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이돌이다-68화 (68/104)

00068  아니 뗀 굴뚝에 연기나네   =========================================================================

스튜디오를 임대한 주안은 자신의 세미 누드를 보그 세계판 화보로 실겠다고 했다. 적어도 월드 스타 로이 테일러의 처음 누드인데 그 정도 스케일은 되어야하지 않겠냐고 그랬다. 처음으로 소속사 사장이구나 싶었다. 믿음직스러웠다. 외국어 진짜 잘하게 생긴 자신은 아빠 국적인 영어도 어버버거리며 아무 말도 못하는데 주안은 프랑스어로 쏴라쏴라 외국 지사 편집장이랑 연락하고, 모든 걸 일사천리로 해결해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계약이었다. 사전 콘셉트도 상의 안하고, 오로지 일방적으로 ‘내가 이런 식으로 사전을 찍어 보내겠다. 세계판 보그에 화보로 실어라.’라고 하는데 그게 OK라니. 주안은 어깨를 으스대며 ‘예전에 프리랜서로 일할 때 보그 화보 많이 찍어서 엠마랑 친해, 거기다 너 로이잖아. 편집장이 자기네 사진 준다고 해서 고맙다고 하는데.’라 했다.

문제는 자신에게 있었다. 그렇게 의상 갈아입을 때는 아무렇지 않게 벗었건만 막상 사진으로 찍는다고 하니 도저히 못 벗겠다 싶었다. ‘나는 프로야.’를 아무리 반복해도 쉽지 않았다. 그제야 나 자신이 고작 19살, 이제 막 20살이 되는 꼬마구나 싶었다. 6살 때 이후로 처음으로 촬영하기 전에 울었던 거 같다. 하지만 그때와 달리 자신에게는 사탕을 건네며 달래줄 삼촌도 없고, 오로지 스스로 이겨내야 했다.

하나도 창피할 거 없는데. 김주안은 게이인데 왜 이렇게 부끄러울까? 이게 다 바람둥이 김게이가 사랑 고백을 해와서 그런 거였다. 물론 그게 진심이 아니고, 장난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자꾸만 그를 남자라고 인식하게 되고 말았다.

“로이야, 못 하겠어?”

주안이 쭈그려 앉아 있던 자신에게 다가와 물었다.

“아니. 잠깐만 기다려. 할 수 있어.”

“…무리하지 마. 다른 차선책을 찾아보면 되니깐. 최민이 너 여자라고 해도 누가 믿어주겠어. 그치?”

긴장한 그가 어색하게 웃었다. 로이는 벌떡 일어났다. 이상하게 주변 사람들이 약해지면 힘이 났다. 나라도 잘해야지, 라는 생각 때문에 그런지 모르겠다. 어려서부터 연예인으로 활동하며 많은 스텝들에게 관리 받고 보살핌 받았지만, 자신 하나를 그들이 그렇게 신경써주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라는 걸 알게 된 후로는 약한 모습 따위 절대 주변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받는 것도 익숙했지만, 책임지는 것도 익숙했다.

로이는 검지를 세워 가로 저었다.

“NO~ NO~ NO~. 왜 최고의 방법을 놔두고 최선책을 선택해야 해. 바보도 아니고. 뭐 하러 쭉 뻗은 고속도로 놔두고 돌아가냐고. 그런 건 삼류들이나 하는 짓이야. 일류가 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최고의 선택만을 해야 되지. 김게이. 가서 촬영 준비해. 내가 아주 화끈하게 벗어주지.”

자신의 허세에 그가 고맙다며 달려갔다. 주안이 카메라를 들고 렌즈 앵글을 맞추는 걸 확인한 로이는 자세를 취했다. 티셔츠를 벗고 청바지 주머니에 엄지를 넣어 쭉 내려 봤다. 이때 배에 힘을 빡주면 치골이 섹시하게 드러난다. 다음은 등 돌리고 살짝 뒤 돌아본 채 뒷주머니에 손을 넣는 포즈다. 카메라맨이 된 주안은 잘한다, 잘한다를 반복하며 자신의 기를 북돋아줬다.

여자 모델들은 자신의 활동 기간 중 한번쯤은 헐벗고 누드를 찍는다. 그러니 자신이 ‘나 이거 못해.’라고 말하는 건 진짜 우스운 일이었다. 그녀들은 안 해도 되는 걸 직업의식이 있어서 한다면, 자신은 앞으로 터질 루머를 잠재우기 위해 오직 ‘나.’만을 위해 하는 건데 그보다 못하게 군다면 이 기회로 은퇴해버리는 게 나았다.

살짝 옆으로 돌아서 벽을 짚고 고개를 숙여봤다. 턱선과 배의 근육을 신경 쓰느라 가슴이 보이는 건 관심도 안 쓰였다. 정말 다행이다.

로이는 본래의 컨디션을 되찾고 좀 더 다양한 자세를 취했다. 청바지 화보야 오랫동안 해온 작업이라 아주 쉬었다. 주안이 100컷 정도 찍고 이만 끝내자고 했다. 라스트 컷으로 등을 살짝 뒤로 젖히고 허리에 손 얹어 정면으로 가슴을 보여줬다.

“끝!”

자신의 외침에 주안이 티셔츠를 벗고 나왔다. 그가 삼각대로 카메라를 설치하고 방금 전 자신이 서 있던 자리에서 똑같은 포즈를 취했다. 자동 연사가 되며 카메라는 주안을 찍었다. 처음으로 그의 심장 수술 자국을 봤다. 평소에 내색한번 안 내서 전혀 몰랐다. 자신이 신기하게 쳐다보니 주안이 창피하다고 배시시 웃었다. 정말 웃긴다. 지금 창피해야 하는 건 여자이 자신인 데 말이다.

주안과 사진을 확인해봤다. 역시 촬영은 오래해도 최고의 사진은 항상 처음에 나오는 법이었다.

“나 복근 신경 써서 줄 그어.”

“하이고, 지금 중요한건 그게 아니거든랑요.”

“가슴이야 그냥 줄이고 형 꺼 붙이면 되잖아.”

“그런데 너 활동 쉰 적 없잖아. 언제 수술했다고 할 거야?”

“형 만나기 전에 잠깐 쉬었어. 나 요양원 가서 쉰 거, 심장 수술해서 간 거라고 하면 되겠다. 형, 이거 기사 만들어줘.”

“넌 아이돌 안했으면 사기꾼 했을 거야. 어쩜 그렇게 머리가 잘 돌아가?”

“그거 지금 칭찬이지?”

“그러어엄~. 아이고, 우리 로이. 삐져쪄용? 우쭈쭈.”

자신의 미심쩍은 표정에 주안이 턱을 쓰다듬어줬다. 개 취급 받는 것 같아 기분 나빠 노려보자, ‘그렇게 쳐다봐지마. 나 심장 떨려.’란다. 정말 못 말리는 게이였다.

로이는 티셔츠를 입고 주안의 가방을 뒤져 방울토마토를 꺼내 먹었다. 굳이 식사 챙기라는 말을 안 해도 그는 자신이 원하는 걸 준비했다. 모든지 자신보다 한발 앞서 자신을 생각했다.

주안이 심각한 표정으로 터치 팬을 움직였다. 실력 보니깐 계속 사진작가로 활동해도 좋았을 텐데, 왜 때려 치고 소속사를 차렸을까 싶었다. 프랑스어도 잘하고, 보그 편집장이랑 친할 정도면 엄청 잘 나갔다는 건데 말이다.

“나 이제 가도 돼?”

“어. 가서 인터뷰 준비해. 실장이 대본 만들어놨을 거야.”

로이는 자신에게 시선도 안주는 주안을 보고 ‘나 간다.’라며 스튜디오를 나왔다. 주안은 그녀가 나가자 고개를 들고 문을 한동안 바라봤다. 그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얼굴이 잔뜩 새빨개져서 노트북 화면을 쳐다봤다.

“포기……할 거야. 그게 너를 위한 일이니깐. 그래도 계속 좋아해도 되는 건 괜찮지? 이건 그냥 내 마음이잖아.”

주안은 울컥하는 마음에 왜 김수혁은 되고 나는 안 되는 거지, 라고 생각했다. 그건 사랑의 정도가 아니라 시간의 정도였다. 그는 로이가 가족이라 생각하고 믿을 만큼 오래 함께하지 않았다면, 자신은 애인이 되기에는 너무나 소중한 존재가 되었기에 그녀의 믿음을 무너트릴 수 없다는 게 달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고백할 걸 그랬다. 민호가 자신더러 바보라고 했다.

‘형은 바보야. 사랑하는데 왜 고백 안하고 지켜봐. 로이 좋으면 그냥 말해. 괜히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려고 들지 말고.’

‘그럼 넌 왜 나를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는데.’

‘………그러네. 우리 둘 다 참 어리석다.’

주안은 남자가 된 로이를 보며 웃었다.

이 놈 참 잘생겼다. 누가 키워냈는지 모르겠다.

그는 잠깐 인터넷을 켜 편집된 음성 녹음을 들은 네티즌들의 상황을 확인했다. 기자들이야 워낙 로이가 평소에 잘 관리하고, 소속사에서도 기사 좀 좋게 써달라고 술 사고 밥 사고 명절 때마다 선물도 보내고, 별 짓을 다했으니 안 좋게 날 리가 없었다. 최민가 하루아침에 매국노에 버금가는 악적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다시는 한국 땅에 발붙이고 못 살 것 같은데, 그놈의 열등감이 뭐라고 이런 짓을 벌이게 했나 싶었다.

얼굴 없는 가수로 활동하다가 방송을 타니, 남자인 줄 알았던 가수가 여자였다며 팬들이 떠나고 최민의 연예계 생활은 쫑났다. 그런데 로이는 여자애가 남자로 활동하니 자신과 비슷한 상황이라 생각했겠지. 주제도 모르고 그녀를 질투했으리라.

하지만 최민이 실패하고, 로이는 성공한 이유는 외모만이 아니었다. 그 차이를 최민만 모르고 있는 거였다. 그러니 계속 재기를 못하는 거였다.

주안은 빠른 속도로 퍼진 로이의 녹취 음성을 듣기 위해 블로그에 들어가 봤다. 정말 예의바랐다. 본래 그녀의 성격을 알고 있는 자신으로서는 그 가증스러운 연기에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였다. 뭐 자신은 이런 로이의 여우같은 점도 좋지만, 최민의 입장에서는 조금 얄미울 것 같긴 하다.

============================ 작품 후기 ============================

완결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 마구 늘어지네요...거기다 공모전 준비를 핑계로 막 연재를 미루게 된다는...크흑...제가 다시 열심히 성실 연재를 도전해보겠습니다.

아자, 아자!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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