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이돌이다-61화 (61/104)

00061  병문안을 가자  =========================================================================

수혁은 방 가득 채워진 이 야설을 어떻게 처리해야하나 싶었다. 이제 얼마 안 남은 로이의 생일에 초대해서 거사를 치러야하는데 이런 게 있으면 자신이 뭐가 된다 말인가. 그래서 식구들을 불러 놓고 각자 가져가고 싶은 걸 가져가라고 했다. 그런데 상철, 상민, 철구가 쓱하니 백합물 야설을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저거라면 저희도 보스께 강매 당해 2세트가 있습니다.”

“………처음에 백설공주였습니까?”

“아니요. 전 신데렐라였는데 사실 언니를 꼬시기 위해 왕자를 이용해 먹은 거라고 하더군요.”

“전 엄지공주 수간물이었습니다. 생쥐랑 제비랑 두꺼비랑 젠장.”

“도련님, 말도 마십시오. 글쎄 전 근친물이었습니다. 헨젤과 그레텔이 마녀랑 뒹구는 걸로다가. 으으으~.”

“……이거 분리수거함에 버리면 소문나겠지요?”

수혁은 그들의 대답에 침울해져서 왜 자신이 충동적으로 이걸 산 것일까, 진짜 미쳤구나 싶었다. 도저히 어디다가 가져다버릴 수준이 아니었다.

“예. 그럴 것 같습니다. 기자들이 쓰레기 버리는 것도 봉투 다 뜯어보던데 당연히 기사에 야설 마왕이라는 타이틀이 나갈 것이라 생각됩니다. 도련님, 로이 아가씨 때문이라면 제가 이 집에 불을 불러보겠습니다. 그리하여 완벽한 증거 인멸을….”

그는 상민의 말에 고민해봤다. 과연 300만 원짜리 책을 버리기 위해서 50억짜리 빌라에 불을 질러야 하느냐. 그거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싶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에게 선물로 주면 될 것이다. 때 마침 지금 로이의 스타일리스트가 병원에서 심심해하지 않는가. 거기다가 미친 게이 쓰레기 김태형과 그렇고 저렇고를 하는 엄청난 게이라고 하니, 그가 참 좋아할 것 같았다. 자신이 야마구치라는 게 무척 싫어 김수혁으로 사는데, 김태형이랑 같은 핏줄이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얼마나 켄이치로라 다행인 줄 모를 정도로 김태형은 세상의 악이자 지조를 모르는 색마였다. 그러니 그런 김태형과 깨를 쏟아내는 자이니 얼마나 밝히겠는가.

조카는 조폭들에게 저거 다시 박스에 넣어서 병문안 가라고 했다. 늦은 밤이기는 하나, 그러니 더 좋은 거였다. 사람들 눈에 덜 뜨일 테니 말이다. 수혁은 책 100권을 들기 힘들다고 낑낑 대는 삼인방을 위해 특별히 외할아버지 댁에 연락을 넣어서 조폭들을 불러 모았다. 편한 복장을 하고 오라니깐, 그들은 밤부터 양복을 쫙 빼입고 ‘わかさま(도련님), 食事は しましたか。(식사 하셨습니까.)’라며 인사를 해왔다. 간부들은 이런 일에 부르면 너무 미안해 신입들을 보내라고 했더니 자신이 일본사람이라는 말에 이러는 모양이었다. 꽤나 한국이나 일본에서 한류스타로 알려졌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김수혁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한국과 일본 흑룡회로 나뉘어 있다고 해도, 자기네 보스 조카를 모를 수 있나 싶다.

“예. 여러분들은 식사하셨습니까.”

자신의 한국말에 그들이 ‘はい, そうです。(예. 그렇습니다.)’라 답했다.

“………무슨 문제 있으십니까.”

“にほんじんに なりたいです。(일본인이 되고 싶습니다.)”

수혁은 엉엉 울며 제발 자신들을 일본으로 데리고 가달라는 신입들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단순히 자신을 알아보지 못해 일본말을 사용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한국은 로이가 살고 있어서 매연조차 향기로운 곳인데, 이곳을 떠나 일본으로 가겠다니 너무 이상했다.

“흐어엉. 제가 진짜 보스를 존경합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더 이상 살 수 없지 말입니다.”

“살려주세요. 도련님, 저희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아니, 사람이 아니어도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정도로만 취급해주시면 정말 목숨 걸고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한국은 보스가 있어서 사람 살 곳이 못 됩니다. 이곳은 지옥. 방사능 터진 일본은 천국입니다. 방사능 오이를 먹인다 해도 군말 않겠습니다.”

수혁은 자신이 너무 신입들을 불렀구나 싶었다. 한국 흑룡회는 약 2년 동안 적응 못하고 조직원들이 힘들어한다고 하던데 정말이었던 것이다. 그걸 직접 눈으로 보니 참 대단한 삼촌이다 싶었다.

“전 야쿠자 안할 거라 일본 흑룡회는 아버지 대에서 해산될 겁니다.”

“뜨헉!”

모두가 자신을 발표에 놀랍다는 듯 쳐다봐서 왜 그러냐고 물었다.

“뭘 그리 놀랍니까. 당연한 일 아닙니까. 전 그저 조용히 사랑하는 로이랑 결혼해서 아이를 12명 정도 낳고 사는 게 꿈인 아주 소박한 남자입니다.”

“현대 의학으로 남자와 남자끼리는……….”

철구가 말하다 말고 고개를 돌리고, 신입들한테 작게 ‘들어라, 신입. 우리 도련님도 너희들 보스랑 별반 다르지 않다. 그 보스나 이 도련님이나 수준이 비슷하지. 핏줄만큼 무서운 게 없는 법이니 한국에 있는 게 그나마 나을 거다. 일본 흑룡회라고 편한 줄 알아? 난 고이치로라는 이름을 버린 지 벌써 25년째다. 제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너 김치 못 먹는다고 입에 배추 반 포기 처박힌 적 있어? 없으면 말을 마. 된장찌개 못 끓인다고 메주로 맞아본 적 있어? 그거 의외로 아프다. 안 맞아봤으면 말을 마.’라며 자신의 흉을 봤다.

수혁은 기가 막혀 ‘그럼 고이치로. 일본 가서 야마구치 오야붕한테 히스테리를 겪어보시겠습니까. 보내드리겠습니다. 지금 오야붕은 우사기짱이 사라져서 아주 친절해졌습니다.’라며 그의 여권을 찾기 위해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그러자 철구가 ‘대한민국 만세! 사실 전 독립운동가가 꿈이었습니다.’라며 벌벌 떨었다.

“………그런 거 같네요. 일본보다는 한국이 낫겠죠.”

신입들도 뭔가 깨달은 게 있는지 철구에서 ‘역시 우리 보스가 최고인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김태형이 야마구치 보다 낫다는 건 말이 안 되지 헛소리였지만, 로이의 한국을 다들 사랑해준다니 수혁은 팬으로서 무척 뿌듯했다.

“넌 방금 한말 지켜. 독립운동가가 되고 싶다며. 나가서 태극기 휘날리며 대한민국 만세! 로이 테일러 만세!를 외치도록.”

흥분을 했더니 반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녀의 이상향은 어른스럽고, 다른 사람을 존중할 줄 아는 커피 CF남인데 말이다. 김배우는 후~ 숨을 내쉬어 감정을 가다듬고 멋진 신사 김수혁 역에 몰입했다. 그는 다정하게 웃어보였다.

“그래 주실 거죠? 철구씨?”

“넵.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도련님의 명령으로 철구는 태극기를 들고 밖에 나갔다. 그리고 모두는 잠시라도 흑룡의 시야에서 그가 벗어났다는 사실에 부럽다는 듯 바라봤다.

“자, 그럼 신입들은 잔말 말고 당신 보스가 팔아먹은 야설 시리즈를 A대학 병원 VIP룸 백민호 환자에게 보내도록 하십시오. 물론 그거 제가 보내는 선물이라고 하지 말고, 당신네 보스가 보내는 거라 하시고요. 혹시 모를 잡음이 발생하면 저는 김수혁의 탈을 벗고 켄이치로가 되어 보겠습니다. 아직도 저의 과거를 기억하는 조직원들이 있을 테니, 간부들한테 물어보십시오. 일본 도련님이 어떠했는지 그들은 참 잘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수혁님.”

“로이 테일러 만세!”

“만세! 로이 천사 만세! 로수 만세!”

“천상천하유아독존. 로이만이 진리이다. 로이 만세!”

수혁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 잘 들은 듯한 신입들이 로느님을 열렬히 외치는 모습에 뿌듯해졌다. 다들 저렇게 우리 로이에게 미쳐 살았다. 하지만 팬들은 철새와 같아 혹독하게 굴려야 했다. 그는 ‘다른 아이돌, 연예인, 가수 좋아하면 그건 흑룡회를 배신한 것 보다 더 큰 보복이 가해질 줄 알아.’라며 경고를 내렸다.

“아이고, 말도 마십시오. 저는 로이님만 나올 때 텔레비전 봅니다.”

“맞습니다. 요즘 연예인들은 연예인이 아니죠. 오지 로이님만 연예인입니다.”

“로이님을 볼 때마다 참으로 감격스럽습니다. 우리 로이님은 존재 자체가 빛이요, 소금이요, 진리. 오늘 로이님 가라사대, 맛살을 먹었더니 밀가루 맛만 나더라. 이 사기꾼들아, 그럼 게맛살이라고 붙이지 말고, 밀가루맛 게맛살 모양이라고 써! 아멘.”

김태형이 부하들 하나는 참으로 잘 뽑았다. 물론 그동안 자신이 한국 흑룡회 간부들을 잘 관리한 덕도 있지만 말이다. 수혁은 그들이 로이를 찬양하는 말을 들으며 기분이 좋아 입꼬리가 잔뜩 올라간 채 상철과 상민을 바라봤다.

“뭐 할 말 없습니까.”

“……요즘은 어렸을 때 공부 안하고 싸움만 하고 돌아다닌 걸 정말 후회합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와사다대 갔으면 크흑.”

“아, 어머니. 어머니 말씀 틀린 거 하나 없었습니다. 이 불효자는 웁니다. 아무리 공무원이 갈굼 당한다 하더라도 조폭만 하랴.”

“야! 그래서 지금 우리 로이 이야기하는데 왜 그딴 구린 말을 꺼내는 거야! 이걸 확!”

수혁은 자신도 모르게 손이 들렸다가 하하하 웃으면서 ‘그래서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뭐하고 싶은 말 없냐고. 상철, 상민. 한 번 더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말해보시죠.’라며 온화한 도련님이 되어보였다.

“……로이님이야 말로 진정한 아이돌이죠. 세상에서 제일 노래를 잘합니다. 아무로 나미에 보다 훨씬 섹시합니다. 네. 정말입니다.”

“로이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최고의 아이돌입니다. 저는 그분을 너무 존경합니다. 그분이야 말로 테레사 수녀님 보다 더 위대한 분입니다.”

“그렇습니다. 로이는 그런 존재입니다. 자,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제가 그런 로이랑 사귑니다. 그런데 남자친구라는 사람이 이런 야설로 그녀의 얼굴에 먹칠하면 안 되겠죠? 그러니 어서 배달가십시오.”

수혁은 박스를 들고 나가는 조폭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로이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다 못해 우주의 시공간을 가를 정도라 기쁘지만, 한편으로는 열혈팬들한테 또 납치 당할까봐 걱정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자신이 매니저가 되어 하루 종일 곁에 있을 거니 한시름 덜었다. 그는 시계를 확인하고 이때쯤이면 로이가 목욕하고 나올 시간이다 싶어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 10번이 지나가 ‘어.’라며 무뚝뚝하고 귀찮은 듯싶지만 사실은 쑥스러워하고 있는 그녀의 허스키 목소리가 들렸다.

“로이, 뭐하세요?”

“목욕했어.”

그녀가 목욕했다는 말에 수혁은 얼굴이 빨갛게 익어 침대에 누웠다.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로이의 금발을 타고 내려와 목덜미를 쓰다듬고, 쇄골에 고였다가 봉긋한 가슴골을 따라 젖꼭지에 맺혔겠지. 그러다 로이의 납작한 배를 훑어 내리고 허벅지를 쓸어 내려온 물방울이 금색 음모에 맺혀 그곳을 촉촉하게 만들었을 텐데. 아, 젠장. 오랜만에 야설이나 써야겠다.

수혁은 ‘잘 자요. 감기 걸리니깐 이불 차지 말고 꼭 덮고요.’라며 나지막하고 달콤한 목소리로 로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그녀가 ‘어, 너도.’라며 간단하게 답해버려 조금 서운했지만 원래 수줍음이 많아서 그렇다는 걸 알아 그는 웃으며 통화를 종료했다. 오늘 하루 종일 봤는데 또 로이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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