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1 아니 뗀 굴뚝에 연기나네 =========================================================================
그러나 로이의 생각과는 달리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건 루시퍼의 후속곡 섹시 가이의 굿바이 무대를 위해서 한 음악방송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MC로 나선 Natural이 클로징 때 ‘선배님, 선배님 소속사로 옮겨도 되지요?’라고 허락을 구했던 것이다.
이것들이 진짜 뇌출혈 일어났나. 어디 할 게 없어서 방송 중에 개소리야.
로이는 굳은 얼굴을 간신히 카메라를 보고 간수한 뒤 그들에게 웃어보였다.
“글쎄요. 그건 제가 아닌 Heaven 소속사 사장님과 상의해야죠. 계약기간이 끝났나요?”
호영이 실실 쪼개면서 ‘네.’라고 답했다.
“그래서 형 소속사로 옮겼어요. 저 이제 Reave 식구니깐, 많이 예뻐해줘요.”
“잘 부탁드립니다.”
영준이 꾸벅 인사를 건넸다. 로이는 하마터면 ‘이 미친놈들아!’라고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호영이 자신의 손을 끌어다가 제 머리를 쓰다듬게 하는 행동에 얼이 빠져 다행히 아무 말도 안 나왔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했다. 왜 이딴 민감한 문제를 생방송 중에 발표하는지 모르겠지만, 이놈들 때문에 Heaven과 자신의 사이가 나빠지게 생겼다. 일단 자신은 뇌출혈의 이전 소식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걸 피력하기로 했다.
“호영씨, 혹시 도장 찍은 건 아니죠? 그럼 Heaven이랑 재계약해요. Natural 색깔이랑 우리 Reave는 맞지도 않고, 저흰 서포터해주기 보다 알아서 크라는 주의거든요.”
“괜찮아요. 저흰 지금도 충분히 크니깐요. 185, 188! 키키키. 이 정도면 많이 큰 거 아니에요?”
누가 키 이야기 하자고 했냐 이것아!
자신들의 잡담에 고정 MC가 자연스럽게 대화를 끊고 이어받았다. 역시 날로 돈 버는 게 아니라고 베테랑이다. 어쨌든 방송 사고인 거는 변함없지만 말이다. 방송국 국장님이 이것들 보고 확 방송 금지 처분 내려버렸으면 좋겠다.
“놀라운 소식인데요. 로이 테일러의 소속사로 이정한 Natural이라니. 앞으로 로이와 Natural의 콜라보 활동을 볼 수 있을까요? 참 기대대네요. 새로운 둥지로 옮긴 Natural, 계속 좋은 모습 보여주시길 기대하겠습니다. 오늘도 함께해주신 음악챔프 여러분 사랑합니다. 그럼 안녕~.”
대본에도 없는 내용으로 애드리브를 하려니, 보이는 거와 달리 그도 많이 긴장했던 모양이다. 자신의 앙코르 무대가 남았는데 언급을 안했다. 이거 참.
로이는 그냥 음악 달라고 손짓을 보냈다. MR에 맞춰 가볍게 몸을 흔들며 노래하자, 뇌출혈 새끼들이 주위에서 얼쩡거리며 수작을 부렸다. 이것들을 진짜! 방송 중에 때릴 수도 없고. 도대체 왜 이런 정신병자들이 귀찮게 구나 모르겠다. 애초에 친한 척 할 때 싹을 잘근잘근 짓밟아버렸어야 하는데 그놈의 이미지 관리가 뭐라고, 너무 잘해준 것 같다.
“우유빛깔 로순이! 사랑해요 로순이!”
특히 주호영이 제대로 미친놈이었다. 무대 위에서 미친 망아지가 ‘로순아, 사랑해.’를 외치며 방방 뛰는 걸 보려니 이대로 그냥 도망쳐버리고 싶었다. 영준에게 네 리더 좀 어떻게 해보라고 입을 뻥긋하니깐, 그는 ‘한번 정신 나가면 아무도 못 말립니다.’라고 말하는 입과는 다르게 ‘우리 도련님 최고야’라는 눈빛으로 호영을 쳐다봤다. 너무 정상적으로 생겨 잠깐 잊었나 보다. 얘도 뇌출혈이라는 걸.
로이는 무대에서 내려오자마자 김사장한테 전화했다.
“형! 미쳤어? 어쩌자고 뇌출혈을 받아!”
“미치긴. 수지맞은 일이지.”
“네~, 저희 돈 덩어리 맞아요.”
로이는 갑자기 손에서 핸드폰이 사라져 뒤돌아봤다. 하마터면 뒤에 바짝 다가선 호영이랑 뽀뽀할 뻔했다. 안도하고 있는 순간, 그가 자신의 입술에 쪽 소리를 내며 입맞춤을 하더니 기생오라비 마냥 야시시하게 눈꼬리를 접고 웃었다.
“그러니깐, 최대주주님. 저희가 Reave 주식 엄청 뻥튀기 시켰는데 뭐 선물 없어요? 예를 들면 키스라던가, 포옹이라던가, 백 허그라던가, 같이 식사하는 거라던가. 개인적으로 키스를 추천해드릴게요.”
“야! 너 이 새끼야! 로이한테 찝쩍거리다니, 죽고 싶냐!”
주안이 난리치는 소리가 굳이 귀에 폰을 가져다대지 않아도 다 들렸다. 로이는 호영에게서 핸드폰을 빼앗아 들고 ‘이게 다 형 때문이야!’ 호영의 들이댐을 주안의 책임으로 미뤘다. 스텝들이랑 다른 가수들이 다 호영의 변태 같은 대화를 듣고 있지 말이다. 이제 기사는 이렇게 날 것이다.
로이 테일러. 게이가 아니라고 여친까지 공개했지만, 그건 개수작이었을 뿐.
로이는 구두로 호영의 정강이를 걷어차 버렸다.
“으악, 로순아. 나 아파.”
“로순이? 이게 죽고 싶나. 하늘같은 선배한테 못하는 말이 없어. 이걸 확 갔다가! 그렇게 키스가 좋으면 요추와 경추를 키스하게 해주마.”
로이는 호영의 배에 주먹을 찔러 넣었다. 그런데 손이 잡히고 말았다. 어찌나 힘이 쎈지 도저히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놔! 이거 안 놔!”
“싫은데. 나 너 보다 나이 많아. 오빠라고 부르면 놔줄게.”
미친. 연하로 알고 있는데 뭔 헛소리인가 싶다. 뭐……연예인 나이랑 키, 몸무게는 고무줄이라 믿을게 못되지만, 원래 이 바닥이 서열 정리를 빡세게 하는 곳이라 아무리 그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다고 한들 자신은 선배였다. 영준에게 어떻게 좀 해보라고 SOS 신호를 치자, 그가 ‘도련님.’했다.
“왜? 나 지금 바쁜 거 몰라? 우리 로순이 손, 겁나게 부드럽네. 예쁘다. 예뻐. 우리 로순이.”
호영이 해실거리며 기분 나쁘게 자신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영준이 호영의 어깨를 감싼 채 거의 끌어안다시피 어깨동무를 하고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 불행히도 자신은 이 두 남자 사이에 낑겨서 그 이야기를 듣고 말았다.
“김수혁의 아내가 된다고 하더군요. 곧 상견례를 한다고 합니다. 참고로 그 김태형의 질부입니다. 또한 김연희의 며느리고, 김문중의 손주 며느리. 흑룡파의 후계자를 양산할 유일한 분이죠.”
“……거짓말.”
호영이 아이 마냥 울먹이며 ‘싫어, 싫어.’하고 땡깡을 부려댔다. 영준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싫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살가죽이 벗겨져서 뼈가 발릴 겁니다. 흑룡파 보스가 남색가라 절대 후계자를 못 가진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김연희가 김수혁만 보고 산답니다. 핏줄에 대한 애착이 남다른 여자이지 않습니까. 로이를 채가면 그 마녀가 도련님을 잡다가 기름에 튀겨 버릴지도 모릅니다.
기억나시죠? 10살 때 김수혁이 자기가 마시던 음료수 마셨다며 도련님을 나무에 거꾸로 매달았던 거. 자기꺼에 대한 집착이 남다른 정신병자이지 않습니까. 자기 여친을 건드리면 이번에는 나무가 아니라 쇠꼬챙이로 찔러 불에 구워버릴 겁니다.”
뭔가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듣고 말았다. 그런데 누구 멋대로 김수혁의 아내가 된다는지 모르겠다. 어라? 어라라? 뭐야. 이 녀석들……. 지금 나……여자라는 거 아는 거야?
로이는 어째서 뇌출혈들이 김수혁 가족 관계를 줄줄이 꾀고 있나 싶었다. 그리고 어째서 자신이 여자라는 걸 지금 확신하고 있는가. 뭐 이건 다 호영을 말리기 위해 영준이 지어낸 내용일 테니 상관없다. 자신이 알고 있는 한, 김수혁은 절대 폭력적인 남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무지 젠틀하며 너무 순딩이라 답답할 정도로………문어 아저씨를 패기는 했지. 파파라치 차를 습격하기도 하고.
“김수혁 짱 무서운데. 영준아. 나 무서워.”
“네. 김수혁이 악의 축이죠. 괜히 야쿠자 아들이겠습니까. 소문으로는 살인자라고 하더군요. 도련님, 조심하십시오.”
호영이 영준에게 매달려 오들오들 떨었다. 어쨌든 과묵 캐릭터 영준이 단박에 천방지축 리더인 호영을 말릴 수 있는 능력자였다니. Natural의 실세는 아무래도 영준 같았다.
“선배님, 오늘도 수고 많았습니다.”
영준이 꾸벅 허리 숙여 인사를 하자 호영이 자신의 손을 놓아줬다. 호영이 분한 얼굴로 자신에게 진짜 김수혁이랑 사귀냐고 물었다. 헤어졌다고 말하기에는 이 철없는 거머리가 또 달라붙을까봐 슬쩍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호영이 영준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 대성통곡을 했다.
“흐어엉엉. 내 첫사랑이. 로순이가! 악마새끼한테 붙잡혀버렸어. 김수혁이 로순이 패면 어쩌지? 그 새낀 졸라 잔인한 놈이라 우리 로순이도 팰 거야. 이중인격이 쩔어서 앞에서는 완전 천사잖아.”
잘 헤어진 거 같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하마터면 매 맞는 아내가 될 뻔한 모양이다.
로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폰에서 김수혁 번호를 지었다. 그리고 호영은 그녀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영준의 품에서 울다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어때. 내 연기. 이 정도면 배우 데뷔도 가능할 것 같지?”
“멋지십니다. 도련님.”
“히히히. 우리 로순이 순진한 거봐. 정말 귀엽지 않아?”
“네, 귀엽습니다.”
영준의 대답에 호영이 단호하게 ‘그래도 넌 넘보면 안 돼. 내 여자니깐.’이라고 경고를 했다. 호영은 무대에서 보여주는 것만큼 요란스럽게 두 팔을 벌리고 ‘로순이는 남몰래 호영이를 사겨놓고 좋아한데요, 좋아한데요~.’ 서동요를 불렀다. 그렇게 Natural이 떠나자 조용히 자기 일을 하는 척 그들의 대화를 듣던 방송국 직원들과 백댄서들, 가수들이 수근 거렸다.
“그 김수혁이?”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고, 아니 뗀 굴뚝에 연기가 나고, 펜 보다 엄지가 빠르다고 다들 스마트폰으로 지인들에게 카톡을 보냈다. 연예계 최고의 핫 가이 김수혁이 사실 야쿠자 아들이라니! 이 보다 더 핫한 소식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 김수혁의 출신 비밀에 여자들은 위험하지만 섹시한 할리퀸의 로맨스를 느끼고 싶어서, 남자들은 범접할 수 없는 외계남의 흠집을 만들기 위해서 음밀하게 떠들어댔다.
김수혁이 야쿠자 아들이래.
아니, 아쿠자 애인이라던데.
농담 마. 그냥 야쿠자야.
그런 식으로 중학교 때는 얌전히 폭주를 뛰고, 고등학교 때는 AV유통업에 손을 덴 삼촌으로부터 무모자이크 야동을 받아 성교육을 한 연예인 K모씨에 대한 연예계 소문은 널리널리 퍼지게 되었고, 없었던 사돈의 팔촌의 친구, 혹은 내가 동창인 데까지 나타나 어린 시절의 그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그 녀석 진짜 놀았지.’라고.
게다가 이런 특급 소식에는 없었던 피해자도 생겨나기 마련이었다. 가요 무대 뒤에서 시작된 작은 대화가 연예계라는 범위를 벗어나 일반인까지 도달하고, 자기가 김수혁한테 학창시절 내내 폭력을 당하고 강간당해 아이까지 낙태했다는 터무니없는 글이 블로그에 게재되기까지는 불과 6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로이는 ‘김수혁 야쿠자설’이라는 기사를 보고 그가 너무 걱정돼서 템페스트 촬영장으로 달려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김수혁은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촬영에 임하고 있었다. 로이는 오랜만에 보는 그의 모습에 순간적으로 울컥 눈물이 나오고 말았다. 자신만 애 끓고 신경 쓰고, 걱정되고, 그랬나 보다. 그는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자신과 아무런 관계도 없던 때로 돌아가 하수연에게 웃고 있었다.
수혁이 수연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귓가에 꽃아 줬다. 수연이 볼을 붉게 붉히며 그의 손끝이 스치고 지나간 자신의 볼을 감싼 채 부끄러워했다. 로이는 가슴이 먹먹해져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봤다.
“사랑해. 사랑해, 하영아.”
그의 고백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선남선녀 사이에 붉은 동백꽃들이 떨어져 내렸다. 바닥에 모가지 채 꺾인 붉은 꽃들이 굴러다니고, 준호가 그 꽃을 들어 하영의 귓가에 꽂아줬다.
“네가 미래로 돌아간다면, 나 기다릴게. 네가 있는 미래를……. 조금 걱정되는 건 내가 아저씨라 더 이상 너에게 멋져 보이지 않을까 하는 거야. 또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 걸까.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를, 네가 아이에서 어른이 되기를. 그래도 좀 기쁜 것도 같다. 그건 내가 네 모든 걸 함께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잖아.”
하영이 울면서 그의 손을 자신의 뺨을 가져다댔다.
“나……돌아가지 않을래요. 싫어요. 헤어지기 싫어. 준식씨, 나…그냥 여기 남아도 되요? 그래도 이 세계 이상해지지 않을까요? 당신의 아내가 되고 싶어요. 당신을 닮은 아이도 낳고 싶고, 당신과 함께 늙어가고 싶어. 다른 시간을 걷는다니, 그런 거 싫어. 나만 모르는 그대가 생겨버린다니, 그것도 싫어. 난 모르는데 준식씨만 나를 알면 어떡해요. 그럼 난, 미래의 내가 너무 질투난다고요.”
“……그럼. 돌아가지 않는 거야?”
하영이 끄덕 고개를 끄덕였다. 준식이 해맑게 웃었다. 그는 하얀 미소처럼 맑은 눈물을 흘려냈고, 사랑하는 연인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입술을 겹쳤다. 카메라가 그들 주위를 돌았다.
“오케이. 컷! 좋았어. 준식아!”
“감사합니다. 감독님.”
“수고하셨습니다.……어? 로이!”
수연이 자신을 발견하고 달려왔다. 로이는 방금 전까지 수혁과 그녀가 키스했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질투나 립글루즈가 번진 여배우의 입술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로이는 수혁을 노려보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냥 넥타이를 확 잡아당기고 그의 입술을 이로 물어뜯어버렸다.
키스씬이라니. 이래서 삼촌이 못 오게 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아무 말 없이 찍은 김수혁도 나빴다.
자신이 입술을 놓아주자 수혁은 퉁퉁 부운 입술로 멍하니 중얼거렸다.
“안되는데. 나 나쁜 남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가 입술을 쓰다듬더니 자신을 내려다봤다. 정신을 차렸는지 아주 눈이 늑대새끼 마냥 번뜩거렸다. 수혁은 복수라도 해주겠다는 듯 거칠게 자신의 입술을 물어뜯었다. 혀가 입안으로 들어와 이를 골고루 훑었다. 그의 오른손이 자신의 등을 쓰다듬으며 티셔츠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남다른 변태 감각으로 왼손을 이용해 자신의 엉덩이를 움켜잡고 자기 하반신에 밀착시켰다. 노골적으로 서버린 수혁의 물건 때문에 조금 무서웠다. 하지만 서로 타액을 교류하며 쪽쪽 빨아대는 행위가 그것의 무서움을 잊게 할 만큼 기분 좋아 로이는 수혁의 목에 팔을 두르고 말았다.
삼촌이 메가폰으로 ‘어이, 거기! 준호 카렌은 리허설 그만 하고, 촬영 들어가면 키스해!’라고 했다. 정신을 차린 로이는 수혁을 밀쳤다. 돼지 삼촌이 아니었으면 진짜 게이라고 소문 날 뻔했다. 수혁이 자신을 끌어당기고 턱에 흘러내린 침을 손으로 닦아줬다.
“보고…싶었다.”
“나도. 나도 보고 싶었어.”
“네가 없는 세상이라니 정말 끔찍한 지옥이었어. 앞으론 그런 곳에 살고 싶지 않다.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준호가 카렌의 이마에 이마를 겹쳤다. 가까워진 얼굴. 그는 살며시 입을 맞췄고, 입술이 겹쳐진 채 ‘사랑해.’라고 했다. 아무래도 김작가, 조만간 신 받아야겠다. 어쩜 이렇게 우리들의 상황과 감정에 딱 맞아떨어지게 대본을 썼는지 모르겠다. 스텝들이 자신들의 격정 키스에 당황하다가 웃으면서 벌써 연습이냐며, 역시 프로라고 했다.
그도, 자신도 둘 다 서로를 보고 감정 컨트롤 전혀 못했는데 프로는 무슨.
로이는 언제까지 자신들의 사이를 사람들에게 숨겨야하나, 자신들이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다시금 떠올렸다. 아마 그건 자신이 아이돌이길 포기할 때까지 그래야할 것이다. 그러므로 김수혁을 잡고 늘어지는 것만큼 그에게 폐인 것도 없었다.
“역시 수혁 형! 완전 연기 짱짱맨이야!”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과장되게 애교를 부리자, 그가 자신을 놓아줬다.
“……그렇…습니까.”
수혁은 ‘로이도 연기 좋았습니다.’라며 자기 자리로 가버렸다. 그의 이름이 써진 의자와 그만을 위해 대기하고 있는 매니저와 코디, 메이크업 아티스트들, 그가 연습하면 읽었던 너덜너덜한 대본까지. 모두 그가 잘나가는 톱스타라고 말해주는데,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 중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는 단 하나도 없었다. 하다못해 헤어진 연인들조차 손가락에 남은 하얀 반지 자국으로 그들의 사랑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는데 말이다.
“…로이, 울어요?”
수연의 물음에 로이는 고개를 번쩍 들고 무슨 소리냐는 듯 웃었다.
“그냥 감정 몰입 좀 해봤어요. 템의 결말이 너무 슬픈 것 같아서요.”
“하하하. 뭐예요. 카렌이 여자 된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도 준호랑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잖아요.”
“다시는……마법을 부릴 수 없는데?”
자신의 울먹임에, 그래도 언니라고 수연이 제법 어른스럽게 답했다.
“로이야. 누나는 말이야.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고, 한 사람의 삶을 구원하며,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는 거. 그것도 일종의 마법이라고 생각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도 기적인데, 그런 상대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거야. 거기다. 엄마는 아이에게 세상의 전부가 되잖아. 카렌이 한 마법 중 그것만큼 멋진 마법이 또 있을까. 그러니깐 카렌은 인간이 되어서도 반짝반짝 빛나.”
“……누나, 누나 혹시 연애해요?”
로이는 이 여자가 자신에게 껄떡이지 않을리 없는데 해서 물었다. 더군다나 잠깐 못 본 사이에 무지 성숙해져버렸다. 완전 어른 여자가 됐다고나 할까나. 수연이 와이셔츠 위로 목걸이를 꺼내 보여줬다. 가느다란 다이아 반지가 걸려 있었다. 그러나 보석의 빛깔이 무색할 정도로 빛나는 그녀의 미소 때문에 반지 보다는 사랑에 빠진 이의 얼굴에 더 눈이 갔다. 하수연이 이렇게 예뻤나 싶을 정도였다.
“응. 민준씨랑 다음 달에 결혼할 거야. 그러니깐, 쉿! 비밀이에요. 로이 오빠~.”
찡끗, 자신의 팬은 윙크를 하며 정민준에게 달려갔다. 그렇게 좋다고 따라다닐 때는 언제고 결국 자기 짝을 찾으러 떠나버리고 말았다. 그나저나 나이도 많은 여자가 자꾸 오빠라고 부르는 의도는 뭔가 싶다. 자기 어려 보이려고 누굴 늙은이로 만드는지 모르겠다.
로이는 조용히 손을 내려다봐봤다. 카렌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이 손에도 반지가 끼이는 날이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