 자신과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 수혁이 수작질을 벌이나 싶었다. 주안에게 귓속말로 상담해보자, 그는 ‘김수혁은 메소드 연기의 천재야. 지금 준호일 뿐이니깐 오해하지 마.’라고 했다. 이상하다. 자신이 보기에는 완전 밀땅인데, 김주안은 아니라고 하니 아무리 게이라도 연애의 A부터 Z 단계까지 다 끝내본 경력자의 말을 믿어야 되는 건지 모르겠다.
일단 촬영이나 하고 보자.
자리에서 일어나 감독에게 촬영 들어가자고 했다. 일본에 DVD 팔아먹을 속셈으로 찍는 미공개 에피소드 때문에 이게 뭔가 싶다. 난생처음 신어보는 스타킹은 스키니진보다 더 불편했다. 일단 자신이 여자이기는 한데 짧은 치마를 입은 것 자체가 쇼크라 영 적응이 안됐다.
============================ 작품 후기 ============================
음...제가 너무 자주 못 오는 관계로 여러분들에 면목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알바가 처음한 말과 달리 5일 근무도 아니고, 초과 근무를 막막 시켜서...ㅜ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